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신 죽음의 시대를 벗어나려는 걸까. 신의 명령에 주목한 시대를 신 죽음의 시대 이전이라 정의한다면. 신 명령이 어떠한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함을 인식한 시대를 신 죽음의 시대라 명명할 수 있다. 신 죽음의 시대는 주체성의 개념조차 존재할 수 없는 세계다. 세계라는 점에서 벗어날 수 있고 시대라는 점에서 언젠가는 마침표를 찍는다.
오랜 시간 슬픔과 절망 속에 신이 다시 살아나기를 희망했건만. 신의 부활은 요원하고 세상은 바쁘게도 신의 존재를 망각한 채 신 죽음을 가리킨다. 아직도 신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확인할 수 없는 시대에 살지만. 죽지 않았다고 잠정 결론을 내리고 신 죽음의 시대라는 3년의 터널을 벗어난다. 그래서 마련한 새로운 이야기가 ‘신 죽음의 시대 이후의 담론’이다.
신 죽음의 시대 이후의 담론은 더는 신학과 철학, 존재론이 중심을 차지하지 않는다. 이 말은 신학과 철학, 존재론이 독점한 시대의 끝에 마주했다는 의미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우스주의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개신교회 상황은 사회에서 바라보기 민망할 만큼 구식이다. 존재론이 지시하지 못하는 영역에 발을 담그고 스스로의 존재를 다 고민했다는 자만심도 부끄럽기 그지없다. 신학과 철학, 존재론에 대응해 신 죽음의 시대 이후 세계에 도달하자 신세계를 경험했다.
신 죽음의 시대 이후의 세계는 정답에 메이지 않아도 좋다. 옳고 그름은 대화를 통해 타협할 수 있고 협상할 수 있다. 그렇다고 정답이 없는 건 아니다. 무지개에 도라에몽 넣었다고 그게 올바른 과제가 아니듯. 신의 명령보다 우선시하는 것은 바로 대화와 소통이다. 자아-타자-세계라는 존재에 하느님이 낄 자리도 없다. 이곳은 신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려는 이원론적 세계관이 붕괴된 세계다. 디자이너가 된 현대인은 스스로가 자신의 세계를 개척하고 만들어낸다. 누구의 허락도 필요하지 않으며 다양한 세계 속에 서로의 존재를 이해하며 살아간다. “정답이 없다. 다만 나의 의견을 참고하라”는 조언뿐이다.
그 세계는 선악과 이후도 없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세우고 언약을 세운 후.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여 이 세계를 구한다는 흔하디흔한 내러티브가 없다는 말이다. 소박한 ‘캔버스’ ‘도큐먼트’ ‘페이지’라 이름 지은 백지장을 펼치면, 직접 이야기를 펼칠 수 있다. 여기에는 구식 내러티브도, 신식 내러티브도 없다. 표현할 수 있는 나만의, 우리들 이야기를 담아 낼 수 있다. 구원도, 십자가도, 칼빈도 없다. 있어야만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 세계엔 경이로움이 가득하다. 새 레이어에 같은 소녀를 복제하고 브러쉬를 가져다 댄 채 노란색을 불어 넣고 오퍼시티(opacity) 값을 낮춰주면 따뜻한 불빛이란 생명력이 탄생한다. 누군가는 인간이 신의 영역을 침범해 사람을 창조해냈다고 붉히지만,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은 복제된 사진을 보며 이를 작품이라 감탄하고, 그 속에서 따뜻함을 느끼며 공감한다. 파란 풀잎 바라보며 ‘주 하느님 지으신 모든 세계’ 짝지어 부른다 한들, 이 세계의 따뜻함과 비교하기 어렵다.
이 조차 세상적 삶이고, 신자유주의 병폐라는 고상한 용어를 쓴다한들 다가오는 신 죽음의 시대 이후의 세계를 부정하기 힘들다. 어차피 세상은 달라지고 바뀌어가기 때문이다. 마귀·사탄·귀신의 음모라 해도 소용없다. 신 죽음의 시대라는 강박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더욱 이 세계가 경이로 다가오기보다 마귀·사탄·귀신의 굴레에 씌운 세속적 세상이란 불쾌한 감정만 남을 것이다. 이제 신이 독점하던 신 죽음의 시대조차 끝이 났다.
신 죽음의 시대를 벗어난 이들은 블락캣(bracket)을 열어 웹 사이트를 구현한다. 포토샵을 열어 사진을 보정한다. 일러스트를 열어 미지의 세계를 그린다. 인디자인을 통해 기억과 미래를 담아낸다. 프리미어를 열어 과거를 새롭게 나열한다. 새로운 시대, 신 죽음의 시대 이후의 담론에 이름을 붙일 수 있다면. 나는 ‘개시(開示)의 세계’라 이름 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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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명령이 어떠한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함을 인식한 시대를 신 죽음의 시대라 명명할 수 있다.
신 죽음의 시대는 주체성의 개념조차 존재할 수 없는 세계다. 세계라는 점에서 벗어날 수 있고 시대라는 점에서
언젠가는 마침표를 찍는다.</p>
<p>오랜 시간 슬픔과 절망 속에 신이 다시 살아나기를 희망했건만. 신의 부활은 요원하고 세상은 바쁘게도
신의 존재를 망각한 채 신 죽음을 가리킨다. 아직도 신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확인할 수 없는 시대에 살지만.
죽지 않았다고 잠정 결론을 내리고 신 죽음의 시대라는 3년의 터널을 벗어난다. 그래서 마련한 새로운 이야기가
‘신 죽음의 시대 이후의 담론’이다.</p>
<p>신 죽음의 시대 이후의 담론은 더는 신학과 철학, 존재론이 중심을 차지하지 않는다.
이 말은 신학과 철학, 존재론이 독점한 시대의 끝에 마주했다는 의미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우스주의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개신교회 상황은 사회에서 바라보기 민망할 만큼 구식이다. 존재론이 지시하지 못하는 영역에
발을 담그고 스스로의 존재를 다 고민했다는 자만심도 부끄럽기 그지없다.
신학과 철학, 존재론에 대응해 신 죽음의 시대 이후 세계에 도달하자 신세계를 경험했다.</p>
<p>신 죽음의 시대 이후의 세계는 정답에 메이지 않아도 좋다. 옳고 그름은 대화를 통해 타협할 수 있고
협상할 수 있다. 그렇다고 정답이 없는 건 아니다. 무지개에 도라에몽 넣었다고 그게 올바른 과제가 아니듯.
신의 명령보다 우선시하는 것은 바로 대화와 소통이다. 자아-타자-세계라는 존재에 하느님이 낄 자리도 없다.
이곳은 신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려는 이원론적 세계관이 붕괴된 세계다. 디자이너가 된 현대인은 스스로가
자신의 세계를 개척하고 만들어낸다. 누구의 허락도 필요하지 않으며 다양한 세계 속에 서로의 존재를
이해하며 살아간다. “정답이 없다. 다만 나의 의견을 참고하라”는 조언뿐이다.</p>
<p>그 세계는 선악과 이후도 없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세우고 언약을 세운 후.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여 이 세계를 구한다는 흔하디흔한 내러티브가 없다는 말이다. 소박한 ‘캔버스’
‘도큐먼트’ ‘페이지’라 이름 지은 백지장을 펼치면, 직접 이야기를 펼칠 수 있다. 여기에는 구식 내러티브도,
신식 내러티브도 없다. 표현할 수 있는 나만의, 우리들 이야기를 담아 낼 수 있다. 구원도, 십자가도, 칼빈도 없다.
있어야만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p>
<p>그 세계엔 경이로움이 가득하다. 새 레이어에 같은 소녀를 복제하고 브러쉬를 가져다 댄 채 노란색을
불어 넣고 오퍼시티(opacity) 값을 낮춰주면 따뜻한 불빛이란 생명력이 탄생한다.
누군가는 인간이 신의 영역을 침범해 사람을 창조해냈다고 붉히지만,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은
복제된 사진을 보며 이를 작품이라 감탄하고, 그 속에서 따뜻함을 느끼며 공감한다. 파란 풀잎 바라보며
‘주 하느님 지으신 모든 세계’ 짝지어 부른다 한들, 이 세계의 따뜻함과 비교하기 어렵다.</p>
<p>이 조차 세상적 삶이고, 신자유주의 병폐라는 고상한 용어를 쓴다한들 다가오는 신 죽음의 시대 이후의
세계를 부정하기 힘들다. 어차피 세상은 달라지고 바뀌어가기 때문이다. 마귀·사탄·귀신의 음모라 해도 소용없다.
신 죽음의 시대라는 강박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더욱 이 세계가 경이로 다가오기보다 마귀·사탄·귀신의 굴레에
씌운 세속적 세상이란 불쾌한 감정만 남을 것이다. 이제 신이 독점하던 신 죽음의 시대조차 끝이 났다.</p>
<p>신 죽음의 시대를 벗어난 이들은 블락캣(bracket)을 열어 웹 사이트를 구현한다. 포토샵을 열어 사진을 보정한다.
일러스트를 열어 미지의 세계를 그린다. 인디자인을 통해 기억과 미래를 담아낸다. 프리미어를 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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