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리서치 여론 속의 여론이 지난 5월 발표한 ‘2024 결혼인식조사’에서 분명한 메시지를 발견했습니다. 혼인 건수가 줄어든 이유가 뭐냐는 물음에 21%의 사람들은 1순위를 ‘내 집 마련 등 결혼 비용 증가’로 꼽았습니다. 자녀 출산, 양욱에 대한 심리적 부담감이 2순위로 14%에 달했죠. 이제 우리 국민 절반은 결혼을 해도 좋고 하지 않아도 좋은 제도 쯤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제 대가족 방식은 과거의 일이며 홀로 살아가는, 홀로 살아남은 시대에 도달한 겁니다. 사실상 선진국 반열에 오른 한국이 돈이 없어 결혼하지 못하는 나라가 된 것입니다.
그래선지 한국 사회의 각박함을 느끼는 순간이 잦습니다. 옛날 같다면이라고 해야 할까요? 참고 넘길 수 있는 문제에도 핏대를 세우며 갈등을 빚는 이들을 봅니다. 단지 참으면 되는 일은 아닐 겁니다. 그렇게 치부해서도 곤란합니다. 다만 무엇이든 돈의 논리로 이해하기에 우려스럽습니다. 돈이 세상의 전부는 아닐 텐데 말이죠. 그러나 우리 사회는 무엇이든 돈의 논리로 사회 문제를 풀려고 합니다. 돈을 벌기 위해 일해야 하고, 돈을 벌기 위해 누군가를 짓이겨야 하고, 돈을 벌기 위해 잠시의 비극에 눈을 감아야 합니다. 자본주의라는 경제 체제 속에서 돈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돈의 논리라는 것은 단순합니다. 종속의 관계입니다. 노동자와 사용자의 관계 속에서는 자유를 맛볼 수 없고 느낄 수도 없습니다. 고대의 신 개념도 인간이 신으로부터 종속되는 관계일 뿐입니다. 종속을 넘어 찬양이나 받는 존재로 비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말합니다.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종은 그의 주인이 무엇을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요한15,15) 예수는 우리의 친구가 되어 친구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택했습니다. 성서는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느냐 묻습니다.
불건전한 애착은 불행과 절망을 낳습니다.(로마8,6) 돈을 사랑하고 제일의 가치로 생각하는 이들을 보면서 불건전한 애착을 가늠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물질의 가치가 아닌, 자신의 가치를 발견했다면 어땠을까를 묻습니다. 예수의 죽음은 무능하고 무력해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가 죽음으로써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을 안겨주었습니다.(로마5,17)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너를 위한 희생이 아무 의미 없는 일이 아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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