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7년 전 일이군요. 학부 시절 조직신학 수업에서 토론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주제는 방언이 실존하느냐 여부였습니다.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언어, 방언은 성서에서 사도행전(2,2)과 고린도전서(14,2)에만 나옵니다. 저는 초등학교 6학년 때 방언을 받아 지금도 방언으로 기도하곤 합니다. 그러나 토론에선 누구보다 방언은 실존하지 않다고 비난했습니다.
아무래도 바울은 방언이 하느님으로부터 온 현상인지 몰랐던 것 같습니다. 후기 바울의 편지인 목회서신에선 방언을 일절 언급도 않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에 가보지 못한 바울은 방언이 어떤 현상인지 확인하지 못했으므로, 무작정 금지할 수 없으니 길게 설명한 듯합니다. 따라서 예언과 비슷하므로 함께 묶어 설명한 게 아닐까 추론했습니다.(14,2-3; 14,22)
물론 바울은 방언을 ‘기도’로 정의합니다. 다른 번역본을 보아도 ‘기도’로 인식한 듯합니다. 사실 방언 기도가 틀렸는지 옳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실상 2:1 토론에서 승전보를 울린 제가, 좋은 점수를 얻었음에도 돌아가는 길은 몹시 피곤하고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강의동에서 기숙사로 올라가는 길목이었습니다. 신학교 교정은 가을 낙엽으로 울렁였습니다. 제 이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와 자세히 보니, 다른 수업의 교수가 서 있었습니다.
“악마가 되는 것 같다”는 말에 교수는 나이를 물었습니다. 스물 셋, 창창한 청춘에 너털웃음 섞으며 이렇게 말하더군요. “아, 이거 스물 셋부터 세팅되어서야 되겠나. 더 방황해야 해, 10년은 더 방황해야 한다고!” 저는 언제나 교회에 분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청년의 노동을 착취할 뿐 아니라 미신과 샤머니즘 요소를 적당히 섞어 교인들을 돈벌이에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한국교회 교인 대다수는 아무 힘이 없는 기독교인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방언도 교인을 돈벌이로 이용할 수단으로 보였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예언도 사라지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사라집니다.”(1고린13,8) 그러나 사랑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지금 우리는 부분적으로 신을 알아갈 뿐입니다. 네, 방언은 중요한 게 아닙니다.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사람의 모든 말과 천사의 말을 하더라도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과리에 불과”(13,1)합니다. 지금의 한국교회는 루터나 칼빈의 개혁으로는 손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힘들수록 기본으로 돌아가라는 말에 주목해야 할 시점입니다. 다시 사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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