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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220

찔리고 베이고 아파도 멀어지지 않음은 지난 겨울 점심이면 회사 근처 덕수궁 돌담길을 걸었습니다. 예쁜 길과 달리 속설은 지독합니다. 연인이 함께 걸으면 헤어진다는 소문 때문입니다. 2018년 영국대사관으로 연결된 100m와 70m 거리가 모두 개방되면서 그저 옛말에 불과하게 됐습니다. 또 지독한 점이 있습니다. 평일 낮, 하도 사람이 많아 걷기 거북할 지경이라는 점입니다. 정말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경향신문사 앞부터 덕수궁 돌담길을 거쳐 서울시청에 이르기까지 왕복 3㎞를 걷습니다. 워낙 사람이 많다보니 돌담길과 시청 앞 광장은 언제나 다채로운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룹니다. 버스 운행과 관련해 시위를 벌이는 민주노총과 윤석열 대통령을 지키자고 외치는 태극기든 시민까지…. 그러다 연령과 지역별로 다 모인 듯 길목에서 애국심 가득한 노인을.. 2024. 11. 21. 12:36
천 년 화괴 앞 세월에게 이별을 맞이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언제나 이별은 가슴 아픈 일입니다. 아무도 없는 머나먼 별나라로 떠나는 기분 같습니다. 가장 가까웠던 사람이 가장 먼 곳으로, 아니 아예 존재하지 않는 사람으로 취급된다는 사실 그 자체가 서글픕니다. 죽음도 그렇습니다. 다시는 이 지구에서 만나지 못한다는 절망감이 마음을 공허하게 만듭니다. 이별은 성숙한 사람이라도 견디기 어려운 마지막 인사일 겁니다. 그 인사마저 하지 못하고 떠나는 인연이 얼마나 많습니까. 청소년 문학소설 ‘너의 이야기를 먹어 줄게’에서는 독특한 괴물이 나옵니다. 남자 고등학생으로 변신해 사람인 척 인간들의 기억을 훔쳐 먹는 이 화괴는 제가 본 괴물 중에서 가장 다정합니다. 괴물은 무서워야 정상이죠. 정체를 알 수 없는, 종잡을 수 없어 두려운.. 2024. 11. 20. 08:25
네가 카톡을 차단하든 말든 카톡 읽씹만큼이나 상대방을 불쾌하게 만드는 태도란 아마 퉁명스러운 대답일 겁니다. 말붙이려 선톡을 날려도 돌아오는 건 차가운 대답뿐이요,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다는 적극적인 의지를 말 한 마디 못 붙이게 냉대하는 태도로 일관하는 건 분명 읽씹만큼이나 불쾌한 태도입니다. 저는 웬만해선 퉁명스레 대답하진 않습니다. 그런 제가 바쁘다는 핑계로 퉁명스레 대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저는 걔를 속으로 ‘녀석’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겉으론 “~씨”라고 불렀지만요. 새벽까지도 카톡을 주고받고, 회사 가서도 일하기 싫다며 찡찡대기도 했으며, 출퇴근 시간이면 어김없이 서로의 안부를 물었고, 심심할 때마다 점심도 같이 먹을 만큼의 가까운 관계였습니다. 처음 아이폰을 구매하러 애플 명동점에 갔을 때도 함께 했을 정도니, 뭐 .. 2024. 11. 19. 14:05
병든 자를 바라본 당신의 시선 복음서에서 예수는 제자들을 부르고 온 갈릴리를 다닙니다. 가르치고 전파하며 사람들의 병과 약한 것을 고칩니다. 이 소문이 시리아에 퍼졌고 모든 앓는 이들이 예수에게 모여 고침을 받습니다. 따라서 갈릴리와 데가볼리, 예루살렘과 유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이들이 예수를 따릅니다. 예수는 이들을 바라보며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앞서면 조건을 걸지 않기 마련입니다. 사랑하면 “그냥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말이 이유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면 사랑하기 때문에 아껴줄 뿐입니다. 예수도 그 어디를 걸어가든 조건을 내걸지는 않았습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향한 당신의 따뜻한 마음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무조건적인 희생을 할 수는 없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2024. 11. 18. 14:29
너에게 닿을 수 있다면 한국리서치 여론 속의 여론이 지난 5월 발표한 ‘2024 결혼인식조사’에서 분명한 메시지를 발견했습니다. 혼인 건수가 줄어든 이유가 뭐냐는 물음에 21%의 사람들은 1순위를 ‘내 집 마련 등 결혼 비용 증가’로 꼽았습니다. 자녀 출산, 양욱에 대한 심리적 부담감이 2순위로 14%에 달했죠. 이제 우리 국민 절반은 결혼을 해도 좋고 하지 않아도 좋은 제도 쯤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제 대가족 방식은 과거의 일이며 홀로 살아가는, 홀로 살아남은 시대에 도달한 겁니다. 사실상 선진국 반열에 오른 한국이 돈이 없어 결혼하지 못하는 나라가 된 것입니다. 그래선지 한국 사회의 각박함을 느끼는 순간이 잦습니다. 옛날 같다면이라고 해야 할까요? 참고 넘길 수 있는 문제에도 핏대를 세우며 갈등을 빚는 이들을 봅니다. .. 2024. 11. 17. 15:59
사랑한다면 본질로 구약성서 포로기 후기의 이스라엘 화두는 ‘왜 나라를 빼앗겼느냐’였습니다. 전쟁의 패배는 곧 야훼 하느님의 죽음이며 신의 죽음과 맞닿아 있습니다. 다시 말해 전쟁의 패배란 전능하고 위대한 유일신의 죽음이며 그 시대를 상징하는 아픔인 겁니다. 우리는 잘 안 되는 일들을 겪을 때마다 저주를 생각한다든지 무언가 잘못된 행동을 한 건 아닌지 되짚곤 합니다. 복과 저주를 우리의 행동과 연결해서 생각하는 습관은 매우 익숙한데요. 이스라엘도 전쟁에서 패하자 그들의 행동을 복과 저주로 연결한 습관은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가까운 사람과 불편한 일이 벌어지면 우리는 본질을 생각하기보다 당장 눈에 띄는 행동과 제스처에 신경을 쓰는데요. 지극히 당연하면서 또 우리가 저지르는 실수이기도 합니다. 몇 가지를 생각해보면 좋겠습니.. 2024. 11. 16. 11:55
인간 삶은 태어난 순간부터 죽음으로 달려가는 것 보통은 이야기의 시작으로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이 먹지 말라던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먹은 아담과 이브의 사건이 그렇습니다. 성서의 제일 첫 권, 창세기에 나오는 신화라 아담과 이브를 지구의 시작으로 보는 거죠. 학부 3학년 조직신학 종말론을 공부할 때였습니다. 철학의 ‘철’자도 모르던 제가 존재론의 대가 하이데거를 붙잡고 죽음에 관한 글을 집필하던 때였습니다. 하이데거도 어려웠지만 죽음 그 자체도 어려워 선배에게 꼬치꼬치 캐물어야 했습니다. 선배의 시각은 저와 확연히 달랐습니다. 하느님이 6일 만에 지구를 만들고 머잖아 인간이 하느님을 배반하는 과정을 ‘시작’이 아닌 ‘끝으로의 도달’로 본 겁니다. 선배의 논리에 따르면 이렇습니다. 인간을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어가는 존재로 본 거죠. “으앙” 우.. 2024. 11. 15. 14:35
모든 죽어가는 것들 앞에 모든 것이 죽어가는 겨울, 죽음을 생각해보았습니다. 모든 가을은 모든 존재의 죽음을 생각하게 만드는 계절의 조입인 듯합니다. 죽음은 언제나 인간에게 이별을 안겨다 줍니다. 무엇이든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가리키죠. 모든 것은 태어나고 죽음을 맞이하듯, 죽음 앞에 장사 없으며 죽음 앞에 거센 힘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이는 태어나면 죽고, 죽으면 존재가 사라집니다. 그래서 남는 것은 기억이며 향기입니다. 죽음은 인간에게 고통을 안겨주지만 고통을 알아가고 이해하는 과정은 인간을 인간 답게 만듭니다. 죽음의 아픔은 또 다른 새로운 생명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죽음은 인간 본연의 존재를 묻게 합니다. 또한 죽음은 스스로의 부끄러움을 보게 만드는 창구 역할을 합니다. 죽음을 피할 수 없으면 죽음을 바라보며 죽.. 2024. 11. 14. 14:35
너의 빈자리를 느끼는 동안 아담과 이브가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먹는 동안 성서는 하느님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밝히지 않습니다. 당신은 마치 이 모든 광경을 보지 못한 것 마냥 뒤늦게 동산을 거닐 뿐입니다. 아담도 뒤늦은 신의 발걸음을 들으며 부끄러워합니다. 하느님은 분명히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먹지 말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담과 이브는 벌거벗은 상태임을 깨닫고 숨어 버리고 맙니다. 어렸을 땐 혹시나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떠나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성인이 된 지금은 불안한 마음이 오래 머물지 않더군요. 좋아하는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는 감정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하느님으로부터 분리 된 인간은 늘 불안한 상태에 노출 돼 있음을 지적합니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유한하기 때문입니다. 언제든 사랑하는 .. 2024. 11. 13. 19:41
모든 개혁은 해방 너머로부터 벌써 7년 전 일이군요. 학부 시절 조직신학 수업에서 토론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주제는 방언이 실존하느냐 여부였습니다.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언어, 방언은 성서에서 사도행전(2,2)과 고린도전서(14,2)에만 나옵니다. 저는 초등학교 6학년 때 방언을 받아 지금도 방언으로 기도하곤 합니다. 그러나 토론에선 누구보다 방언은 실존하지 않다고 비난했습니다. 아무래도 바울은 방언이 하느님으로부터 온 현상인지 몰랐던 것 같습니다. 후기 바울의 편지인 목회서신에선 방언을 일절 언급도 않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에 가보지 못한 바울은 방언이 어떤 현상인지 확인하지 못했으므로, 무작정 금지할 수 없으니 길게 설명한 듯합니다. 따라서 예언과 비슷하므로 함께 묶어 설명한 게 아닐까 추론했습니다.(14,2-3; 14,2.. 2024. 11. 12. 1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