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이유립이 출간한 ‘환단고기’는 논란의 대상이 아니라 문제점이 명확한 위작(僞作)이다. 가장 근본적인 결함은 원본 자료의 부재다. ‘환단고기’는 1911년 계연수가 편찬했다고 주장되지만 이유립이 이를 출간한 1979년 이전까지 검증 가능한 실본이 존재하지 않는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계연수는 1916년까지도 천부경의 존재를 알지 못했던 인물이다. 그런데 그가 1911년에 편찬했다는 ‘환단고기’에는 이미 천부경이 수록되어 있다. 편찬 연대와 인물의 실제 행적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다.
‘환단고기’가 위작이라는 점은 주류 역사학계에서 이미 결론이 난 사안이다. 기경량은 이를 “전형적인 날조 문헌”이라고 규정했고, 정요근은 “전문 역사학의 연구 결과와 유사역사학의 주장을 동일 선상에 놓고 진위를 따지는 것 자체가 매우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반병률 역시 “‘환단고기’ 논쟁은 연구 방법론과 검증 기준이 전혀 다른 주장을 학문적 이견처럼 포장하면서 발생한 문제”라고 밝힌 바 있다.
문제가 불거진 계기는 12일 교육부 업무보고 자리였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환단고기’를 언급하며 검증된 역사학과 유사역사학을 마치 ‘관점의 차이’인 것처럼 발언했다. 이는 대단히 부적절하고 잘못된 인식이다. 더 심각한 것은 대통령실의 사후 해명이다. 14일 대통령실은 대통령의 발언이 “주장에 동의하거나 연구·검토를 지시한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지만 23분간 진행된 공식 브리핑에서는 단 한 번도 “환단고기는 위작”이라는 명확한 언급이 나오지 않았다.
“유사역사학 논쟁을 언급한 것이 적절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김남준 대변인은 친일파 문제와 위안부, 독도 문제를 언급하며 답변을 회피했다. “‘환단고기’가 위서라는 점이 잘못됐다는 뜻이냐”는 질문에도 “기관에서 답을 내놓아야 할 부분”이라며 즉답을 피했다. 결국 대통령실은 공식 브리핑에서 끝내 ‘환단고기’를 위작이라고 밝히지 않았다.
이 장면은 8년 전 “지구의 나이는 6000년”이라고 답해 논란을 빚은 박성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후보자의 인사청문회를 떠올리게 한다. 과학적 자격을 갖추지 못한 창조설이 ‘창조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며, 자신들의 결론을 뒷받침하는 증거만 선택적으로 채택하는 모습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반박과 검증은 외면한 채, 진화론의 일부 문제만을 부각하며 생물학 전체를 부정하는 태도 말이다. ‘환단고기’를 숭배하는 이들이 주류 역사학자들을 ‘친일 식민사학자’로 매도하는 모습을 보며 창조설을 과학으로 믿는 유사과학자들이 겹쳐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과학과 역사학은 모두 귀납적 추론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창조설과 유사역사는 결론을 먼저 정해 놓고, 그 결론을 정당화할 자료만을 거꾸로 끌어온다. 이런 인식을 가진 대통령이 ‘환단고기’를 그저 하나의 ‘문헌’쯤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과거를 잊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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