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셀라 시론] 소녀의 이름으로

나는 이제껏 김용철의 새능력을 왜 더 빨리 탈퇴하지 못했는가에 대한 괴로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좀 더 빨리 탈교(脫敎) 했다면, 조금 더 빨리 관계를 정리했더라면…. 소년을 구하지 못한 죄책감은 우연히 입수한 18년 전, 한 영상을 보면서 오롯이 해소되었다. 연세중앙교회 YBS 인터뷰에 담긴 소년은 짐짓 말할 수 없는 모든 죄를 짊어진 표정으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알고 지은 죄인데 왜 그걸 지금까지 해결하지 못했는가….” 도대체 중학교 2학년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카메라 앞에 서서 자책하며 스스로를 옥죈단 말인가. 새능력을 탈퇴하고서 나는 단 한 번도 김용철의 설교를 끝까지 들어본 일이 없다. 양심에 찔려서도 아니고 눈물이 감격으로 앞을 가렸기 때문도 아니다. 1시간 설교 모든 문장 옭아맨 감정 동원과 협박 구조, 의미 없는 아멘의 반복, 철학도 신학도 없는 감정만 휘젓는 수준의 처참한 호통은 그의 설교를 들어보면 누구나 깨닫게 된다. 그는 오로지 의식의 흐름에 의지한 채 청중을 감정적으로 끌고 다닐 뿐이다. 각 단락 사이의 논리적 연결은 찾아볼 수 없다. 자기도취에 빠진 간증을 서사로 가져다가 어떻게든 이어 붙이는 게 전부다. 모든 것 공허함의 파도밖에 보이지 않던 시절, 나는 죽을 용기를 가지고 어둠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시절 스물 두 살의 나는 미지(未知)의 두려움을 견뎌야 했다. 이제는 지옥에 가는 건가 싶었다. 가족도, 연고도 없이 새능력에 붙잡혀 노동 착취를 당했어도 불안함은 가시지 않았다. 그로부터 10년이 흘렀다. 그동안 탈출이 재생되었다. 때로는 방송실 귀퉁이에서 일을 하는 장면이 꿈으로 재생되었고, 어쩔 땐 빠져 나오는 꿈을 꾸기도 했다. 많으면 한 달, 뜸하면 서너 달에 한 번 연속된 꿈은 새능력으로부터의 완전한 탈출을 가리키고 있었다. 과거의 나로부터 찾아오는 ‘시간의 죄책감’이 나를 오랜 시간 사로잡은 것이다. 몸은 난파선을 벗어났지만 아직도 나의 혼은 그곳에 갇혀 있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허물어지는 시간. 탈교는 무너진 영혼 속에서 재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저 어른들이 주입한 죄책감은 남은 인생의 각도를 비틀었다. 어그러진 관념과 여성성에 대한 왜곡된 이해는 긴 시간의 교정이 아니었으면 영구히 손상되었을 것이다. 바로 그 소년이 자신의 입으로 토설한 ‘알고 지은 죄’는 이브가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따먹은 상징이다. 왜곡된 여성 이해의 뿌리는 기독 담론 그 자체다. ‘성숙한 소녀’라는 어른들의 거짓말이 빚어 만든 망상이 소녀의 노동을 착취했고, 소년의 미래를 짓밟은 것이다. 탈교 이후 나는 차근차근 기독 담론을 해체하기 시작했고 비로소 소녀를 다시 발견하게 되었다. 그 소녀는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지,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천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악과를 먹은 후 야훼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침잠한 것처럼 나는 소녀 앞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되어가는 과정을 순연(純然)하게 바라보듯 과거의 시간을 다시 배열하고 재건하는 소녀의 손길을 말없이 볼 뿐이었다. 소녀는 잃었던 재주, 놓쳤던 이름, 잊혔던 얼굴을 되찾았다. 에덴의 난민, 아담과 이브는 재건의 기회조차 잃었으나 소녀는 신의 질서를 거스르고 마침내 ‘지금 여기(hic et nunc)’의 자리에 섰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소녀의 일하는 광경 속에서 기록하는 것뿐이었다. ‘기억의 화해’가

[사설] 그저 ‘병사1’로만 생각하는 정신머리 이런 게 해병 없는 ‘해병 정신’

2023년 7월 19일 경상북도 예천군 내성천에서 13명의 해병대원과 폭우 실종자를 수색하는 작전에 투입된 채수근 상병이 급류에 휩쓸려 순직한지 2년 10개월 만에 법원은 1심에서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다.(2026.05.08) 포병 대원이 구명조끼도 없이 허리 깊이까지 물에 들어가는 건 수색 작전이라 할 수 없다. 상급 지휘관의 성과 집착이 대원의 몸으로 지불된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임 전 사단장은 수중 수색 사진을 보고받고도 멈추지 않았다. 재판부는 이를 두고 “구체적 위험을 인지한 상황에서 위험을 가중시키는 지시”라고 밝혔다. 과실이 아니라 선택이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죗값은 징역 3년이었다. 특검은 5년을 구형했음에도 대원의 생명을 담보로 작전 성과로 밀어붙인 지휘관에게 법원이 매긴 값이 고작 그뿐이었다. 채 상병의 어머니는 선고 직후 법정을 떠나지 못했다. 군 복무로 나라를 바친 이들이면 먹먹해질 물음이다. “아들의 희생에 대한 책임이 이렇게 가볍다면 어느 부모가 안심하고 자식을 군에 보내겠느냐.” 임 전 사단장은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 “수중 수색을 지시한 건 내가 아니”라는 장문의 이메일과 문자를 보냈다. 재판부는 “오랜 재판 경력에서 이런 피고인을 본 적이 없다”고 질타했다. 해병 정신을 입에 달고 살던 사람이 해병의 죽음 앞에서 한 행동이 그것이다. 임 전 사단장의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를 적시한 2023년 7월, 해병대수사단이 경찰에 이첩하려 했을 때, 누군가 그것을 가로 막았다. 대통령실 번호로 걸려온 통화 뒤 14초 후 이첩 보류 지시가 내려간 것이다. 수사단장은 ‘집단항명의 수괴’로 입건됐다. 이첩을 막은 혐의로 기소된 윤석열의 재판이 진행 중이다. 1심 법원이 임 전 사단장의 과실치사를 인정했다는 것은 그 이첩을 막을 이유가 없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재판부는 말단 지휘관에게만 책임을 떠넘기는 군의 관행을 지적했다. 그 관행을 깨려 한 건 해병대수사단이었고 그것을 다시 덮으려 한 것이 침묵의 권력이었다. 해병 정신을 가르치던 이들이 누구보다 해병의 죽음을 덮으려 했다.

철없는 어른도 성장은 합디다

2020년 02월 11일
‘진짜’라는 말 백 번 천 번 할 필요 없다. 직접 해봤다고 말하면 된다. 기억과 행동 대충 섞어도 괜찮다. 남들은 해보지 않았을 일이니까. 그래도 괜찮다. 사람들은 내 행동엔 관심 없고, 오로지 그 시점에 무엇을 느꼈는지만을 궁금해 할 테니까. 일상의 행복처럼 누구든 공감하되 세계 평화처럼 동떨어진 언어여선 안 된다. 대충 가능성 있는 성장 서사 눙쳐놓고 해봤다는 추진력 스까 놓으면 인생 선배로서 조언이 탄생한다. 독자 여러분은 ‘성장 서사’ 이 단어를 기억해 두시라. 성장 서사를 마케팅 요소로 사용한 이들은 유독 ‘진짜’라는 뉘앙스를 즐긴다. 말 그대로 자기 말이 진짜라는 말이다. ‘진짜’라는 단어를 한병철은 판매 논리(타자의 추방, 35)라고 지적했다. 판매논리는 남과 비교하는데서 시작한다. 말빨을 왜 키워야 하지? 계발을 왜 해야 하지? 성공을 왜 해야 하지? 공부를 왜 해야 하지? 독서를 왜 해야 하지? 존버를 왜 해야 하지? 왜를 묻기도 전에 말빨계발성공공부독서존버를 나열하고 나처럼 살고 싶으면 먼저 성공한 내 얘기를 들어보라 권한다. 진짜를 말하지 않아도 설명할 방법은 무궁무진한데도 말이다. 직접 보여주면 된다. 판매 논리를 숨기려 직접 보여주기를 실행한다. 사람들은 감쪽같이 속는다. 직접 해봤으니 당사자가 더 잘 알거라고 비호까지 한다. 비호한 이유 한 가지 더, 헬조선 자체에 ‘희망’과 ‘의지’를 불어 넣었으니 이만하면 됐다는 논리다. 그러니 내 사람 그만 까고 문해력 딸리는 너희들은 책이나 읽으시라. 자존감 낮은 인간들은 남 잘 되는 꼴을 못 보는구나. 쓰레기들의 끝은 어디일까? 대화 불가. 아이코, 이를 어쩌나. 좋은 일 한다고 했거늘 공정위 아저씨가 다가와 자꾸만 뭘 빼라고 말한다. 성장 운운하던 그 사람 이마에 괴팍한 단어 하나가 보였고 이 광경에서 데자뷔를 느꼈다. 자기 착취를 배경에 둔 인간들 행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배제의 정치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더욱더 남들과 비교해댈 어휘력을 길러놓고 너희들과 다르다고 차별한다. 공간과 시간을 분리해 너의 시간은 발 디딘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지금부터 혓바닥에 나오는 모든 말을 적으시라 가르친다. 스스로가 고립되고 그사세가 돼버려도 상관없다. 우리가 세상의 중심이니 너희들은 우리에게 배우시라. 진짜 성장, 진짜 인간은 이렇듯 집단 사이 숨어버려 쨉만 날려댄다. 누군가 불편한 이야기를 꺼낸다. 자기 착취적인 너희들은 무엇이 다르냐고. 대답하지 않아도 괜찮다. 직접 해봤다는 말 한 마디 충분하듯 밤새도록 되새김질 한다. ‘나는 ○○이 아니다!’ ‘나는 ○○과 다르다!’ ‘나는 진정한 ○○이다!’ 온갖 동네 뒤엎을 심령대부흥성회는 남들도 모르는 우리끼리 부흥성회로 비칠 뿐이다. 이쯤 되면 성장서사가 더 이상 성장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성장을 위한 성장, 배제를 위한 성장은 자가당착(自家撞着), 자기만족,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 기독교가 무너진 배경엔 인간을 죄인으로 보지 않는 새로운 시각 덕분이다. 카리스마 탑재해서 경영하던 아저씨들 꼬부랑 할배 되어 이빨 빠진

“나는 괜찮지 않다”

2020년 02월 07일
집단으로 모여야 한다는 강박은 두려움을 잊게 한다. 마음속 무자비하게 만들어지는 두려움을 조금이라도 잊고자 집단으로 모여든다. 나와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묻고, 공감할 감정을 가졌는지

[헌사] 아장스망의 기쁨

2020년 01월 30일
미야자키 하야오의 1978년 作 『미래소년 코난』에서 코난과 몬스키가 마주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실은 코난의 현란한 총알 피하기 기술보다 눈길이 간 건, 적으로 등장한 몬스키였습니다. 유독 19화엔 몬스키가 악마가 되기 전의 기억을 상세히 묘사합니다. 기억하던 마지막 세상은 불바다가 되어버린 도시. 쓰러진 발발이를 깨우지만 이내 쓰나미는 아픈 기억과 함께 모든 것을 휩쓸고 맙니다. 극적으로 구조된 몬스키는 멸망한 인류를 다시 세우려 인더스트리아 행정국 차장이란 직함도 얻습니다. 알다시피 인더스트리아는 독재자 레프카에 의해 지배 체제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세계의 평화를 위해 지구를 정복해야 하고 정복하기 위해선 체제 순응적인 강한 인간, 강한 에너지로 강한 무기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만들어진 것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느라 끝내 인간성을 잃습니다. 1등 시민이 인간성을 잃은 역설은 19화 곳곳에 흩어져 몬스키의 정황을 설명합니다. 그런 몬스키 앞에 코난이 서 있습니다. 코난은 만들어진 세계엔 관심이 없습니다. “대단한 아이”라 칭찬했지만. 총알 피하기(?) 기술이 뛰어나서라기보다 사람들 생명을 지켜낸 그 용기에 감탄한 겁니다. 만들어진 것은 우리가 사는 이 땅에도 넘칩니다. 진정성도 그렇습니다. 유명해지기 위해선 진정성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파란 만장한 삶 뒤에 숨은 어른들의 욕망은 투표 조작을 낳았고 이젠 장애를 빙자해 방송까지 해대며 순연함을 파괴합니다. 강한 인간, 우월한 삶. 몬스키에겐 과거의 기억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들어진 것들을 위해 발발이와 화목했던 기억은 가치 없는 상품으로 전락합니다. 가치 없는 아이돌이 잊히듯, 정복에 도움 되지 않을 기억도 소거해 버립니다. 하이하바에서 마신 진짜 홍차와 벤치에 앉자 지저귀는 새, 그 앞에 멸종한 줄만 알았던 강아지 앞에 10년 전, 죽어버린 발발이와 사라진 기억을 되찾습니다. 목숨을 걸고 다가오는 쓰나미에 사람들과 대피하라 경고한 코난을 넋 놓고 바라보자 이제껏 자신이 쌓아온 강한 여성, 강한 인간상이 와르르 무너지고 맙니다. 몬스키의 무너진 자화상 속에서, 힌트를 얻었습니다. 패배라는 기억들이 아장스망으로 구성되어 비교 의식을 낳듯, 거꾸로 진짜 홍차와 발발이, 코난이란 순연한 기억들이 모여 희망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요. 그렇다면 과거를 기억한다는 건 단순히 기억의 재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고장 난 테이프 마냥 같은 부분을 반복하며 피해 서사 만드는데 초점을 맞춘다면 더 이상 새로운 관계,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지 못할 겁니다. 아사카 모리오의 1999년 作 『카드캡터 체리』 극장판 ‘마법의 카드’가 끝날 무렵 크레딧이 올라오며 주제가 ‘머나먼 이 거리에서’가 나옵니다. 한국어 번역과 달리, 일본어 원어는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나만이 간직한 소중한 추억 언제나 함께하리 영원히’. ‘私の力で進む果てしないこの道を(나의 힘으로 나아가요. 끝없는 이 길을)’ 기억은 나만이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만들어가기에 수많은 기억과 기록물이 끝없는 여정에 함께하기를 고대합니다. (1절) 大好きだったあの歌古いテープの中 小さなキズ色あせたタイトルにじんだ夜明け そしてまた今日が来る夏の風を連れて 慣れていく日々の片すみでふと孤独に出会う 즐겨 부르던 그때 그 노래 오래 된 테이프에서 빛바랜 표지, 귀에 익은 노래 속에 새벽은 밝아오네 또 다시 시작된 오늘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 맑개 갠 하루 어느 시간이면 문뜩 그리움에 젖는다 自転車でどこまでも 風を蹴る速さ忘すない 작은 자전거에 몸을 싣고서 부는 저 바람 맞으면 달리던 기억 la la la la歌おう空を見上げて la la la la It’s my life 歩いて行こう 私の力で進む果てしないこの道を 라─ 라─ 라─ 라─ 노래해 저 하늘 바라보며 라─ 라─ 라─ 라─ It’s my life

[에셀라 시론] 태초에 개발자가 doctype를 선언하시니라

2020년 01월 22일
드디어 신 죽음의 시대를 벗어나려는 걸까. 신의 명령에 주목한 시대를 신 죽음의 시대 이전이라 정의한다면. 신 명령이 어떠한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함을 인식한 시대를 신 죽음의 시대라 명명할 수 있다. 신 죽음의 시대는 주체성의 개념조차 존재할 수 없는 세계다. 세계라는 점에서 벗어날 수 있고 시대라는 점에서 언젠가는 마침표를 찍는다. 오랜 시간 슬픔과 절망 속에 신이 다시 살아나기를 희망했건만. 신의 부활은 요원하고 세상은 바쁘게도 신의 존재를 망각한 채 신 죽음을 가리킨다. 아직도 신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확인할 수 없는 시대에 살지만. 죽지 않았다고 잠정 결론을 내리고 신 죽음의 시대라는 3년의 터널을 벗어난다. 그래서 마련한 새로운 이야기가 ‘신 죽음의 시대 이후의 담론’이다. 신 죽음의 시대 이후의 담론은 더는 신학과 철학, 존재론이 중심을 차지하지 않는다. 이 말은 신학과 철학, 존재론이 독점한 시대의 끝에 마주했다는 의미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우스주의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개신교회 상황은 사회에서 바라보기 민망할 만큼 구식이다. 존재론이 지시하지 못하는 영역에 발을 담그고 스스로의 존재를 다 고민했다는 자만심도 부끄럽기 그지없다. 신학과 철학, 존재론에 대응해 신 죽음의 시대 이후 세계에 도달하자 신세계를 경험했다. 신 죽음의 시대 이후의 세계는 정답에 메이지 않아도 좋다. 옳고 그름은 대화를 통해 타협할 수 있고 협상할 수 있다. 그렇다고 정답이 없는 건 아니다. 무지개에 도라에몽 넣었다고 그게 올바른 과제가 아니듯. 신의 명령보다 우선시하는 것은 바로 대화와 소통이다. 자아-타자-세계라는 존재에 하느님이 낄 자리도 없다. 이곳은 신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려는 이원론적 세계관이 붕괴된 세계다. 디자이너가 된 현대인은 스스로가 자신의 세계를 개척하고 만들어낸다. 누구의 허락도 필요하지 않으며 다양한 세계 속에 서로의 존재를 이해하며 살아간다. “정답이 없다. 다만 나의 의견을 참고하라”는 조언뿐이다. 그 세계는 선악과 이후도 없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세우고 언약을 세운 후.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여 이 세계를 구한다는 흔하디흔한 내러티브가 없다는 말이다. 소박한 ‘캔버스’ ‘도큐먼트’ ‘페이지’라 이름 지은 백지장을 펼치면, 직접 이야기를 펼칠 수 있다. 여기에는 구식 내러티브도, 신식 내러티브도 없다. 표현할 수 있는 나만의, 우리들 이야기를 담아 낼 수 있다. 구원도, 십자가도, 칼빈도 없다. 있어야만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 세계엔 경이로움이 가득하다. 새 레이어에 같은 소녀를 복제하고 브러쉬를 가져다 댄 채 노란색을 불어 넣고 오퍼시티(opacity) 값을 낮춰주면 따뜻한 불빛이란 생명력이 탄생한다. 누군가는 인간이 신의 영역을 침범해 사람을 창조해냈다고 붉히지만,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은 복제된 사진을 보며 이를 작품이라 감탄하고, 그 속에서 따뜻함을 느끼며 공감한다. 파란 풀잎 바라보며 ‘주 하느님 지으신 모든 세계’ 짝지어 부른다 한들, 이 세계의 따뜻함과 비교하기 어렵다. 이 조차 세상적 삶이고, 신자유주의 병폐라는 고상한 용어를 쓴다한들 다가오는 신 죽음의 시대 이후의 세계를 부정하기 힘들다. 어차피 세상은 달라지고 바뀌어가기 때문이다. 마귀·사탄·귀신의 음모라 해도 소용없다. 신 죽음의 시대라는 강박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더욱 이 세계가 경이로 다가오기보다 마귀·사탄·귀신의 굴레에 씌운 세속적 세상이란 불쾌한 감정만 남을 것이다. 이제 신이 독점하던 신 죽음의 시대조차 끝이 났다. 신 죽음의 시대를 벗어난 이들은 블락캣(bracket)을 열어 웹 사이트를 구현한다. 포토샵을 열어 사진을 보정한다. 일러스트를 열어 미지의 세계를 그린다. 인디자인을 통해 기억과 미래를 담아낸다. 프리미어를 열어 과거를 새롭게 나열한다. 새로운 시대, 신 죽음의 시대 이후의 담론에 이름을 붙일 수 있다면. 나는 ‘개시(開示)의 세계’라 이름 짓고 싶다.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현실논단] 기억담론과 시간 정책

2020년 01월 22일
전체주의 시대가 끝이 났다. 드디어 종결된 전체주의 시대를 바라보며 새로운 시간 정책을 구사한다. ‘신(神) 죽음의 시대 이후의 담론(談論)’도 그렇다. 신 죽음의 시대에 구가하던 전체주의 담론의 끝을 선언하고 새로운 담론으로 새 시대를 맞이하자는 의미였다. 전체주의 시대 시간 정책은 해방을 기저에 둔 담론이었다. 해방을 위한 자유, 해방을 위한 신앙, 자유 투쟁도 이러한 연장선에 등장한다. 전체주의 시대의 자유란 해방 그 자체였고, 신자유주의 시간 정책과는 무관한 신 죽음의 시대 이전의 담론이었다. 전체주의 망령(亡靈)에서 벗어나려던 신 죽음의 시대는 어떤가. 비로소 해방을 위한 자유와 신앙, 자유 투쟁이란 현실을 깨닫고 해방 너머의 자유를 등장시켰다. 그 자유란 자기가 자기 자신일 수 있어야 할 자유. 신과의 교감을 전혀 의지 하지 않은 채 스스로가 행위 가능한 주체성을 의미했다. 자기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깨달으며 반성하는 끝없는 과정에서 스스로 삶의 가치를 돌이키고 찾아가는 주체성이다. 그럼에도 완전한 주체성으로 인식하기 어려운 이유는 간단하다. 주체성을 가지고 과거를 보기 때문이다. 신 죽음의 시대 이후의 담론은, 신 죽음의 시대를 바라보고 있다. 신 죽음의 시대 이전에 등장한 주체성은 신 죽음의 시대 연장선에 등장한 내러티브 인식과 함께 했다. 제2의 유일신은 아이돌이란 새 가면을 쓰고 제2의 오순절로 등장했다. 주체성을 언급하나 끌려 다니고, 존재를 물으나 자신의 존재는 사라진다. 시간 정책은 자기 착취적인 제2의 유일신 중심으로 펼쳐졌고 이내 찾아온 소진증후군과 우울증은 개인이 감당해야 할 몫으로 남고 말았다. 그사세(그들이 사는 세상)는 하나의 현상이다. 그사세를 탈출하자 다시금 신 죽음의 시대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구호로 등장한 자유와 해방은 신 죽음의 시대 이전에 등장한 구호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현재라는 관점에서 아이돌은, 비로소 현재를 볼 수 있는 창이 되었으나 오순절과 다르지 않다는 비판은 피하기 어려웠다. 다시금 과거로 돌아갔다는 비판이 이 지점에서 등장했다. 전체주의 종결 그 以後 時間 정책 여전히 과거 내러티브 神으로 부상 記憶을 넘을 수 있을까 언제부턴가 담론의 화두로 등장한 신 죽음의 시대 이후의 담론은 어느 때보다 ‘주체성’에 집중한다. 스스로가 스스로의 삶을 깨닫고 찾아가며, 찾아가리라는 믿음과 함께 ‘열심히’와 ‘최선을’ 다한 삶에 방점을 둔다. 하지만 공허한 ‘열심히’와 ‘최선을’ 사이에 낀 주체성은 앞으로도 세워지지 않을 테고, 존재론은 언제든 제3의 유일신에 자신의 자리를 내어줄 용의를 보이는 듯하다. 주체성을 가지고 과거를 기억하는 순간, 제3의 유일신은 완성되고 만다. 타자성이 배제 되었다며 주체성이 소외되던 현상은 전체주의 시대를 통틀어 언제나 존재했다. 유일신에 기대지 않는 주체성이 존재하기는 할까? 성숙에 덧댄 내러티브는 다시금 신으로 등장할 가능성을 남긴 채 사라지고 있다. 다양한 기억을 한데 모아 긍정도 부정도 의미하지 않을 기억 그 자체에 집중한 나머지 점과 점들이 모여 내러티브를 형성한다는 유혹 속에 내러티브를 제3의 유일신으로 받아들일지 모른다. 이전의 시간 정책은 언제든 과거를 지향하고 있었다. 성숙 내러티브는 현재와 미래로 향할 교두보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유익함을 부정하기 힘들다. 그러나 만들어진 존재, 만들어질 내러티브에 부푼 희망으로 자기 자신을 소외시킨 작금의 부정성은 부정하기 힘들다. 소외감을 견디지 못해 다시금 레트로토피아(retrotopia)로 향할 때면 과거는 재소환 된다. 그렇다면 단지 과거의 나열만이 과거의 아픔을 해소하는 방법일까? 과거의 인식을 기억이란 내러티브로 소환해야 할까? 과거의 인식을 기억이란 이름으로 기억하는 것만이 현재에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까? 과거를 과거대로 내버려둔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과거의 기억들을 소유한 이들과의 연대, 대화가 진정한 대화이자 미래를 향할 교두보일까? 비로소 전체주의 망령에서 벗어나 등장한 자아와 타자, 그리고 세계라는 성질을 바라보며 시간 정책은 여전히 과거를 지시하고 있다. 주체성은 오로지 현재를 인식할 때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가 모르지는 않는다. 주체성을 가진다 한들, 과거를 바꿀 순 없기 때문이다. 기억이 가져다 줄 내러티브라는 유혹이 제3의 오순절이자 새로운 신으로 등장하지 않기 위해서는 기억에 의존한 시간 정책을 직시하고 재고해야 한다. 과거의 특정한 사건이야 말로 현재에 어떠한 영향도 끼칠 수 없다는 교훈을 선언해야 한다.

만들어진 것에 우리는 주목한다

2020년 01월 20일
미아쟈키 하야오(宮崎駿)는 『미래소년 코난』에서 만들어진 것에 주목한다. 몬스키란 여성이 악마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다시금 인간의 순연함을 되찾는 과정을 그린 19화에서 만들어진 것의 실체를 깨달은 몬스키의 충격을 그려낸다. 하야오가 담아놓은 인간의 조건엔 아무래도 순연함이 존재하지 않을까. 순연함은 진정성과 궤를 달리 한다. 진정성도 만들어진 것에서 비롯할 수 있기에 만들어지지 않은, 존재 그

10년 전의 편지

2020년 01월 01일
그 때도 촌스럽다고 생각했었다. 아래아 한글에서 지원하는 기본 클립아트를 이용해 하나하나 붙였을 모습을 생각하니, 그 노고를 상상하며 그 때도 웃었던 것 같다. 벌리지 않은

[사진으로 보는 내일] 파란 하늘 갈매기는

2019년 12월 31일
날아가는 새를 바라보며 자유를 꿈꾼 적이 많았다. 자유롭게 어디든지 향할 수 있음을 부러워했다. 동경하는 대상이 되면 동경하는 대상처럼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일말의 희망을 안으며 살아간다. 동경하는 대상을 향해 나도 저렇게 살 수 있을까. 그래서 져가는 노을이 서글펐다. 오늘이 끝난다는 감정이 무겁게만 느껴졌다. 누구에게나 동일한 파란 하늘이지만, 어떤 이에게는 회색 빛 하늘이고, 중천에 뜬 해를 바라보며 하품이 질 푸른 하늘이자 누구에겐 저녁 노을이 지는 보랏빛 하늘일 것이다. 갈매기를 바라보니 파란 하늘 아래 져가는 노을이 보였다. 그리고 어디든 향할 수 있는 지금에 이르자, 더는 새를 떠올리지 않게 되었다. 새를 잊어버리며 살아가다 이제야 날아가는 새를 다시 보니, 알 것 같다. 새가 된다 해도 자유를 느끼지 못할 거라고. 오늘은 져가는 노을을 끝까지 바라보았다. 날아가던 갈매기가 부럽지 않았다. 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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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랑 2026년 9월 19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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