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에서 예수는 제자들을 부르고 온 갈릴리를 다닙니다. 가르치고 전파하며 사람들의 병과 약한 것을 고칩니다. 이 소문이 시리아에 퍼졌고 모든 앓는 이들이 예수에게 모여 고침을 받습니다. 따라서 갈릴리와 데가볼리, 예루살렘과 유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이들이 예수를 따릅니다. 예수는 이들을 바라보며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앞서면 조건을 걸지 않기 마련입니다. 사랑하면 “그냥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말이 이유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면 사랑하기 때문에 아껴줄 뿐입니다. 예수도 그 어디를 걸어가든 조건을 내걸지는 않았습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향한 당신의 따뜻한 마음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무조건적인 희생을 할 수는 없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이익에 맞지 않으면 분노합니다.
그러나 당장의 이익에 눈이 먼 것은 정신이 성숙하지 못할 때 저지르는 잘못이기도 합니다. 성숙한 사람은 자신을 내어 희생하면서도 긍정의 에너지를 내뿜습니다. 미숙한 사람은 눈앞의 이익을 우선하면서 모든 것을 잃고 결국엔 자기 자신마저 잃고 맙니다. 예수는 자기 자신을 인류에게 내어주면서 모든 이들을 구했습니다. 지금처럼 오로지 자신의 이익에만 초점을 맞춘 시대가 또 있을는지 싶습니다.
희생을 강요하면 바보가 되는 시대에 도달한 것 같습니다. 이 기조가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회에선 발전도 없으며 번영도 없고, 오로지 남는 것이라고는 상처와 고통 뿐입니다. 누군가에게 나의 이익을 건네면, 자기에게는 준 만큼 이익을 잃어버릴 거라고 믿는 제로섬 게임도 이쯤 그만두어야 하지 않을까요. 주고 또 주어도 마음과 물질도 풍성해지는 삶으로 이어가고 싶습니다.
그런 예수가 갈릴리와 데가볼리, 예루살렘과 유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온 수많은 이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나약하고 가난한 이들로만 치부한 사회의 모든 시선을 거두고 과거의 예언을 이룹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상한 마음을 싸매어 주고, 포로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갇힌 사람에게 석방을 선언하고, 주님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느님의 보복의 날을 선언하고, 모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셨다.”(이사6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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