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망이의 신학 서재] “호오, 의외네요.” 非전공자가 쓴 성경 통독서라니…

2022년 06월 12일

“호오, 의외네요.”

만화 드래곤볼에서 악당 프리더는 예상 못할 만큼 강해진 주인공 일행에 놀란다. “호오 전투력이 상승하는군요.”

한 페이지 펼치자 엇비슷한 입버릇이 나왔다. 저자가 신학이나 종교학 전공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공자 아닌 사람이 성경 가르치는 책을 쓰다니. 그렇다고 전공자만 써야 한다는 편견에서 느낀 당혹감은 아니었다. 전공자도 어려워하는 성서에 관한 글쓰기를 일반 신자가 감당했다는 사실에서 의외라고 생각했다.

의외는 이어졌다.

본문 초반부터 다른 성경통독 서적에서 다루지 않는 성서 번역의 역사를 다룬다. 보통 신학을 모르는 일반 신자들은 성경에 과도한 신성을 부여한다. 따라서 신의 가르침과 의미를 성경이라는 문자로 가두어 또 다른 우상을 만드는 실수를 저지른다. 이 책은 다르다.

 “우리는 ‘신이 메시지를 준 대상이 고대인이었다’는 것을 반드시 인식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 읽을 때는 현대 뉴턴적 세계관으로 해석하고 분석하는데 정력을 소비하는 것보다 고대인들이 어떤 역사적 경험을 했으며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32쪽)

기독교인 다수가 가진 성경에 대한 생각에 도전장 내밀며 포문을 연 것이다. 신학교에선 저자의 주장은 너무도 당연하다.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저자가 집필했다니. 흥미롭고 재미있다.

미망이의 평점
가독성│★★★
내용│★
소장가치│★
보너스점수│☆☆
총점│7점

평점 기준
가독성
① 한 번에 읽기 쉬움 3점
② 두 번 읽어야 이해가 됨 2점
③ 세 번 읽어야 이해할 수 있을 경우 1점
④ 세 번 읽어도 어려운 경우 0점

내용
① 독서 후 다른 곳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유용함 3점 (다른 곳에 적용 가능성)
② 단순한 새로운 정보의 습득 2점 (다른 곳에 적용 가능성이 없음)
③ 새로운 정보 없이 기존 정보를 재편집 했을 경우 1점
④ 텍스트 오류 발견 시 0점

소장가치
① 평생을 두고 함께 갈 텍스트 3점
② ①의 경우에는 해당 되지 않지만 지인에게 한번은 추천할 텍스트 2점
③ 도서관에서 빌려볼 만한 책 1점
④ 안 봐도 그만인 텍스트 0점

보너스 점수
저자에 대한 호의감이나 감동 외에 기타 점수 1점

 


◇내용은 쉽지만 구약의 존재를 묻게 만드는 구성
“일반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학자들이 그간 써놓은 내용을 정리했다”(머리말)

전체적으로 괜찮은 입문서로 보인다. 중간사 몇몇 부분을 제외하면 성경 기본 지식이 없는 사람도 충분히 읽을 정도로 쉽다. 하지만 ‘좋은’이 아니라 ‘괜찮은’으로 평가한 이유는 두 가지 문제 때문이다.

중간사(Intertestamental period)
구약 선지자의 마지막 활동 시기에서 신약 성경 시기 배경 이전까지의 기간을 의미한다. 저자 남우현은 구약 예언이 종결된 기원전 433년부터 37년까지 기간으로 정리한다.(132쪽) 중간기 동안 페르시아 제국 점령-알렉산더 대왕-프톨레마이오스 왕조-셀레쿠오스 왕조-마카비 혁명-로마 점령이 벌어진다.

먼저, 구성이다. 전체적으로 다섯 개 대단원으로 구성한다. 첫 단원에서 창세기-왕정 전까지를 설명하며 두 번째 단락에서 왕정시대와 중간사를 다룬다. 세 번째 예수 그리스도 공생애를, 네 번째 초대교회 가르침을 다룬다. 마지막 다섯째 단원에선 교리를 벗어나 예수의 가르침대로 살아갈 것을 강조하는 이야기로 마무리 짓는다. 허나 이 같은 구성은 성서 내용을 제대로 요약하지 못한다.

저자는 성경의 초점을 “예수 사건”(18)으로 설명한다. 실제 구약 990쪽과 신약 322쪽 모두 더해 예수가 활약한 복음서는 전체 분량 1312쪽에 비해 140쪽 안팎이다. 성서 전체에서 10% 수준이다. 이 책은 전체 355쪽으로 이뤄진다. 성경 990쪽에 달하는 구약을 66쪽(36-112)으로, 성서에 나오지 않는 중간사는 30쪽,(113-141) 복음서는 약 110쪽(146-268, 293-308)으로 구성했다.

구성은 이 책 입지를 애매모호하게 만든다. 다른 성경 통독 서적에 비해 성경은 적게 다루며 중간사는 월등히 많이 다루기 때문이다. 반면 조병호 저자 ‘통성경 길라잡이’(현재 출간 된 개정판 이전 버전 기준)는 전체 380쪽에서 구약 180쪽, 중간사 20쪽 신약 130쪽 분량으로 구성한다. 필립 얀시 작 ‘맥잡는 성경 읽기’ 또한 전체 340쪽 분량으로 구약 180쪽, 신약 140쪽, 중간사는 다루지 않는다.

따라서 이 책은 평균 350쪽 구성인 다른 성경 통독 서적에 비해 중간사는 많고 구약은 월등히 적기에 성경 통독 서적으로는 애매모호하다고 보았다. 중간사를 다루는 부분은 다른 대안격 서적과 비교했을 때에도 경쟁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복음서라는 특정 사건 중심으로 요약하고 나머지는 부차 요소로 요약했음을 보여준다. 물론 신약성서의 주된 사건은 예수다. 성서 사건을 예수에게만 맞춘다면 우리에게 분량대로 조정된 성서도 필요할까? 이 질문은 한걸음 나아가 ‘예수의 사건만 중요하다면 복음서만 읽으면 되지 굳이 성경공부를 통해서 구약을 알 필요가 있을까?’ 묻게 만든다.

따라서 성서의 내용을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중심으로 압축하는 건 일장일단(一長一短)이다. 나는 이 문제가 장점보다 단점이 더 부각된다고 생각한다.

의외라고 생각한 이유
전공 바깥 신자가 연구한 책
과도한 신성 부여하기보다
고대 문헌으로 전제해 집필

불편한 두 가지 이유
①구속사로 편향된 분량
②바울 해석vs예수의 말

◇공감은 가지만 호불호가 강한
마지막 단원에서 저자는 성서 이야기가 아닌 자신의 주장을 적었다. 성화에 관한 내용이다.

“예수는 어떤 종교적 사실을 믿는 것이나 어떤 종교적인 형식이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물론 믿어야 할 것을 믿는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어떤 중요한 종교적 사실을 믿는다는 것이 구원을 보증하지는 않습니다. 예수의 동생이었으며 예루살렘 교회의 리더였던(사도15,13, 갈라2,9) 야고보는 귀신들도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다고 말하면서 ‘여러분이 아는 대로 사람은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지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야고2,24)’라고 말합니다.

이 부분에서 야고보는 ‘여러분이 아는 대로’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것은 초대교회 사람들은 믿음으로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믿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321)

저자에게 성서는 예수의 삶을 기록한 문헌이다. 저자는 인간의 주체적인 믿음이 아니라 삶의 모습으로 믿음을 보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달리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저자가 말한다.

“법도 상위법과 그 밑의 시행령이나 시행규칙과 같은 하위법이 있듯이 그리스도교의 구원론도 사도 바울의 편지를 그리스도인 예수의 가르침보다 상위에 올려놓고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론에 대한 교리도 예수의 가르침을 기본 틀로 하고 그 기본 틀 안에서 바울의 편지를 해석해야 합니다.

그러나 현재 개신교의 교리는(믿음으로 얻는 구원) 성경을 입체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내용을 문자적으로 동등하게 보아 해석했고 예수의 구원에 대한 가르침과 개신교의 교리가 대립하면, 예수의 가르침을 바울 패러다임으로 분해하고 바울 패러다임으로 짜 맞추었습니다.

이것은 성경 내용의 오류이기보다는 명백한 신학적 또는 해석 방법론적인 오류이며, 이런 방식으로 성경을 읽는 것을 가톨릭 신학자들은 ‘루터식 읽기’라 비난하고 있습니다. 또 신약성경 스스로(베드로후서) 바울 편지의 읽기 방법론을 직접 거론하며 무식한 사람은 바울의 편지를 잘못 해석해서 스스로 파멸에 이르고 말 것이라며, 성경이 읽는 방법론에 따라서 해석이 달라져 파멸 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습니다.”(317)

예수의 가르침이냐, 바울의 편지냐. 갈림길 앞에서 나는 저자가 옳다고 생각했다. 일반 신자에게 성서 읽기란 성서에 대한 지식 획득을 넘어 예수의 삶을 재현함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 때의 심판의 기준이 어떤 사상이나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며 이 기준으로 하나님을 사랑했느냐 아니면 박해했느냐로 구분 될 것이고 이것으로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형벌에 들어갈 것(마태25,31-46)이라고 성경은 답하고 있습니다.”(334-335)

물론 반대의견도 있을 것이다. 이들은 위 견해가 결과적으로 ‘행위구원’을 형성하게 하며, 초기 종교개혁 정신과 상충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또한 참된 신자면 자연스레 행위가 뒤따라오는 것이지, 결코 행위가 구원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 이들 의견이다.

◇하지만 예수를 믿는 건 예수의 삶을 따라 사는 삶이라고
따라서 이 책을 호불호 갈리는 애매모호한 그러면서도 꽤 괜찮은 책이라고 평가했다. 독자로서 예수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편집에는 불호(不好)를, 예수를 믿는 게 그 삶을 재현함이라는 저자 의견에 호(好)로써 동의했다.

모두가 나와 같지는 않을 것이다.

“예수는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어 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혀 있을 찾아 주었다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하고 아버지의 뜻을 행한 것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말했습니다.(마태25,34-40)

이 말은 장애인들을 보살핀다고 하면서 그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사람은 바로 예수님을 착취한 것이고, 나이든 노인의 노후자금을 등친 부흥사는 예수를 등친 것이고, 성직자의 지위를 이용해 여신도를 성적으로 농락한 목회자는 예수를 농락한 것이며, 종교를 이유로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경멸한 사람은 바로 예수를 박해한 것으로 심판 받는다는 의미입니다.”(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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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신명기 문헌 안에서 연좌제 허용·불허 왜 일까 수많은 사람 손 거친 결과 기독교라 부르는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는 구약과 신약을 경전으로 인정한다. 가톨릭은 더 나아가 제2경전이라 부르는 ‘토빗기’ ‘바룩서’ ‘집회서’ ‘마카베오서’ 등도 경전으로 받아들인다. 기본적으로 구약은 고대 이스라엘을 다룬다. 어려운 구약을 굳이 공부해야 하는지 의문이 든다. 명확하게 예수의 생애와 죽음, 부활, 재림을 말하는 신약만 공부하면 되지 않을까 묻는 이들도 있다. 신약성경 중 복음서를 읽다보면 각주에서 구약성경 주소를 볼 수 있다. 신약성경 구절이 구약과 연결된다는 의미다. 마태7,23에서 각주는 시편6,8을 가리킨다. 마태복음서에서 예수가 시편 구절을 인용해 설교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복음서 외에도 바울 서신이나 일반 서신에서도 구약 인용을 볼 수 있다. “마음이 한껏 부푼 교만한 자를 보아라. 그는 정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하박2,4) “하나님의 의가 복음 속에 나타납니다. 이 일은 오로지 믿음에 근거하여 일어납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한 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한 것과 같습니다.”(로마1,17) 하박국과 로마서 본문을 정독하다보면 바울 사도가 하박국 구절을 인용하며 재해석함을 알 수 있다. 하박국서 내용은 ‘왜 하나님을 믿는 백성은 힘들게 살며 믿지 않는 이방인은 승승장구하느냐’는 물음(1,2-4)에 야훼 하나님이 “정한 때가 올 때까지 기다려라”(2,3)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4)며 믿고 기다릴 것을 독려한다. 그러나 바울은 하박국의 의도대로 인용하지 않는다. 단순히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말하려함이 아니다. 유대인에게 향한 구원이 이방인에게까지 전해지면서 바울은 “복음이 부끄럽지 않다”는 맥락에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라” 권면한 것이다. 리처드 헤이스(Richard B Hays)는 ‘바울서신에 나타난 구약의 반향’에서 구약의 메시지를 문자 그대로 인용한 것이 아니라 바울이 살던 상황에 맞게 재해석한 것을 지적한다. 따라서 연구자 조주희도 논문(어거스틴, 칼빈과의 비교를 통한 조나단 에드워즈의 구속사적 성경해석에 관한 연구, 2015)에서 칼빈은 구약의 역할에 대해 구약성경을 해석하기 위해 신약성경을 지침서로 활용한 점을 가리켰다. 예수 그리스도 역할을 구약 본문으로 인용하는 해석 방법은 가톨릭이나 개신교나 비슷하다. 단지 가톨릭 교부 전통과 루터의 해석 방식, 칼빈의 해석 방식 등으로 세분화되어 차이를 만들 뿐이다. 개신교회는 이를 ‘구속사’라고 부른다. 유대교는 신약을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으므로 구속사 관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쯤 되면 신약은 구약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신약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구약도 필요하다. 신약과 구약을 떼어 한 경전만을 중요하게 생각해서도 곤란하다. 그래서 가톨릭과 일부 교회가 성경 읽을 때 구약과 복음서, 서신서 세 군데를 모두 읽는 게 아닐까. 누가 구속사적 해석 방식을 시작했는지 모른다. 성경 형성 과정을 보면 이해 가능하다. 구약은 얌니아 회의(기원후 90년)를 통해 확정되었으며 신약은 카르타고 공의회(기원후 397년)에 이르러서야 정경 과정을 마무리한다. 예수가 죽고 300년가량 지나서야 신약조차 정경으로 완성되어 지금에 이르렀고 구약은 말할 것 없이 원본을 확보할 시간과 여력도 턱없이 부족하다. 오늘의 성경으로 만들어지는 과정 속에서 사라지고 추가된 문헌 자리는 오늘 우리의 성경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없음’ 구절 속에는 성경 형성 과정이 응축되어 있다. 다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누구의 손에 의해 지금에 이르렀는지 정확히 알지 못할 뿐이다. 신명5,9에서는 연좌제를 허용하지만 신명24,16에는 연좌제를 부정하는 성경 내용상 불일치를 설명하지 못한다. 같은 신명기 문헌 속에서 불일치가 나오는 이유는 성경이 다양한 사람들의 손에 의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약성경으로 모든 신약성경을 재해석할 수는 없다. 마태2,23에서 나사렛 사람이라 부를 것이라 예언한 구약 문헌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잘한 성경 속 오류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도 성경을 완벽히 해석할 수 없다. 이쯤 되면 ‘구속사’ 용어 자체가 필요한지 의문이 든다. 가톨릭도 예수의 죽음, 부활, 재림으로 이어지는 예수로부터 시작될 해방을 믿는다. 자기가 해석한 성경이 더 구속사 관점이고, 더 예수 중심이라는 미사여구가 아닌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세상에는 완벽한 해석이란 없다.

순복음 신앙의 별이 지다

여의도 순복음교회 원로목사 靈山 조용기… 85세 일기로 逝去 여의도 순복음교회 조용기 원로목사가 85세 일기로 서거했다.(2021.09.14) 지난해 7월 뇌출혈로 쓰러져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서울대병원으로 옮겨 입원 치료를 받았다. 지난 2월 부인인 고(故) 김성혜 한세대 총장 장례식에도 참여하지 못했다. 조 목사는 2020년 7월 19일 ‘예수님과 강도’라는 제목으로 설교했으나 생방송이 아닌 녹화 방송으로 보이는 영상물로 설교를 대체한 바 있다. 안경을 쓰지 않은 채로 오른쪽 눈을 감고 설교하고서 뇌출혈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세계 최대 교회 여의도 순복음교회를 설립한 조용기 목사는 해방 이후 서울 서대문구 대조동에서 1958년 5월18일 5명의 교인으로 개척했다. 1961년 천막 성전에서 서대문성전으로, 1969년 여의도 부지에 지금의 여의도 순복음교회 건물을 세웠고 1979년 교인 10만명을 돌파해 기념 예배를 드렸다. 1984년 ‘순복음중앙교회’에서 ‘여의도 순복음교회’로 개명했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08년 담임목사 직에서 은퇴한 조 목사는 원로목사로 취임했고 2020년 7월까지 주일4부예배에서 설교를 진행했다. 제2대 담임목사로 취임한 이영훈 목사가 뒤를 잇고 있다. 조용기 목사는 평소에 복음성가를 작사했다. 아내

조용기 목사 서거에 한국교회 이어진 哀悼

여의도 순복음교회 조용기 원로목사 서거에 한국 보수교회는 침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한국교회총연합은 ‘고 조용기 목사님의 한국교회장에 즈음하여’ 성명을 통해 “산업화 시대, 실향민이 서울로 집중되는 변화의 시기에 십자가 복음을 통한 삶의 변화와 긍정적 삶의 가치를 가르치며 모든 국민에게 희망으로 세상을 이길 용기를 갖게 했다”며 “어려운 이웃을 돌보기 위해 NGO 선한사람들 설립과 헌혈 운동 등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며 한국교회를 위한 큰 족적을 남겼다”며 애도했다. 한국교회연합은 ‘조용기 목사님의 소천을 애도합니다’ 성명에서 “지금도 까랑까랑한 음성으로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3요한

[미망이의 신학 서재] 종교 다원주의: 기독교가 기독교이기를 포기할 수 있을까?

미망이의 평점가독성│★★★내용│★★☆소장가치│★☆☆보너스점수│☆☆☆총점│6점 평점 기준가독성① 한 번에 읽기 쉬움 3점② 두 번 읽어야 이해가 됨 2점③ 세 번 읽어야 이해할 수 있을 경우 1점④ 세 번 읽어도 어려운 경우 0점 내용① 독서 후 다른 곳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유용함 3점 (다른 곳에 적용 가능성)② 단순한 새로운 정보의 습득 2점 (다른 곳에 적용 가능성이 없음)③ 새로운 정보 없이 기존 정보를 재편집 했을 경우 1점④ 텍스트 오류 발견 시 0점 소장가치① 평생을 두고 함께 갈 텍스트 3점② ①의 경우에는 해당 되지 않지만 지인에게 한번은 추천할 텍스트 2점③ 도서관에서 빌려볼 만한 책 1점④ 안 봐도 그만인 텍스트 0점 보너스 점수저자에 대한 호의감이나 감동 외에 기타 점수 1점 다원주의와 종교철학을 크게 생각해 본 일은 없었다. 내가 속한 기독교에 대한 이해도 부족할뿐더러 다른 세계 종교의 이해도 부족해 스스로 종교철학 본문을 읽으려던 마음이 없었던 탓이다. 피할 수 없는 전공필수 과목, 피할 수 없는 과제는 어쩔 수 없이 본문을 열고서 저자가 인도하는 종교 다원주의 세계로 향하게 만들었다. 본문의 1부는 학자 별 종교 다원주의를 유형에 따라 분류한다. 아쉽다면 저자가 소개하는 대부분 학자들이 기독교적 배경에서 이야기를 하는 점 하나. 만일 ‘기독교 다원주의’라는 제목으로 구성했다면 문제없을 테지만 이 책의 이름은 분명히 ‘종교 다원주의 유형’이다. 저자가 소개하는 학자들 대부분 기독교, 혹은 영미권 학자들로(파니카 한 분 빼고) 종교 다원주의를 말하려면 다른 종교의 목소리에도 귀 기울여야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슬람, 불교, 힌두교, 도교, 유교 학자들 목소리는 전무했다. 언어란 사고에 대한 표현이며 사용에 따라 권위가 부여되기도, 부여되지 않기도 한다. 종교 다원주의는 분명히 종교라는 상위 개념을 말한다.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종교 다원주의가 기독교 하나님의 배경, 혹은 영미권 학자들 사이에서만 이야기가 이어진다면 기독교 상위 개념인 종교라는 위치에서 말하는 게 아닌 기독교 그 자체 안에서만 이야기함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본문의 종교 다원주의는 언어가 가진 개념을 완전히 표현하지 못하며 나아가 힉의 지적처럼 기독교 제국주의적 성격이 가능한 게 아닐까. ◇기독교이기를 포기한 기독교 다원주의? 본문을 읽으며 고민된 지점은 기독교 다원주의에 대한 내 입장이다. 저자는 기독교 다원주의를 오늘날 피할 수 없는 상황으로 묘사하며 다원주의를 주장하는 학자들과 근거를 싣는다. 역사적 예수 연구 세미나 결과로 예수의 배타적 발언은 케리그마(κῆρυγμα) 선포일 뿐 역사적 예수의 발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288) 다시 말해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는 케리그마 예수와 케리그마 붓다가 만나는 게 아니라 역사적 예수와 역사적 붓다가 만나야지, 케리그마 간의 만남은 어렵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기독교가 가진 배타성은 케리그마라는 선포에 불과하다. 타종교와 만나 차이를 인정하는 자세를 넘어 상호간 변혁해야 할 필요성은 저자가 다원주의를 주장하는 근거다.(292) 저자가 정의한 신학은 틸리히(Paul J. Tillich)처럼 “기독교 메시지를 새로운 상황과 상호 관련시키는 작업”(297-8)이기는 하지만 종교 간 계속되는 대화와 상호변혁은 우리가 흔히 ‘이단’이라 부르는 집단에 대한 인정을 넘어 그들을 통해 ‘상호 변혁’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일 수 있다. 기독교가 이단으로 명명한 집단과 연합이 가능한 셈이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무엇일까. 사전의 정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며 인류의 유일한 구원자로 믿는 종교’(지식백과)라고 말한다. 기독교는 니케아-칼케돈 신조를 가지고 천 오백년 간 이를 부정하는 이들과 싸워온 종교다. 기독교 분파에서 기독교 기본 원리는 오직 성경이고 이를 이룩하기 위해 수많은 이들이 피 흘릴 만큼 중요한 전통이자 규범이다. 문영옥 연구자는 논문(니케아, 칼케돈 신조로 본 종교다원주의 신관의 문제연구)에서 종교 다원주의를 공통 합의인 니케아-칼케돈 신조를 근거로 비판한다. “유대인들의 배척이나 로마의 박해, 희랍의 철학이나 논리 앞에서도 결코 굽히지 않는 신앙을 보임으로써 진리를 수호하였는 바 이렇게 바른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정리되어 공표된 것이 바로 니케아 신조와 칼케돈 신조다.”(60) 케리그마(Kerygma) 신약성서에서 선포라는 단어로 사용했으며 설교를 의미한다.(마태 3,1; 누가 4,18-19; 로마 10,14; 1고린 2,4) 설교자가 세상을 향해 좋은 소식,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전파하는 일이 케리그마다. (장동진, 2010) 진보 정당이 진보적이고, 보수 정당이 보수적일 때 당원들은 자신의 정당을 지지한다. 현실 정치에서 보듯 정당은 정당이 가진 강령과 색채를 잃을 때 몰매의 대상이 된다. 유권자가 각 정당의 강령을 보고 정당을 선택하듯 모든 사람은 종교의 자유와 선택의 권리를 가질 뿐, 하나로의 통합, 교리가 가진 정통과 역사를 부정하면서까지 변혁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 현재의 종교는 하나의 집단 체제이자 개인화된 종교로 전락했다. 피터버거(Berger)는 “오늘의 종교는 사회적 기능보다 개인적 기능에 머물렀다”고 지적했고, 루크만(Luckmann)도 “종교가 다원화 됐기에 종교는 사적인 일만을 담당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이원규, 종교사회학의 이해, 1997) 오늘의 종교가 자유로운 하나의 소비재가 되었고 집단성보다 개인의 안정과 평화를 위한 도구로 머물렀다. 종교가 굳이 자신이 가진 구호를 깨고 타종교와 대화를 넘어 변화를 추구하는 자세가 종교를 선택한(혹은 구매한) 이들에 대한 배신일 수 있고 그동안 지켜온 전통과 합의에 대한 도전이 될 수 있다. 따라서 기독교 다원주의에 대한 내 입장은 종교 간 상호 존중, 배려, 대화는 가능하지만 종교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변화해야 한다는 주장엔 의문을 던진다고 봐야 한다. 변화를 통해 종교는 종교가 가진 고유한 정체성을 잃을 수 있기에 대화와 만남에서 소극적일 수 있다는 점이 내 생각이다.
Today소랑 2026년 6월 20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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