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은 이야기의 시작으로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이 먹지 말라던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먹은 아담과 이브의 사건이 그렇습니다. 성서의 제일 첫 권, 창세기에 나오는 신화라 아담과 이브를 지구의 시작으로 보는 거죠. 학부 3학년 조직신학 종말론을 공부할 때였습니다. 철학의 ‘철’자도 모르던 제가 존재론의 대가 하이데거를 붙잡고 죽음에 관한 글을 집필하던 때였습니다. 하이데거도 어려웠지만 죽음 그 자체도 어려워 선배에게 꼬치꼬치 캐물어야 했습니다.
선배의 시각은 저와 확연히 달랐습니다. 하느님이 6일 만에 지구를 만들고 머잖아 인간이 하느님을 배반하는 과정을 ‘시작’이 아닌 ‘끝으로의 도달’로 본 겁니다. 선배의 논리에 따르면 이렇습니다. 인간을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어가는 존재로 본 거죠. “으앙” 우는 신생아의 눈물이 시작이 아니라 죽음으로 걸어가기 시작해 달려가는 한 인간의 총체적 종말이라는 시각이 무척 신선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도 이별을 정해놓고 만나지는 않는 법입니다. 그래서 이별은 쓰디쓴 초콜릿 같습니다. 처음엔 후련했지만 점점 쓰라리는 맛이 떨떠름하고 당혹스럽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철학은 미리 가보지 않은 인식의 지평으로 달려가게 만드는 힘을 가집니다. 모든 인간은 생물학적 죽음을 경험합니다. 죽음 이후에는 다시 살아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철학은 미리 죽음이 무엇인지를 인식하게 만듭니다. 신앙도 같습니다. 미리 가보지 않은 세계로 달려가는 만드는 동력이 되어 줍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히브11,1)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기 전 야훼 하느님의 약속을 “희망이 사라진 때에도 바라면서 믿었”(로마4,18)습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았고, 경험하지 않은 미래를 향해 믿으며 걸어갔습니다.
예수도 죽기 위해 이 지구에 왔을 때, 믿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신의 아들이 믿음을 가진다니, 모순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는 모든 믿는 자의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몸소 희생과 믿음을 내보인 예수는 직접 자신의 몸을 죽이러 이 땅에 내려왔습니다. 보름 후면 대림 첫 번째 주일입니다. 대림절은 예수의 나심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기독교의 기념일은 부활절과 성탄절이죠. 보통의 사람들에게 성탄절은 아기 예수의 나심을 축하하는 날일 겁니다.
거꾸로 보는 것은 어떨까요. 예수가 이 땅에 온 이유를 생각하고 묵상하는 겁니다. 당신은 과거에도 오셨지만, 미래에도 다시 올 부활과 재림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마라나 타!(Maranatha·1고린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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