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애문학] 기억을 기억하는 이유

2021년 04월 07일

각이진 턱에서 돋아나는 입가의 주름 그 입에서 쏟아지는 무책임한 단어들. 몇 년이 지나도 여전했다.

“얼마만이죠?”

“그러게요. 마주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요. 호호.”

새신자환영회실 지나쳐 곧바로 12교구 담당 전도사와 바쁘게 걷는 걸 특권처럼 생각하던 이 분위기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했다.

도착한 상담실에선 그 여러 해 동안의 회포가 이어졌다.

“이 교회 저 교회 전전하고 교구장까지 해봐도, 우리 교회 만하지는 않더만. 시설 좋지, 목사님 좋지, 성도들 좋지, 분위기 어때, 신앙심도 이만한 데가 없다고.”

“네.”

어처구니없고 기가 막힐 때마다 나오는 특유의 표정을 잘 안다. 살짝 고개를 기울어 다문 윗입술로 아랫입술 닫아줄 때 발생하는 무표정. 마구 휘갈겨 적는 종이 위엔 정자로 인쇄된 교적 전입처리가 바싹 말라 있었다.

“그 때 일 유감스레 생각해. 내가 오죽 입방정이겠어? 세상 살다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거지. 깔깔깔.”

“네.”

순간 아랫입술 깨무는 게 보일까 싶어 고개를 숙이고 끼적여 놓은 글들을 일부 수정했다. 인터넷 칼럼에서 읽은 글이 떠올랐다. 난파선을 벗어날 때 스쳤던 파수꾼 앞에서 무슨 말을 더 하느냐던 물음. 물어도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꺼내길 좋아하던 당신의 글에서 가슴을 못 박은 구절을 발견했다.

‘머잖아 침몰할 난파선으로 돌아간 파수꾼의 심정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붙잡을 지푸라기 없으니 무너질 난파선이라도 붙잡아야 하지 않겠나.’

그래. 먹고는 살아야 할 테니 사업가 기질도 발휘해 이 교회 저 교회 옮겨가며 발품 팔이라도 하긴 해야겠지. 아무도 건들지 못하는 살기 위해 네 글자 위해서라면 내 머리채를 잡아끌어 이 년 저년 내뱉을 수도 있는 거겠지. 그때 일은 미안했고, 그렇게 생각했다면 미안하다 한마디로 끝날 테지. 살기 위해 몸 버려 다함께라는 난파선을 벗어나려던 선택, 그거 무시 안 해.

금의환향(錦衣還鄕) 마냥 달라진 것 하나 없는 50대 아주머니 뒤로하고 문서더미를 팔로 안은 채 걷는 폼을 예수라는 인간이 바라보면 뭐라고 지껄여줄 지가 무척 궁금했다.

사무실에 도착했다. 문서 더미를 던져 버렸다. 이때의 표정도 잘 안다. 못 생겨서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는다. 잘 안다고. 그 따위 표정 관리하라는 말 말라고.

“저렇게 살게 나둬, 구역장 아무나 해? 저러다가 몇 푼 못 건질 거 뻔하잖아.”

힘없이 앉아서 듣고만 있었다.

“이번 달 통계는 내가 할 테니까 정리 좀 하게 쉬었다가 메일로 보내.”

강신혜 듣고 있냐던 말도 들리지 않았다.

“괜찮아?”

여러 숨을 골라서야 말할 용기가 생겼다.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지. 왜 기억하는 줄 알아?”

“…….”

안아주는 동료가 남자친구로 보이지 않았다. 흐느끼는 이 모습도 주님은 사랑해주실까. 죽이고 싶어서 미칠 것 같은 나마저도 받아줄 수 있느냐고. 당신은 못하더라도, 이 녀석은 받아주지는 않을까. 그래서 고맙다고.

“…… 기억해 주는 것. 이게 사랑이니까…… 그때의 아픔을 간간히 버텨내며 지금까지 살아 숨 쉬게 하루하루 견뎌준 그때의 나를 사랑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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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애문학] 겨울방학, 이별을 앞두고

마지막 날.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평소라면 책상에 바로 앉아 마음을 가다듬은 채 명상을 하고, 교실 이곳저곳 쓸어다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은 이 아침을 독서로 문을 열어야 했다. 마지막이라는 순간 때문이었을까. 박동하는 심장을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발 닿는 대로 걷기로 결심했다. 복도에는 노을이 꽉 들어 차 있었다. 지금이 새벽이라는 걸 말해주는 것 같았다. 한 걸음, 한 걸음. 이어폰에서 흐르는 멜로디와 가락을 곱씹었다. 아무도 없는 빈 거리를 홀로 거니는 들뜬 이 기분에 오히려 차분해졌다. 한 반씩 스쳐 지나갈 때마다 묻곤 했다. 이곳에서 밤낮을 보낸 너희의 일상은 언제쯤 끝에 도달할까. 황금 빛 파묻힌 책상에는 먼지 하나 없고, 머지않아 새로운 손님을 마주할 부푼 기대만을 머금고 있었다. 이 곳 낯선 땅에 처음 발 디딘 순간을 기억한다. 엄한 군기와 훈육 시스템. 획일화 된 교육 커리큘럼. 똑같은 패션과 헤어스타일. 단연 우리의 꿈 좋은 대학. 척박하고 메마른 땅에 던져진 기분이었다. 아무도 없는 고독한 땅을 개간해야 하는 막막한 심정. 씨앗이라도 심으면 새싹이라도 자랄 수 있을는지 묻고 또 묻기를 1년. 수없이 지나간 밤들. 비로소 사계절을 보내고 새로운 겨울을 맞는구나. 복도의 끝은 적막했다. 하나 둘 교실에 도착해 내는 왁자지껄 소리 풍경과는 달랐다. 누구에게는 반복되는 발걸음일 뿐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지금의 발걸음도 그렇다. 그냥 정처 없이 이곳저곳 떠도는 순간일 뿐이라고만 생각할 것이다. 도무지 견디기 어려우면 나는 발걸음 떼 걷기 시작했다. 낮부터 저녁까지 말없이 걷기만 했고, 밤을 새워 하염없이 걷기도 했다. 물론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를 얻었다. 견딜 수 있는 힘 말이다. 상황은 달라지지 않아도 사람들은 변하지 않아도 사건은 제자리걸음이어도. 내 마음은 환기되었고 나는 조금 더 단단한 사람이 되었다. 나에게 이 걸음은 답답한 순간을 지나가게 해준 터널에서의 여정이었다. 힘든 순간을 견디게 해준 최후의 여정이었다. 자리에 멈춰 섰다. 이어폰에서는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새벽노을은 아침 이슬처럼 차갑고 상쾌했다. 발걸음을 이리저리 옮기기 시작했다. 보편적인 노래, 날들, 일들이 되어버린 메시지를 되뇌고 또 되뇌었다. 마지막이란 단어가 주는 다섯 빛깔에 주목했다.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아련함. 다시 너를 볼 수 없다는 우울함. 다시 너를 느낄 수 없는 서늘함. 다시 사랑할 수 없다는 미안함. 다시 고마움뿐일 우리의 일상. 저 너머 아득히 사라진 지난 날들이 하나의 빛깔로 모여들었다. 그 속에서 나는 새싹을 발견했다. 그 새싹은 조금씩 피어오르고 있었다.열여섯, 그 더딘 시간 안에 자란 새싹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짓밟히고 뜯겨 무참히 박살난 줄 알았던 그곳에서. 그곳에서 발견한 노을 빛이 얼굴에 서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또다시 평범한 나날이 지나고 지나면 더 자라 있겠지. 노래가 더욱 진해져갔다. 이어폰에서 흐르는 멜로디 한 마디 한 마디를 곱씹었다. 그렇게 말없이 이리로 걷다가 저리로 걸었다. “진성아.” 담임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교무실로 나를

[지애문학] 찝찝하고 불쾌하다 못해 쓸쓸하고 아득한 빗방울

방학이 끝나든 뭐든 간에 시궁창 같은 삶은 달라지지 않았다. 며칠 전에 읽은 신문 칼럼이 떠올랐다. “돈 많은 사람들이 다 똑똑한 건 아닌 것처럼, 똑똑한 사람들이 다 돈만 좇는 건 아니다 (……) 오스카 와일드의 말처럼, 우리는 모두 시궁창에 살지만, 몇몇은 별을 바라보는 법. 그들의 분투를 응원한다.” 이 글을 읽을 때만 해도 추운 겨울이었는데 어느덧 미세먼지가 나도는 봄 초입에 들어섰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다는 의미기도 하다. 그러나 삶은 여전히 시궁창. 절망 그 잡채. 터벌터벌 오늘도 어김없이 발걸음은 서대문역에 다다르고, 정말 정말 회사에 가기 싫은 나머지 늦든 말든 스벅에서 화이트초콜릿모카를 시키고 자리에 널브러지고 말았다. 그러나 피할 수는 없었다. 돈은 벌어야 했으니까.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언제나 물었다. ‘행운은 언제쯤 나를 구원할까’ ‘어쩌면 행운은 내게서 멀지도 몰라’ ‘일생일대 한 번뿐이 아니라, 아예 없을지도 몰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에 금세 점심시간이 찾아왔다. 동료와 그냥저냥 식사를 마치고 식당 건물을 나오려는 순간 생각지 못한 빗방울에 짜증이 솟구쳤다. 안 그래도 싫증나는 하루인데, 비 너마저 쏟아져야만 했니. 그러다 내 마음을 설레게 만드는 장면을 보고 말았다.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여자애가 기타를 메고 어디론가 가는 모습을 눈에 담은 것이다. 문득 내 안에 잠든 무언가가 꿈틀 거렸다. 네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무척 오랜만에 깨달은 것 마냥. 나도 모르게 그 애한테 말을 걸고 말았다. “저기.” 머리 위에 손등을 올려두고 비를 피하려던 아이가 뒤를 돌아보았다. 멀뚱히 쳐다보는 그 애한테 “회사에 남는 우산 있으니까. 그거 쓰고 갈래?”라고 물었다. “감사합니다.” 끝말에서 느껴지는 가벼운 웃음에, 나도 모르게 반해버릴 것 같았다. 네 아름다움에, 네 어린 꿈에. 꺼내든 우산, 금세 도착한 1층엔 그 애 말고도 남자애, 여자애 두 명이 회사 앞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다. 같이 쓰고 가기엔 좀 좁을지라도 빗방울을 피하기엔 적절하게 큰 우산을 가져와 다행이었다. “감사합니다.” 두 번째 인사에 말 걸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싫어 죽겠는 부장의 그 칼럼이 다시 떠올랐다. ‘우리는 모두 시궁창에 살지만, 몇몇은 별을 바라보는 법.’ 그 애도 기타를 연주하며 오늘의 볕을 떠올리지 않을까. 내 작은 성의에 말이야. 짧고 어리숙한 용기가 누군가에게 힘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다. 달짝지근하게 추워진 날씨가 이제는 어색하지 않다. 그 추운 겨울도 언젠간 끝나는 구나, 비록 시궁창에서 살아 갈진 몰라도 언젠가 그 밤이 끝나고 말 거라는 교훈이 마음에 남자 괜히 흐뭇한 미소가 되살아났다. 회사에 도착해 디엠을 보냈다. ‘재현 씨 맛점하세요’ 눈 깜박할 사이에 도착한 대답. 역시 밀당 없는 남자가 좋아. ‘그럼요. 점심이 1시간뿐이라 후딱 먹고 눈 좀 붙이려구요.’ 당장 이번 주 토요일이다. 재현 씨와의 첫 약속. 예보를 보니 비, 구름 가득이다. 그래도 거리낌 없었다. 오늘 같은 일들이 벌어질 것만 같은 예감이 한 가득이다. 비가와도 재현 씨를 만나고 싶은 이유였다. 어쩌면 지금이 겨울 끝자락일지도 모른다는

[지애문학] 널 잊기까지 23일

너랑 자던 밤이 생각났다. 다리로 포갠 너의 허리. 데일 때까지 스친 입술. 가지고 싶어서 남겨 놓은 키스마크까지. 닿았던 살결. 안아 주면서 맡았던 냄새. 온몸을 끌어다 안다 못해 서로 가지고 싶어서 안달난 새벽. 또 일어나자마자 입술을 덧대어 하루를 시작했던 그 아침. 아랫입술을 가득 메울 때면 따뜻한 바람이 불어왔고 날 놀라게 하던 또 다른 입맞춤에 날 “사랑해”라고 말하게 만들었어. 알아? 처음 너랑 자고 나서 가벼운 감기에 걸렸던 거. 조금은 아팠어. 적당히. 콜록 거려도 괜찮았어. 들이키는 숨에서 너의 온기가, 내쉬는 날숨에서 네 냄새가 더 지독하게 남았으니까. 그동안 괜찮은 척 연기하느라 힘들었어. 안 보고 싶은 척. 그럭저럭 잘 지내는 척. 실은 무지 연락하고 싶었어. 정말 정말 보고 싶었고 만나고 싶었어. 견디지 않은 척. 기억에조차 사라져 까먹은 척. 하지만 몸은 널 잊지 않고 있더라. 퇴근길. 너랑 자던 그 밤이 생생하게 떠오른 저녁.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단 걸 깨달았다. 며칠이 지나야 할까. 널 완전히 잊기까지. 기억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정말 정말 보고 싶어서 나는 괴로운데. 너와의 밤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안달나 있는데. 내 곁에 잔상이 이리도 오래 갈 줄이야……. 다정히 부르던 나의 이름. 사랑스러운 너의 퉁명한 대답. 침 삼키는 소리까지도 들릴 만치 가까웠던 우리 사이. 사라지고 만 너와의 밤. 공허함 속에서 널 잊었다고 생각했을 때. 마지막까지 남았던 작은 불꽃이 더욱 강렬하게 타오르다 꺼지고 말았다. 이제 더는 몸조차 너를 그리워하지 않는다. 더는 생각나지 않고. 기억나지 않는다. 어느 순간 너에게 빠져든 것처럼, 갑자기 부는 바람처럼 네 마음 바깥으로 스치고 말았다. 단숨에 벌어진 이 일에 완전히 너를 잊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동안 괜찮다고 생각하면 괜찮아지는 줄 알았는데. 정말 정말 보고 싶어도 정말 정말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 다 되는 줄 알았는데. 너를 완전히 잊기까지 23일. 그 긴 시간을 견디고 또 견뎌내어 다시 살아난 마음. 이제야 숨 쉴 틈을 발견했다. 언제나 넌 마지막 순간에 “사랑해”라고 말했어. 끝까지 밀어 넣을 듯 날 가지고 싶다더니. 그건 아니었나봐. 날 사랑한다는 말은, 다시 말해 날 책임지겠다는 말이니까. 책임까지는 지고 싶지 않은 그런 관계였으니까. 허공에 사라진 고백에 더는 신을 믿지 않기로 했다. 신이 나를 배반한 게 아니라 신을 믿는 사람들 때문에서라도 믿지 않기로 결심한 것이다. 가끔은 잠만 자고 그러려니 하는 사람들이 부러워. 나도 책임 없는 쾌락만 느끼고 손절하고 싶은데. 그게 안 돼. 그만큼 사랑해 주고 싶은 마음이 크니까. 나쁘다는 거 알지만 어쩌면 책임 없는 쾌락이 더 나을지도 몰라. 너무 힘드니까. 힘들 바에야 쉽게 고통을 잊어버릴 수 있었으면 싶을 정도로 힘들었으니까. 긴 시간이었다. 책임 없는 쾌락이 이어졌다면 짧아졌을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참아야 했다. 더는 그런 관계를 원하진 않으니까. 이제껏 사랑인 줄 알았던 관계가 몸조차 원하지 않는 아픔뿐이라는 걸 지금에야 알았으니까. 날이 풀린 게 느껴졌다. 이제껏 견뎌낸 지난한 계절처럼. 더는 네가 떠오르지 않게 된 지금처럼. 모든 일이 풀릴 것만 같았다. 신혜야, 견뎌내느라 고생 많았어. 더욱 내 마음을 끌어 안아주었다.

[지애문학] 그날 밤 연락하지 않은 건 자존심 따위를 지키려는 게 아니야

옛날 일들이 떠올랐다. 갑자기 떠오른 일들에 기분이 울적해졌다. 그리고 생각했다. 휴우증은 여전히 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떠오르는 걸까. 아닌 것 같다. 그때 그 상황으로 돌아간다면. 분명히 뺨을 때리고 말았을 거다. 불쾌감, 적의, 분노, 배신, 파괴, 한순간의 말들로 사랑했던 그 사람과의 모든 기억이 얼룩지고 말았다.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은 ‘새로운 친구’ 목록에서 적의로 가득한 그 얼굴이 역겨웠다. 오늘은 그냥 두지 않았다. 마음먹은 대로 움직였다. 프로필까지 차단. 이젠 기억에서 완전히 지워졌으면 좋겠다. “누구랑 톡하는데 심각해?” “아냐, 오빠.” 볼 새라 폰을 끄고 배에 누워 만지작거리며 발을 흔들었다. 뚫어지게 바라보는 눈빛이 닿았다가, 미끌거리다 다시 닿으며 마주치고 떠나기를 반복했다. 또 시작이다 그런 표정. 귀여워. 관심 끌고 싶은 마음마저 귀엽게 봐주는 느낌이 귀여워 미치겠다. 힘들다는 듯 머리 위에 손을 대고 쓰다듬는 이 순간이 마냥 좋았다. 너무 가볍지도 너무 무겁지도 않은 그런 기분. 사람으로 받은 상처 사람으로 해결하란 말이 떠올랐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 같다. 후유증조차 경험할 겨를도 없이 빠르게 기억에서 사라지면 좋을 텐데. 오빠와의 데이트 중에도 아문 상처는 이따금 되살아난다. “삐질 때마다 달래주는 거 안 힘들어?” “웬일이야? 그런 걸 물어보고.” 아니……. 여기까지. 더는 잇지 않았다. 오빠는 아직도 생각이 많아질 때마다 하는 특유의 생각을 모른다. 그냥 내뱉은 말인 줄 안다고. 장난감처럼 만지작만지작, 그러다 상상에 빠진다. 힘들었을 그 때, 너한테 연락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딱 한 번 있었다. 추했다. 뒤돌아보지 않기로 했는데 금세 돌아서 엉엉 울고 말았으니. 그 모습 하나까지 남김없이 발라먹듯 이용해 먹었다. 그리고 더는 외로워도 슬퍼도 힘들어도 뒤돌아서지 않기로 했고 한 번도 뒤돌아서지 않았다. 며칠 전 그 밤만큼은 불안감에 휩싸인 마음을 달래느라 정말 많이 힘들었다. 힘겨운 그 밤을 한 걸음 한 걸음 빠져나오자 걸어온 발걸음을 되짚어봤다. 칭찬했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우리 지애 많이 컸어. 연락하지 않기를 정말 잘했어. 만약에 말이야. 다시 그 새끼에게 돌아갔다면, 그 품에 안겼을 땐 괜찮을지는 몰라도 또 다른 차원의 후유증을 남겼을지도 모른다고. 때로는 외롭고 고달픈 순간을 정면으로 맞서야 할 때도 있는 거라고. 하나의 교훈을 깨달았다. 넘어서기 어려운 산을 지나가면 육체적으로든 감정적으로든 감당 못할 기쁨이 찾아온다는 걸. 왜 삶의 맛 중에서도 쓴 맛이 진정한 맛이라고 말했는지 알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잠시의 후유증도 또 넘길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이미 넘긴 건 아닐까.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오빠.” 그새 내 마음처럼 부풀어 올랐다. 게이지 충전 완료. 조금씩 올라가는 입술에 달아오른 기분이 후유증조차
Today소랑 2026년 6월 21일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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