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예쁘면 할 말을 잃기 마련입니다. ‘너무’라는 단어도 ‘정말’이란 말도 필요 없습니다. 말 그대로 “예쁘다” 이 한 마디면 됩니다. 또 너무도 거룩하면 할 말을 잃게 마련이죠. 어떤 말도 나오지 않는, 그 감정을 뭐라 말해야 할까요. 신 앞에 선 모세도 야훼 하느님의 영광 앞에 신발을 벗고 말았습니다.(탈출3,5) 선지자 이사야도 야훼의 거룩함 앞에 벌벌 떨었습니다.(이사6,5) 그렇습니다. 정직한 것 앞에서 인간은 할 말을 잃습니다. 정직하게. 말 그대로 예쁘고 거룩함 앞에 우리는 넋을 놓습니다. 따라서 그 예쁘고 거룩한 존재 앞에 ‘너무’ ‘정말’ ‘아주’ ‘상당히’ 같은 수식어를 붙이지 않습니다. 그냥 예쁘다고, 그저 거룩하다고 말합니다.
저는 가끔, 아름다운 것을 보면 넋을 놓고 그대로 바라만 봅니다. 눈에 담고 싶어서, 마음에 새기고 싶어서, 그 자체로 보존하고 싶어서 바라만 볼 뿐입니다. 훼손되어서는 안 될, 순수한 것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조금이라도 나의 생각이 닿기라도 하면, 조금이라도 내 것이 묻기라도 하면 안 될 것 같기에 지켜주고싶은 마음이 앞선 것이죠.
아름다움을 알지 못하는 이들은 아름다운 것을 가질 수 있으리라고 착각합니다. 때로는 과장된 행위와 폭력을 동원해 가지려고도 합니다. 그러나 아름다움은 숭고한 것이므로 가지려는 욕망으로 가득한 사람이 함부로 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때가 묻고, 더러워지므로 그 자체로 아름다움을 잃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말한 게 아닐까요. “너희의 하느님인 나 주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레위19,2)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소유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자체로 보존하고 그 자체로 숭앙해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느님에게 맞추고싶은 마음을 느낍니다. 하느님에게 예의를 갖추고 싶은 진심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도 그 아름다움 앞에 할 말을 잃습니다. 너무도 아름다워서 그 자체로 지켜주고 싶은, 나의 생각이 묻지 않은 순수함을 보호해주고 싶은, 그래서 너를 닮고 싶은 마음을 느낍니다. 사랑하면 더 알고 싶은 모양입니다. 고양이 다루듯 그 순수함을 지켜주고 싶습니다. 조금씩 다가가고 싶습니다. 하느님도 그 마음을 아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거울로 영상을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마는,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부분밖에 알지 못하지마는, 그 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아신 것과 같이, 내가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1고린13,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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