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조한 기억모음⑥] [1] 11년 전, 금빛 하늘 아래… 아이들의 힘찬 응원가 “빠따빠따빠따팀”

2014년 여름을 달군 나의 ‘수련회 이야기’
2025년 07월 25일

크리스마스 시즌도 벅찼는데, 여름방학까지 바빠진 건 신학교에 들어간 뒤부터였다. 교회 수련회에 따라다녀야 했는데,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교회학교와 중고등부, 청년부까지 모두 세 번. 한 번에 2박 3일에서 3박 4일씩, 한 달 가까운 시간을 교회에 바쳐야 했다. 그래서 가기 싫었다. 혼자 유유자적하게, 내 시간대로 여름을 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알바비 때문에 그러니? 목사님이 줄 테니까, 좀 가라.”

나는 결국, 하는 수 없이 교회 스케줄에 맞춰야 했다. 중고등부와 청년부까지는 수월했다. 어차피 프로그램은 이미 짜인 각본대로 움직이면 되었기 때문이다. 큰 업체에서 진행하는 행사라 교사 자격으로 아이들을 케어만 하면 됐다. 예배도 드리고, 물놀이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었다. 밤에는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산책도 하면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강제로 가야만 했던 11년 전 교회학교 수련회, 어쩔 수 없었던 환경이 나의 숨겨진 또 다른 나를 보게 만들었다. 설교를 듣고 있는 아이들 속 나의 모습.

◇몸치 박치였던 내가, 이 세계에선 인기 교사?
문제는 교회학교였다. 중고등부와 청년부가 전국 단위로 여는 빅 텐트라면, 교회학교는 강원도 영동 지방의 교회들이 모여서 여는 스몰 텐트 수준이었다. 그러니까 나의 일손이 필요한 규모의 여름성경학교인 것이다.

“선생님, 나가서 율동 좀 추세요.” 몸치 박치인 내가? 예배 중 갑작스러운 부탁에 시끌벅적했던 대성전이 한순간 고요해졌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거부 의사를 밝혔지만 두어 번만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시작부터 어긋나 버렸다. 말 그대로 무대 위로 나올 때까지 기다린 것이다. 나는 마지못해 무대 위로 올라갔고 속으로는 울면서 어설프게 율동하고 말았다. 동시에 마음의 상처도 입었다. 나와 이 여름성경학교는 맞지 않는 옷 같았다.

혼자 상처를 다독이다가 문득 한 가지를 깨달았다. 규모도 작고 나의 손길이 필요한 여름성경학교라…. 반대로 내가 나설 수 있는 무대이지 않을까. 무언가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할 수 있다’는 희망과 용기를 안고 예배 중 율동과 게임 등 다양한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풀이 죽어 있던 교사가 갑자기 의욕 넘치는 모습을 보게 된 아이들도 나를 따르기 시작했다.

툴툴 거리는 아이에게는 “대충대충춤추면서 하나님을예배해도돼 뭐든지 강제로하는건 하나님도좋아하지않으셔” 싸우는 아이에게는 “아니아니무슨일이야? 누가널화나게했니데리고와” 이제는 내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율동도 추면서 찬양 인도자보다 더한 성령 충만한 몸동작을 선보이며 아이들에게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문제가 터지면 터진 대로 찾아가 수습하고, 물어보면 물어보는 족족 방언 터진 것 마냥 성경적으로 대답하니 나도 아이들도 가까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믿을 수 없었다. 교회에서도 매일 방송실에서만 살다 보니, 내가 이렇게 붙임성 있는 인간인 줄은 몰랐다. 특히나 아이들과 이렇게 가까워질 줄은 상상조차 못한 것이다.

죽어도 하기 싫은 일
몸치 박치인 내게 선뜻
“선생님, 율동해주세요”
어색한 강요 분위기에
끝끝내 마상까지 입고

그래, 좋아, 그거야
‘오히려 내 무대 아냐?’
180도 달라진 내 모습
율동도 인솔도 ‘갓-벽’

그럴 듯한 새 별명
아침엔 다정 순둥한 쌤
밤엔 ‘빠따 선생님’으로
고학년까지 압도하고

절망 속에서도 발견한
고압적인 담목 태도에
숨이 막혀 몸져눕기도 
그래도 아이들의 응원
한마디에 한마음 한 팀
‘너희가 있어 나도 있다’

◇그날 밤, 몽둥이를 들고 새벽까지 서 있던 ‘빠따 선생님’
그럼에도 모든 아이들에게 인기를 얻었던 건 아니었다. 특히 사춘기에 접어든 초등학교 5학년과 6학년 아이들은 내 말을 귓등으로 듣지 않았다. 어떤 아이는 나를 무시하기도 했다. 내 나이 스물한 살, 이렇게 위기가 다가오는 것일까. 짧으면 짧은 7년, 교회학교 교사로 봉사하면서 나를 스쳐간 아이들만 열댓 명. 생각해 보면 초등학교 5학년과 6학년 학생들에게 어필한 적은 없었다. 친하게만 대하기엔 아이들에 대해 잘 모르기도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에게 기회가 주어졌다. 모두가 잠든 밤이었다. 유난히 긴 밤을 보내야 했던 고학년 아이들에겐 고역이었다. 밤 10시에 무작정 자야 한다니. 지금 생각해 보면 아이들의 숙소도 그리 편해 보이지는 않았다. 낮에는 50명의 아이들이 예배하던 공간에 남자아이들만 꾸역꾸역 넣었으니 말이다. 저학년 아이들은 이미 잠들었는데 고학년 아이들만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바깥에서 꽤 괜찮은 아이템 하나를 발견했다. 철제로 된 긴 막대기였다. 공교육 12년의 교훈이 스쳐 지나갔다. ‘아, 이래서 호랑이 교관이 필요한 거구나.’

이로써 나는 밤엔 무서운 선생님으로 돌변하게 되었다. 중요한 건, 적당하게 아이들에게 겁을 줘야 한다는 점이다. 아침에는 순연한 똘끼로 충만하던 선생님이, 밤에는 침묵으로 일관하며 분위기를 잡으니 나의 어색한 온도 차에 고학년 아이들도 말을 듣기 시작했다. 잠들지 않으면 혼내겠다는 위협(?)이 먹힌 것이다. 그렇게 몽둥이를 턱에 걸친 채 서서 새벽 1시까지 버티고 또 버텨야 했다.

다음 날, 나의 별명은 ‘빠따 선생님’이 되고 말았다.

교회학교 연합 여름성경학교는 예배와 행사, 두 축으로 구성됐다. 기도원 곳곳에 마련된 게임 등을 팀 단위로 클리어하면서 점수를 따는 형식이다. 각 교회의 교사들은 팀에 배치되어 학생들을 관리했다. 나의 업무 역시 교회학교 교사로서 아이들과 함께하는 일이었다.

◇”빠따빠따빠따팀!” 그래, 너희들이 ‘나의 힘’
날이 밝을 무렵이었다. 나는 카리스마 빠따쌤에서 다정하고 순둥한 교회학교 교사로 변해 있었다. 누군가 나를 잠에서 깨우기 시작했다. “쌤! 누가 가운데에 똥 싸질렀어요!” 나는 벌떡 일어나 상황을 파악하기 바빴다. 일단, 누군지를 찾지 않았다. 누가 저질렀는지는 당사자만이 알 것이다. 괜히 누가 실수했는지를 밝히면 부끄러워할 게 뻔했다. 더구나 의도적인 건 아니었을 것이다. 자고 일어나 보니, 어두운 대성전을 돌아다니다 화장실을 찾지 못한 녀석이 아무도 자고 있지 않는 곳에다가 볼일을 봤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아이들에게 놀리거나 괜히 호들갑 떨지 말라고 단호하게 일렀다. 부장 선생님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처리를 부탁드렸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아침 예배부터 점심 예배까지 둘째 날 행사에 흠뻑 빠져들었다. 오히려 수렁에 빠져든 건 나였다. 담임 목사가 둘째 날에 돌아오면서부터다. 목사는 여전히 고압적이었다. 누구보다 여름성경학교에 흠뻑 빠졌던 나였지만 목사가 등장하면서 기가 죽기 시작했다. 광란의 똘끼를 차마 목사에게 보여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내 안의 또 다른 나는 숨어버렸다. 나는 목사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마치 문제라도 저지른 양 바라보는 시선, 칭찬 한 마디 내뱉지 않는 오만한 태도, 뭐든 다 안다는 듯한 착각이 나를 숨 막히게 만들었다. 오래도록 기가 죽어 있어야 했다. 아이들이 실컷 물놀이하고 있는 동안, 나는 대성전 한 편에서 몸져누워 있어야 했다.

저녁이었다. 마지막 밤 예배를 드리고 각 교회마다 피자 파티를 하던 중이었다. 얼굴도 모르는 녀석이 내게 다가와 “선생님! 쟤가 괴롭혀요!”라고 이르는 것이었다. 찾아가서 중재해 주려던 차, 담임 목사가 나서서 고압적인 한 마디를 내던졌다. “재현, 넌 어느 교회 선생이야?” 마음속으로만 ‘우리 모두의 교사’를 되뇌어야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떠오를 해는 당당히 떠올랐다. 마지막 3일 차엔 다소 차분히 교회학교 아이들을 돌보았다. 그러나 은연중에 ‘빠따 선생님’이라고 놀리던 고학년 아이들이 대놓고 응원 구호를 바꾸기 시작했다. 남들은 “우리우리우리팀!”이라고 응원할 때면 녀석들은 “빠따빠따빠따팀!”으로 나를 응원하기 시작한 것이다. 내 입에서 미소가 맴돌았다. 그리고 같이 응원했다. “빠따빠따빠따팀!” 그 순간, 아이들과 나는 한 팀이 되었다는 걸 느꼈다.

선생님들까지 내게 물었다. “이번 여름성경학교를 보내면서 바뀌어야 할 점 없으셨어요?” 모든 선생님들이 보완해야 할 점들을 진지하게 경청했다. 내가 다니던 교회에서는 겪어보지 못한 사뭇 다른 태도였다.

빠따 선생님으로서의 즐거운 감정은 집에서 홀로 쉬던 중에도 여운처럼 남았다. 나는 잘 해내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여름성경학교가 한바탕 분위기를 압도한 캠프가 되어버렸으니 한여름 밤의 꿈처럼 느껴졌다. 너희들이 있어, 내가 있었다는 것을.


연결 기사
[건조한 기억모음⑥] [2] 한여름 소년은 보았다 목마른 너의 가능성을
[건조한 기억모음⑥] [3] 수련회 때마다 반복된 ‘마귀의 역사’… 외로움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자유의 새노래

자유의새노래

정론직필의 자유·시대성의 창달·주체자의 기록

답글 남기기

Previous Story

증인의 전도지, 외면 못한 이유

Next Story

[건조한 기억모음⑥] [2] 한여름 소년은 보았다 목마른 너의 가능성을

Latest from 역사

[소녀의 이름으로①] 죽음의 네 화살과 신앙의 해방… 탈교의 끝에는 소녀가 있었다

기독교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려던 때였다. 기독교가 진리를 탐색하는 길이 아니라 오히려 삶을 왜곡하고 소진시키는 신념 구조로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기독교적 삶은 심리적 탈진을 야기했다. 누군가에겐 여전히 의미 있는 신앙이라 해도, 기독교만의 배타적 복음주의는 성서의 민낯을 깨달은 이에게 더는 도움이 되지 않는 체계로 기능했다. 교회를 탈퇴한지 10년이 흘러서야 미신으로 인식하기에 이른 것이다. 신앙을 내려놓는 과정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다. 어떤 사람에게는 가족과 문화, 가치관 전체가 걸린 선택이기에 더욱 조심스럽고 고통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탈교 10년을 되돌아보면, 그 과정은 치밀하고 정교했다. 감정적 반발이나 충동이 아닌 오랜 시간 축적된 경험과 사유, 고통과 관찰을 바탕으로 자기 삶의 주도권을 되찾은 증거인 것이다. 교회의 과잉 노동과 사회를 바라보는 이분법적 시각, 새능력교회의 신앙은 인간성을 상실하게 만드는 이념이었다. 무너진 인간성은 탈교를 하면서 회복되고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회복은 그저 신앙의 해체가 아니라, 내면 깊숙이 잠들어 있던 감수성과 윤리적 질문의 귀환이었다. 그때 모습을 드러낸 것이 바로 ‘소녀소년담론’이다. 기독교가 부정했던 인간의 섬세함과 복잡성을 복원하려는 시도, 그리고 잃어버렸던 인간성의 언어를 되찾아오는 과정을 서사화한 것이 소녀소년담론이다. 소녀소년담론은 도덕적 대체물도, 반기독의 상징도 아니다. 억압된 인간성의 귀환이며 되살아남의 기적을 담론화한 것이다. 이제 소녀소년담론은 기독교를 대체해 삶의 한 축으로 섰다. 악과 선의 이분법의 시각을 버리고 다채로운 삶의 풍경을 바라보며 끊임없는 대화로 세상과 소통하는 틀로 발전했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어떻게 해체되었을까. 소녀소년담론을 만든 신앙 주권주의를 살펴보자. 연결 기사 [소녀의 이름으로②] 예고 없이 다가온 ‘신의 죽음’… 그의 대침묵이 이끈 기독 담론의 끝

[소녀의 이름으로②] 예고 없이 다가온 ‘신의 죽음’… 그의 대침묵이 이끈 기독 담론의 끝

연결 기사 [소녀의 이름으로①] 죽음의 네 화살과 신앙의 해방… 탈교의 끝에는 소녀가 있었다 2017년은 오순절 신앙의 내적 종말이 가시화된 해였다. 참여교회에서의 탈출, 그리고 해방. 버뮤다순복음교회의 해체는 제도권 교회의 붕괴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는 신의 대침묵과

[건조한 기억모음⑥] [2] 한여름 소년은 보았다 목마른 너의 가능성을

신학교에만 입학하면 뭐든 다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나의 허상은 단 한 달만에 산산히 부서졌다. 방학이 오기 전까지 나는 무력하게 지내야 했다. 목사는 끊임없이 “할 수 있다”는 새 능력만을 설교 했지만 나는 할 수 없다 는 무기력을 느꼈다. 1980년대의 부흥을 제창하는 교회에서 2014년도의 신앙을 가진 나와는 맞지 않았던 것이다. 우울증은 더욱 깊어만 갔다. 할 수 있는 사회에서 할 수 없다는 절망감은 나를 더욱 슬픔으로 몰아 갔다. 행위로 구원을 받는 교회의 능력주의가 빚어 만든 결과인 것이다. 필요할 땐 은혜를 찾으면서, 정작 중요한 순간엔 행위를 강조하는 교회의 이중적 신앙이 나를 절망의 수렁으로 빠뜨리고 말았다. 그런 어두운 수렁에서 나를 구해준 것은 하느님도, 목사도 아니었다. 먼 타지에서 나와 함께해 준 루디아 선교사였다. 루디아 선교사는 내가 다니던 학부 부설 기관에서 선교 활동을 위해 잠시 머물렀던 중년의 여성이다. 할 수 없다는 무기력에 사로 잡혔을 시절, 내게 가능성을 일 깨워준 사람이다. 11년 전 신문은 기록한다. “‘형제는 사람의 마음을 간파하고 그 사람에게 맞도록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방법론을 알고 있는 자다’라고 어두움 가운데에서 빛을 소개해주는 일이 있었다.” 교회에서는 무능력한 신학생, 할 줄 아는 게 없는 녀석, 심지어 눈치를 주기도 했다. 그러나 루디아 선교사는 남들이 보지 못한 나의 가능성을 선명하게 보았다. 그는 나에게 부활의 복음을 가르쳤고, 머지 않아 나는 신 죽음의 시대를 경험해야 했다. 그럼에도 루디아 선교사가 일깨워준 가능성은 훗날, 내게 재림 신앙을 되살리는데 영향력을 발휘한다. 언제나 교회에서 여름성경학교는 아이들의 삶을 바꿔 줄 기회라고들 광고한다. 그러나 정작 그해 여름성경학교는 아이들의 삶과 나의 삶을 바꾸지 못했다. 발견한 것은 있었다. 목마른 소년의 간절한 가능성을. 연결 기사 [건조한 기억모음⑥] [1] 11년 전, 금빛 하늘 아래… 아이들의 힘찬 응원가 “빠따빠따빠따팀”[건조한 기억모음⑥] [3] 수련회 때마다 반복된 ‘마귀의 역사’… 외로움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건조한 기억모음⑥] [3] 수련회 때마다 반복된 ‘마귀의 역사’… 외로움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수련회를 다녀올 때마다, 나는 감정 상하는 일을 경험했다. 목사는 매번 설교 시간에 나를 거론하며 “매번 삐지고 돌아온다”고 토로했을 정도다. 스스로 영적으로 깨어 있는다고 믿었던 목사는 이런 현상을 두고 ‘마귀가 역사한 것’이라고 정의하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마귀 역사’라는 말만큼 무책임한 단어도 없다. 한창 사춘기 시절의 아이들을 강제로 수련회 합숙소에 몰아넣는 것도 모자라 계속해서 기독교 사상과 이념을 주입한다면 어느 누가 즐겁게 받아들이겠는가. 설교 메시지도 탁월한 것도 아니다. “너희들은 죄인이야” “게임하지 마” “부모에게 효도해” 같은 직설적인 언사를 누가 좋은 마음으로 받아들이겠는가. 결국은 사람의 불완전성을 결함으로 비치도록 만드는 말들을, 이제 자라 나는 연약한 자아에게 화살처럼 찌르고 있으니, 어떻게 견디겠느냐는 말이다. 한국 개신교회는 유치원생부터 장년과 노년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메시지를 고수한다.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주장 말이다. 모든 이들에게 똑같은 메시지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던져 놓고 “이제 본질” “이게 진리”라고 주장하면서 정작 왜 진리인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그냥 믿기에 믿는 것이다. 사춘기 소녀 소년 모아“너는 죄인이야” 윽박만불완전한 인간의 존재 결함으로 몰아세우고공포팔이나 던져대니 마지막 수련회에서유일하게 말벗 되어준 고마운 형마저 떠나고나 역시 교회를 나선다 이제 자아가 성장하는 초등학생들에게는 효과적일지 모른다. 가장 연약한 자아를 가진 중고등학생들에게는 상처라는 사실을 교회는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자신의 생각을 말하게 하고, 하고 싶은 일들을 경험하도록 돕는 것도 모자라 아이들을 죄인 취급이나 하며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하길 바라고 있으니. 나의 감정도 다르지 않았다. 어느 때보다 민감하고 예민한 성정을 가진 나란 사람이 집단 공동체 속에 파묻혀 나의 나 됨을 잊어버려야 했으니, 감정의 진폭이 커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담임 목사는 일대일도 아니고, 모든 교인들이 보는 앞에서 “재현이는 이번 수련회에서 삐지지 않았다”며 “성령 충만해선지 이야기까지도 주도한 걸 봤다”는 걸 보면 참, 기가 막힐 따름이다. 2014년, 여름성경학교를 통해 나는 가능성을 보았다. 어머니의 말씀이 떠올랐다. 유아기 시절의 나는, 어른들에게 재롱 떨 줄 아는 아이였다고. 어렸을 시절 잃어버린 나의 본 모습을 여름성경학교를 통해 발견한 것이다. 교회의 억압적인 구조와 폐쇄적인 환경, 죄와 선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이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가두고 있었다. 나의 마지막 수련회는 2015년이었다. 군 생활을 앞두고 흰돌산 기도원 수양관으로 향한 것이다. 이번만큼은 토라지지 않았다. 나와 함께해 준 형님이 있었기 때문이다. 형님은 유일하게 나의 이야기를 경청해 주었다. 머지않아 형님은 교회를 떠나고 말았다. 나는 무척 아쉬웠다. 간만에 좋은 어른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생각해 보면 그동안 나에게 말벗이 되어준 사람은 없었다. 나는 성경을 말하고,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데까지 관심을 기울일 또래를, 어른을 만나지 못했던 것이다. 딱 교회의 수준에 맞는 그런 어른들을 만난 것이다. 그런 어른을 만나러 교회를 다닐 필요는 없다. 교회를 벗어나, 그런 어른을 만나야 한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아니, 그런 어른이 되면 좋겠다고 다짐했다. 연결 기사 [건조한 기억모음⑥] [1] 11년 전, 금빛 하늘 아래… 아이들의 힘찬 응원가 “빠따빠따빠따팀”[건조한 기억모음⑥] [2] 한여름 소년은 보았다 목마른 너의 가능성을
Today소랑 2026년 6월 20일 토요일
Go to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