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하게 싸우는 사람들을 향해 저는 웃으면서 이런 상상을 합니다. ‘그러지 말고 차라리 사귀지 그래?’ 세상만사가 이런 편의주의적 발상으로 작동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사랑이란 감정도 그런 것 같습니다. 좋아하지만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하는, 사랑하지만 사랑하지 않는 척, 숨겨야 할 때가 있습니다. 괜히 들켰다간 쉬운 남자, 쉬운 여자로 보ㄹ 게 뻔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한국 사회는 초반의 기선 제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참 골치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학교 시절 구약성서 아가서도 논란이 많은 문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유월절 절기에 아가서를 읽는다고 하는군요. 본문은 얼굴이 화끈해지는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여자와 남자의 사랑을 그린 문헌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학부 시절 아가서를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아가서에는 하느님을 믿는 신앙에 관한 이야기는 없고 온갖 여성과 남성의 속삭이는 야릇한 목소리만 가득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 펼친 아가서를 보자 설레는 감정을 느꼈습니다.
이따금 썸·연애 글을 읽으며 “사랑해”를 지겹게 말해도 권태기에 빠진 이들을 봅니다. 사랑은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한다고 전해지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사랑해”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기에 사랑하는 마음으로 보이지 않는 실천과 행동이 앞서는 것처럼. 하느님도 인간을 사랑해서 스스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내려와 희생제물이 된 것처럼. 사랑은 언어로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며 행동과 실천으로 내보이는 가치인 것이죠.
그럼에도 사랑은 단순하지 않기에 “희생해라” “봉사해라” “아끼라” 같은 말로 매듭 짓지는 않겠습니다. 대신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다음의 행동을 취해보는 건 어떨가요. ‘지켜보는 일’ 말이에요. 지켜보는 일에는 개입이란 없습니다. 그저 멀리서 혹은 가까이서, 그가 인지하지 못하는 틈을 타 바라만 보는 일입니다. 아마 지켜보는 일도 쉽지 않다는 걸 느끼실 겁니다. 그가 어던 일에 즐거워 하는지, 슬퍼하는지, 괴로워하는지, 기뻐하는지 등을 관찰하는 일이니까요.
‘야훼’ ‘하느님’ 같은 기독교적 용어가 없어도 사랑의 감정을 북받치게 만드는 아가서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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