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문쏘, 할 말 있어④] 뭘 물어봐야 하는지도 모르는 회사, 영포티에게서 “도망쳐!”

2025년 11월 11일
면접 때 잘 봤어. 그 새끼 싸가지 없더라. 그럴 거면 뭐 하러 면접관 타이틀 달고 앉아 있었대? 지 할 일이나 할 것이지. 잘 됐어. 그런 회사 가봐야 별 의미 없었을 거야. 마지막까지 예의를 갖추고 “회사의 번영을 기원합니다” 인사했던 거, 잘 했어. 너도 잠시 면접관 노릇 좀 해봐서 알 거야. 무얼 질문해야 할지를 모르는 인간은 면접에 참여할 자격조차 없다는 사실 말이야. 뭘 물어봐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무슨 면접을 보라는 거야. 그렇지? 처음 떨리는 마음, 직접 손으로 공고를 올리던 긴장된 너의 숨결, 너의 손길, 기억할 거야. 무엇부터 물어봐야 할지, 떠오르는 질문들을 쏟아내고 ‘이건 물어봐야 해’ ‘이건 묻지 말아야 해’ 고민하던 순간들. 밀려오는 면접자를 대하던 너의 숙고를 생각하면 그날 그 회사의 면접은 이미 꽝이야.

[열여덟, 이런 고3이라 됴아④] 세상을 바꾸는 건, 뜨거운 정의심과 압도적인 문장들이 아냐

잡지를 만든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네가 만들려던 그 잡지 말이야. 솔직히 말해서 포기하길 잘했어. 원래 잡지를 만든다는 건 혼자서 할 수 있는 업무가 아니야. 유명한 잡지들을 봐. 그 잡지 한 호를 만들기 위해 매달리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더라. 사진 보정과 편집조차 익숙하지 않은 네가 잡지를 만든다는 건 어쩌면 욕심이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뭔가를 말하고는 싶은데, 말할 방법이 없어서 편집 디자인에 기대는 너의 부푼 마음 말이야. 나도 그게 뭔지는 알 거 같아.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란 생각이 들어. 잡지를 만드는 일은 단순히 보기에 좋아 보이는 것 정도는 아니야. 어떤 내용을 담아야 하는지를 기획해야 하고, 어떤 제목으로 독자들을 후킹 할 수 있는지, 사진은 또 저렴한 스마트폰이 아닌 미러리스 같은 전문 카메라로 찍어야 하는 고급 기술이야. 글자를 조제(調劑) 하는 일도 그래. 하고 싶은 말을 나열한다고 될 일이 아니라는 거지. 고등학교 1학년 때 기억해? 담임 선생님이 써오라던 독후감, 일부러 단락도 구분하지 않은 채 3000자, 5000자 한 무더기로 써 냈던 거. 마음이 고운 선생님이라서 그랬지, 나였으면 가차 없이 다시 쓰라며 까버렸을 거야. 선생님이 홀로 자리에 앉아 네가 쓴 그 거대한 문장들을 다섯, 여섯 줄로 요약하느라 진땀 뺀 모습도 기억할 거야. 그땐 챗지피티(chatGPT)도 없던 시절인데 말이야. 선생님이 고생 좀 하셨지. 이제 사람들은 손바닥만 한 글을 겨우 읽는 시대에 살고 있어. 손바닥이 뭐니, 손톱만 한 글도 읽지 않는 논 텍스트(non-text) 시대야. 그러나 글과 문장이 필요 없어졌다는 건 아니야. 왜냐하면 인간은 글과 문장으로 의사를 소통하기 때문이야. 글을 읽으려 하지 않는 시대에, 오히려 글을 정제된 손길로 다듬고 또 다듬는 강인함이 필요하다는 걸 나는 말하고 싶어. 네가 듣기에 참 미안한 말이지만, 앞으로도 네가 만들려던 지면신문 오래도록 실패할 거야. 그러나 포기하지는 말아 줘. 그 신문이 너의 멱살을 잡고 삶의 자리를 이끌어갈 테니까. 너의 그 신문에 사람들이 호응하지 않더라도 신문을 만들어 글을 다듬고 다듬는 일에는 지치지 말아 줘. 미래의 내가 과거의 네 글을 보면서 살아갈 힘을 얻을 테니 말이야. 지금의 난

[상황설명] 기어코 무르익은 ‘소년의 문장’

2025년 11월 11일
연결 기사[열여덟, 이런 고3이라 됴아④] 세상을 바꾸는 건, 뜨거운 정의심과 압도적인 문장들이 아냐[문쏘, 할 말 있어④] 뭘 물어봐야 하는지도 모르는 회사, 영포티에게서 “도망쳐!” 15년 전 소년은 정직한 문장과 꾸밈없는 건조한 문체가 불의에 맞서는 방법이라고 믿었다. ‘단비새’라는 이름의 잡지를 만들려고 애를 쓴 것도 정직함을 지키기 위한 하나의 몸부림이었다. 부도덕한 사회와 협잡한 대중문화라는 프레임은 잡지를 만들려는 열정에 기름을 부었다. 그러나 세상은 무심했다. 세상은 세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어떻게 윤리를 잃어가는지에 대한 방향을 잃고 말았다. 열정을 다해 글을 썼어도 꼼꼼히 읽는 사람은 대학 입시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첨삭하던 담임 교사뿐이었다. 시간이 흐르며 시대는 바뀌었다. 논술을 가르치던 시대는 미디어 리터러시(media literacy)를 먼저 가르쳐야 하는 새로운 국면에 닿은 것이다. 까이는 건 중학생 신문에서뿐만이 아니다. 이름 없는 회사의 면접에서도 까이는 건 마찬가지였다. 한 쪽은 설익어서 까였고, 다른 한쪽은 물러터져 버려서 문제였다. 발신자는 안다. 두 곳 모두 혼은 나지만 존경심이 드는 곳, 지치지만 배울 수 있는 곳, 무력감이 아니라 성장통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정의와 신념에 가득 찬 무리들, 그리고 무력감에 절어 세상만사를 삐딱하게 보는 아저씨를 경험하며 발신자는 15년 전 소년의 실패를 떠올린다. 발신자는 그럼에도 글쓰기를 포기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그 문장들이 이후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재의 발신자를 살리게 될 거라는 분명한 사실을 가리키며 지치지 말라고도 당부한다. 글은 의사를 소통하는 최초의 방식이자 미래의 수신자에게 보내는 최후의 의사소통이다. 15년 전, 소년은 발신에 실패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끊임없이 지치지 않는 발송을

[부음] ‘젠틀하고 구수한 어머니’ 반세기 배우 김수미 별세

2024년 12월 30일
피로누적으로 건강악화를 우려해 활동을 잠정 중단한 배우 김수미(본명 김영옥)씨가 향년 75세로 세상을 떠났다.(2024.10.25) 서울 서초경찰서는 고인이 25일 서초구 방배동 자택에서 심정지 상태로 발견돼 오전 8시께 119구조대에 의해 서울성모병원으로 이송됐지만 사망 판정을 받았다고 밝혔다. 고인은 1970년 MBC 공채 3기 탤런트로 합격해 ‘전원일기’에서 22년간 일용 엄니 역을 맡았다. 코믹하면서 거침없는 말투와 푸근한 연기로 호평 받았다. 1990년대 생에게는 욕쟁이 할머니로도 알려져 있다. 2015년 전국 욕쟁이들이 모여 욕 배틀을 펼치는 영화 ‘헬머니’ 단독 주연을 맡았다. 뛰어난 요리 솜씨도 주목을 받았다. ‘수미네 반찬’(tvN) ‘밥은 먹고 다니냐?’(SBS플러스) 등 음식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구수한 손맛을 펼쳤다. 유족으로는 배우자 정창규씨와 딸

[건조한 기억모음⑤] [2] 똥 팬티 세탁에 매일 청소까지… 그 모든 게 ‘하나님의 은혜’라고?

2024년 12월 13일
방장에게 노예 생활하던 중 나는 강렬한 신앙 체험을 했다. 내 인생의 각도를 튼 놀라운 사건이었다. 대학교에서는 학기 초 대학부흥회를 연다. 포도나무교회 여주봉 목사를 초청해 세미나를 개최했다. 주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었다. 나는 기독교인으로 살면서 오랜 시간 삶의 변화를 꿈꾸었다. 좀더 성실하게 살기를 바랬다. 정직하고 경건하기를 바랬다. 언제나 여색(女色)은 발목을 붙잡았고 마음을 괴롭게 했다. 그런데 여 목사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 만큼 그리스도인의 삶이 변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여 목사는 탈출기를 해설하며 하나님조차 자신의 목적과 수단으로 활용하는 자기중심적 인간의 삶을 비판했다. 나는 좌절했다. 이제껏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삶의 액세서리 쯤으로 생각해온 지난 날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깊은 절망과 슬픔이 몰려왔다. 신에게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눈물을 흘렸다. 대강당에서 한참을 울었다. 시규와 대풍이랑 점심을 먹으러 걸어가는 와중에도 펑펑 울었다. 속죄가 이렇게 거대할 줄은 몰랐다. 기숙사는 매일 아침 5시 30분에 기상해 새벽예배를 진행한다. 나는 아침 7시부터 한 시간을 기도하고 1교시 수업을 듣기로 작정했다. 저녁에도 시규와 7시 기도를 하기로 약속했다. 당연했다. 방에 일찍 들어가면 방장을 마주치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최대한 아침 일찍 기숙사를 나와 늦게 들어가면 됐다. 그래서 달라진 게 하나 있느냐는 것이다. 누군가 10년이 지난 지금 달라진 게 있느냐고 물으면 나는 확실하게 답할 수 있다. “달라진

[건조한 기억모음⑤] [1] “그날의 주먹, 용서할게요”… 다시 만난 형은 무릎을 꿇었다

2024년 12월 13일
기숙사 새 방장에게 메시지가 왔다. 대충 언제 오느냐는 물음이었다. “아직 잘 모르겠다”고 답한 것 같다. “잘 모르겠다?”되묻는 물음에 느낌이 싸했다. “막내가 벌써부터 빠져가지고….” 방학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구린내가 진동했다. 똥군기의 서막이었다. 스무살 학부 때의 일이다.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2학기에 발디딜 무렵이었다. 3인실 쓰다가 5인실을 경험해보니 놀라웠다. 나무에 그늘진 방이 내 어둔 미래를 암시했다. 막내에게 주어진 의무는 가혹했다. 이틀에 한 번은 세탁을, 방장과 중방의 옷까지 말아야 했다. 먹기 싫은 야식도 내 돈 주고 먹어야 했다. 그 야식, 방까지 배달해야 했다. 꼬박 인사하는 건 기본이고 기분 좋은 선배 대접에 과제물 파일까지 메일로 보내줘야 했다. 다른 막내도 있었지만 나보다 한 살 많았다. 나만 막내인 이유였다. 저녁만 되면 기숙사 들어가기가 싫어졌다. 방점검 시간까지 시규와 같이 있었다. 방장은 우스운 사람이었다. 심심하면 자기가 다니는 교회의 규모나 자랑했다. 가격이 상당한 스피커를 뽐내며 CCM을 흥얼거렸다. 목회실습 과제는 거짓말로 써 제꼈다. 목사와 교수의 알력 다툼을 조롱했다. 신학이란 걸 알긴 아는 건지 묻고 싶었다. 내가 보기엔 기독교인도 아니었고 신학생도 아니었다. 하는 짓이 천박했다. 딱 그 수준의 인간이다. 나는 방장이 기숙사에서 쫓겨 나기를 바랬다. 공부도, 생활도, 신앙도 엉망인 그가 있을 자리는 아니었다. 일요 예배를 마친 다음날이었다. 오후 기숙사에 들어가려다 층장을 만났다. 걱정 어린 눈으로 “방에 들어가도 놀라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다. 당시 일과속기록에 이렇게 적었다. “방으로 들어가 보니 평소와 다를 바 없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언가 이상했다. 파편이 튀어 있었고 방장 책상은 어지럽혀 있었기 때문이다.”(2013.11.18) 그날 방장은 짐을 싸고 기숙사를 나갔다. 벌점 누적으로 쫓겨난 것이다. 당시 방에는 방장과 중방1, 중방2, 막내1, 그리고 내가 살았다. 방장과 중방은 친구 사이였고 같은 신학과 학생이었다. 또다른 중방은 교회음악과 학생에 방장보다 나이가 많았다. 문제는 방장이 나이 많은 중방에게도 무례하게 군 나머지 싸움으로 번졌다는 점이다. 중방은 평소 운동까지 하던 사람이라 체격이 다부졌다. 방장이 중방에게 맞았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렇게 갑자기 나는 해방을 맞이했다. 의자를 던졌다던 중방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중방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연쇄적으로 폭력을 저질렀다. 방장과 친구라던 중방과도 충돌한 것이다. 당시 이 신문은 이렇게 보도했다. “중방2는 중방1에게 쌓인 분노를 표출하는 등 ‘개XXX’ ‘X같은’ 등 심한 욕설과 신던 양말까지 던져 때리는 행동도 일삼았다. 중방1은 분노를 억누른 덕분에 다행히 그날 밤은 무사히 지나갔다.”(2015.03.02) 마지막 칼날이 나에게 향하자 기숙사의 비극은 끝이 났다. 중방이 나를 폭행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단순한 말다툼이 주먹까지 불러일으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중방은 방문이 고장 난 틈을 타 문을 잠갔다. 나를 일방적으로 구타했다. 문을 고치러 온 수리 기사가 아니었으면 고문은 계속 되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 두 해가 흘렀다. 군생활하던 중이었다. 중방이 생각났다. 다짜고짜 연락했다. 중방은 내 목소리를 알아 들었다. 그의 첫 마디를 잊지 않고 있다. “재현아,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나는 이미 용서한 상태였다. 왜 중방은 분노를 조절하지 못했을까. 도화선은 고립된 삶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봤다. 어느 시점부터 중방의 주변 사람들이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언제는 나 빼고 방장부터 모두가 도둑질 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모두가 당했으니 다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다음엔 중방만 도난 당했을 땐 중방은 몹시 억울해 했다. 그 억울함을 들어주는 이 아무도 없었다. 아마 그 즈음이었을 것이다. 중방은 늘 혼자 다녔고 혼자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 무렵 나는 교회전도지원단을 다녀와 1500명 앞에서 성공적인 발표를 마친 후였다. 학교에 내 이름이 알려진 마당에 소문은 금세 퍼졌다. 더는 학교 생활이 어려웠을 것이다. 그는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그의 체질상 선택적 분노 조절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신학교 기숙사라고 일반 대학과 다르지 않았다.

[고마운 이름들⑥] 그 시절 누나에게 교회는 ‘마지막 등불’

2024년 12월 03일
내 기억 속 누나는 언제나 활짝 웃는 사람이었다. 세상이 무너져도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사람. 좌고우면(左顧右眄) 하지 않을 그런 강직한 사람. 그런 누나가 갑자기 사라졌다. 인사도 없이 교회를 나오지 않기 시작한 것이다. 누나의 행방이 궁금했다. 머지않은 시기였다. 나도 새능력교회를 탈퇴했다. 목사의 신앙과 나의 신앙은 대립각을 세웠다. 그리고 갈등했다. 교회를 나오면서도 인수인계를 철저히 했다. 방송실 근무자 민찬이에게도 여러 번 강조했다. “교회를 나오는 건 목사님하고 신앙이 달라서야.” 차마 내 입에서 목사의 신앙이 틀렸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 예의였다. 훗날 새능력교회가 젊은이의 노동력을 갈취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달에 교통비 5만원만 주면서 생색내는 목사가 역겨워지기 시작했다. 군 생활도 하고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교회가

[고마운 이름들⑤] 말없이 도둑놈 놔주며 “됐다, 그만 가 봐라”

2023년 04월 10일
버찌씨도 2센트도 아닌 ‘빈손’에 지난 번 초코칩쿠키는 대성공이었다. 허겁지겁 삼키느라 제대로 음미하지는 못했다. 이번에는 천천히 꼭꼭 씹어 먹으리라 다짐했다. 점원이 보지 못한 것 같다. 슬쩍 왼쪽 다리에다 겹쳐다가 홧김에 나와 버렸다. TV에 정신 팔리느라 못 보는 것 같다. 심장이 마구 뛰었다. 때는 초등학교 2학년. 오늘도 챙겨오라던 준비물을 빼놓고 갔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존나 아픈 기억만 남은 걸 보면 손바닥 아작 날 만했다. 불과 20년 전 엄한 회초리와 귀싸대기가 일상이던 시절의 얘기다. 그땐 거짓말이 일상이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도둑질도 많이 했다. 친구네 집에서 훔쳐온 장난감만 몇 주먹이나 쥐어야 할 정도였다. 실컷 놀다가 배가 고파졌다. 상가 건물에는 1층에 마트와 맞은편 교회가 전부였고 2층부터 미용실·학원·문방구·부엉이 모양의 호프집이 상주했다. 언덕 중턱에서 한신아파트 수문장처럼 서 있는 상가에는 많은 기억이 서려 있다. 항상 문방구 아저씨는 재미없는 YTN이나 YBS 영동방송을 보고 있었다. 미용실에는 30대로 보이는 디자이너가 할머니들에게 둘러쌓여 머리 다듬고 있었다. 초등학생인 날 믿었기 때문일까. 어느 날은 헤어디자이너가 급히 할 일이 생겼다며 투니버스를 틀어놓고 어딘가로 가버리고 말았다. 서너 시간이었을까. 그새 한두 명 찾아온 손님 빼고는 혼자서 미용실에 죽치고 텔레비전만 보았다. 어머니가 헤어디자이너로 공부하고 처음 바리깡 들었을 때 인연도 기억난다. 구레나룻 3㎝ 올라가다가 나지막이 내 이름 부르며 말한 엄마의 당혹감은 지금도 생생하다. “재현아 미안. 근처 미용실 좀 가봐라.” 오천원이었을까. 만원이었을까. 남은 돈으로 맛있는 거 사먹은 슈퍼마켓이 한신마트였다. 주인아주머니는 터프했다. 배우 이태란 닮은 아니, 이태란 배우보다 더 남성미가 한껏 드러난 아주머니였다. 아주머니가 아들 이름을

[부음] 장미라는 빛을 잃었다 외

2022년 07월 10일
트위치 스트리머로 활동한 인터넷 방송인 잼미(본명 조장미·27·사진)가 숨진 채 발견됐다. 잼미의 트위치 커뮤니티 게시판에 ‘안녕하세요. 잼미 삼촌입니다’ 제목의 글이 게시됐다. 잼미 아이디로 접속한 삼촌은

[부음] 순복음 신앙의 별이 지다 외

2022년 03월 01일
세계 최대 교회 여의도 순복음교회를 설립한 조용기 원로목사(사진)가 85세로 서거했다.(2021.09.14) 지난해 7월 뇌출혈로 쓰러져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서울대병원으로 옮겨 입원 치료를 받았다. 지난 2월 부인인 고(故) 김성혜 한세대 총장 장례식에도 참여하지 못했다. 조 목사는 2020년 7월 19일 ‘예수님과 강도’라는 제목으로 설교했으나 생방송이 아닌 녹화 방송으로 보이는 영상물로 설교를 대체한 바 있다. 안경을 쓰지 않은 채로 오른쪽 눈을 감고 설교하고서 뇌출혈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세계 최대 교회 여의도 순복음교회를 설립한 조용기 목사는 해방 이후 서울 서대문구 대조동에서 1958년 5월18일 5명의 교인으로 개척했다. 1961년 천막 성전에서 서대문성전으로, 1969년 여의도 부지에 지금의 여의도 순복음교회 건물을 세웠고 1979년 교인 10만명을 돌파해 기념 예배를 드렸다. 1984년 ‘순복음중앙교회’에서 ‘여의도 순복음교회’로 개명했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08년 담임목사 직에서 은퇴한 조 목사는 원로목사로 취임했고 2020년 7월까지 주일4부예배에서 설교를 진행했다. 제2대 담임목사로 취임한 이영훈 목사가 뒤를 잇고 있다. 조용기 목사는 평소에 복음성가를 작사했다. 아내 김성혜 총장이 작곡하며 어둠이 세상을 찬양해 주님께 이리로 오세요 등을 함께 만들었다.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으로도 유명하다. 순복음 신앙으로 알려진 두 가르침을 통해 현생에도 받아야 할 복이 있고 누려야 할 가치가 있음을 설파했다. 이 같은 가르침으로 인해 번영신학으로 지적하는 신학자도 존재했다. 그럼에도 한국 경제가 성장하던 권위주의 정권 시절 희망의 복음을 전파하며 사회에 긍정적 영향을 끼쳤으며 여의도 순복음교회 성장과 함께 한국교회도 성장했다. 자체 성가인 복음성가를 편찬해 버뮤다 순복음교회 은혜성가 마련에 영향을 끼쳤으며 한국교회에 복음성가 열풍을 일으켰다. 그러나 교회 사유화로 집행유예 선고를 받으면서 조 목사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 2019년 7월 가발을 쓰고 나타나 환하게 웃는 조 목사를 향해 권력을 놓지 않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으나 두 해 지나지 않아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길을 떠났다. ▲김기덕 영화감독 향년 59세. 2020년 12월11일 ▲김보경 서울예술대학 연극과卒 초대(1999)를 시작으로 친구(2001),
Today소랑 2026년 6월 20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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