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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자유의새노래 칼럼

누군가의 죽음이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음’에서 찾아오는 게 아니라 완벽히 비어‘있음’을 느낄 때 비로소 슬픔으로 다가오듯

자유의새노래 2024. 11. 7. 23:09

 

?”라는 질문으로도 풀리지 않는 질문 앞에 섰을 때 무기력을 느낀다. 지금은 고인인 정신과 전문의 임세원 교수는 저서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에서 왜(Why?) 대신 어떻게(How)로 물을 것을 제안한다. ‘어떻게와 달리 절망적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도록 돕기 때문이다. 청소년 문학소설 열여덟 너의 존재감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나온다. 오랜 밤, 부모의 격한 싸움에 지쳐버린 여고생 이지가 집에 도착하자마자 스스로에게 다정한 말을 건넨다. ‘지금 당장, 교복부터 갈아입자. 옷 갈아입고 일단 자자’(1613)

 

피할 수 있었고 막을 수 있는 인재에 화가 난다. 그러나 우리 정치권은 계속 를 물으며 책임 소재를 묻기 급급하다. 지금도 커뮤니티 댓글 자체를 보지 않는다. 어처구니없는 무력감과 좌절을 외면하고 싶기 때문이다. 피해자에게 탓하는 일부 여론, 문제 해결에 하등 도움 되지 않을 책임 지우기, 또 다시 반복되는 일상적 재난…….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 사회가 너무도 느리게 바뀌어가는 듯 해 조바심까지 난다. 그럼에도 지금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는지를 묻게 된다.

 

유독 사람 문제에 대해서는 관대한 우리 사회를 보면서 질문을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왜 나는 행복해야 하느냐같은 자아가 비대한 질문이 아니라. ‘어떻게 더불어 살아갈 수 있을지를 물어야 한다. 구약성경 호세아 6장에는 우리가 지향해야 할 부끄러운 고백을 담았다. 이 고백을 들여다보려거든 한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 말이다. 또 다시 누군가는 가혹한 한국 사회 구조에 끼어 죽을 것이다. 그 죽음을 막기 위해서라도 지금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는지를 묻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갑작스레 떠난 이의 빈자리를 바라보면서 완벽히 비어있음을 느낄사람들에게 일상적인 온정을 베푸는 일에서 출발하는 것. 아파하는 이들과 함께 아파하면서도 강인한 마음을 잃지 않는 것. 그러나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한정 돼 있다는 것. 그러기에 지금을 충실히 살아야 한다는 것. 예수의 숨진 몸에서 완벽히 비어있음을 느낀니고데모처럼.(요한19,39) 지금은 고통스럽고 아프지만 끊임없이 몰려올 것만 같은 어둠을 바라보며 순순히 어둠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