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이 야훼 하느님을 원망하던 때였습니다. 야훼는 모세를 부르며 이렇게 말했죠. “장로 일흔 명을 세우고 고기를 먹일 것이다. 하루만 먹는 게 아니라 스무 날도 아니라 한 달 내내 냄새만 맡아도 먹기 싫을 때까지 먹게 될 것”이라고요.(민수11,16-19) 모세는 가능하냐고 묻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기에는 불가능하다고 답합니다. 그런 모세에게 야훼는 “나의 손이 짧아지기라도 하였느냐”고 묻습니다.
구약에서 야훼의 손은 능력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놀라운 권능을 선보였음에도 이스라엘은 40년을 광야 생활하며 야훼 하느님을 믿지 않습니다. 다시 과거를 그리워하며 이집트 노예 생활이 더 낫다고 불평하죠. 그런 인간들을 바라보며 모세는 야훼 하느님에게 당신의 존재를 요구합니다.(탈출32,18) 새번역 성서에서는 ‘주의 영광’이라고 번역하지만 공동번역에서는 ‘당신의 존엄하신 모습’으로 번역합니다.
어째서 모세는 지도자로서의 권위, 능력, 지혜가 아니라 야훼의 존재를 구한 걸까요. 모세가 바라던 한 가지에서 우리는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모든 가치가 숫자로 매겨진 근대 시대에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온누리를 황폐하게 만든 제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정치이론가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에 대해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숫자가 돈으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돈으로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모든 생각의 방식이 우리 마음을 황폐하게 만듭니다. 권위와 능력, 지혜는 거꾸로 우리의 목을 옥죄며 죽음으로 달려가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꽃님 작가의 청소년 문학소설 ‘행운이 너에게 다가오는 중’에서 화자로 등장한 행운의 역할은 작은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두들겨 맞는 여중생이 생각없이 찬 공을 최 감독이라는 축구 감독의 눈에 띠게 만드는 것. “내가 지금 이 두 사람의 인생에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다.”(63쪽) 따라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기도는 단 한 가지일 겁니다. ‘가난하고 낮은 자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 수 있는 하느님의 마음을 주십시오.’
절망이 곧 엄습할 것만 같은 시대에 구약은 우리가 구해야 할 한 가지를 가리킵니다. “주님의 손이 짧아서 구원하지 못하시는 것도 아니고, 주님의 귀가 어두워서 듣지 못하시는 것도 아니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의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의 죄 때문에 주님께서 너희에게서 얼굴을 돌리셔서, 너희의 말을 듣지 않으실 뿐이다.”(이사5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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