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성의 창

[시대성의 창] 자기에게 주는 벌 그만 받아요

브라우저가 오디오를 지원하지 않습니다. 만민중앙교회가 지쳤나보다. 본지에 실린 글을 상대로 게시중단요청을 그만두었기 때문이다. 명성교회와 인터콥, 신천지 같은 집단이 기사와 칼럼에 대고 게시중단을 요청하기 일쑤다. 당혹감은 무덤덤해졌다. 지난 12월 명성교회를 끝으로 특정 교회 문제점을 언급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지상파 방송국이 누구보다 발 빠르게 취재하기 때문이다. 문제 많은 교회를 대하는 사회 시선도 바뀌었다. 피해자 중심으로 생각해 더 나은 사회를 걱정하는 자세가 예전과 달라진 덕이다. 달라지지 않은 건 어머니의 친구였다. 풋풋한 청년 시절 만민중앙교회를 다니던 어머니 친구 이야기 말이다. 어머니는 친구 이야기를 자주했다. 걱정 때문이다. 자칭 목자라 불리던 이재록 씨가 구속되고도 목자의 권능을 강하게 믿었다. 구속 이후에도 변함없는 신앙과 흔들리지 않는 교회 분위기도 전해 들었다. 이재록은 상고심에서도 패소한지 오래다. 구로디지털산업단지 예배당이 무너져서도 다니고 있을지 궁금했다. 어머니는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린다고 전했다.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이쯤이면 현실을 마주하고 충격도 받아야 하거늘 달라진 것 하나 없는 신앙심이 놀라웠다.

[시대성의 창] 난 여전히 ISTJ일 뿐이라고

브라우저가 오디오를 지원하지 않습니다. 다시 버뮤다순복음교회가 문 열었다.(2022.09.03) 한국교회 유일 메타버스 교회가 2016년 8월 23일, 6년 지난 그 모습 그대로 게임 퍼피레드에 복원된 것이다. 감회가 새롭다는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웠다. 다시금 기억을 마주하자 감격했다. 흠이라면 접속조차 불가했던 정식 출시 첫 날의 퍼피레드 로그인 오류, PC버전과 다른 조작감, 생각보다 모자란 그래픽 퀄리티는 때론 짜증을 불러왔다. 그렇지만 어두운 예배당을 따뜻한 조명으로 비추자 한줄기 빛처럼 감동이 밀려왔다. 교회와 퍼피레드 복원은 기억이 오브제로 되살아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오로지 바뀐 것은 우리의 몸, 성숙한 정신임을 말해주는 듯했다. 한 신학자는 20년 전 교회의 ‘역할 독점’을 비판했다. 교회는 중세시대 이후 한 번도 자신의 절대적 역할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역할은 신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구원의 대리자였다. 구원은 오로지 교회를 거쳐야만 이룰 수 있기에 천년 넘는 시간 독점해 왔다. 버뮤다순복음교회는 달랐다. 종교를 초월해 모든 이들을 반겼다. 교회가 처음이어도 괜찮다. ‘추천’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말 그대로 누구든지 환영하는 공간으로 자리했다.

[시대성의 창] 4년 만에 다시 ‘ㅅ’ 교회로 돌아간 이유

2024년 09월 23일
브라우저가 오디오를 지원하지 않습니다. 담임목사가 설교 중 고함을 질렀다. “전도해야 합니다! 대상자의 이름을 적으세요! 만일 이름조차 적어내지 못한다면 여러분의 신앙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목사는 과거에도 이런 극단적인 주장을 펴곤 했다. 나는 어이없는 수준의 설교에 분노했고, 6년간 몸담던 ㅅ교회를 떠났다. 그러나 4년 만에 돌아갔다. 떠돌던 3곳의 교회는 모두 비슷했지만, 직전의 교회는 더 심각했다. ㅅ교회의 목사가 양반으로 보일 정도였다. 직전의 교회는 1950년 무렵에 개척한 작은 교회였다. 코로나19가 발생한 때였다. 어느 날 담임목사는 설교 중 방역 때문에 시청 직원과 싸운 이야기, 방역 지침의 허점과 본인이 고안한 꼼수를 설파했다. 그러다 이어진 망언. “코로나19 백신을 맞으면 나노 칩이 혈관을 타고 뇌에 도착합니다. 그러다 나쁜 사람이 5G 주파수로 나노 칩을 조종해 백신 맞은 사람을 조종할 겁니다. 그 백신이 바로 666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헛소리였다. 목사는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목사의 강요는 나의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결국 나는 설교 도중 목사에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가족을 데리고 교회를 떠나고 만 것이다. 나는 ‘이게 정말 기독교 신앙인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진단한 한국교회는 이랬다. 몇몇 목사들은 자신의 욕망, 다시 말해 교인 수 증가와 권력 확대를 위해 문자적으로 자기 입맛에 맞는 성경 구절을 찾아와 교인들을 협박한다. 이때 목사는 ‘자신은 단지 성경을 인용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 이 협박을 들은 교인들은 성경을 모르기 때문에 목사의 지시에 따르게 된다. 안타깝게도 교인들은 이것을 ‘성경이 말하는 순종’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타개할 방법은 스스로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자세였다. 성경을 바로 알면 해결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다짜고짜 쉬운 성경을

[시대성의 창] 예수가 다시는 부활하지 않았어도

2022년 04월 18일
브라우저가 오디오를 지원하지 않습니다. 향린교회가 재건축조합으로부터 예배당 침탈을 당했을 때의 일이다. 교인들은 향린교회 바깥 어두운 골목길에서 초라해 보이는 고난주간을 보내야 했다. 찬송가 147장 ‘거기 너 있었는가’ 힘없이 부르는 침참속 교인들 풍경이 낯설었다. 낯선 것은 예배뿐만이 아니었다. 기도하는 신자 분 메시지가 가슴에 와 닿았다. “십자가도 없이 싸늘하게 식은 저 예배당 안에서 홀로 눈물의 기도를 드리고” 있을 “그 예수를 우리가 구원해야 할 때”라고 규명한 그분은 예수의 힘없는 무력한 광경을 목도했다. 기독교인에게 신의 전능성은 ‘무소부재’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무엇이든 구해낼 수 있는, 무엇이든 가능한, 미래의 일들까지도 감찰하고 영향력을 발휘하는. 그러나 현대인에게 기독교적 신은 허상으로 보일 뿐이다. 전쟁을 막지 못했고, 죽어가는 사람들조차 구하지 못했으며, 고통 속에 신음하는 노동자와 절망으로 스러지는 노인들의 고의적 자해를 막지도, 없애지도 못한다. 한국 개신교회에서 유행처럼 번진 현대 찬송 ‘nothing is impossible’은 말 그대로 신은 인간에게 성도 무너뜨리고 눈먼 자도 눈 뜨게 할 것 같은 착각을 심어준다. 새능력교회도 그렇다. 이름 자체에서 느끼는 것처럼 무능력한 기독교인을 일깨울 담임목사의 욕망 그 자체를 담았다. 이들이 믿는 모든 것 가능한 신 개념과 이들이 살아가는 무능력한 신이 다스리는 지구와 충돌하며 벌어진 불일치는 인지부조화로 이어진다. 전 교인을 상대로 저지른 노동 착취와 “회개하지 않아서” “예배 생활하지 않아서” 행위 중독을 신앙 덕목처럼 설파하는 현상으로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복음서에서 예수는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예수는 모든 이들이 바랬던 로마의 해방을 이뤄내지도, 제자들이 바라던 인사도, 손목에 묶인 포승줄조차 풀어내지 못했다.

[시대성의 창] 자격 없는 것들

2021년 07월 12일
남성과 여성의 신음으로 이루어진 ‘게로게리게게게(ゲロゲリゲゲゲ)’ 두 번째 정규 앨범은 기미가요 전주와 히로히토 일왕의 근엄한 표지에서 황당함을 더한다. 이름부터 ゲロ(게로)=구토, ゲリ(게리)=설사를 뜻한다. 두 개 트랙으로 나눠진 이 곡 쇼와(昭和)는 18분59초, 19분8초 내내 신음소리와 오토바이나 숨소리, 여성에게 상태를 묻는 남성과 갈 것 같다는 여성의 목소리가 중간에 삽입되어 이질감을 표현한다. 그 외에 노래는 볼일 보는 소리, 소리 지르거나 치찰음을 섞어 노랜지 소음인지 정신을 혼미하게 만든다. 히로히토가 사망하고 발표한 앨범이니 만큼 전체주의에 대항해 설사와 구토로 우스꽝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려는 목적인지는 모르지만 히로히토의 근엄함이 주는 실소만은 분명하다. 교회와 섹스라는 단어도 이질감을 넘어 황당한 실소를 던진다. 두세 달 사이 두 명의 목사가 성범죄 혐의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대전과 삼척의 두 교회 목사 이야기다. 여성 교역자 신체를 만지고 뽀뽀까지 한 것도 모자라 성 접촉 상황을 보고하라 지시했다. 해명이 웃긴다. 남성에게도 차별 없이 대한다는 해명이다. 목양실에서 여 신도와 부적절한 관계를 가진 목사는 잘못과 해명도 없이 부활절 헌금과 함께 잠적했다. 두 사람 모두 교회 홈페이지와 소셜미디어 계정을 감춰버렸다. 제왕적 목사 권력, 여성 향한 그루밍성범죄와 돈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조건이다. 유튜브에는 이곳저곳 강사로 서서 내가 교회를 이렇게 세웠고 하나님의 일을 했다던 성장론만 남아 메아리로 증언한다. 교회만큼 섹스를 외면하는 공간이 또 있을까. 교회서만 볼 수 있는 이 황당한 실소는 성(聖)과 속(俗) 이분법으로 이질감을 안겨준다. 하고는 싶지만 하지는 말아야 할, 마음에는 들지만 외면해야 할. 사랑에는 국경과 나이도 없다지만 신과의 관계 속 터부(taboo)는 도덕과 윤리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교회는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의 섹스를 향해서 거룩과 경건을 파괴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생각보다 교회 내 성범죄는 히로히토와 신음소리 만큼 이질적인 수준이다. 교회 내 성범죄는 현재 진행형이다. 당장 포털 뉴스에 최신순으로 ‘목사 성범죄’를 검색해보시라. 하루 전 기사가 쏟아진다. 그리고 익숙한 단어가 보인다. ‘그루밍 성범죄’ 지난 2019년 JTBC 취재 결과 2005년부터 2018년까지 법원에서 유죄판결 받은 아동 청소년 대상 성범죄 목사만 79명으로 집계됐다. 면직만 5명. 목사직이 박탈되어야 함에도 당당하게 원로목사까지 된 사례도 3건이나 집계됐다. 앞에선 거룩한 척하고 뒤에선 음란한 목사들 바울은 그리 말하겠지 “가만두지 않겠다”고 기독교반성폭력센터 2018년 상담 통계에서 성별로 분류한 자료를 보면 황당함은 분노로 바뀐다. 미성년 여성 피해자만 21건으로 전체에서 25%를 차지한다. 네 명 중 한 명이 미성년 피해자다. 성범죄자 131명 중 목사만 79명인 자료도 황당한데 그 중 21명은 목회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범죄를 저지른 자격 없는 목사들이 지금도 자신의 이름을 바꾸거나 교회를 옮겨 활동한다. 이 기관 조사에서 가해자 직분만 목회자 61%로 전체에서 55건에 달했다. 성서는 치리(治理)를 다룬다. 이단은 멀리하고 교회에 반하는 사람들을 바로 잡아야 한다. 그러나 교회는 목사 면직에 미온적 태도를 취한다. 목사직을 박탈한다 하더라도 피해자 치유에는 여러 박자가 늦는다. 교회 내 여성혐오 발언이 여전한데, 어떻게 피해자들을 보듬을 수 있을까. 여러 여학생과 부적절한 관계를 가진 인천의 모 목사는 그게 사랑이었다고 말한다. 기가 막힌다. 교회는 교회법이 우선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당신들은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허가 받은 교단에 불과하다. 정교분리 원칙을 말하기 전에 자격 없는 목사들부터 쳐라. 여기는 교회보다 헌법이 위인 대한민국이다. 성경대로 하겠다고? 바울은 부정과 음란, 방탕을 회개하지 않은 자들을 향해 “그런 사람들을 그냥 두지 않겠다”(2고린 13,2)고 말했다. 그러나 교회는 교회 내 성소수자들을 탄압하고 축복 기도한 이동환 목사를 가만두지 않았다. 임보라 목사를 이단으로 규정한 황당한 교단도 있었다. 전통적인 가부장제 사회에서 1인 가구로 변모하는 현대 사회에 혼전순결을 강조하는 것도 우습지만, 목사들부터 경건하지 않으면서 섹스하면 죄라고 가르치는 광경이 히로히토 일왕의 사진 앞에 신음소리를 변주한 게로게리게게게 앨범같이 황당한 웃음만 나온다. 청소년 단체가 자기 단체라고 지껄인 그 인간은 무얼하며 살고 있을까. 언론에 나온 성폭력은 합의된 관계였다며 또 강사 노릇 하겠지. 목사 면직 3년만 지나도 자동 복직 될 테니. 대단하다. K-교회!

[시대성의 창] 교회 바깥 나서면서 시작되는 것

2021년 03월 31일
채플하기 싫어서 대강당을 나가려던 차에 동급생과 눈이 맞았다. 점심을 먹자기에 식사했고 이대로 헤어지기 아쉬워 대학원 카페에서 2차를 보냈다. 세 시간 이어진 대화는 지난 번 이야기의 연장선이었다. 신학교에 입학해도 무얼 해야 할지 모른다며 한 숨 지었다. 기나긴 대화는 하나님이 어떻게 당신을 이끌어 가셨는지 재차 확인하던 자리였다. 그러나 그 뒤에 찾아오는 빈 공간, 다음 인생사 이야기를 어떻게 써내려가야 할지를 모르는 막막함이 느껴졌다. 촉. 그 때의 촉은 빗나가질 않았다. 미소는 밝지 않았다. 일찍이 자퇴한 친구가 있다고 말했다. 사진까지 보여주며 소개시켜 주겠다고 말했지만 한사코 거절했다. 영적인 세계에 몰두한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은 내 앞에 앉아서 곱상하게 웃기만 하던 이 자매는 인터콥 회원이다. 7년 전에도 인터콥이 어떤 단체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이들 회원을 강하게 붙잡던 거대한 이야기 하나. 복음의 서진(西進)이 이스라엘에 이르면 예수가 다시금 재림할 거라는 강한 믿음체계 신봉하던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이 단체 인터콥 창시자 최바울은 5년 전 목회자 국제선교 컨퍼런스에서 구속사적 신학으로 알려진 신약학자 헤르만 리델보스를 인용했다. “사도바울 관점은 구속 역사 그 자체의 사실이 중심이다. 그것은 ‘구원의 서정’이 아니라 ‘구속의 역사’다.” 구원에는 순서가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이끌어갈 보이지 않는 손에 주목한다. 백 투 예루살렘(back to jerusalem) 운동도 하나님이 만들어가는 마지막 시대, 종말의 때에 인터콥과 대한민국을 사용해 하나님 나라를 완성한다는 믿음체계다. 따라서 통치자가 나타나 세계를 통합해 사람들을 노예로 만든다던 80년대 세대주의 종말론을 재인용한다. 우리 손으로 마지막 시대를 만들어가자는 거창한 구호쯤으로 보일 테지만. 거대한 하나님 나라 비전에 이끌려 기꺼이 헌신하는 착취 구조를 들여다보거든 눈에 띄는 ‘빈 공간’이 거대 담론으로 가득 차 있는 모순이 보인다. 인터콥서 벗어난 심정 누구보다 이해하니까 신앙에서 벗어나 함께 모름의 바다 유랑하자 따라서 하나님 나라 운동에 이끌림을 받았다는 선민사상과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다르다던 우월감은 현상에 불과하다. 너는 꿈이 있니? 그런 시시한 세상의 꿈? 열강으로 가로 막힌 가련한 이 나라 대한민국 통하여 마지막 때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헌신이 필요해 같은 꿈꾸는 자의 담대한 포부는 성경의 특정한 구절을 견지망월(見指忘月)하게 만든다. 압도하는 성령의 역사에 동참하면 지식쯤은 중요하지 않다. 오직 기도와 복음 전파에 힘쓰자는 구호로 한 사람 한 사람 인터콥을 움직이는 부품으로 전락한다. 지금도 바벨탑 세우려던 ‘벽돌’에서 세상지식을 초등학문으로 비유해 하나님을 대적하는 기술쯤으로 묘사한 최바울의 설교가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인터콥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낯설지 않다. 40년 전 오정현이 상품으로 내다팔던 무브먼트였다. 프랑스 철학자 프랑수아 줄리앙은 탈합치(De-coincidence) 개념을 꺼내들었다. 미완성 같은 피카소 작품에서 가장자리를 주목했다. 칠하지 않은 그림과 캔버스가 합치(coincidence)하지 않고 이탈한(de) 어긋남을 발견했다. 사람들은 학교에서 교회에서 무리에서 집단에서 제도권에서 이탈하면 지옥 간다고 겁박한다. 네 마음의 빈 공간을 내가 우리가 만든 별이 끌어당겨야 한다고 말한다. 선한 의도 안에 숨겨둔 악마의 미소로. 내 앞 자매의 미소를 관찰하자 곧바로 감성주의(感性主義)와 척을 두었다. 기독교 신앙을 벗어나기까지 꽤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지옥에도 갈 수 있다는 불안감 말이다. 사람을 물건처럼 부려먹는 허황된 별. 그 별 좇아 자신의 인생을 갈아 넣는 비정상 구조. 그 때의 촉은 지금도 발동한다. 누군가 신념에 차 별을 말하면 믿지를 않는다. 그 별은 머지않아 신념과 함께 빛바랜 청사진처럼 타버리기 때문이다. 모름의 바다로 이탈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변해가고 모든 전통이 무너지는 시대라서 이해한다. 사람이기 때문에 두려워할 수 있고, 불안할 수

[시대성의 창] 가해자 文法

2021년 03월 01일
모든 사람을 두 부류로 분류할 수는 없다. 인간의 다양한 결을 관찰하다 마주치는 아름다움이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 내 편과 네 편으로 구분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타인은 비정상이고, 나는 정상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문법을 발견했고, 이 문법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관찰했다. 고등학교 1학년 입학하고 실장으로 자처한 녀석도 같았다. 나보다 훤칠한 키에 잘 생긴 미모가 누가 봐도 호감을 주었고 선생님의 신임을 받기에 적절하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나와 사이가 틀어졌다. 실장이란 녀석이 특정 과목 선생님을 왕따 시키려고 모의하질 않나, 철없는 친구들의 주먹 다툼에도 아랑곳 않으며 말리지도 않으니. 그 녀석의 인간적 평가를 저급하다고 평가한 마지막 이유는 다름 아닌 내 사랑하는 친구를 어렵고 힘든 지경에 밀어 넣은 사건들 때문이다. 하나의 날(日)도 아니라 오랜 시간 내 친구를 격투기 경기장으로 밀어 넣고서도 침묵으로 방조한 역겨움을 보고 가장 정상적인 인간이야 말로 가장 역겨울 수 있다는 교훈을 알아차렸다. 석식 다 먹을 시점에 또 다시 내 친구의 말꼬리를 잡으며 괴롭혀대기에 나서서 사실은 이게 아니고 저게 진실이라 말하기에 이르렀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네 녀석이 무엇이관대 끼어드느냐.’ 침묵으로 일관하자던 선동에도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그 날 보충 1교시 수업에서 유일하게 대답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수업에 성실히 참여하던 사람은 나뿐이었다. 나 하나 때문에 친구들의 흥미로운 재밌거리가 사라졌다. 그 광경, 실장이 주도해 반 아이들이 싫어하던 영어 선생 왕따 시키려던 계획이 물거품으로 돌아갔다는 분위기가 느껴지자 웃음이 나왔다. 즐거웠다. 내 뒤에는 내가 믿는 신념, 야훼 하느님이 자리했다. 괴롭힘 당하던 친구와 학교 바깥에서 놀고, 공부했다. 그 친구를 제외하면 반 아이들과 딱히 소통하지 않았다. 성경 보기에 바빴기 때문이다. 여자 아이돌에 관심조차 없었던 시절이다.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옳은 일은 옳다고 그른 일은 그르다 말할 줄 아는 사람이 멋있는 거라고 철저한 외부인 자리에 서자, 누구와도 이해관계에 얽히지 않은 자유인의 해방감을 만끽했다. 외롭지 않았다. 늘 내 할 일에 최선을 다했고, 해야 할 일에 집중할 생각으로 매일매일 가슴이 설렜다. 바람이 부는 하늘 구름 바라보며 하느님의 손길에 감격했고, 성경 읽지 않은 날이라면 꽃과 나비를 보면서 사귀자고 고백도 했다. 그걸 지켜보던 문학 선생님은 당황하지 않았고, 순수 문학 청년이라며 외부인의 공원을 지나쳤다. 실장이란 놈은 학기가 끝나갈 무렵까지도 왕따 당하던 또 다른 친구 하나 보살피지 못했다. 탄핵도 이런 인간이 당해야 하지 않은가. 일 하나 못하는, 왕따 하나 대처 못해 기어이 친구의 사진속 얼굴이 압정으로 뚫리는 광경을 보고만 있는 무능한 정권. 담임은 실장이 아니라 나를 불렀다. 그 친구에 대해 아는 게 있느냐고. 언제부터 실장 녀석 괴롭힘은 사라졌다. 담임을 욕하며 미워하는 말들을 쏟아내자, 선생님께 말씀드린 직언이 잘 통했다고 생각했다. 그 녀석은 체육계와 연예계 폭력 논란이 벌어지는 작금의 상황에 무슨 감정을 느낄는지. 10년이 지나서도 스스로를 정상으로 상정하는 인간들의 문법을 접하거든 가장 비정상일 가능성을 재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은 다양한 군상에 불과하다. 엄연한 사실 앞에 정상과 비정상의 분류가 무슨 소용인가. 멋들어지게 꾸며낸 아이돌을 예찬하고, 찬미하는 근거도 멋있기 때문이다. 순환논리가 만들어낸 아이돌의 허상이 깨어지기 시작했다. 실장 아우라에 보이지 않았던 그간의 민낯. 담임의 충격도 가볍지 않았을 것이다. 1학년으로서 마지막 등교가 다가왔다. 평소라면 성경책을 읽었어야 했다. 그날은 읽기 싫었다. 복도 끝 같은 자리를 뒷짐 지고서 맴돌았다. 브로콜리너마저 ‘졸업’을 불렀다. 가사가 완전히 와 닿지는 않았다. 담임께서 나를 불렀다. 자신의 마음을 담은 파란색 봉투를 건넸다. 두 장 빼곡 담긴 선생님의 문체에서 마음과 마음이 통한 그간의 관계가 생각났다. 나는 이 미친 세상을 믿지 않기 위해서는 세상에 맞설 힘을 갖춰야 한다고 다짐했다. 그 힘은 옳은 일에 옳다고 말하며, 그른 일에 그르다고 말하는 사람과의 연결된 관계에서 갖출 수 있다. 옳은 일은 무엇인가. 코로나 파동에도 광화문에 떠들어 댈 자유? 예배당 문 열어 놓고 일천 명이 예배할 자유? 웃기지 마라. 정의란 인간마다 다르다는 정의로 우매한 인간 등쳐먹는 거짓말쟁이 참교육시켜주는 게 그게 옳은 일이다.

[시대성의 창] 대안격 사랑의 죽음

2021년 01월 23일
갑자기 발생한 고열에 죽을 뻔 했다. 코로나는 아니었다. 올 겨울 한 번도 틀지 않은 전기장판 급하게 펴놓고 이틀 종일 앓아 누웠다. 내게 가장 어려운 일은 피아노 배우는 일도,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공부도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바쁘게 살아가는 삶에서는 비로소 몸살에 걸려서야 주의를 기울인다. 피로가 누적된 만큼 생활 패턴이 올바르지 않았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일에 중독된 듯 ‘이 밤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감정이 거짓말 못하는 몸의 언어인 몸살로써 제동이 걸려서야 깨달을 만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잘 못한다. 한병철이 아렌트의 ‘활동적 삶’을 지적한 것처럼 할 수 있음의 세계에서 타버리는 영혼은 사람을 망가뜨린다. 할 수 있음의 세계는 자기 착취적이다. 스스로가 경영인이 되어 자신을 부려먹는다. 제동 장치가 없어서 멈추지도 않는다. 문제는 대안으로 포장하여 괜찮은 상품처럼 전시되어 진짜처럼 행세하는 기만(欺瞞)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우리 사회에 귀감을 준다. 초등학교 1학년. 매일 하교 후에 집을 나섰다. 자전거 타고 마을을 떠돌아 유랑했다. 갇혀 지내는 공간이 싫었기 때문이다. 자유를 느끼고 싶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마음 속 어딘가에 이곳저곳 둘러보며 새로운 세계를 탐험하고 싶은 강렬한 욕구가 자리했다. 모르는 친구를 거쳐 갔다. 넓게는 남의 집 아버지와도 놀기도 했다. 하교 후의 놀이야 말로 진정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음 날, 반복되는 패턴 주입과 좌측통행 같던 교육은 우울하게 만들었다. 선생님께 반항한답시고 숙제도 해가지 않았다. 뺨도 뜨거웠고 손가락도 부어올랐다. 그러다 이런 질문과 마주했다.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걸까. 살아가는 건 무엇일까.’ 다음 날 선생님께 얻어맞기 싫은 불안감에 던진 질문이었지만 지금 나 자신을 추동하는 근본 질문(root question)으로 남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한다는 말이냐.’ 전통적 기반이 무너진 틈 사이에 자라난 代案 이렇게 질문해 보시라 어떻게 살아가야 하냐 모든 것이 대안으로 등장했다. 기존의 전통이 무너진다. 학벌이 나댈 만한 근거조차 되지를 못한다. 그렇다고 돈이 제일일 수는 없다. 윤리적이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돈을 벌지 못하는 현실 때문이다. 그렇다고 철학은 어렵다. 아니 사람들이 철학을 이해하지 못한다. 가장 윤리적일 거라 믿어온 종교도 외면당한다. 그제서 전통의 틈 사이에 피어오른 독버섯이 대안이란 가면을 쓰고서 자라난다. 전통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전통이 아니기에 매력적이다. 보수도 진보도 해결하지 못하기에 대안이 필요하다는 논변을 늘여놓는다. 너 자신을 알라는 명령과 함께 새로운 직업을 붙여 준다. 아티스트, 디자이너 같이 중립적인 요소를 극대화해 아름답게 포장한다. 나답게 살아가는 삶을 아름다운 미덕으로 여긴다. 실은 나다운 것도 사회적 영향 속에서 만들어진 ‘만들어진 것’에 불과한데. 디자인은 죄가 없는데…. 포장은 질문을 숨긴다. 질문을 꺼내어 외치는 이들의 목소리를 집단이란 영향력으로 틀어막는다. 멋들어진 교회 건물에 피피티 화면 속 영양가 없는 설교만 문제가 아니다. 역설적으로 살아남은 엘리야 단 한 사람 대 팔백오십명,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가짜의 개수를 부풀리며 소수자의 목소리를 쥐어 튼다. 좌우를 가리지 않는다. 피아식별이 어렵다. 내일은 내가 그 적이 될지도 모른다. 얼마 남지도 않은 진짜들은 에덴의 숲으로 숨는다. 가짜만이 남은 사회에 횟수와 개수를 가지고 득세한다. 이들이 성과주의와 능력중심 사고를 가질만하다. 이들은 전통이 무너지는 혼란한 사회에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한다는 말이냐’를 질문하지 않는다. 살아남아야 할 공포 속에 백지장 같은 표정으로 연대라는 단어를 들먹인다. 분명히 좌우를 가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단어로 정의하기 어려운 이들을 대항할 방법은 이들 문법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질문이다. 아니라고 말하면 적으로 간주할 테고,

[시대성의 창] 홍콩을 지지합니다

2019년 08월 22일
입력 : 2019. 08. 19 | 수정 : 2019. 08. 23 | A27 자국민 억압하는 당국 지금 當國이 정상인가 홍콩의 自由 실현되길 지난 18일, 홍콩 시민은 유수식 집회(流水式集會)로 도로를 행진했습니다(2019. 8. 18). 거대한 우산들로 가득 메운 빅토리아 공원 오색 빛깔은 어둡고 칙칙했고, 자유를 위한 주말 투쟁이 열한 번째 주(週)를 넘겼다는 사실에 조금도 즐겁지 않았습니다. 시위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지난 2월, 한 홍콩 청년이 대만에서 여자친구를 살해하고 홍콩으로 도망 온 사건이 발생하자 범죄인을 인도하라 홍콩에 요청했지만 범죄인을 인도할 근거가 없으므로 송환하지 못했습니다. 속지주의(屬地主義)인 탓이지요. 홍콩 정부가 이 때문에 송환법을 개정하려 한 겁니다. 문제는 정치범이나 종교 관련 사범을 중국 본토가 손 쉽게 송환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의문 때문입니다. 6월 9일, 103만 명이 홍콩의 자유를 위해 모였습니다. 입법회는 범죄인 인도법 개정안 심의를 연기하겠다고 밝혔지만(2019. 6. 12) 물러서지 않은 홍콩 시민들은 캐리 람 행정장관 퇴진과 개정 법안 완전 철회를 주장하며 해산하지 않겠다고 밝혔습니다. 홍콩 경찰은 “해산하지 않으면 발포하겠다”는 경고와 함께 물대포와 최루탄으로 해산을 시도했습니다. 이를 항의하기 위해 5분의 1에 달하는 홍콩 시민은 검은 상복을 입고 홍콩의 자유가 무너지는 것을 참을 수 없어 거리로 나왔습니다. 흰옷 입은 남성들이 홍콩 위안랑(元朗) 전철역에 등장해 귀가하던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폭행을 가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2019. 7. 21). 백색테러였습니다. 그 중엔 만삭의 임산부까지 포함 돼 있었습니다. 뉴스로 바라보던 지하철 안에서 벌어진 무차별 폭행은 충격이었습니다. 올라가던 계단에 펼쳐진 우산이 찢어져라 때려대던 광경은 광기 그 자체였습니다. 이들은 도대체 어디서 온 존재일까요? 지난 달 한국일보 인터뷰에서 민간인권전선 부의장 웡익모(黃弈武·34) 씨는 불법 진압에 나선 경찰이 경찰 번호와 배지를 의도적으로 가렸다고 지적합니다. 비폭력
소랑 2026년 11월 5일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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