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김용철 새능력’이 체제경쟁 대상이라 생각하는 정신머리

예수의 부활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새능력의 김용철은 유독 ‘믿음’에 방점을 두었다. 그의 스크립트를 분석해 보면 ▲믿음=74회 ▲부활=54회 ▲사망·죽음=54회 ▲하나님=26회 ▲죄=22회를 언급했다. 특히 그가 “~줄로 믿습니다”를 말한 맥락을 살펴보면 종결의 강박을 확인할 수 있다. 이 표현이 수십 번 나오는데 LLM 인공지능 클로드는 “기능이 독특하다”고 평했다. 주장을 사실처럼 만들지 않고 ‘믿음의 영역’에 가둬버린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회복시키십니다”가 아니라 “회복시키실 줄로 믿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반증 불가능해지는 구조다. 안 되면 ‘믿음이 부족한 것’이 되고 되면 ‘믿음의 결과’인 것이다. 이 종결 어미 하나가 설교 전체를 검증 불가한 구조로 만들었다. 김용철의 스크립트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몇 가지 특징이 선명하게 보인다. ①설교 전체에서 대여섯 번 반복되는 ‘위기-해결’ 구조: 단일한 구조가 청중이 어디에 있든 ‘내 문제도 해당되겠다’는 느낌을 받도록 설계돼 있다. 문제는 이게 설득이 아닌 패턴 주입이라는 것이다. 부활이 왜 그 위기의 해답인지를 한 번도 연결하지 않는다. 그저 위기 다음에 부활이 나오니까 청중이 연결되는 것처럼 느끼게 할 뿐이다. ②예수가 부활했다(전제)-믿으면 너도 산다(결론)-아버지가 나았고, 쌀통에 쌀이 나왔고, 바울이 순교했다(근거): 이건 신학적 논증이라 할 수 없다. 귀납도 연역도 아니다. A가 B와 비슷하니까 A에서 일어난 일이 B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주장을 하려면 A와 B가 왜 비슷한지 먼저 보여야 한다. 그러나 김용철의 스크립트에서는 그 과정이 없다. 성경은 전부 결론을 지지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될 뿐이다. 로마서 6장, 고린도전서 15장, 요한복음 11장을 인용하지만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지, 그 문맥이 무엇인지, 원어가 무엇인지 단 하나의 설명도 없다. 성경은 감정 고조의 타이밍에 삽입되는 장치로 기능하는 것이다. 김용철의 스크립트는 오직 청중을 위기 속의 존재로 몰아넣는다. “삶이 무너졌나요” “건강에 어려움이 찾아왔나요” “절망 가운데 계십니까” 청중의 현재 상태를 결핍으로 규정하고 그 결핍의 해답을 설교자가 독점하는 구조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해답은 언제나 교회 안에 있다고 주장한다.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려면 예배당에 와야 하고, 믿음을 고백해야 하고, 설교자의 언어를 따라 해야 한다. 청중이 스스로 접근할 수 있는 경로가 없다. 설교자를 경유해야만 한다. 교인의 실명과 자산 규모를 비유하는 것도 이 맥락에서 봐야 한다. 단순한 농담이 아니라 설교자가 교인의 삶을 알고 있다는 과시를 의미한다. 알고 있는 사람이 권력을 가지는 이 섬뜩한 맥락을 어떻게 무시할 수 있는가. 새능력은 10년이 넘는 기간,

[한눈금] 18세 국민연금

10대 국민연금 임의가입자 순 출처: 국가데이터처 청년의 기피 대상인 국민연금을 자진해서 가입한다는 통계가 눈에 띄었다. 국민연금 10대 임의가입자가 2023년 4814명에서 올해 1월 1만2245명으로 2년 새 두 세 배 늘었다는 기사였다. 18~ 19세 인구 대비 10대 임의가입률이 높은 지역은 경기도 과천시(3.63%), 서울 강남구(2.88%), 종로구(2.45%), 동작·송파구(2.41%) 순이다. 전국 평균 1.28%의 2~3배다.

[헌사] 아장스망의 기쁨

2020년 01월 30일
미야자키 하야오의 1978년 作 『미래소년 코난』에서 코난과 몬스키가 마주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실은 코난의 현란한 총알 피하기 기술보다 눈길이 간 건, 적으로 등장한 몬스키였습니다. 유독 19화엔 몬스키가 악마가 되기 전의 기억을 상세히 묘사합니다. 기억하던 마지막 세상은 불바다가 되어버린 도시. 쓰러진 발발이를 깨우지만 이내 쓰나미는 아픈 기억과 함께 모든 것을 휩쓸고 맙니다. 극적으로 구조된 몬스키는 멸망한 인류를 다시 세우려 인더스트리아 행정국 차장이란 직함도 얻습니다. 알다시피 인더스트리아는 독재자 레프카에 의해 지배 체제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세계의 평화를 위해 지구를 정복해야 하고 정복하기 위해선 체제 순응적인 강한 인간, 강한 에너지로 강한 무기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만들어진 것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느라 끝내 인간성을 잃습니다. 1등 시민이 인간성을 잃은 역설은 19화 곳곳에 흩어져 몬스키의 정황을 설명합니다. 그런 몬스키 앞에 코난이 서 있습니다. 코난은 만들어진 세계엔 관심이 없습니다. “대단한 아이”라 칭찬했지만. 총알 피하기(?) 기술이 뛰어나서라기보다 사람들 생명을 지켜낸 그 용기에 감탄한 겁니다. 만들어진 것은 우리가 사는 이 땅에도 넘칩니다. 진정성도 그렇습니다. 유명해지기 위해선 진정성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파란 만장한 삶 뒤에 숨은 어른들의 욕망은 투표 조작을 낳았고 이젠 장애를 빙자해 방송까지 해대며 순연함을 파괴합니다. 강한 인간, 우월한 삶. 몬스키에겐 과거의 기억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들어진 것들을 위해 발발이와 화목했던 기억은 가치 없는 상품으로 전락합니다. 가치 없는 아이돌이 잊히듯, 정복에 도움 되지 않을 기억도 소거해 버립니다. 하이하바에서 마신 진짜 홍차와 벤치에 앉자 지저귀는 새, 그 앞에 멸종한 줄만 알았던 강아지 앞에 10년 전, 죽어버린 발발이와 사라진 기억을 되찾습니다. 목숨을 걸고 다가오는 쓰나미에 사람들과 대피하라 경고한 코난을 넋 놓고 바라보자 이제껏 자신이 쌓아온 강한 여성, 강한 인간상이 와르르 무너지고 맙니다. 몬스키의 무너진 자화상 속에서, 힌트를 얻었습니다. 패배라는 기억들이 아장스망으로 구성되어 비교 의식을 낳듯, 거꾸로 진짜 홍차와 발발이, 코난이란 순연한 기억들이 모여 희망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요. 그렇다면 과거를 기억한다는 건 단순히 기억의 재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고장 난 테이프 마냥 같은 부분을 반복하며 피해 서사 만드는데 초점을 맞춘다면 더 이상 새로운 관계,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지 못할 겁니다. 아사카 모리오의 1999년 作 『카드캡터 체리』 극장판 ‘마법의 카드’가 끝날 무렵 크레딧이 올라오며 주제가 ‘머나먼 이 거리에서’가 나옵니다. 한국어 번역과 달리, 일본어 원어는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나만이 간직한 소중한 추억 언제나 함께하리 영원히’. ‘私の力で進む果てしないこの道を(나의 힘으로 나아가요. 끝없는 이 길을)’ 기억은 나만이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만들어가기에 수많은 기억과 기록물이 끝없는 여정에 함께하기를 고대합니다. (1절) 大好きだったあの歌古いテープの中 小さなキズ色あせたタイトルにじんだ夜明け そしてまた今日が来る夏の風を連れて 慣れていく日々の片すみでふと孤独に出会う 즐겨 부르던 그때 그 노래 오래 된 테이프에서 빛바랜 표지, 귀에 익은 노래 속에 새벽은 밝아오네 또 다시 시작된 오늘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 맑개 갠 하루 어느 시간이면 문뜩 그리움에 젖는다 自転車でどこまでも 風を蹴る速さ忘すない 작은 자전거에 몸을 싣고서 부는 저 바람 맞으면 달리던 기억 la la la la歌おう空を見上げて la la la la It’s my life 歩いて行こう 私の力で進む果てしないこの道を 라─ 라─ 라─ 라─ 노래해 저 하늘 바라보며 라─ 라─ 라─ 라─ It’s my life

[에셀라 시론] 태초에 개발자가 doctype를 선언하시니라

2020년 01월 22일
드디어 신 죽음의 시대를 벗어나려는 걸까. 신의 명령에 주목한 시대를 신 죽음의 시대 이전이라 정의한다면. 신 명령이 어떠한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함을 인식한 시대를 신 죽음의 시대라 명명할 수 있다. 신 죽음의 시대는 주체성의 개념조차 존재할 수 없는 세계다. 세계라는 점에서 벗어날 수 있고 시대라는 점에서 언젠가는 마침표를 찍는다. 오랜 시간 슬픔과 절망 속에 신이 다시 살아나기를 희망했건만. 신의 부활은 요원하고 세상은 바쁘게도 신의 존재를 망각한 채 신 죽음을 가리킨다. 아직도 신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확인할 수 없는 시대에 살지만. 죽지 않았다고 잠정 결론을 내리고 신 죽음의 시대라는 3년의 터널을 벗어난다. 그래서 마련한 새로운 이야기가 ‘신 죽음의 시대 이후의 담론’이다. 신 죽음의 시대 이후의 담론은 더는 신학과 철학, 존재론이 중심을 차지하지 않는다. 이 말은 신학과 철학, 존재론이 독점한 시대의 끝에 마주했다는 의미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우스주의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개신교회 상황은 사회에서 바라보기 민망할 만큼 구식이다. 존재론이 지시하지 못하는 영역에 발을 담그고 스스로의 존재를 다 고민했다는 자만심도 부끄럽기 그지없다. 신학과 철학, 존재론에 대응해 신 죽음의 시대 이후 세계에 도달하자 신세계를 경험했다. 신 죽음의 시대 이후의 세계는 정답에 메이지 않아도 좋다. 옳고 그름은 대화를 통해 타협할 수 있고 협상할 수 있다. 그렇다고 정답이 없는 건 아니다. 무지개에 도라에몽 넣었다고 그게 올바른 과제가 아니듯. 신의 명령보다 우선시하는 것은 바로 대화와 소통이다. 자아-타자-세계라는 존재에 하느님이 낄 자리도 없다. 이곳은 신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려는 이원론적 세계관이 붕괴된 세계다. 디자이너가 된 현대인은 스스로가 자신의 세계를 개척하고 만들어낸다. 누구의 허락도 필요하지 않으며 다양한 세계 속에 서로의 존재를 이해하며 살아간다. “정답이 없다. 다만 나의 의견을 참고하라”는 조언뿐이다. 그 세계는 선악과 이후도 없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세우고 언약을 세운 후.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여 이 세계를 구한다는 흔하디흔한 내러티브가 없다는 말이다. 소박한 ‘캔버스’ ‘도큐먼트’ ‘페이지’라 이름 지은 백지장을 펼치면, 직접 이야기를 펼칠 수 있다. 여기에는 구식 내러티브도, 신식 내러티브도 없다. 표현할 수 있는 나만의, 우리들 이야기를 담아 낼 수 있다. 구원도, 십자가도, 칼빈도 없다. 있어야만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 세계엔 경이로움이 가득하다. 새 레이어에 같은 소녀를 복제하고 브러쉬를 가져다 댄 채 노란색을 불어 넣고 오퍼시티(opacity) 값을 낮춰주면 따뜻한 불빛이란 생명력이 탄생한다. 누군가는 인간이 신의 영역을 침범해 사람을 창조해냈다고 붉히지만,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은 복제된 사진을 보며 이를 작품이라 감탄하고, 그 속에서 따뜻함을 느끼며 공감한다. 파란 풀잎 바라보며 ‘주 하느님 지으신 모든 세계’ 짝지어 부른다 한들, 이 세계의 따뜻함과 비교하기 어렵다. 이 조차 세상적 삶이고, 신자유주의 병폐라는 고상한 용어를 쓴다한들 다가오는 신 죽음의 시대 이후의 세계를 부정하기 힘들다. 어차피 세상은 달라지고 바뀌어가기 때문이다. 마귀·사탄·귀신의 음모라 해도 소용없다. 신 죽음의 시대라는 강박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더욱 이 세계가 경이로 다가오기보다 마귀·사탄·귀신의 굴레에 씌운 세속적 세상이란 불쾌한 감정만 남을 것이다. 이제 신이 독점하던 신 죽음의 시대조차 끝이 났다. 신 죽음의 시대를 벗어난 이들은 블락캣(bracket)을 열어 웹 사이트를 구현한다. 포토샵을 열어 사진을 보정한다. 일러스트를 열어 미지의 세계를 그린다. 인디자인을 통해 기억과 미래를 담아낸다. 프리미어를 열어 과거를 새롭게 나열한다. 새로운 시대, 신 죽음의 시대 이후의 담론에 이름을 붙일 수 있다면. 나는 ‘개시(開示)의 세계’라 이름 짓고 싶다.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현실논단] 기억담론과 시간 정책

2020년 01월 22일
전체주의 시대가 끝이 났다. 드디어 종결된 전체주의 시대를 바라보며 새로운 시간 정책을 구사한다. ‘신(神) 죽음의 시대 이후의 담론(談論)’도 그렇다. 신 죽음의 시대에 구가하던 전체주의 담론의 끝을 선언하고 새로운 담론으로 새 시대를 맞이하자는 의미였다. 전체주의 시대 시간 정책은 해방을 기저에 둔 담론이었다. 해방을 위한 자유, 해방을 위한 신앙, 자유 투쟁도 이러한 연장선에 등장한다. 전체주의 시대의 자유란 해방 그 자체였고, 신자유주의 시간 정책과는 무관한 신 죽음의 시대 이전의 담론이었다. 전체주의 망령(亡靈)에서 벗어나려던 신 죽음의 시대는 어떤가. 비로소 해방을 위한 자유와 신앙, 자유 투쟁이란 현실을 깨닫고 해방 너머의 자유를 등장시켰다. 그 자유란 자기가 자기 자신일 수 있어야 할 자유. 신과의 교감을 전혀 의지 하지 않은 채 스스로가 행위 가능한 주체성을 의미했다. 자기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깨달으며 반성하는 끝없는 과정에서 스스로 삶의 가치를 돌이키고 찾아가는 주체성이다. 그럼에도 완전한 주체성으로 인식하기 어려운 이유는 간단하다. 주체성을 가지고 과거를 보기 때문이다. 신 죽음의 시대 이후의 담론은, 신 죽음의 시대를 바라보고 있다. 신 죽음의 시대 이전에 등장한 주체성은 신 죽음의 시대 연장선에 등장한 내러티브 인식과 함께 했다. 제2의 유일신은 아이돌이란 새 가면을 쓰고 제2의 오순절로 등장했다. 주체성을 언급하나 끌려 다니고, 존재를 물으나 자신의 존재는 사라진다. 시간 정책은 자기 착취적인 제2의 유일신 중심으로 펼쳐졌고 이내 찾아온 소진증후군과 우울증은 개인이 감당해야 할 몫으로 남고 말았다. 그사세(그들이 사는 세상)는 하나의 현상이다. 그사세를 탈출하자 다시금 신 죽음의 시대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구호로 등장한 자유와 해방은 신 죽음의 시대 이전에 등장한 구호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현재라는 관점에서 아이돌은, 비로소 현재를 볼 수 있는 창이 되었으나 오순절과 다르지 않다는 비판은 피하기 어려웠다. 다시금 과거로 돌아갔다는 비판이 이 지점에서 등장했다. 전체주의 종결 그 以後 時間 정책 여전히 과거 내러티브 神으로 부상 記憶을 넘을 수 있을까 언제부턴가 담론의 화두로 등장한 신 죽음의 시대 이후의 담론은 어느 때보다 ‘주체성’에 집중한다. 스스로가 스스로의 삶을 깨닫고 찾아가며, 찾아가리라는 믿음과 함께 ‘열심히’와 ‘최선을’ 다한 삶에 방점을 둔다. 하지만 공허한 ‘열심히’와 ‘최선을’ 사이에 낀 주체성은 앞으로도 세워지지 않을 테고, 존재론은 언제든 제3의 유일신에 자신의 자리를 내어줄 용의를 보이는 듯하다. 주체성을 가지고 과거를 기억하는 순간, 제3의 유일신은 완성되고 만다. 타자성이 배제 되었다며 주체성이 소외되던 현상은 전체주의 시대를 통틀어 언제나 존재했다. 유일신에 기대지 않는 주체성이 존재하기는 할까? 성숙에 덧댄 내러티브는 다시금 신으로 등장할 가능성을 남긴 채 사라지고 있다. 다양한 기억을 한데 모아 긍정도 부정도 의미하지 않을 기억 그 자체에 집중한 나머지 점과 점들이 모여 내러티브를 형성한다는 유혹 속에 내러티브를 제3의 유일신으로 받아들일지 모른다. 이전의 시간 정책은 언제든 과거를 지향하고 있었다. 성숙 내러티브는 현재와 미래로 향할 교두보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유익함을 부정하기 힘들다. 그러나 만들어진 존재, 만들어질 내러티브에 부푼 희망으로 자기 자신을 소외시킨 작금의 부정성은 부정하기 힘들다. 소외감을 견디지 못해 다시금 레트로토피아(retrotopia)로 향할 때면 과거는 재소환 된다. 그렇다면 단지 과거의 나열만이 과거의 아픔을 해소하는 방법일까? 과거의 인식을 기억이란 내러티브로 소환해야 할까? 과거의 인식을 기억이란 이름으로 기억하는 것만이 현재에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까? 과거를 과거대로 내버려둔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과거의 기억들을 소유한 이들과의 연대, 대화가 진정한 대화이자 미래를 향할 교두보일까? 비로소 전체주의 망령에서 벗어나 등장한 자아와 타자, 그리고 세계라는 성질을 바라보며 시간 정책은 여전히 과거를 지시하고 있다. 주체성은 오로지 현재를 인식할 때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가 모르지는 않는다. 주체성을 가진다 한들, 과거를 바꿀 순 없기 때문이다. 기억이 가져다 줄 내러티브라는 유혹이 제3의 오순절이자 새로운 신으로 등장하지 않기 위해서는 기억에 의존한 시간 정책을 직시하고 재고해야 한다. 과거의 특정한 사건이야 말로 현재에 어떠한 영향도 끼칠 수 없다는 교훈을 선언해야 한다.

만들어진 것에 우리는 주목한다

2020년 01월 20일
미아쟈키 하야오(宮崎駿)는 『미래소년 코난』에서 만들어진 것에 주목한다. 몬스키란 여성이 악마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다시금 인간의 순연함을 되찾는 과정을 그린 19화에서 만들어진 것의 실체를 깨달은 몬스키의 충격을 그려낸다. 하야오가 담아놓은 인간의 조건엔 아무래도 순연함이 존재하지 않을까. 순연함은 진정성과 궤를 달리 한다. 진정성도 만들어진 것에서 비롯할 수 있기에 만들어지지 않은, 존재 그

10년 전의 편지

2020년 01월 01일
그 때도 촌스럽다고 생각했었다. 아래아 한글에서 지원하는 기본 클립아트를 이용해 하나하나 붙였을 모습을 생각하니, 그 노고를 상상하며 그 때도 웃었던 것 같다. 벌리지 않은

[사진으로 보는 내일] 파란 하늘 갈매기는

2019년 12월 31일
날아가는 새를 바라보며 자유를 꿈꾼 적이 많았다. 자유롭게 어디든지 향할 수 있음을 부러워했다. 동경하는 대상이 되면 동경하는 대상처럼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일말의 희망을 안으며 살아간다. 동경하는 대상을 향해 나도 저렇게 살 수 있을까. 그래서 져가는 노을이 서글펐다. 오늘이 끝난다는 감정이 무겁게만 느껴졌다. 누구에게나 동일한 파란 하늘이지만, 어떤 이에게는 회색 빛 하늘이고, 중천에 뜬 해를 바라보며 하품이 질 푸른 하늘이자 누구에겐 저녁 노을이 지는 보랏빛 하늘일 것이다. 갈매기를 바라보니 파란 하늘 아래 져가는 노을이 보였다. 그리고 어디든 향할 수 있는 지금에 이르자, 더는 새를 떠올리지 않게 되었다. 새를 잊어버리며 살아가다 이제야 날아가는 새를 다시 보니, 알 것 같다. 새가 된다 해도 자유를 느끼지 못할 거라고. 오늘은 져가는 노을을 끝까지 바라보았다. 날아가던 갈매기가 부럽지 않았다. 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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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day소랑 2026년 6월 23일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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