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복음 신앙의 별이 지다

2021년 09월 14일
여의도 순복음교회 원로목사 靈山 조용기… 85세 일기로 逝去 여의도 순복음교회 조용기 원로목사가 85세 일기로 서거했다.(2021.09.14) 지난해 7월 뇌출혈로 쓰러져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서울대병원으로 옮겨 입원 치료를 받았다. 지난 2월 부인인 고(故) 김성혜 한세대 총장 장례식에도 참여하지 못했다. 조 목사는 2020년 7월 19일 ‘예수님과 강도’라는 제목으로 설교했으나 생방송이 아닌 녹화 방송으로 보이는 영상물로 설교를 대체한 바 있다. 안경을 쓰지 않은 채로 오른쪽 눈을 감고 설교하고서 뇌출혈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세계 최대 교회 여의도 순복음교회를 설립한 조용기 목사는 해방 이후 서울 서대문구 대조동에서 1958년 5월18일 5명의 교인으로 개척했다. 1961년 천막 성전에서 서대문성전으로, 1969년 여의도 부지에 지금의 여의도 순복음교회 건물을 세웠고 1979년 교인 10만명을 돌파해 기념 예배를 드렸다. 1984년 ‘순복음중앙교회’에서 ‘여의도 순복음교회’로 개명했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08년 담임목사 직에서 은퇴한 조 목사는 원로목사로 취임했고 2020년 7월까지 주일4부예배에서 설교를 진행했다. 제2대 담임목사로 취임한 이영훈 목사가 뒤를 잇고 있다. 조용기 목사는 평소에 복음성가를 작사했다. 아내

조용기 목사 서거에 한국교회 이어진 哀悼

2021년 09월 14일
여의도 순복음교회 조용기 원로목사 서거에 한국 보수교회는 침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한국교회총연합은 ‘고 조용기 목사님의 한국교회장에 즈음하여’ 성명을 통해 “산업화 시대, 실향민이 서울로 집중되는 변화의 시기에 십자가 복음을 통한 삶의 변화와 긍정적 삶의 가치를 가르치며 모든 국민에게 희망으로 세상을 이길 용기를 갖게 했다”며 “어려운 이웃을 돌보기 위해 NGO 선한사람들 설립과 헌혈 운동 등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며 한국교회를 위한 큰 족적을 남겼다”며 애도했다. 한국교회연합은 ‘조용기 목사님의 소천을 애도합니다’ 성명에서 “지금도 까랑까랑한 음성으로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3요한

[미망이의 신학 서재] 종교 다원주의: 기독교가 기독교이기를 포기할 수 있을까?

2021년 06월 15일
미망이의 평점가독성│★★★내용│★★☆소장가치│★☆☆보너스점수│☆☆☆총점│6점 평점 기준가독성① 한 번에 읽기 쉬움 3점② 두 번 읽어야 이해가 됨 2점③ 세 번 읽어야 이해할 수 있을 경우 1점④ 세 번 읽어도 어려운 경우 0점 내용① 독서 후 다른 곳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유용함 3점 (다른 곳에 적용 가능성)② 단순한 새로운 정보의 습득 2점 (다른 곳에 적용 가능성이 없음)③ 새로운 정보 없이 기존 정보를 재편집 했을 경우 1점④ 텍스트 오류 발견 시 0점 소장가치① 평생을 두고 함께 갈 텍스트 3점② ①의 경우에는 해당 되지 않지만 지인에게 한번은 추천할 텍스트 2점③ 도서관에서 빌려볼 만한 책 1점④ 안 봐도 그만인 텍스트 0점 보너스 점수저자에 대한 호의감이나 감동 외에 기타 점수 1점 다원주의와 종교철학을 크게 생각해 본 일은 없었다. 내가 속한 기독교에 대한 이해도 부족할뿐더러 다른 세계 종교의 이해도 부족해 스스로 종교철학 본문을 읽으려던 마음이 없었던 탓이다. 피할 수 없는 전공필수 과목, 피할 수 없는 과제는 어쩔 수 없이 본문을 열고서 저자가 인도하는 종교 다원주의 세계로 향하게 만들었다. 본문의 1부는 학자 별 종교 다원주의를 유형에 따라 분류한다. 아쉽다면 저자가 소개하는 대부분 학자들이 기독교적 배경에서 이야기를 하는 점 하나. 만일 ‘기독교 다원주의’라는 제목으로 구성했다면 문제없을 테지만 이 책의 이름은 분명히 ‘종교 다원주의 유형’이다. 저자가 소개하는 학자들 대부분 기독교, 혹은 영미권 학자들로(파니카 한 분 빼고) 종교 다원주의를 말하려면 다른 종교의 목소리에도 귀 기울여야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슬람, 불교, 힌두교, 도교, 유교 학자들 목소리는 전무했다. 언어란 사고에 대한 표현이며 사용에 따라 권위가 부여되기도, 부여되지 않기도 한다. 종교 다원주의는 분명히 종교라는 상위 개념을 말한다.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종교 다원주의가 기독교 하나님의 배경, 혹은 영미권 학자들 사이에서만 이야기가 이어진다면 기독교 상위 개념인 종교라는 위치에서 말하는 게 아닌 기독교 그 자체 안에서만 이야기함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본문의 종교 다원주의는 언어가 가진 개념을 완전히 표현하지 못하며 나아가 힉의 지적처럼 기독교 제국주의적 성격이 가능한 게 아닐까. ◇기독교이기를 포기한 기독교 다원주의? 본문을 읽으며 고민된 지점은 기독교 다원주의에 대한 내 입장이다. 저자는 기독교 다원주의를 오늘날 피할 수 없는 상황으로 묘사하며 다원주의를 주장하는 학자들과 근거를 싣는다. 역사적 예수 연구 세미나 결과로 예수의 배타적 발언은 케리그마(κῆρυγμα) 선포일 뿐 역사적 예수의 발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288) 다시 말해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는 케리그마 예수와 케리그마 붓다가 만나는 게 아니라 역사적 예수와 역사적 붓다가 만나야지, 케리그마 간의 만남은 어렵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기독교가 가진 배타성은 케리그마라는 선포에 불과하다. 타종교와 만나 차이를 인정하는 자세를 넘어 상호간 변혁해야 할 필요성은 저자가 다원주의를 주장하는 근거다.(292) 저자가 정의한 신학은 틸리히(Paul J. Tillich)처럼 “기독교 메시지를 새로운 상황과 상호 관련시키는 작업”(297-8)이기는 하지만 종교 간 계속되는 대화와 상호변혁은 우리가 흔히 ‘이단’이라 부르는 집단에 대한 인정을 넘어 그들을 통해 ‘상호 변혁’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일 수 있다. 기독교가 이단으로 명명한 집단과 연합이 가능한 셈이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무엇일까. 사전의 정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며 인류의 유일한 구원자로 믿는 종교’(지식백과)라고 말한다. 기독교는 니케아-칼케돈 신조를 가지고 천 오백년 간 이를 부정하는 이들과 싸워온 종교다. 기독교 분파에서 기독교 기본 원리는 오직 성경이고 이를 이룩하기 위해 수많은 이들이 피 흘릴 만큼 중요한 전통이자 규범이다. 문영옥 연구자는 논문(니케아, 칼케돈 신조로 본 종교다원주의 신관의 문제연구)에서 종교 다원주의를 공통 합의인 니케아-칼케돈 신조를 근거로 비판한다. “유대인들의 배척이나 로마의 박해, 희랍의 철학이나 논리 앞에서도 결코 굽히지 않는 신앙을 보임으로써 진리를 수호하였는 바 이렇게 바른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정리되어 공표된 것이 바로 니케아 신조와 칼케돈 신조다.”(60) 케리그마(Kerygma) 신약성서에서 선포라는 단어로 사용했으며 설교를 의미한다.(마태 3,1; 누가 4,18-19; 로마 10,14; 1고린 2,4) 설교자가 세상을 향해 좋은 소식,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전파하는 일이 케리그마다. (장동진, 2010) 진보 정당이 진보적이고, 보수 정당이 보수적일 때 당원들은 자신의 정당을 지지한다. 현실 정치에서 보듯 정당은 정당이 가진 강령과 색채를 잃을 때 몰매의 대상이 된다. 유권자가 각 정당의 강령을 보고 정당을 선택하듯 모든 사람은 종교의 자유와 선택의 권리를 가질 뿐, 하나로의 통합, 교리가 가진 정통과 역사를 부정하면서까지 변혁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 현재의 종교는 하나의 집단 체제이자 개인화된 종교로 전락했다. 피터버거(Berger)는 “오늘의 종교는 사회적 기능보다 개인적 기능에 머물렀다”고 지적했고, 루크만(Luckmann)도 “종교가 다원화 됐기에 종교는 사적인 일만을 담당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이원규, 종교사회학의 이해, 1997) 오늘의 종교가 자유로운 하나의 소비재가 되었고 집단성보다 개인의 안정과 평화를 위한 도구로 머물렀다. 종교가 굳이 자신이 가진 구호를 깨고 타종교와 대화를 넘어 변화를 추구하는 자세가 종교를 선택한(혹은 구매한) 이들에 대한 배신일 수 있고 그동안 지켜온 전통과 합의에 대한 도전이 될 수 있다. 따라서 기독교 다원주의에 대한 내 입장은 종교 간 상호 존중, 배려, 대화는 가능하지만 종교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변화해야 한다는 주장엔 의문을 던진다고 봐야 한다. 변화를 통해 종교는 종교가 가진 고유한 정체성을 잃을 수 있기에 대화와 만남에서 소극적일 수 있다는 점이 내 생각이다.

훈련을 빙자한 敎會 인분을 먹고만 敎人

2020년 07월 02일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소속 빛과진리교회(김명진)를 탈퇴한 피해자들이 교회에서 발생한 맹목적 신앙을 폭로했다. 사단법인 평화나무가 ‘신앙훈련한다며 대변먹이는 교회’ 제목으로 탈퇴 교인들의 폭로를 보도했다(2020. 4. 28). 훈련과정인

[그래서 안 된다는 거다] 모세가 오경을 안 썼다고 하더라도

2020년 01월 05일
카페 한 복판에 싸움이 벌어졌다. 아담과 하와는 실존 인물이 아니라고 따져댔고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았다며 날이 섰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그 구절로 오류를 가릴 순 없다고 받아쳤다.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지 믿음의 눈이 아닌 세상의 관점에서 읽으면 안 된다고 했다. 신천지도 성경으로 성경을 푸는데 걔들 논리하고 뭐가 다르냐고 반박했다. “걔들은 이단이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하는 거니까!” 오늘 처음 방문한 빽다방을 다시는 방문하지 못할 것 같다. 학부시절 4년을 함께한 대풍이가 물었다. “어쩌다 니 신앙이 이렇게 됐냐”고. 생각해보면 성경을 읽기 시작한 중학생 때부터 그래왔다. ‘하모니’란 정체불명 단체에서 성경을 묵상할 때도. 성서 본문의 배경과 인물, 사건 중심으로 저자가 무얼 말하려는지 의도를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풍이에게 의도는 아니라 해도 적어도 역사적 배경, 인물, 사건을 중심으로 읽어야 하지 않냐고 물었다. ◇오경, 모세가 쓰지 않았을지도 꽤 오랜 시간 오경을 모세가 집필한 책이라 믿었다. 나도, 인류도. 일단 성경에 그렇게 쓰여 있다(여호1,7-8; 1열왕2,3; 2열왕14,6; 23,21; 23,25; 2역대8,13; 34,14; 35,12; 에스3,2; 6,18; 느헤8,1;13,1). 예수님과 신약도 모세저작설을 전제했다(마태8,4; 19,8; 누가2,22; 16,29; 16,31; 요한5,46; 7,19-23; 사도3,22; 로마10,5; 10,19; 1고린9,9; 히브7,14). 필로와 요세푸스도, 탈무드조차 모세 임종 땐 여호수아가 펜을 들었을 거라고 추정했다. 종교개혁 시기에도 오경의 권위에 집중했지, 정작 누가 집필했는지 질문하지 않았다. 교회도 하지 못한 그 질문을 세상이 먼저 꺼냈다.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는 『리바이어던』에서 모세저작설에 의문을 제기하고 스피노자(Spinoza)는 1670년 신학-정치론(Tractatus Theologico-Politicus)에서 네 가지를 지적한다. ▶오경이 모세를 3인칭으로 기술한 점. ▶모세의 죽음을 기술 ▶후대의 이름을 사용 ▶야곱과 요셉 이야기의 비일관성. 서로 다른 두 자료로 결합했을 가능성을 언급한다. 홉스처럼 에스라가 오경을 최종적으로 편집했다고 주장했다. ◇문서가설-단편가설-보충가설 등장 프랑스 의사 장 아스트뤽(Astruc)이 용감하게 모세저작설을 ‘지난 세기의 질병’으로 묘사하며 지적한다. ‘문서가설’의 탄생이다. 아스트뤽은 인간 창조와 사라가 이방 왕에게 넘겨진 사건이 두 번이나 반복된 점에서 의문을 가졌다. 복음서처럼 두 개의 긴 자료와 짧은 자료, 총 네 개의 자료로 배열했다고 봤다. 후대에 이 자료를 조합하며 반복과 비일관성을 갖춘 현재 본문에 이르게 됐다는 주장이다. 가톨릭 신학자 게데스(Geddes)가 모세 시대나 그 이전에 유래한 단편들의 편집으로 반박했다. 단편 가설이었다. 따라서 완성 시기를

만화성경이 재미없는 이유

2019년 12월 21일
학창시절 ‘만화로 보는 그리스로마신화’와 ‘만화 삼국지’는 재밌게 읽었지만 만화 성경은 기억에 남질 않습니다. 왜 그런 걸까요? 만화 성경은 재미가 없기 때문이에요. 출판 중인 모든 만화 성경을 미망이가 읽어본 건 아니에요. 기껏해야 여덟 권을 읽었지만 이 여덟 권은 인기 없는 책이 아니라 포털 사이트 기준으로 가장 많이 팔린 책을 꼽아서 읽어 봤어요. 그리고 내린 결론은 하나였어요. ‘핵─노─잼’ ◇그림체가 나빠도 스토리가 있어야 재미있다 그림체가 시대에 뒤 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미망이는 ‘원피스’와 ‘나루토’를 즐겨봤는데요. 동시에 등장한 교육 만화가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였죠. 집에서는 ‘맹꽁이 서당’을, 책방에선 ‘떴다! 럭키맨’을 보며 살았어요. 그림체가 나빠도 만화를 이끄는 스토리가 몰입감을 가져다주면 독자는 읽는다고 생각해요. 성인이 되고서 ‘먼나라 이웃나라’를 보는 이유가 뭘까요? 그림이 유치해도 책 내용 때문 아닐까요? 하지만 만화 성경은 스토리에 집중하기 어려워요. 성경이란 방대한 이야기를 한두 권으로 압축하려다보니 자연스레 이어가기가 쉽지 않은 거죠. 노아의 홍수에서 노아에게 집중하다보면 노아 이야기가 끝나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모습에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구나!’ 깨닫는 순간 끝나버리죠. 마치 24부작 드라마를 1화부터 24화까지 보지 않고 24개 드라마를 1화씩만 보고 만 듯한 느낌이에요. 따라서 성경은 한두 권으로 요약하기 어려운 책이에요. ◇아무도 읽지 않는 만화 성경? 그렇다면 왜 대부분 만화 성경은 한두 권으로 구성할까요? 만화 성경을 연구하고 싶은 미망이도 2~3만원은 구매해도 10만원 만화 성경책은 구매하지 못해요. 만화 성경 소비자는 누구일까요? 어린이가 용돈을 모아 구매할까요? 아니겠죠. 교회 다니는 집사님과 권사님이 어린 자녀를 위해 구매하지 않을까요. 어린이도 학부모도 잘 읽지 않으니 서평이나 비평이 나오기 어렵죠. 이렇게 구매한 책들이 훗날 중고시장으로 나온다는 게 가슴 아픈 일이에요. 희한한 건 만화 성경이 계속해서 팔려요. 오래된 책은 절판이 아니라 계속 인쇄 중이고, 10년이 지나 개정판으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출판사마다 새로운 책을 내기도 하죠. 이상하지 않나요? 아무도 읽지 않는데 책이 팔리다니. ◇문서선교의 꿈을 가졌다면 그림체도 그림체지만 미망이는 여덟 권의 만화 성경을 읽다보니 번역서에서 표절(트레이스)한 책을 발견했어요. 어떤 만화 성경책은 상상력을 가미한 책도 있었고요. 무지개 색깔 배경을 넣기도 했고 글자가 틀에서 벗어난 경우도 있었어요. 만화 제목도 참신한 제목보다 ‘한눈에 보는’ ‘하루 만에 꿰뚫는’ ‘재미있는’ ‘재밌는’처럼 진부했죠. ‘○○ 만화 성경’처럼요. 교회 집사님과 권사님들께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직접 읽고 만화 성경을 선물해 주시기 바랍니다. 기독교 출판업 직원들에게도 말씀드리고 싶어요. 회사가 이윤을 창출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순리죠. 여러분이 먹고 살기 위한 업이 아니라 문서선교라면 어린이 책만큼은 이윤추구가 아닌 미래에 대한 가치투자로 생각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만화 성경은 어린이에게 성경을 바라보는 낯선 감정이 아니라 훗날 친구들이

[미망이의 신학 서재] JEDP를 완벽하게 구분할 수 있다고?

2019년 12월 07일
미망이의 평점가독성│★★★ 내용│★☆☆ 소장가치│☆☆☆ 보너스점수│☆☆☆ 총점│4점 평점 기준 가독성 ① 한 번에 읽기 쉬움 3점 ② 두 번 읽어야 이해가 됨 2점 ③ 세 번 읽어야 이해할 수 있을 경우 1점 ④ 세 번 읽어도 어려운 경우 0점 내용 ① 독서 후 다른 곳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유용함 3점 (다른 곳에 적용 가능성) ② 단순한 새로운 정보의 습득 2점 (다른 곳에 적용 가능성이 없음) ③ 새로운 정보 없이 기존 정보를 재편집 했을 경우 1점 ④ 텍스트 오류 발견 시 0점 소장가치 ① 평생을 두고 함께 갈 텍스트 3점 ② ①의 경우에는 해당 되지 않지만 지인에게 한번은 추천할 텍스트 2점 ③ 도서관에서 빌려볼 만한 책 1점 ④ 안 봐도 그만인 텍스트 0점 보너스 점수 저자에 대한 호의감이나 감동 외에 기타 점수 1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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