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애문학

[지애문학] 찝찝하고 불쾌하다 못해 쓸쓸하고 아득한 빗방울

2024년 03월 04일
방학이 끝나든 뭐든 간에 시궁창 같은 삶은 달라지지 않았다. 며칠 전에 읽은 신문 칼럼이 떠올랐다. “돈 많은 사람들이 다 똑똑한 건 아닌 것처럼, 똑똑한 사람들이 다 돈만 좇는 건 아니다 (……) 오스카 와일드의 말처럼, 우리는 모두 시궁창에 살지만, 몇몇은 별을 바라보는 법. 그들의 분투를 응원한다.”

[지애문학] 그날 밤 연락하지 않은 건 자존심 따위를 지키려는 게 아니야

옛날 일들이 떠올랐다. 갑자기 떠오른 일들에 기분이 울적해졌다. 그리고 생각했다. 휴우증은 여전히 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떠오르는 걸까. 아닌 것 같다. 그때 그 상황으로 돌아간다면. 분명히 뺨을 때리고 말았을 거다. 불쾌감, 적의, 분노, 배신, 파괴, 한순간의 말들로 사랑했던 그 사람과의 모든 기억이 얼룩지고 말았다.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은 ‘새로운 친구’ 목록에서 적의로 가득한 그 얼굴이 역겨웠다. 오늘은 그냥 두지 않았다. 마음먹은 대로 움직였다. 프로필까지 차단. 이젠 기억에서 완전히 지워졌으면 좋겠다. “누구랑 톡하는데 심각해?” “아냐, 오빠.” 볼 새라 폰을 끄고 배에 누워 만지작거리며 발을 흔들었다. 뚫어지게 바라보는 눈빛이 닿았다가, 미끌거리다 다시 닿으며 마주치고 떠나기를 반복했다. 또 시작이다 그런 표정. 귀여워. 관심 끌고 싶은 마음마저 귀엽게 봐주는 느낌이 귀여워 미치겠다. 힘들다는 듯 머리 위에 손을 대고 쓰다듬는 이 순간이 마냥 좋았다. 너무 가볍지도 너무 무겁지도 않은 그런 기분. 사람으로 받은 상처 사람으로 해결하란 말이 떠올랐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 같다. 후유증조차 경험할 겨를도 없이 빠르게 기억에서 사라지면 좋을 텐데. 오빠와의 데이트 중에도 아문 상처는 이따금 되살아난다. “삐질 때마다 달래주는 거 안 힘들어?” “웬일이야? 그런 걸 물어보고.” 아니……. 여기까지. 더는 잇지 않았다. 오빠는 아직도 생각이 많아질 때마다 하는 특유의 생각을 모른다. 그냥 내뱉은 말인 줄 안다고. 장난감처럼 만지작만지작, 그러다 상상에 빠진다. 힘들었을 그 때, 너한테 연락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딱 한 번 있었다. 추했다. 뒤돌아보지 않기로 했는데 금세 돌아서 엉엉 울고 말았으니. 그 모습 하나까지 남김없이 발라먹듯 이용해 먹었다. 그리고 더는 외로워도 슬퍼도 힘들어도 뒤돌아서지 않기로 했고 한 번도 뒤돌아서지 않았다. 며칠 전 그 밤만큼은 불안감에 휩싸인 마음을 달래느라 정말 많이 힘들었다.

[지애문학] 널 잊기까지 23일

2023년 10월 22일
너랑 자던 밤이 생각났다. 다리로 포갠 너의 허리. 데일 때까지 스친 입술. 가지고 싶어서 남겨 놓은 키스마크까지. 닿았던 살결. 안아 주면서 맡았던 냄새. 온몸을 끌어다 안다 못해 서로 가지고 싶어서 안달난 새벽. 또 일어나자마자 입술을 덧대어 하루를 시작했던 그 아침. 아랫입술을 가득 메울 때면 따뜻한 바람이 불어왔고 날 놀라게 하던 또 다른 입맞춤에 날 “사랑해”라고 말하게 만들었어. 알아? 처음 너랑 자고 나서 가벼운 감기에 걸렸던 거. 조금은 아팠어. 적당히. 콜록 거려도 괜찮았어. 들이키는 숨에서 너의 온기가, 내쉬는 날숨에서 네 냄새가 더 지독하게 남았으니까. 그동안 괜찮은 척 연기하느라 힘들었어. 안 보고 싶은 척. 그럭저럭 잘 지내는 척. 실은 무지 연락하고 싶었어. 정말 정말 보고 싶었고 만나고 싶었어. 견디지 않은 척. 기억에조차 사라져 까먹은 척. 하지만 몸은 널 잊지 않고 있더라. 퇴근길. 너랑 자던 그 밤이 생생하게 떠오른 저녁.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단 걸 깨달았다. 며칠이 지나야 할까. 널 완전히 잊기까지. 기억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정말 정말 보고 싶어서 나는 괴로운데. 너와의 밤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안달나 있는데. 내 곁에 잔상이 이리도 오래 갈 줄이야……. 다정히 부르던 나의 이름. 사랑스러운 너의 퉁명한 대답. 침 삼키는 소리까지도 들릴 만치 가까웠던 우리 사이. 사라지고 만 너와의 밤. 공허함 속에서 널 잊었다고 생각했을 때. 마지막까지 남았던 작은 불꽃이 더욱 강렬하게 타오르다 꺼지고 말았다. 이제 더는 몸조차 너를 그리워하지 않는다. 더는 생각나지 않고. 기억나지 않는다. 어느 순간 너에게 빠져든 것처럼, 갑자기 부는 바람처럼 네 마음 바깥으로 스치고 말았다. 단숨에 벌어진 이 일에 완전히 너를 잊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동안 괜찮다고 생각하면 괜찮아지는 줄 알았는데. 정말 정말 보고 싶어도 정말 정말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 다 되는 줄 알았는데. 너를 완전히 잊기까지 23일. 그 긴 시간을 견디고 또 견뎌내어 다시 살아난 마음. 이제야 숨 쉴 틈을 발견했다. 언제나 넌 마지막 순간에 “사랑해”라고 말했어. 끝까지 밀어 넣을 듯 날 가지고 싶다더니. 그건 아니었나봐. 날 사랑한다는 말은, 다시 말해 날 책임지겠다는 말이니까. 책임까지는 지고 싶지 않은 그런 관계였으니까. 허공에 사라진 고백에 더는 신을 믿지 않기로 했다. 신이 나를 배반한 게 아니라 신을 믿는 사람들 때문에서라도 믿지 않기로 결심한 것이다. 가끔은 잠만 자고 그러려니 하는 사람들이 부러워. 나도 책임 없는 쾌락만 느끼고 손절하고 싶은데. 그게 안 돼. 그만큼 사랑해 주고 싶은 마음이 크니까. 나쁘다는 거 알지만 어쩌면 책임 없는 쾌락이 더 나을지도 몰라. 너무 힘드니까. 힘들 바에야 쉽게 고통을 잊어버릴 수 있었으면 싶을 정도로 힘들었으니까. 긴 시간이었다. 책임 없는 쾌락이 이어졌다면 짧아졌을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참아야 했다. 더는 그런 관계를 원하진 않으니까. 이제껏 사랑인 줄 알았던 관계가 몸조차 원하지 않는 아픔뿐이라는 걸 지금에야 알았으니까. 날이 풀린 게 느껴졌다. 이제껏 견뎌낸 지난한 계절처럼. 더는 네가 떠오르지 않게 된 지금처럼. 모든 일이 풀릴 것만 같았다. 신혜야, 견뎌내느라 고생 많았어. 더욱 내 마음을 끌어 안아주었다.

[지애문학] 그러라고 있는 사람들

2021년 08월 08일
“하하하!” 정확히 세 번 하!하!하! 예, 아니오도 아니었다. “그랬으면 좋겠네요”란다. 누가 취재한 걸까. 그 소식통 줘 패야 돼. 또 나만 바보 됐어. 힝. “마지막 날 상고장 제출하면서 조마조마했어요. 또 마음 바뀌는 건 아닐까…. 간혹 인선 자료 떠돌아도 틀릴 때 많아요. 결국 오늘 1면에 제 이름만 안 실린 것처럼요. 데스크는 그러라고 있는 사람들이니까요.” 안도했다. 그럼 그렇지 이렇게 착한 사람이 누가 누굴 이용해 먹어? 지금 당장은 김지수 공판 준비하느라 정신없을 뿐이고 대통령 당선하기 전부터 몇 번 만나본 사이일 뿐이라고. 국민의 악마를 변호하는 사람을 자기 대변인으로 뽑을 리 있겠냐던 말에서 황당해진 건 나였다. 당연히 그렇지. 신문사 들어가고 나서부터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모르고 살아서 당연한 소리에도 훅 넘어가버렸다. “지수도 절 필요로 하는 사람이니까요. 변호사로서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저도 너님이 필요해요.’ 라는 생각을 말로 내뱉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수임료도 받지 않았다는데 그럼 그 필요란 뭘까. 한때 사람들에게 사랑 받았던 그때의 감정을 독려해주는 유일한 사람? 모든 사람은 욕할지라도 악마까지도 변호해 줄 단 한 사람의 응원? “근데 왜 데스크 사람들이랑 밥 드신 거예요?” 라는 말을 생각 필터에 거치지 않고서 내뱉었다. 아, 음, 아. 그건……. 보기 드문 추임새. 변호사님도 감추는 게 있었을까. “돈 버는 사람들이니까요.” 변호사님 비유가 필터 없이 귀에 들어왔다. 제3막으로 구성한 한 사람의 인생 뮤지컬. 학생 때부터 꿈꾸어 온 미래를 향하여 정신없이 달려가는 소녀로서의 1막. 가장 아름답고 짜릿해야 했건만 현실의 벽 앞에 거칠게 쓰러지고 맞서 싸우는 현재로서의 2막. 덤덤하게 죽어가는 이들 앞에서 삶을 정리하고 주변을 지켜만 보아가는 과거로서의 3막. 빠르게 재편되어가는 사회, 바뀌어가는 직업, 쉴 새 없는 출근길, 변해가는 가족, 조금씩 삐걱대는 몸과 마음. 사람의 봄여름가을겨울 저무는 계절 속에서 고작 돈 때문에 죽어가는 광경을 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 속삭임에 말을 잇지 못했다. “둘로 찢어진 상고장보다도 눈가에 고인 듯한 눈물이 저를 필요로 한다는 걸 말해줬어요. 말은 필요 없다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걸…….”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누군가를 무시하며 살아간다. 반대로 자존감이 필요 이상으로 높을 땐 자의식이 과잉되어 누군가를 숨 막히게 만든다. 학벌과 돈, 명예. 모든 것은 자신을 치장하는 액세사리에 불과하다. 자유의새노래, 라는 1등 신문사의 명예도 누군가를 무시하고 숨 막히게 만드는 매개에 불과하다. 그러나 변호사 배지에도 이 남자와 같이 있을 때면 느낀다. 숲처럼 정화되는 맑은 햇살. 높고 낮음도 없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존중해주는 밝고 맑은 자존감. 확실히, 확실히 ENFJ 같아. MBTI 같은 건 안 믿겠지? “정론직필의 자유란 사실 신문이 살아남기 위한 구호겠죠. 누군가 아버지의 밥벌이로 보일 때면 조금은 다르게 보일 거예요.” 하나도 안 부럽다. 멋들어지게 치장한 자기 자신이 대단하게 보일지는 모르겠다. 근데 내 눈엔 그 나물에 그 밥이다. 돈 벌기 위해 몸뚱아리 돈으로 쳐 바르기 위해 안달 난 사람들. 그러라고 있는 사람들이라기엔 비참했다. 1등 신문사 만들어 놓고도 순수했던 그때의 자신을 잃어버리는 기분이란 무엇일까. 그런 지수가 자기 자신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죽음을 목전 앞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이 남자와 만나면 왠지 어두워 보이는 그늘을 조금이나마 밝혀줄 수 있을까. 어렵게 취업하고 나서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 으, 말하고 싶어.

[지애문학] 배제

2021년 05월 25일
아침부터 차장한테 깨져야 했다. 일러스트 그따구로 그릴 거면 때려치우라고. 언제부터 신문이 개인 연애편지 쪼가리였느냐고. 그딴 종이 쪼가리 윤전기에서 태어나자마자 외국에 버려지잖느냐 내뱉을 뻔 했다.

[지애문학] 위로

2021년 05월 24일
남의 집 냄새는 언제나 맡아도 낯설다. 남자친구 작은 원룸 나서던 순간까지도 홀아비 냄새가 익지를 못했다. 낯설다는 풍경이 내게 가져다준 불편함은 너에게 내 사람이 될 수 있을지를 직감으로 깨닫게 만드는 감정이다. 어머니가 출근하고 빈 현호의 집에도 낯선 냄새가 가득했다. 순전히 현호의 냄새뿐이었다. 아기자기 알록달록 쿠션 위 가족사진과 식탁처럼 보이는 공간에 누가 봐도 현호가 만든 걸로 보이는 나무 모형이 옹기종기 항해할 요량을 갖추었다. 늦점심이 되어서야 베란다 앞으로 져가는 햇빛이 외로운 저녁으로 들어가는 현호의 마음을 그리는 것 같았다. 가방을 내려놓고 소파에 앉아서 생각했다. 무어라 말해주어야 할지, 어떤 말로 놀라지 않게 다가갈지, 혹시나 싫어하지는 않을지. 무릎에 팔꿈치를 올려두고 손가락을 펴 마주친 상태로 고개 숙인지 5분이 채 되지 않은 찰나에 해는 완전히 지고 말았다. 인기척에도 나오질 않는 걸 보면 자고 있는 것 같았다. 문 앞에 노크하고 조심히 들어가도 등진 채로 꿈쩍 않는 모습이 뒷방 늙은이 같았다. 바보. “…….” 겨우 들릴 만하게 한숨을 쉬는 걸 들었다. 안 자고 있었어. 라고 말한다.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말 안할 줄 알고 물었다. 그냥 해본 말이다. 맛있는 거 먹어도, 게임을 해도, 샤워하고 뽀송해져도, 친구를 만나고, 키스를 해도, 나아지지 않는 무언의 벽이 섰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말을 해줘도 달라질 게 없으니 나에게조차 말없이 등진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대로 방 안이 컴컴해질 때까지 침대 발치에 조용히 앉아 기다렸다. 삐걱 소리도 안 나게 앉았고 침 넘기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교회학교 선생님은 현호가 입시에서 찾아오는 설움이 컸다고 언질을 주었다. 요새 오르락 내리는 기분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을까.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는데서 찾아오는 안도감, 이내 찾아오는 할 수 없을 거라는 불확실감, 그래도 열심히 살아가면 뭐라도 되지 않을까하는 실낱의 희망, 그렇지만 언제까지 얼만큼 노력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지 예측도 예상도 하지 못하는 무능력함. 무기력의 근원은 항상 할 수 있는 희망에서 시작한다. “좀 잘래? 이따가 깨워줄게.” “갈래요.” “저번에 거기?” 크게 숨을 들이키자 베개에 품었던 얼굴을 빼내어 일어나려는 모습을 힐긋 안 보는 척했다. 자리에 일어나 기지개를 폈다. 딱 키스하기 적당한 정도의 밝기. 오히려 주말 새벽에 일어난 설렘이 밀려왔다. “불 켜지 마요. 안 씻었으니까.” 귀여워서 엉덩이를 토닥여주고 싶었다. 적당한 정도의 키, 적당히 불쾌한 남자애 냄새, 적당히 헝클어져서 대놓고 보게 만드는 걸 참느라 힘들었다. 소파에 앉아서 도도한 척했다. 그새 익숙해진 이 집 냄새가 나쁘지 않았다. 그래, 적당함.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는 않겠지만. 적당한 너라서 좋다고. 적당하게 못 살도록 내버려 두는 이 세계가 나도 싫다고. 이렇게라도 말해주면 웃어줄까. 싸늘해질 때로 싸늘해진 전임자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바빠 두 글자만 보내고

[지애문학] 하고 싶다고 진짜

2021년 04월 27일
아이고, 우리 진유! 하고서 반겨주실 줄 알았다. 같은 교회 다니는 집사님을 엄마 앞에서 만나게 될 줄은 상상정돈 해봤지만 이렇게 급작스레 마주할 줄은 몰랐다. 교복 입은 시절 성실하게 교회 오가다가 대학 진학과 함께 쓸려나간 이후 한 번도 뵙지를 못했다. 그렇게 10년, 나보다 작은 키에 여전히 적당하게 자글자글한 주름살 건조한 눈매 푸석한 입술. 한복 곱게 차려입고서 생기롭게 주보 건네던 분위기만 달랐을 뿐 분명히 정겨운 얼굴을 뵈니 마음은 즐거웠다. 예뻐졌다는 말에서부터 어른다워졌다, 결혼할 나이잖느냐는 말까지 기어이 무슨 일하고 있다며 말하기 전까진 식은땀조차 생각할 겨를 없이 정수기 물 한잔 겨우 마실 수 있었다. “저어기 자유의새노래 편집국에서 일하고 있어요…….”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니라서 주워 담을 수 없었다. “와따매, 집사님은 자랑도 않으셨다만 좋은 데라서 입 꾹 닫고 있었고만.” “허허 망해가는 신문인데요.” 엄마의 팔을 때리는 바람에 성적도 잘 안 나와서 백수 생활 몇 년 하던 내용은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1등 신문사에 사원으로 일하는 것. 거기엔 기자들이 유출되어 부수(部數) 조작까지 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닥 쓸모없었다. “네, 새로 디지털 업무 시스템을 도입해서요, 저 같은 디자이너들도 뽑아주고 있대요. 가며는 프로그램으로 지면신문을 편집하는데요. 사설도 여러 번 바뀌거든요. 그거 갈아주고 들어온 일러스트도 배치하고….” “햐, 뭐 지금 시대에 취업이라도 하면 어디겠니?” 마스크를 잠시 벗어다가 방울토마토 집어넣는 모습에서 생각에 잠기고 말았다. 이제 내가 할 말은 다 끝났으므로. 익숙한 이야기들이 흘러나오는 동안, 엄마 옆에 앉아서 조용히 바깥을 내다봤다. 아…. 다함께교회. 나의 비극적인 시대가 담긴 동네. 건물 하나 믿고 많은 것들이 오가던 공간. 거기에 묶여버린 나의 사랑도 지금까지 찾아가질 못했다. 낳아주셔서 감사하다는 생각만으로도 즐거웠던 시절이 있었다. 귀엽고 착하게 생겨서 자빠트리고 싶은 그 남자를 만나던 날들. 학생들이 주도해서 만든 24클럽에도 자발적으로 들어간 이유도 사실은 오빠랑 오래도록 같이 있고 싶어서였다.

[지애문학] 내 이름

2021년 04월 07일
어디에도 집단 감염을 보도하는 데가 없었다. 다양한 사건들이 사람들 기억에서 코로나 세 글자를 밀어냈고, 발병하고 정확히 2년하고도 반년이 지나서야 다른 뉴스들로 뒤덮였다. 뉴스로 뉴스를 덮는다, 이거 현실 정치에서도 유용하겠지만 여자와 남자 사이 관계에서도 무척이나 유효하다. 오늘처럼 적당히 쓴 알콜로도 애매한 기운을 덮기가 어렵다면 말이다. 한 달이 지나도 응답 없음 유지하던 우리 관계도 잠시 주춤하는 건지 영원히 멀어지는 건지. 발걸음도 주춤했다. 지하철 환승 통로 한 편에 마련한 전시회에 다다른 직후였다. 익숙한 전신의 찰리 채플린이란 점 때문만이 아니었다. 머리에서 분리된 얼굴, 부르튼 발에서 벗겨진 신발, 천사의 날개를 겨드랑이에 끼운, 누구라도 느낄 수 있는 마르크 샤갈 냄새. 웃고는 있지만 그림에서 느껴지는 채플린의 표정은 밝지 않다. 광대도 외로움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 채플린의 영화 <키드>(The Kid)를 보면 샤갈의 의도를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결코 사람의 얼굴은 한 가지 표정으로 구성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화사한 그림도 낯익다. 붉은 배경의 꽃다발. 1970. 피카소에 대한 일화를 접하고 그날부터 피카소를 시기한 샤갈이 와 닿았기 시작했다. 상처받기 쉬운 그의 작품 앞에 서면 고스란히 마음이 보이는 투명한 유리가 느껴진다. 붉은 배경이라 파랗고 보랏빛 하얀 얼룩한 꽃들이 돋보이는 작품에서 피카소에게 열등감을 느꼈을 샤갈을 상상했다. 구석에서 유령처럼 서 있는 정장과 웨딩드레스는 누가 봐도 사랑을 의미한다. 풋풋했던 사랑이 떠올랐다. 다시 시를 써볼까 싶었다. 그림 그릴 줄 모르니 노래 가사처럼 한 구절 끼적이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뉴스로 뉴스를 덮듯, 하고 싶은 일로 슬픈 마음을 덮어 버리기. 일에 치여 전시회도 가지 못하는 날이면 우리는 놀러가듯 서점으로 향했다. 배워본 일 하나 없는 미학 용어 늘여놓기 일쑤지만 책 하나 들고 버티다 보면 뒤에서 안아주던 향기에 서점 냄새가 덮이고 말았다. 잔잔한 음악도 귓가에 속삭이는 끈끈한 말들로 덮이는 것처럼, 끝끝내 흐트러진 생각에 못 이기고 돌아가곤 했었는데.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에서 떠나가자 그토록 어려웠던 글줄이 풀리면서 샤갈의 생애를 읽어 내려갔다. 첫 사랑이 아니어도 온종일 생각나는 너의 얼굴. 주말 드라마보다 익숙하고 뻔한데도 알고 싶고 두드리고 싶고 열고 싶은 네 마음. 가녀린 영혼도 상처 받기 쉽고 상처 받을 존재라고 지긋이 웃으며 말해줄 샤갈의 색채에서 사랑을 느낀다. 액자 가까이 얼굴을 들이댈 때마다 다소곳이 서 있는 내 얼굴이 비친다. 다시 연애하면 쓰고 싶다. 시. 잠시 샤갈의 화사한 빛깔에서

[지애문학] 기억을 기억하는 이유

2021년 04월 07일
각이진 턱에서 돋아나는 입가의 주름 그 입에서 쏟아지는 무책임한 단어들. 몇 년이 지나도 여전했다. “얼마만이죠?” “그러게요. 마주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요. 호호.” 새신자환영회실 지나쳐 곧바로 12교구 담당 전도사와 바쁘게 걷는 걸 특권처럼 생각하던 이 분위기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했다. 도착한 상담실에선 그 여러 해 동안의 회포가 이어졌다. “이 교회 저 교회 전전하고 교구장까지 해봐도, 우리 교회 만하지는 않더만. 시설 좋지, 목사님 좋지, 성도들 좋지, 분위기 어때, 신앙심도 이만한 데가 없다고.” “네.” 어처구니없고 기가 막힐 때마다 나오는 특유의 표정을 잘 안다. 살짝 고개를 기울어 다문 윗입술로 아랫입술 닫아줄 때 발생하는 무표정. 마구 휘갈겨 적는 종이 위엔 정자로 인쇄된 교적 전입처리가 바싹 말라 있었다. “그 때 일 유감스레 생각해. 내가 오죽 입방정이겠어? 세상 살다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거지. 깔깔깔.” “네.” 순간 아랫입술 깨무는 게 보일까 싶어 고개를 숙이고 끼적여 놓은 글들을 일부 수정했다. 인터넷 칼럼에서 읽은 글이 떠올랐다. 난파선을 벗어날 때 스쳤던 파수꾼 앞에서 무슨 말을 더 하느냐던 물음. 물어도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꺼내길 좋아하던 당신의 글에서 가슴을 못 박은 구절을 발견했다.

[지애문학] 잊어버려야 할 때

2021년 02월 24일
D+1100. 지울까 말까 고민만 수백 번. 달달해서 짜증났다. 어제의 네 미소가 오늘의 쓰디쓴 망상으로 이어질 줄은 정말로 몰랐다. 가끔은 폭발하는 내가 너무 싫었다. 연례행사라도 하듯 한 달에 한 번쯤 예민해지는 시기가 미웠다. 그래서 어제는 이해해주는 줄로만 알았다. 착각이었다. 만나자 해도 확인 하나 없었고 연락을 해도 받지를 않는다. 고작 네 글자, 그 한 마디 꺼내려 잘해줬다고 생각하니 화가 치밀었다. 마지막 한 모금 마시고서 찌그러뜨리고 나서야 일어났다. 추웠다. 지애야, 패대기치고 나오는 순간만큼은 좀 이성적이면 안 될까. 하고 달래도 소용없었다. 목도리 하나 걸치지 않고 니트 한 조각만 입고서 나왔으니. 거지같았다. 떠는 몸 이고서 이곳저곳 배회할 존심만 남았다. 햇살에 몸을 쬐니 따뜻해지기는 한다. 정신 차려지는 것 같자 물었다. 어디서부터 문제였을까. 며칠쯤부터 적신호였을까. 스케줄을 뒤져봐도 아무리 뒤져도 모르겠다. 그을 수 없는 선 넘어 어리광부리던 순간과 패대기치려는 순간이 모호해졌다. 벤치를 지나서 한 발자국 내딛는 저 커플은 오늘로써 며칠 째일까. 저 홀로 외롭게 걷는 남자는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있을까. 사람들이 바라보는 유지애 나란 인간에게 1100일 정확히 천백일 째 깨졌다는 사실을 알기나 할까. 쪽팔림과 부끄러운 모호한 경계에 서 허둥지둥 대는 멍청한 유지애 바보 같은 유지애 지껄여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다시 카톡을 열었다. 지울까 말까 고민했다. 아직도 선언해선 안 되었다. 못 받아들이겠다는 거다. 아직도 1은 사라지지 않았다. 또 다시 전화를 거는 순간 말려드는 거다. 절대로 조용히, 입 다물고 있어 유지애하고 매듭졌다. 이쯤하면 연락은 주겠거니 예측했다. 틀려먹었다. 바짝 고개라도 숙여야 할지, 정면돌파할지 두 가지 갈림길에 서자 다리가 후들거렸다. 갑작스런 오늘의 날씨만큼이나 혼자서 홀로 서기에 돌입해야 할 유지애가 가련하고 불쌍했다. 그렇다고 널 만난 게 당당한 유지애를 바래서 만났던 건 아닌데. 어쩌다 네가 내 자리 한 가운데 서 있었을 뿐이고, 네가 있어 웃음꽃 피었을 뿐이고. 단지 너에게 패대기 한 번 쳤을 뿐인데 그 웃음꽃이 시들어 혼자서 겨울을 나야 한다는 게 슬펐을 뿐이고. 맞아, 후회해. 후회한다고. 그니까 제발 돌아오라고. 적당히 배회하다 돌아와 부장 눈빛 스캔하고 자리에 앉았다. 아무 일 없다는 듯, 잘해 한 마디 던지는 눈빛이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라디오에선 잔잔한 음악이 끝나갈 채비를 마쳤고, 사연을 읽으며 소박한 하루를 지껄일 테지만 나아졌던 마음은 또 다시 상승 곡선을 그려 내려갈 준비를 끝낸 것 같았다. 헤어지자는 네 글자 한 마디 본 순간 올라갔다 내려갔다 끝 보이지 않을 롤러코스터 오르고 내리다 또 오르고 내린다. 두 시간 배회했으니 그 만큼 늦게 나가면 되는데 상관없다. 어차피 야근이었으니까. 짜증이 밀려온다. “유 과장님 대신해서 다 끝냈어요. 밀린 원고 오탈자 확인 했으니까 바로 편집 들어가면 되겠어요.” 대답하기 귀찮았다. 두 다리 쭉 뻗고 몸을 뉘었다. 퇴근할 시간이 되어서야 매듭지을 수 있었다. 좀 나아졌다는 걸 캐치했는지 나 아니었으면 유 과장님 큰일 났을 거라고 알랑방귀 뀌었다. “여자친구랑 싸웠다면서?” 대답도 하기 전에 이런 말들을 늘여놓았다. 미안. “맘대로 지껄여도 돼. 근데 처음이었다고만 말하지 마. 그거 추하니까.” 모니터에 올려둔 무슨 고교 학교신문 칼럼이 아른거렸다. ‘잊어버려야 할 때’ 최예림 학생의 이름으로 올라온
Today소랑 2026년 6월 20일 토요일
Go to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