자유의새노래 디지털판967 인간 삶은 태어난 순간부터 죽음으로 달려가는 것 보통은 이야기의 시작으로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이 먹지 말라던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먹은 아담과 이브의 사건이 그렇습니다. 성서의 제일 첫 권, 창세기에 나오는 신화라 아담과 이브를 지구의 시작으로 보는 거죠. 학부 3학년 조직신학 종말론을 공부할 때였습니다. 철학의 ‘철’자도 모르던 제가 존재론의 대가 하이데거를 붙잡고 죽음에 관한 글을 집필하던 때였습니다. 하이데거도 어려웠지만 죽음 그 자체도 어려워 선배에게 꼬치꼬치 캐물어야 했습니다. 선배의 시각은 저와 확연히 달랐습니다. 하느님이 6일 만에 지구를 만들고 머잖아 인간이 하느님을 배반하는 과정을 ‘시작’이 아닌 ‘끝으로의 도달’로 본 겁니다. 선배의 논리에 따르면 이렇습니다. 인간을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어가는 존재로 본 거죠. “으앙” 우.. 2024. 11. 15. 14:35 모든 죽어가는 것들 앞에 모든 것이 죽어가는 겨울, 죽음을 생각해보았습니다. 모든 가을은 모든 존재의 죽음을 생각하게 만드는 계절의 조입인 듯합니다. 죽음은 언제나 인간에게 이별을 안겨다 줍니다. 무엇이든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가리키죠. 모든 것은 태어나고 죽음을 맞이하듯, 죽음 앞에 장사 없으며 죽음 앞에 거센 힘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이는 태어나면 죽고, 죽으면 존재가 사라집니다. 그래서 남는 것은 기억이며 향기입니다. 죽음은 인간에게 고통을 안겨주지만 고통을 알아가고 이해하는 과정은 인간을 인간 답게 만듭니다. 죽음의 아픔은 또 다른 새로운 생명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죽음은 인간 본연의 존재를 묻게 합니다. 또한 죽음은 스스로의 부끄러움을 보게 만드는 창구 역할을 합니다. 죽음을 피할 수 없으면 죽음을 바라보며 죽.. 2024. 11. 14. 14:35 [알립니다] 11월 20일, 신은빈 작가가 여러분의 마음을 두드립니다 새 코너 ‘인류의 마음 박물관’ 11월 20일부터 격월 연재처음 신은빈 작가의 글을 마주했을 때의 느낌은 산뜻함이었습니다. 생글한 눈망울로 독자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느낀 것이죠. 완벽히 어그러진 것 같으나, 그 어그러짐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작가의 문체 앞에서 저는 감탄했습니다. 지금의 자신이 내면의 자신에게 말해주는 데에서 나긋한 마음가짐을 발견한 겁니다.본지는 11월 20일부터 신은빈 작가의 글을 격월로 연재합니다. 코너 이름은 ‘인류의 마음 박물관’입니다. 뉴송어스닷컴과 지면신문에서 볼 수 있는데요.연재를 통해 관통 당하는 기분을, 치유받는 희망을, 어그러진 것이 다시 펴지는 경험을 해보시길 바랍니다. 2024. 11. 14. 14:32 너의 빈자리를 느끼는 동안 아담과 이브가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먹는 동안 성서는 하느님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밝히지 않습니다. 당신은 마치 이 모든 광경을 보지 못한 것 마냥 뒤늦게 동산을 거닐 뿐입니다. 아담도 뒤늦은 신의 발걸음을 들으며 부끄러워합니다. 하느님은 분명히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먹지 말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담과 이브는 벌거벗은 상태임을 깨닫고 숨어 버리고 맙니다. 어렸을 땐 혹시나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떠나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성인이 된 지금은 불안한 마음이 오래 머물지 않더군요. 좋아하는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는 감정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하느님으로부터 분리 된 인간은 늘 불안한 상태에 노출 돼 있음을 지적합니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유한하기 때문입니다. 언제든 사랑하는 .. 2024. 11. 13. 19:41 모든 개혁은 해방 너머로부터 벌써 7년 전 일이군요. 학부 시절 조직신학 수업에서 토론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주제는 방언이 실존하느냐 여부였습니다.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언어, 방언은 성서에서 사도행전(2,2)과 고린도전서(14,2)에만 나옵니다. 저는 초등학교 6학년 때 방언을 받아 지금도 방언으로 기도하곤 합니다. 그러나 토론에선 누구보다 방언은 실존하지 않다고 비난했습니다. 아무래도 바울은 방언이 하느님으로부터 온 현상인지 몰랐던 것 같습니다. 후기 바울의 편지인 목회서신에선 방언을 일절 언급도 않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에 가보지 못한 바울은 방언이 어떤 현상인지 확인하지 못했으므로, 무작정 금지할 수 없으니 길게 설명한 듯합니다. 따라서 예언과 비슷하므로 함께 묶어 설명한 게 아닐까 추론했습니다.(14,2-3; 14,2.. 2024. 11. 12. 13:17 진주 목걸이를 맨 그대의 고운 목 너무 예쁘면 할 말을 잃기 마련입니다. ‘너무’라는 단어도 ‘정말’이란 말도 필요 없습니다. 말 그대로 “예쁘다” 이 한 마디면 됩니다. 또 너무도 거룩하면 할 말을 잃게 마련이죠. 어떤 말도 나오지 않는, 그 감정을 뭐라 말해야 할까요. 신 앞에 선 모세도 야훼 하느님의 영광 앞에 신발을 벗고 말았습니다.(탈출3,5) 선지자 이사야도 야훼의 거룩함 앞에 벌벌 떨었습니다.(이사6,5) 그렇습니다. 정직한 것 앞에서 인간은 할 말을 잃습니다. 정직하게. 말 그대로 예쁘고 거룩함 앞에 우리는 넋을 놓습니다. 따라서 그 예쁘고 거룩한 존재 앞에 ‘너무’ ‘정말’ ‘아주’ ‘상당히’ 같은 수식어를 붙이지 않습니다. 그냥 예쁘다고, 그저 거룩하다고 말합니다. 저는 가끔, 아름다운 것을 보면 넋을 놓고 그대로 바라.. 2024. 11. 11. 11:01 땋은 머리채 귀여운 두 볼 격하게 싸우는 사람들을 향해 저는 웃으면서 이런 상상을 합니다. ‘그러지 말고 차라리 사귀지 그래?’ 세상만사가 이런 편의주의적 발상으로 작동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사랑이란 감정도 그런 것 같습니다. 좋아하지만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하는, 사랑하지만 사랑하지 않는 척, 숨겨야 할 때가 있습니다. 괜히 들켰다간 쉬운 남자, 쉬운 여자로 보ㄹ 게 뻔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한국 사회는 초반의 기선 제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참 골치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학교 시절 구약성서 아가서도 논란이 많은 문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유월절 절기에 아가서를 읽는다고 하는군요. 본문은 얼굴이 화끈해지는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여자와 남자의 사랑을 그린 문헌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학부 시절 아가서를 그리 중.. 2024. 11. 10. 16:00 아름다움의 여신이여, 이제는 편히 쉬소서 8년 전 이 신문은 PC버전의 퍼피레드가 서버를 종료하기 직전 걸출한 회원 한 분을 인터뷰 했습니다. 두 시간 이어진 대화는 화기애애했습니다. 대화의 요지는 간단했습니다. “퍼피레드만한 게임은 없구나” 이 진부한 교훈 하나. 그분은 말미에 이런 말을 하더군요. “서버 종료 공지 보고 사비와 재능기부로 유지됐다는 말에 찡했고….” 그랬던 그가 시간이 흘러 돌연 운영진을 비난하는 위치에 서 있더군요. 그분의 시간은 2019년 12월 1일에 멈춰선 듯 했습니다. ‘퍼피레드 같은 게임’의 개발이 중단된 날입니다. 퍼피레드 운영진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신물이 난다는 듯 행동하는 점을 미뤄보면 트라우마로 남은 건 아닌지 싶을 지경이더군요. 저는 조금 의아했습니다. 퍼피레드에 자산을 투자한 투자자도 아닐 테고, 그렇.. 2024. 11. 9. 10:50 당신에게 구할 한 가지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이 야훼 하느님을 원망하던 때였습니다. 야훼는 모세를 부르며 이렇게 말했죠. “장로 일흔 명을 세우고 고기를 먹일 것이다. 하루만 먹는 게 아니라 스무 날도 아니라 한 달 내내 냄새만 맡아도 먹기 싫을 때까지 먹게 될 것”이라고요.(민수11,16-19) 모세는 가능하냐고 묻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기에는 불가능하다고 답합니다. 그런 모세에게 야훼는 “나의 손이 짧아지기라도 하였느냐”고 묻습니다. 구약에서 야훼의 손은 능력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놀라운 권능을 선보였음에도 이스라엘은 40년을 광야 생활하며 야훼 하느님을 믿지 않습니다. 다시 과거를 그리워하며 이집트 노예 생활이 더 낫다고 불평하죠. 그런 인간들을 바라보며 모세는 야훼 하느님에게 당신의 존재를 요구합니다.(탈출32.. 2024. 11. 8. 17:45 누군가의 죽음이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음’에서 찾아오는 게 아니라 완벽히 비어‘있음’을 느낄 때 비로소 슬픔으로 다가오듯 “왜?”라는 질문으로도 풀리지 않는 질문 앞에 섰을 때 무기력을 느낀다. 지금은 고인인 정신과 전문의 임세원 교수는 저서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에서 왜(Why?) 대신 어떻게(How)로 물을 것을 제안한다. ‘어떻게’는 ‘왜’와 달리 절망적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도록 돕기 때문이다. 청소년 문학소설 ‘열여덟 너의 존재감’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나온다. 오랜 밤, 부모의 격한 싸움에 지쳐버린 여고생 이지가 집에 도착하자마자 스스로에게 다정한 말을 건넨다. ‘지금 당장, 교복부터 갈아입자. 옷 갈아입고 일단 자자’(161쪽 3줄) 피할 수 있었고 막을 수 있는 인재에 화가 난다. 그러나 우리 정치권은 계속 ‘왜’를 물으며 책임 소재를 묻기 급급하다. 지금도 커뮤니티 댓글 자체를 보지 않는다... 2024. 11. 7. 23:09 이전 1 ··· 9 10 11 12 13 14 15 ··· 97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