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소녀의 이름으로①] 죽음의 네 화살과 신앙의 해방… 탈교의 끝에는 소녀가 있었다

2025년 11월 27일
기독교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려던 때였다. 기독교가 진리를 탐색하는 길이 아니라 오히려 삶을 왜곡하고 소진시키는 신념 구조로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기독교적 삶은 심리적 탈진을 야기했다. 누군가에겐 여전히 의미 있는 신앙이라 해도, 기독교만의 배타적 복음주의는 성서의 민낯을 깨달은 이에게 더는 도움이 되지 않는 체계로 기능했다. 교회를 탈퇴한지 10년이 흘러서야 미신으로 인식하기에 이른 것이다.

[건조한 기억모음⑥] [1] 11년 전, 금빛 하늘 아래… 아이들의 힘찬 응원가 “빠따빠따빠따팀”

크리스마스 시즌도 벅찼는데, 여름방학까지 바빠진 건 신학교에 들어간 뒤부터였다. 교회 수련회에 따라다녀야 했는데,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교회학교와 중고등부, 청년부까지 모두 세 번. 한 번에 2박 3일에서 3박 4일씩, 한 달 가까운 시간을 교회에 바쳐야 했다. 그래서 가기 싫었다. 혼자 유유자적하게, 내 시간대로 여름을 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알바비 때문에 그러니? 목사님이 줄 테니까, 좀 가라.” 나는 결국, 하는 수 없이 교회 스케줄에 맞춰야 했다. 중고등부와 청년부까지는 수월했다. 어차피 프로그램은 이미 짜인 각본대로 움직이면 되었기 때문이다. 큰 업체에서 진행하는 행사라 교사 자격으로 아이들을 케어만 하면 됐다. 예배도 드리고, 물놀이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었다. 밤에는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산책도 하면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몸치 박치였던 내가, 이 세계에선 인기 교사? 문제는 교회학교였다. 중고등부와 청년부가 전국 단위로 여는 빅 텐트라면, 교회학교는 강원도 영동 지방의 교회들이 모여서 여는 스몰 텐트 수준이었다. 그러니까 나의 일손이 필요한 규모의 여름성경학교인 것이다. “선생님, 나가서 율동 좀 추세요.” 몸치 박치인 내가? 예배 중 갑작스러운 부탁에 시끌벅적했던 대성전이 한순간 고요해졌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거부 의사를 밝혔지만 두어 번만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시작부터 어긋나 버렸다. 말 그대로 무대 위로 나올 때까지 기다린 것이다. 나는 마지못해 무대 위로 올라갔고 속으로는 울면서 어설프게 율동하고 말았다. 동시에 마음의 상처도 입었다. 나와 이 여름성경학교는 맞지 않는 옷 같았다. 혼자 상처를 다독이다가 문득 한 가지를 깨달았다. 규모도 작고 나의 손길이 필요한 여름성경학교라…. 반대로 내가 나설 수 있는 무대이지 않을까. 무언가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할 수 있다’는 희망과 용기를 안고 예배 중 율동과 게임 등 다양한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풀이 죽어 있던 교사가 갑자기 의욕 넘치는 모습을 보게 된 아이들도 나를 따르기 시작했다.

[건조한 기억모음⑥] [2] 한여름 소년은 보았다 목마른 너의 가능성을

2025년 07월 25일
신학교에만 입학하면 뭐든 다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나의 허상은 단 한 달만에 산산히 부서졌다. 방학이 오기 전까지 나는 무력하게 지내야 했다. 목사는 끊임없이 “할 수 있다”는 새 능력만을 설교 했지만 나는 할 수 없다 는 무기력을 느꼈다. 1980년대의 부흥을 제창하는 교회에서 2014년도의 신앙을 가진 나와는 맞지 않았던 것이다. 우울증은 더욱 깊어만 갔다. 할 수 있는 사회에서 할 수 없다는 절망감은 나를 더욱 슬픔으로 몰아 갔다. 행위로 구원을 받는 교회의 능력주의가 빚어 만든 결과인 것이다. 필요할 땐 은혜를 찾으면서, 정작 중요한 순간엔 행위를 강조하는 교회의 이중적 신앙이 나를 절망의 수렁으로 빠뜨리고 말았다. 그런 어두운 수렁에서 나를 구해준 것은 하느님도, 목사도 아니었다. 먼 타지에서 나와 함께해 준 루디아 선교사였다. 루디아 선교사는 내가 다니던 학부 부설 기관에서 선교 활동을 위해 잠시 머물렀던 중년의 여성이다. 할 수 없다는 무기력에 사로 잡혔을 시절, 내게 가능성을 일 깨워준 사람이다. 11년 전 신문은 기록한다. “‘형제는 사람의 마음을 간파하고 그 사람에게 맞도록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방법론을 알고 있는 자다’라고 어두움 가운데에서 빛을 소개해주는 일이 있었다.” 교회에서는 무능력한 신학생, 할 줄 아는 게 없는 녀석, 심지어 눈치를 주기도 했다. 그러나 루디아 선교사는 남들이 보지 못한 나의 가능성을 선명하게 보았다. 그는 나에게 부활의 복음을 가르쳤고, 머지 않아 나는 신 죽음의 시대를 경험해야 했다. 그럼에도 루디아 선교사가 일깨워준 가능성은 훗날, 내게 재림 신앙을 되살리는데 영향력을 발휘한다. 언제나 교회에서 여름성경학교는 아이들의 삶을 바꿔 줄 기회라고들 광고한다. 그러나 정작 그해 여름성경학교는 아이들의 삶과 나의 삶을 바꾸지 못했다. 발견한 것은 있었다. 목마른 소년의 간절한 가능성을. 연결 기사 [건조한 기억모음⑥] [1] 11년 전, 금빛 하늘 아래… 아이들의 힘찬 응원가 “빠따빠따빠따팀”[건조한 기억모음⑥] [3] 수련회 때마다 반복된 ‘마귀의 역사’… 외로움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건조한 기억모음⑥] [3] 수련회 때마다 반복된 ‘마귀의 역사’… 외로움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2025년 07월 25일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수련회를 다녀올 때마다, 나는 감정 상하는 일을 경험했다. 목사는 매번 설교 시간에 나를 거론하며 “매번 삐지고 돌아온다”고 토로했을 정도다. 스스로 영적으로 깨어 있는다고 믿었던 목사는 이런 현상을 두고 ‘마귀가 역사한 것’이라고 정의하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마귀 역사’라는 말만큼 무책임한 단어도 없다. 한창 사춘기 시절의 아이들을 강제로 수련회 합숙소에 몰아넣는 것도 모자라 계속해서 기독교 사상과 이념을 주입한다면 어느 누가 즐겁게 받아들이겠는가. 설교 메시지도 탁월한 것도 아니다. “너희들은 죄인이야” “게임하지 마” “부모에게 효도해” 같은 직설적인 언사를 누가 좋은 마음으로 받아들이겠는가. 결국은 사람의 불완전성을 결함으로 비치도록 만드는 말들을, 이제 자라 나는 연약한 자아에게 화살처럼 찌르고 있으니, 어떻게 견디겠느냐는 말이다. 한국 개신교회는 유치원생부터 장년과 노년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메시지를 고수한다.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주장 말이다. 모든 이들에게 똑같은 메시지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던져 놓고 “이제 본질” “이게 진리”라고 주장하면서 정작 왜 진리인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그냥 믿기에 믿는 것이다. 사춘기 소녀 소년 모아“너는 죄인이야” 윽박만불완전한 인간의 존재 결함으로 몰아세우고공포팔이나 던져대니 마지막 수련회에서유일하게 말벗 되어준 고마운 형마저 떠나고나 역시 교회를 나선다 이제 자아가 성장하는 초등학생들에게는 효과적일지 모른다. 가장 연약한 자아를 가진 중고등학생들에게는 상처라는 사실을 교회는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자신의 생각을 말하게 하고, 하고 싶은 일들을 경험하도록 돕는 것도 모자라 아이들을 죄인 취급이나 하며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하길 바라고 있으니. 나의 감정도 다르지 않았다. 어느 때보다 민감하고 예민한 성정을 가진 나란 사람이 집단 공동체 속에 파묻혀 나의 나 됨을 잊어버려야 했으니, 감정의 진폭이 커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담임 목사는 일대일도 아니고, 모든 교인들이 보는 앞에서 “재현이는 이번 수련회에서 삐지지 않았다”며 “성령 충만해선지 이야기까지도 주도한 걸 봤다”는 걸 보면 참, 기가 막힐 따름이다. 2014년, 여름성경학교를 통해 나는 가능성을 보았다. 어머니의 말씀이 떠올랐다. 유아기 시절의 나는, 어른들에게 재롱 떨 줄 아는 아이였다고. 어렸을 시절 잃어버린 나의 본 모습을 여름성경학교를 통해 발견한 것이다. 교회의 억압적인 구조와 폐쇄적인 환경, 죄와 선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이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가두고 있었다. 나의 마지막 수련회는 2015년이었다. 군 생활을 앞두고 흰돌산 기도원 수양관으로 향한 것이다. 이번만큼은 토라지지 않았다. 나와 함께해 준 형님이 있었기 때문이다. 형님은 유일하게 나의 이야기를 경청해 주었다. 머지않아 형님은 교회를 떠나고 말았다. 나는 무척 아쉬웠다. 간만에 좋은 어른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생각해 보면 그동안 나에게 말벗이 되어준 사람은 없었다. 나는 성경을 말하고,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데까지 관심을 기울일 또래를, 어른을 만나지 못했던 것이다. 딱 교회의 수준에 맞는 그런 어른들을 만난 것이다. 그런 어른을 만나러 교회를 다닐 필요는 없다. 교회를 벗어나, 그런 어른을 만나야 한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아니, 그런 어른이 되면 좋겠다고 다짐했다. 연결 기사 [건조한 기억모음⑥] [1] 11년 전, 금빛 하늘 아래… 아이들의 힘찬 응원가 “빠따빠따빠따팀”[건조한 기억모음⑥] [2] 한여름 소년은 보았다 목마른 너의 가능성을

[건조한 기억모음④] [2] 무신론 선배에 민주당 지지자, 술 처먹고 드르렁… 그런 긱사 또 없습니다

2024년 04월 01일
“야 재현아, 야식 먹으러 와라!” 맞은편 박 선배네 방에는 여러 선배들이 야식 먹을 채비를 마치고 있었다. 전체적인 분위기를 둘러보았다. 내가 껴들어도 되나 싶었다. 헬스에 미친 장 선배, 민주당 지지자 박 선배, 기도원에서 살다시피 하던 대풍이까지. 박 선배네 방은 박근혜 지지자에 보수적 신앙인이던 나를 품어주는 곳이었다. 2013년 대학교에 입학한 첫 학기 새내기에게 군기 대신 야식 챙겨주는 고마운 선배를 만났다. 이듬해 2학년 근대교회사 시간, 교수의 그 말 한 마디에 박 선배가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났다. “세월호도 안타까운 사건이지만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건 자제해야 하죠.“ 정확히 어떤 부분에서 발끈했는지는 알지 못했다. 교수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말 안타까운 일인 건 맞지만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사람들이 문제라고 봤다. 선배는 달리 생각하는 것 같았다.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던 교수의 손가락 끝에는 정치인이나 언론인이 아닌 유가족에게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박 선배는 그런 사람이었다. 억울하게 죽음을 경험한 유가족에게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학생들의 더 나은 복지를 꿈꾼 사람이기도 했다. 학생복지위원회가 선배의 손으로 꾸려졌다. 총학생회장 후보로 나섰지만 아쉽게도 낙선했다. 때론 팩트폭행도 서슴없었다. “그 선배 참 영적인 사람 같다”던 말에 “그리 쉽게 사람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며 실수 할 뻔한 내게 충고를 던지기도 했다. 매일 밤마다 카페 알바 하느라 삶이 고돼 보였다. 자정 넘어 몰래 문 좀 열어 달라고 부탁하면 들어주지 않을 기숙사 층장이 없을 정도였다. 신학생이라고 다 같진 않아 힘들 땐 술 한 잔 걸치기도… 다채로운 정체성 스펙트럼 나와는 생각이 다를지라도 정겹던 “야식 먹으러 와라” 그 선배들은 뭐하며 지낼까 방 맞은편에 살던 박 선배는 시간 날 때마다 나를 불렀다. 바쁜 시간 짬 내어 맛있는 것 좀 먹으라고 초대한 것이다. 선배가 민주당을 지지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래서 교수가 맞는 말 했다고 생각했어도 저런 말은 선배가 듣기에 몹시 거북하겠구나 생각했다. 거기에다 같은 정치 성향의 장 선배, 무신론자 Y 선배, 새벽까지 롤이나 처하던 서 선배, 꼭 나한테 군기나 잡던 김 선배… 소명을 가지고 신학교에 입학한 신학생들이 다 한 마음 한 뜻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었다. 헤매고 헤매던 이도 있었다. 기숙사에서 일찍 나와 복사실로 향했다. 신학생이 쓴 걸로 보이는 아래아 한글 파일이 열려 있었다. “내가 왜 이 학교에 왔는지 모르겠다. 그냥 아버지가 목사 됐으면 좋겠어서 왔다 (……)” 선배들이 하나 둘 졸업과 동시에 학교를 떠나기 시작했다.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학교에는 선배가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뿐이었다. 학점 챙기느라 후배들 챙겨줄 겨를도 없었다. 나는 선배들처럼 후배에게 밥 사주고 야식 챙겨주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빌런에 가까웠다. 아니 빌런 그 자체였다. 한 후배와 어쩌다 친해졌다. 신학교 생활에 압박감을 느낀다더라. 아버지가 명망 있는 목사라 행실을 바르게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었다. 나와 함께라면 압박에서 벗어난다는 고백을 들었다. 밖에서 고기에다 술 한 잔 곁들였다. 언제는 떡이 되어 내 방에 찾아와 침대에 다짜고짜 누운 일도 있었다. 가슴 한 편이 아려왔다. 몇 마디 잠꼬대에도 조용히 뉴스를 보았다. 지나가던 후배들은 한숨이나 눈치를 주었다. 그는 외국어에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건조한 기억모음④] [1] 가나안이라 믿었던 신학교에서 모든 것이 무너지고

2023년 10월 02일
유아교육과 여자애들이 내 번호를 물어봤다는 선배의 말이 농담인 줄 알았다. 지금이라면 모든 번호 다 캐내었을 테지만 그땐 그럴 마음이 없었다. 신문과 성경을 든 블랙 톤 뿜뿜인 내게서 어떤 매력을 느꼈을진 모르겠다. 신비주의 끝판 왕과도 친해지고 싶다는 의미 아니었을까. 뒤늦게 깨닫는 일들이 있다. 소중한 줄 알지 못하는 순간들이 얼마나 많은지. 돌이키지 못할 시점 언제나 과거와 만날 때면 아쉬움만 뒤따른다. 의외였다. 후회의 낯빛이 머문 자리는 여자애가 아니라 남자애였다. 같은 날 신학교에 입학한 영어과 동기에게 측은지심 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신학과를 같은 믿음, 같은 신앙 가진 이들이 비슷한 소명을 가지고 오는 데라고 생각한다. 나도 그런 줄 알았다. 학부 4년 동안 눈으로 본 믿음의 개수만 가지처럼 뻗어나갔다. 중도에 보험설계사, 바리스타, 편의점 알바로 꺾인 신앙인만 부지기수다. 뜨거운 믿음을 가지고 걸어간 인간도 있었지만 왜 왔는지 모를 인간도 있었다. 소명(召命·calling)하느님의 일을 하도록 하느님이 인간을 선택해 부름을 이르는 말. 개신교회에서는 일반 신자에게 성경 구절을 개인적으로 깨닫고 하느님께서 자신을 불렀다고 믿으며 목회자에게는 목회자로서의 할 일을 성경으로 말씀한다고 믿는 신앙을 가진다. ◇특명, 대학 첫 과제2013년 대학 입학한 그 시절은 빡센 기도와 뜨거운 신앙이면 다 되는 줄 알았다. 오리엔테이션 같은 조로 배정 받은 서안이를 보며 든

[건조한 기억모음③] [2] “담임목사는 참 욕심이 많다 그려”

2022년 07월 13일
그날 해가 져도 ‘한 장만 더 붙이자’는 마음으로 홍제동 거리를 누볐다. 좁은 골목, 가로등 불빛조차 닿지 않는 곳에서 혹시나 전단지를 떼어내는 건 아닐는지 조마조마했다. 창립기념일을 준비하며 교회에 헌신할 수 있음이 감사했다. 담임목사는 주일예배 때마다 기도했다. “고사리 손으로 드려지는 주일학교 헌금도 받아주시고…….” 작은 자 한 사람도 교회를 위해 일한다면 하나님은 작은 자라도 기억해주실 것이란 믿음을 가졌다. 따라서 배고프고 목이 말라도 칠흑 같은 어둠 뚫고서 앞으로 내 모교가 될 제일고 길목을 지나쳐 관동중 후문으로 걸어갔다. 목사는 교인의 믿음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헌신을 생각하는 목사의 인식도 아둔하기 짝이 없었다. 당연히 은혜를 받은 만큼 교회에 충성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문제는 이 교회가 작은 교회란 점이다. 교인들 모아봐야 300명도 되지 않으며 2014년 기준 한해 헌금액은 2억에 불과했다. 목사는 설교를 통해 당당히 말했다. “그래도 강릉에서 이 정도 교인수면 곱하기 두 배는 쳐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주먹구구 방식의 경영은 중학교 2학년 소년에게 교회 방송실을 맡기기에 이르렀다. 방송실뿐만 일까. 회계부터 식당까지 교회 곳곳 교인들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주일학교는 대학생 누나들을 교사로 삼았고, 피아노 반주는 중학교 여학생에게, 교회 집사와 성도들은 한복으로 갈아입어 주보를 나눠주었다. 남자 교인이라 해서 일이 없던 건 아니다. 차량운행과 행사 때마다 필요한 장비 이동에 교회가 헌신으로 인력을 부렸다. 게다가 토요일은 전교인 대상으로 시내 전도활동도 이어갔다. 거기에다 주일예배, 수요, 금요철야, 학생, 새벽예배에 십일조까지 강조했다. 상식적으로 이런 교회에 헌신할 젊은이는 아무도 없다. 많아봐야 다섯 명 유동인구의 청년들도 대학생활을 병행했을 뿐, 직장생활 병행하던 젊은이는 한두 명에 그쳤다. 뭣 모르고 교회에 코 꿰어 신앙을 이유로 헌신한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었다. 언젠가 소개할 ‘그 누나’는 평일엔 대학생활, 주말엔 교회생활에 온몸으로 투신했다. 밤 10시 넘은 토요일 저녁까지 교회 사무실에 남아 퀭한 얼굴로 묵묵히 일할 뿐이었다. 그때 누나의 한숨이 가슴을 할퀸다. 성경 어디에도 교회 일에 충성하라는 구절은 없다. 예수는 자신을 위해 분주히 일하던 마르다에게 말했다. “주님의 일은 많지 않거나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누가10,42) 분명히 예수는 분주하게 일하던 마르다보다 자신의 가르침을 듣던 마리아의 행동을 긍정했다. 교회는 교회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노동과 봉사를 필요로 한다. 교인들의 헌신과 봉사 그 자체가 잘못된 일은 아니다. 예수는 예수 자신에게 대접하던 마르다의 마음까지 문제 삼지 않았다. 그러나 참여교회 담임목사는 교인의 순진한 헌신을 이용했다. 결코 과한 노동에 “그만하라”는 말을 하지 않은 것이다. 나에게 만큼은 한 차례 “방송일이 힘들면 언제든지 그만두어도 좋다”고 말했다. 힘들어서 방송 일을 그만둔 이후, 교회 보직은 단순히 방송 업무를 없애는 데서 그쳤다. 주일학교 교사 보직 등 다른 보직 이동은 없었다. 문자 그대로 방송 업무라는 짐을 없앴을 뿐이다. 업무분장도 이럴진대 방송실 자체를 개편했느냐, 그렇지도 않다. 여전히 누군가는 맡아야 할 일로 남은 채 다른 교인으로 채우는 방식으로 시스템을 유지했다. 누군가가 알아주지도 않는다. 누군가가 알아주는 게 중요하냐고 물을지 모른다. 신앙의 인지부조화는 허탈감에서 비롯한다. 교회에 열심히 충성했지만 항상 좋은 결과가 기다리지 않는다. 실패의 원인을 교회와 신앙에 최선을 다하지 않으므로 보는 교인이라면 더욱 느낀다. 교회 봉사라는 행동 속에 기복(祈福)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욕망이 숨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누군가가 알아주는 건 중요하다. 알아주는 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누군가 알아주길 바라는 내 욕망을 보기 위해서라도, 누군가 알아주는 게 중요하다. 한국 개신교회가 이익집단으로 전락하는 사이. 교인들의 헌신과 노고는 고작 교회라는 이익집단에 충성한 광신도 이미지로 굳어갔다. 사회는 이 노고를 우습게 생각한다. 교회는 순진한 사람을 이용해 자기 이익에 충실한다. 교회를 나오면 누구도 책임져주지 않는다. 당신의 그 헌신이 천국에서는 해같이 빛나기는커녕 이 세상에서 목사의 그 400만원 월급*만 든든해질 뿐이다. 그러므로 교회에 충성할 필요가 없다. 하느님도, 예수도 그런 충성을 바란 적이 없다.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지, 제사가 아니다. 불살라 바치는 제사보다는 너희가 나 하나님을 알기를 더 바란다.”(호세6,6) *목사가 설교 중 실제로 한 말.

[건조한 기억모음③] [1] 저녁해가 뉘여서도 2학년 중학생은 전단지 나르며, 좋은교회 홍보했다

2022년 07월 13일
매년 4월 2일은 교회 창립일이다. 참여교회는 창립기념일이면 여느 교회 못지않게 갖은 행사를 개최한다. 뷔페를 예약해 배터지게 먹은 해도 있었고 큰 규모 식당을 운영하던 집사의 사업체에 힙 입어 식후(式後)를 잇기도 했다. 발레단 선율의 무대, 이름 모를 목사가 기타 치며 노래 부르는 행사 광경은 낯익다. 언젠가는 가스펠 매직(Gospel magic) 마술사 이현 전도사를 초청했다. 플랜카드엔 띄어쓰기 없이 ‘이현전도사’로 돼있기에 주일학교 학생과 “저거 ‘이현 전도사’가 아니라 ‘이현전 도사’님 아니냐”고 농담 건네곤 했다. 8주년은 유별났다. 231제곱미터, 그러니까 70평 지하에 세 들던 교회가 무슨 돈으로 시 아트센터 900석 홀을 대관했는지 모르겠다. 북한 이탈주민이 모여 결성한 ‘평양민족예술단’까지 초청했던 2008년은 역사상 가장 큰 행사를 개최한 해였다. 그땐 방송실 개념도 없어서 음향은 외주 받았고 중년 집사가 프리젠테이션(pptx)으로 방송 업무를 진행한 해였다. 중학생 2학년일 내게 맡긴 일은 없었지만 후술할 기억하는 한 가지. 교회는 각 부서별로 제각기 창립기념일 준비로 분주했다. 창립기념일이 지나 목회자주일이던 5월 마지막 주. 주일학교 교사인 내게 방송실 업무가 주어졌다. 교회는 조금씩 교인들에게 고유 업무를 배정하는 방식으로 꿈틀거렸다. 중학생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갓 중학생이 주일학교 교사되기까지 마지막 겨울방학 끝으로 졸업 딱지 뗀 건 초등학교만이 아니었다. 교회도 주일학교를 운영했고 고학년 배지와도 작별했다. 5000원 문화상품권과 꽃 한 송이, 개역개정 성경을 선물로 받았다. 처음 내 소유의 성경책을 받고서 이상한 기분에 좋으면서도 낯선 감정을 느꼈다. 이상한 기분에는 책임감이 자리했다. 이제 마음대로 어른들만의 11시 예배에 참석할 수 없게 되었다. 11시 예배와 토요일 청년학생 예배에 의무라는 딱지가 붙은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담임목사는 설교를 못했다. 얼마나 못했느냐 하면, 중학교 1학년이 들어도 무슨 내용인지 모를 만큼 따분한 수준이다. 논리 정연하지 않았다. 이 말 저 말 섞어가며 열변을 토하는 게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았다. 11시 예배 또 다른 이름이 ‘어른예배’인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초반엔 청년학생 예배에도 불참했다. 담임목사가 설교했기 때문이다. 뭐 하러 재미없는 노래나 부르고 의미 없는 설교나 듣기 위해 아까운 토요일 오후를 낭비해야 하는지. 목사는 예배 불참에 대단히 서운해 했고 부담스럽게 참석을 요구했다. 주일학교를 졸업하자 바로 주어진 업무는 주일학교 보조교사 역할이다. 오랜 시간 고학년 위치에 서다보니 저절로 주어진 셈이다. 당시 교회에는 지속적으로 가르칠 교사가 없었다. 한두 달 하다가 그만두기 일쑤였다. 집사 직분의 교인들이 거들었다. 그땐 공과로 가르치지 않았으므로 같이 노는 게 전부였다. 중학교 3학년이 되고서야 본격적인 반 배정이 이루어졌다. 담당 학년은 5학년. 학생만 두 사람. 한 여자 아이는 지금까지도 교회 다니지 않지만 다른 남자 아이는 현재 교육 전도사가 되었다. 공과(敎會學校 敎材)교회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재를 의미하며 어원은 알려진 바 없다. 영세한 교회는 교단에서 제작한 일년 단위 교재를 교사들에게 나눠준다. 이 과정에서 교사용 교재를 통해 교육한 후 현장에 투입한다. ◇내내 울면서 예배를 드리던 먹먹한 마음 아이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그 아이는 덩치가 컸다. 예배 후 몸으로 게임하던 시간, 남들보다 빠른 손으로 카드를 뒤집자 서운함을 못 이기자 내게 충돌하며 분풀이 했다. 놀란 나머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주위 교사 집사들이 중재하고 말았다. 내가 담당하던 아이가 자기감정을 마구 풀어내는 모습에 나약한 내 모습을 보았다. 이럴 땐 어떻게 달래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그 아이는 토라져놓곤 뒤돌아보지 않았다.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복구하기 어려운 절망스러움이 괴롭게 만들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11시 예배에 몸을 실었다. 훗날 찬양 인도하던 꽁지머리 집사님이 방송용 카메라를 구했다며 찬양 부르던 중간 중간 돌아다니면서 이모저모를 촬영했다.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저 가련한 아이의 마음을 어떻게 돌봐야 할지가 우선인 탓이다. 시간이 흘러 집사님은 녹화 영상을 다시 보는 과정에서 그날 왜 울었는지를 물었다. 멋쩍은 미소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아이 할머니는 지역에서 이름 난 불교 신도였는데 손자 녀석 교통사고 난 후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자 개종했다. 다른 교인과 갈등을 빚은 끝에 교회를 떠났고, 더는 그 아이와 만나지 못했다. 중학생 시절만 해도 신앙은 분명했다. 이 교회가 아니면 안 된다는 믿음. 그 나이 때 경험한 어른들의 일탈과 다툼을 지켜보며 마음으론 ‘저렇게 살지 말아야겠구나’ 다짐했다. 따라서 어떤 갈등이 벌어져도 이 교회를 벗어나지 않을 단단함이 남았다. 문상만 받고 그만 다니는 아이들과 생각이 달랐다. 내게 주어진 일이 있다면 끝까지 책임져야 했고 잘 해내야 한다는 순진함을 심어준 이는 누구였을까. 우울증이 심화되어 간헐적으로 교회를 나가기 전까진, 한 번도 주일예배를 결석하지 않았다. 이 정직함과 성실함은 어디에서 배운 걸까. 중학교 올라가자마자 교사로 주일학교 졸업하고 주어진 첫 근무는 ‘보조교사’ 역할 고학년에서 그대로 교사직 이어지자 9년간 직무 맡아 초등생 시절과 달라진 환경 ①관심사 공유할 이 없어 ②평범한 욕망, 죄악으로 ③성찰과 성장 없는 신앙 이 모든 게 우울증 만들어 그래서 남은 질문 신앙과 삶에서 불일치 일자

[건조한 기억모음②] [1] “교회 누나를 지키지 못한 내가…”

2021년 02월 28일
누나에게 마음 문을 연 건 순진했기 때문도 맞지만 계속해서 나에게 다가온 덕분이다. 매년마다 갱신하듯, 헌법상 연애금지조항은 살아남았고, 급기야 대학 입학에 이르러야만 연애 가능하다고 못 박아두기에 이르렀다. 스무 살 되기 전, 공부와 신앙에 매진해야 한다는 자발적 의지가 빚어낸 참사다. 누나는 진리를 알고 싶어 했다. 제도권 교육처럼 신앙에도 방법이 있고, 절차에 따른 순서가 있으면 누구보다 좋아했을 것이다. 고등학교 2학년 시절을 보내던 나 역시 같은 생각이다. 누나도 나도 성경공부 교재가 있기를 바랬다. 그러나 시중의 빈칸 채우기 방식의 교재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성경 내용 전체를 관통하고 하나님이 이끄시는 역사를 통찰하며 성령의 감동 속에서 신앙의 열정을 느끼게 만들 분명하고 확실하게 진리를 가리킬 그런 성경공부가 절실했다.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절대적 믿음을 가진 나와 누나는 진리를 사모하고 갈급했다. ◇진리에 대한 갈급함으로 덧입은 불안과 우울 매번 170-180등 하다가 반 1등을 맛보니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래봤자 전교에서 가장 공부 못하는 반 1등일 뿐이고, 내신 2-3등급에 불과했지만 고등학교 1학년은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는 믿음이 강해진 시기였다. 아침 6시 반에 일어나 씻고, 7시에 출발할 무렵 삼성뮤직 어플로 흘러나오는 영산싱어즈와 헵시바콰이어 예배 실황은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이른찬양예배 이름으로 40분, 학교로 걸어가는 통로가 예배길이었고 복음로(福音路)였다. 7시 30분, 학교에 도착하면 의자에 앉아 1분 간 선포기도로 하루를 시작했다. 빗자루 들어 교실 이곳저곳 쓸고서 바른 자세로 0교시 수업 전까지 성경을 읽었다. 피곤함이 몰려오던 1~2교시 쉬는 시간 제하면 모든 쉬는 시간엔 성경을 읽었다. 최대한 많이 읽고 싶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신학교에 입학해 한 번도 일독 못한 신구약성서를 고등학교 1학년, 4번이나 읽은 배경도 진리를 알고 싶은, 진리를 찾고 싶은 갈급함 덕분이다. 점심에는 20분 방언으로 기도했고, 저녁에는 30분. 때로는 금식하며 1시간 하나님께 내어드렸다. 밤 10시 야간자율학습 마치고, 버스에 타면 저녁찬양예배가 이어졌다. 또 다시 헵시바콰이어가 끊임없이 찬송을 부르며, 방방 뛸 듯한 기분으로 은혜성가 326장 마음속으로 외쳤다. 내일이란 없었다. 그저 오늘 열정으로 찬양하며 하나님께 나의 모든 것을 드리는 걸로 족했다. 진리에 대한 갈급함. 어디에서부터 메말라 간 걸까. 새롭고 낯선 고등학교에 발 딛자 불안과 우울함이 몰려왔다. 밤 10시까지 학교에 남아 공부해야 한다는 시각적으로 갇힌 공간이 제공한 불청객이다. 담임목사는 고등학교 입학했으니, 새벽예배 나오라고 독촉했다. 밤 11시에 도착해 12시 무렵에 겨우 잠들던 때에 새벽예배라니. 너무하다 생각도 들었지만, 이마저도 견딜 수 있었던 건 이유 없이 찾아온 마음의 불안, 원인을 규명하기 어려운 우울함이 진리에 대한 갈급함으로 덧입은 덕분이다. 진리를 갈급해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는 그런 영적인 세계 알고자 진리를 잡았고 영적 세계를 갈급하는 이 찾아 헤매던 누나와 만나 허무를 보았다 방공호 바깥서 두들기는 우울과 불안을 만나 탈출 ◇누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말했지만 그런 누나는 나의 신앙을 대단하게 생각했다. 오히려 귀감으로 삼았기에 누나가 고마웠고, 애틋했다. 서로가 신앙의 동지로 생각했다. 교육감이 바뀌면서 시대도 바뀌었다. 야간강제학습이 말 그대로 야간자율학습으로 바뀌었다. 선생님과 가까웠던 사이여도 갈라설 건 갈라서야 했다. 자유를 찾아서 학교 건물을 나섰다. 핑크색 슬리퍼 신은 채 10분 언덕 더 올라가면 만날 수 있는 도서관으로 향했다. 커피와 초콜릿 다이제, 조선일보는 자유로운 환경에서 손에 익었지만. 어렵게 획득한 자유가, 손 위의 그 자유가. 자유가 아니라는 사실을 불안과 우울함이 알려주었다. 원인을 알 수 없었다. 진리가 생각나지 않았다. 당장에 닥친 원인불명 고통을 해치우고 싶었다. 붙잡으면 붙잡을수록, 진리는 내게서 멀어졌고 쳐다만 보아도 행복을 느꼈던 그 진리가 보이지 않을 저편으로 사라진 사실을 깨달았다. 더 불안했고, 더 붙잡고픈 그 무언가를 찾아야 했다. 그래서 누나를 붙잡았다. 말을 걸었고, 사랑한다고 말했다. 말했지만 말 걸면 걸수록 멀어졌고,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보이지 않는 저편으로 숨었다. 서운했다. 화가 났다. 잡으려고 손 내밀면 잡힐 듯 말 듯, 풍선처럼 미끄러져 도망간다. 누나는 장문의 메시지를 보내었다. “우린 항상 깨어있어야 해”라는 문장의 편지에 분명 내가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을 만한 사람”이고 자신에 의해 “슬픔이 오고 괴롭다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며 “낙담과 좌절하는 영”까지 데려와 불안과 우울을 해명했다. 기어이 누나는 전 남친을 소환했고 독신을 거론하며 매우 조심스럽게, 예민한 것들을 조금씩 움직이는 마음으로 장황하게 설명했다. “애정 표현들 하나님 안에서 같은 천국 백성으로서 받아들이겠습니다.” 언젠가 누나가 나에게 쇄골을 보여주었다. 자그마한 눈망울, 깨끗한 이마. 누가 봐도 순결한 대학생 누나가 여자로 보이지 않았다. 나와 함께해 준다는 기쁨만이 가득했다. 정말 다시 고마웠고, 사랑했다. 남들보다 “영적인 티”를 냈던 것처럼 남들보다 감성적이고, 남들보다 사랑을 많이 말했던 모습이 누나에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방해되는 이성관계” 쯤으로 보인 모양이다. 만일 성경을 편협한 신앙이 아니라, 고결한 문학으로 접근했다면. 풍부한 언어로 사랑의 다양한 결들을 보이며 누나를 즐겁게 해주지 않았을까. ◇방공호를 나와서 발견한 생명 누나는 “어느 정도로 영적으로 살아야 하는지 도통 지혜가 나오지 않는다”고 고민을 털었다. 학교에서 성경을 직접 읽을 시간에 누나는 ‘기독교 강요’에 도전했다. 혹시나 교리를 집대성한 칼빈에게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이쯤이면 읽어도 되지 않겠냐고 내게서 허락을 구했다. 대답하지 않았다. 그 무렵, 교회를 나왔기 때문이다. 방송실 근무가 교회 분열에 불 질렀다. 전도사와 갈등을 빚고 인생 처음, 오랜 시간 교회를 나가지 않았다. 신학교로 향하려던 발걸음도 주춤했다. 서운함도 서운함이겠지만, 신앙을 유지하지 못한다는 죄책감이 영혼을 잠식했다. 침묵은 오랜 시간 이어졌다. 10년이 지나도 하나님께 모든 것을 가져다 바친 누나의 소식을 접할 수 없었다. 다시 생각해도 나는 영적인 사람이 아니다.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도 말이다. 정체불명처럼 등장했던 우울함과 불안은 허무할 정도로 단순하게 사라졌다. 교회를 나온 것 하나. 단지 교회라는 방공호를 나오기까지 죽을 만큼의 용기가 필요했다. 독가스도, 수류탄 하나 없이 평화로운 바깥 세계. 그 곳에서 이제 막 터오는 싹을 발견했다. 스피커로 흐르던 담임목사의 프로파간다가 들려오지 않았다. 바깥에서 성경공부하면 지옥 간다던 촌스러운 색감의 주보라는 삐라도 보이지 않았다. 미소만 짓던 빨간색 풍선의 누나도 사라져 찾을 수 없었다. 그곳 교회라는

[건조한 기억모음②] [2] 내가 왜 QT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2021년 02월 28일
재미도 없는 감성팔이 큐티 비평할 가치도 없는 설교들 무가치한 시간 보낼 바에야 대중 강연 들었어야 했는데 학생회 예배를 마치면 어색해지는 순간이 있다. 의자도 아니고 방 안에 모여서 양반 다리로 성경 한 구절을 읽으며 해석하는 일이다. QT(Quiet Time)라고 부르는 그 시간만큼 귀찮고 쓸데없는 시간이 또 있을지 모르겠다. 불편한 시간은 기독교 청소년 커뮤니티에서도 이어졌다. 신학생이 아니었던 고등학교 1학년 때조차 자고로 큐티는 인물과 사건 순서대로 본문을 이해하고 인물과 사건의 기록물을 시간 순으로 정리해 전후맥락 파악에 나서는 작업으로 시작해야 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나보다 나이 많은 형들의 우스꽝스러운 해석, 이를 테면 예배 생활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천관웅 목사의 찬양팀 면접에서 ‘제일 은혜 받은 때가 언제였느냐’는 말에 ‘어제의 주일예배였다’는 식의 감성팔이 해석은 들어주기 어려웠다. 돌아가며 오늘의 구절에 대한 은혜 받은 점을 나누기로 한 순서에서 유일하게 말이 길어지는 건 나뿐이었다. 솔로몬 행각에서 설교하고도 붙잡혀간 베드로와 요한에게서 목숨까지 불사하며 부활의 복음을 전파한 이들 모습(사도 3,11)을 조명했다. 그래봐야 상투적 신앙 간증일 뿐이고 고작 남들이 생각지 않은 시각일 뿐인데 내 뒤로 떠오른 아우라가 친근하게 다가오지 못하게 만드는 무언의 경계선이란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누나를 좋아한 이유 고등학교 입학하고 맞닥뜨린 불안과 우울의 두 괴물은 휴일과 평일을 가리지 않았다. 교회에서 진리처럼 가르치던 “하나님 한 분이면 충분하다”던 구호와 달리 교회는 정신적 문제를 해결하기 역부족이었다. 대인관계가 모자라다고 생각해 발 디딘 기독교 청소년 커뮤니티에서도 사람들과 어울리기 어려웠다. 늘 고민했다. 교회 안에서는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누나를 좋아한 모양이다. 누나도 진리를 알지는 못했지만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했고, 모르기 때문에 공부하려는 열의를 가졌다. 단지 모임에서 기타치고 드럼 내리치는 사람들과 부대끼던 분위기가 좋아서 모였던 형, 누나, 동생들과 다르게 진리를 찾고 싶은 열의를 읽을 수 있었다. 교회 아이들은 싱거웠다. 길어지는 말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자세도 없었고, 지겹고 재미없는 QT 시간이 끝나기를 바랬다. 누나와 계속해서 이어지는 끈끈한 영적 대화는 때로 말줄임표 늘어지는 침묵이 이어져도 즐거웠다. ◇교회 식구가 아니라 누나와 교제한 이유 애석하게도 참여교회는 이야기가 길어져야 마땅한 성도의 교제를 좋아하지 않았다. 자칫 친목으로 비화할 가능성이 농후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면. 최근 입수한 10년 전 라디오 기독교 방송국 음성 파일에서 알게 된 정보다. 지역교회 찾아가서 담임목사 소개하고 자기네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소개하는 단편 코너. 나도 참여해 집사님과 함께 담임목사를 칭찬했다. 다른 교회 파일을 찾아서 들어보니,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느꼈다. 유독 그 교회는 담임목사 대신 교인들만 나와서 교회를 안내하는 것이었다. 목사가 어떤 스타일이고 성향인지 익히 알고 있어 촉을 느꼈다. ‘이 인간 패싱(passing) 당했구만.’ 현재 사역 중인 전도사 형님에게 연락해 물었다. 놀랄만한 답변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 스승의 주일에 목사가 선물 하나 못 받았다고. 교인들은 설교 듣기 위해 교회 오는 게 아니라 친목하기 위해 그 관계가 재밌어서 온다는 사실을 알아맞히자 10년 전 내가 했던 칭찬이 떠올랐다. “목사님 아래에서 성도 분들이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일 때는 모이고 흩어질 때는 잘 흩어지는, 연대가 강하고 예수님 안에서 성도와의 교제 부분이 강하고 좋아요.”(2012. 12. 20) 교회를 나오기 전, 분석한 담임목사 설교 자료를 보이면서 신앙과 맞지 않으니 떠나겠다고 말하려고 계획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평가할 만한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과는 무관한 자기 얘기, 교회 얘기일 뿐이다. 교회의 모든 교직자가 자기 얘기하느라 바쁘다. 교회를 떠난 지금은 ‘왜 저 설교 들으러 교회를 가지?’ 생각만 들 뿐이다. 저럴 시간에 대중 강연을 보든지 인문학 강좌를 듣는 편이 더 나을 텐데. 성의 없고 지루하며 무가치한 QT 할 시간에 커피 마시며 신문을 보는 편이 더 행복한데 말이다. 교회보다 도서관을 좋아한 이유다.
Today소랑 2026년 6월 20일 토요일
Go to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