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조한 기억모음②] [1] “교회 누나를 지키지 못한 내가…”

진리를 알고 싶고 따라가고 싶었던 교회 누나와 옛날의 나 누구보다 애틋하고 고마운 특수 관계에서 싹튼 마음 연민 하나님에게 집중하기 어려운 관계 향하자 멀어진 우리 둘 체계적으로 진리가 열어 밝혀졌다면 아파하지 않을 텐데
2021년 02월 28일

누나에게 마음 문을 연 건 순진했기 때문도 맞지만 계속해서 나에게 다가온 덕분이다. 매년마다 갱신하듯, 헌법상 연애금지조항은 살아남았고, 급기야 대학 입학에 이르러야만 연애 가능하다고 못 박아두기에 이르렀다. 스무 살 되기 전, 공부와 신앙에 매진해야 한다는 자발적 의지가 빚어낸 참사다.

누나는 진리를 알고 싶어 했다. 제도권 교육처럼 신앙에도 방법이 있고, 절차에 따른 순서가 있으면 누구보다 좋아했을 것이다. 고등학교 2학년 시절을 보내던 나 역시 같은 생각이다. 누나도 나도 성경공부 교재가 있기를 바랬다. 그러나 시중의 빈칸 채우기 방식의 교재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성경 내용 전체를 관통하고 하나님이 이끄시는 역사를 통찰하며 성령의 감동 속에서 신앙의 열정을 느끼게 만들 분명하고 확실하게 진리를 가리킬 그런 성경공부가 절실했다.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절대적 믿음을 가진 나와 누나는 진리를 사모하고 갈급했다.

점심시간 성경 읽기 전 고등학생 시절 하루 0교시부터 9교시까지 쉬는 시간이면 성경을 읽었다. 점심과 저녁은 각각 15분과 30분 시간 내어 방언으로 기도했다.

◇진리에 대한 갈급함으로 덧입은 불안과 우울
매번 170-180등 하다가 반 1등을 맛보니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래봤자 전교에서 가장 공부 못하는 반 1등일 뿐이고, 내신 2-3등급에 불과했지만 고등학교 1학년은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는 믿음이 강해진 시기였다. 아침 6시 반에 일어나 씻고, 7시에 출발할 무렵 삼성뮤직 어플로 흘러나오는 영산싱어즈와 헵시바콰이어 예배 실황은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이른찬양예배 이름으로 40분, 학교로 걸어가는 통로가 예배길이었고 복음로(福音路)였다. 7시 30분, 학교에 도착하면 의자에 앉아 1분 간 선포기도로 하루를 시작했다. 빗자루 들어 교실 이곳저곳 쓸고서 바른 자세로 0교시 수업 전까지 성경을 읽었다.

피곤함이 몰려오던 1~2교시 쉬는 시간 제하면 모든 쉬는 시간엔 성경을 읽었다. 최대한 많이 읽고 싶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신학교에 입학해 한 번도 일독 못한 신구약성서를 고등학교 1학년, 4번이나 읽은 배경도 진리를 알고 싶은, 진리를 찾고 싶은 갈급함 덕분이다. 점심에는 20분 방언으로 기도했고, 저녁에는 30분. 때로는 금식하며 1시간 하나님께 내어드렸다. 밤 10시 야간자율학습 마치고, 버스에 타면 저녁찬양예배가 이어졌다. 또 다시 헵시바콰이어가 끊임없이 찬송을 부르며, 방방 뛸 듯한 기분으로 은혜성가 326장 마음속으로 외쳤다. 내일이란 없었다. 그저 오늘 열정으로 찬양하며 하나님께 나의 모든 것을 드리는 걸로 족했다.

진리에 대한 갈급함. 어디에서부터 메말라 간 걸까. 새롭고 낯선 고등학교에 발 딛자 불안과 우울함이 몰려왔다. 밤 10시까지 학교에 남아 공부해야 한다는 시각적으로 갇힌 공간이 제공한 불청객이다. 담임목사는 고등학교 입학했으니, 새벽예배 나오라고 독촉했다. 밤 11시에 도착해 12시 무렵에 겨우 잠들던 때에 새벽예배라니. 너무하다 생각도 들었지만, 이마저도 견딜 수 있었던 건 이유 없이 찾아온 마음의 불안, 원인을 규명하기 어려운 우울함이 진리에 대한 갈급함으로 덧입은 덕분이다.

진리를 갈급해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는
그런 영적인 세계 알고자

진리를 잡았고
영적 세계를 갈급하는 이
찾아 헤매던 누나와 만나

허무를 보았다
방공호 바깥서 두들기는
우울과 불안을 만나 탈출

◇누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말했지만
그런 누나는 나의 신앙을 대단하게 생각했다. 오히려 귀감으로 삼았기에 누나가 고마웠고, 애틋했다. 서로가 신앙의 동지로 생각했다. 교육감이 바뀌면서 시대도 바뀌었다. 야간강제학습이 말 그대로 야간자율학습으로 바뀌었다. 선생님과 가까웠던 사이여도 갈라설 건 갈라서야 했다. 자유를 찾아서 학교 건물을 나섰다. 핑크색 슬리퍼 신은 채 10분 언덕 더 올라가면 만날 수 있는 도서관으로 향했다. 커피와 초콜릿 다이제, 조선일보는 자유로운 환경에서 손에 익었지만. 어렵게 획득한 자유가, 손 위의 그 자유가. 자유가 아니라는 사실을 불안과 우울함이 알려주었다. 원인을 알 수 없었다. 진리가 생각나지 않았다. 당장에 닥친 원인불명 고통을 해치우고 싶었다.

붙잡으면 붙잡을수록, 진리는 내게서 멀어졌고 쳐다만 보아도 행복을 느꼈던 그 진리가 보이지 않을 저편으로 사라진 사실을 깨달았다. 더 불안했고, 더 붙잡고픈 그 무언가를 찾아야 했다. 그래서 누나를 붙잡았다. 말을 걸었고, 사랑한다고 말했다. 말했지만 말 걸면 걸수록 멀어졌고,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보이지 않는 저편으로 숨었다. 서운했다. 화가 났다. 잡으려고 손 내밀면 잡힐 듯 말 듯, 풍선처럼 미끄러져 도망간다. 누나는 장문의 메시지를 보내었다. “우린 항상 깨어있어야 해”라는 문장의 편지에 분명 내가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을 만한 사람”이고 자신에 의해 “슬픔이 오고 괴롭다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며 “낙담과 좌절하는 영”까지 데려와 불안과 우울을 해명했다.

기어이 누나는 전 남친을 소환했고 독신을 거론하며 매우 조심스럽게, 예민한 것들을 조금씩 움직이는 마음으로 장황하게 설명했다. “애정 표현들 하나님 안에서 같은 천국 백성으로서 받아들이겠습니다.” 언젠가 누나가 나에게 쇄골을 보여주었다. 자그마한 눈망울, 깨끗한 이마. 누가 봐도 순결한 대학생 누나가 여자로 보이지 않았다. 나와 함께해 준다는 기쁨만이 가득했다. 정말 다시 고마웠고, 사랑했다. 남들보다 “영적인 티”를 냈던 것처럼 남들보다 감성적이고, 남들보다 사랑을 많이 말했던 모습이 누나에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방해되는 이성관계” 쯤으로 보인 모양이다. 만일 성경을 편협한 신앙이 아니라, 고결한 문학으로 접근했다면. 풍부한 언어로 사랑의 다양한 결들을 보이며 누나를 즐겁게 해주지 않았을까.

낡아버린 개역개정 성서.

◇방공호를 나와서 발견한 생명
누나는 “어느 정도로 영적으로 살아야 하는지 도통 지혜가 나오지 않는다”고 고민을 털었다. 학교에서 성경을 직접 읽을 시간에 누나는 ‘기독교 강요’에 도전했다. 혹시나 교리를 집대성한 칼빈에게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이쯤이면 읽어도 되지 않겠냐고 내게서 허락을 구했다. 대답하지 않았다. 그 무렵, 교회를 나왔기 때문이다. 방송실 근무가 교회 분열에 불 질렀다. 전도사와 갈등을 빚고 인생 처음, 오랜 시간 교회를 나가지 않았다. 신학교로 향하려던 발걸음도 주춤했다. 서운함도 서운함이겠지만, 신앙을 유지하지 못한다는 죄책감이 영혼을 잠식했다. 침묵은 오랜 시간 이어졌다.

10년이 지나도 하나님께 모든 것을 가져다 바친 누나의 소식을 접할 수 없었다. 다시 생각해도 나는 영적인 사람이 아니다.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도 말이다. 정체불명처럼 등장했던 우울함과 불안은 허무할 정도로 단순하게 사라졌다. 교회를 나온 것 하나. 단지 교회라는 방공호를 나오기까지 죽을 만큼의 용기가 필요했다. 독가스도, 수류탄 하나 없이 평화로운 바깥 세계. 그 곳에서 이제 막 터오는 싹을 발견했다. 스피커로 흐르던 담임목사의 프로파간다가 들려오지 않았다. 바깥에서 성경공부하면 지옥 간다던 촌스러운 색감의 주보라는 삐라도 보이지 않았다. 미소만 짓던 빨간색 풍선의 누나도 사라져 찾을 수 없었다.

그곳 교회라는 세계를 벗어나기까지, 고통 속에서 불안과 우울은 나를 부르고 또 부르고 있었다. 밖으로 나오라고. 나처럼 뒤늦게 공포스러운 방공호를 나와 휘청이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왜 이제 나왔을까’ 한탄한다. 그러게 말이다. 다시 시간을 돌이킬 수 있다면. 돌이킨 그 발을 잘라서라도 누나에게 돌아갔을 텐데. 사랑하는 누나에게 달려가 그 진리는 존재의 은둔지로 향할 거라고 말해주었을 텐데.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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