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조한 기억모음⑤] [1] “그날의 주먹, 용서할게요”… 다시 만난 형은 무릎을 꿇었다

2024년 12월 13일
갑자기 무법자로 돌변한 중방의 태도는 이해할 수 없었다. 영문도 모르는 폭행에도 나는 일상을 살아가야 했다. 토요일 오전의 커피와 신문은 교회가 주지 못한 위로와 힘을 내게 주었다. 고맙게도 그때 내 곁에는 시규가 함께해 주었다.

기숙사 새 방장에게 메시지가 왔다. 대충 언제 오느냐는 물음이었다. “아직 잘 모르겠다”고 답한 것 같다. “잘 모르겠다?”되묻는 물음에 느낌이 싸했다. “막내가 벌써부터 빠져가지고….” 방학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구린내가 진동했다. 똥군기의 서막이었다.

스무살 학부 때의 일이다.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2학기에 발디딜 무렵이었다. 3인실 쓰다가 5인실을 경험해보니 놀라웠다. 나무에 그늘진 방이 내 어둔 미래를 암시했다. 막내에게 주어진 의무는 가혹했다. 이틀에 한 번은 세탁을, 방장과 중방의 옷까지 말아야 했다. 먹기 싫은 야식도 내 돈 주고 먹어야 했다. 그 야식, 방까지 배달해야 했다. 꼬박 인사하는 건 기본이고 기분 좋은 선배 대접에 과제물 파일까지 메일로 보내줘야 했다. 다른 막내도 있었지만 나보다 한 살 많았다. 나만 막내인 이유였다. 저녁만 되면 기숙사 들어가기가 싫어졌다. 방점검 시간까지 시규와 같이 있었다.

방장은 우스운 사람이었다. 심심하면 자기가 다니는 교회의 규모나 자랑했다. 가격이 상당한 스피커를 뽐내며 CCM을 흥얼거렸다. 목회실습 과제는 거짓말로 써 제꼈다. 목사와 교수의 알력 다툼을 조롱했다. 신학이란 걸 알긴 아는 건지 묻고 싶었다. 내가 보기엔 기독교인도 아니었고 신학생도 아니었다. 하는 짓이 천박했다. 딱 그 수준의 인간이다. 나는 방장이 기숙사에서 쫓겨 나기를 바랬다. 공부도, 생활도, 신앙도 엉망인 그가 있을 자리는 아니었다.

일요 예배를 마친 다음날이었다. 오후 기숙사에 들어가려다 층장을 만났다. 걱정 어린 눈으로 “방에 들어가도 놀라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다. 당시 일과속기록에 이렇게 적었다. “방으로 들어가 보니 평소와 다를 바 없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언가 이상했다. 파편이 튀어 있었고 방장 책상은 어지럽혀 있었기 때문이다.”(2013.11.18) 그날 방장은 짐을 싸고 기숙사를 나갔다. 벌점 누적으로 쫓겨난 것이다.

당시 방에는 방장과 중방1, 중방2, 막내1, 그리고 내가 살았다. 방장과 중방은 친구 사이였고 같은 신학과 학생이었다. 또다른 중방은 교회음악과 학생에 방장보다 나이가 많았다. 문제는 방장이 나이 많은 중방에게도 무례하게 군 나머지 싸움으로 번졌다는 점이다. 중방은 평소 운동까지 하던 사람이라 체격이 다부졌다. 방장이 중방에게 맞았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렇게 갑자기 나는 해방을 맞이했다. 의자를 던졌다던 중방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중방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연쇄적으로 폭력을 저질렀다. 방장과 친구라던 중방과도 충돌한 것이다. 당시 이 신문은 이렇게 보도했다. “중방2는 중방1에게 쌓인 분노를 표출하는 등 ‘개XXX’ ‘X같은’ 등 심한 욕설과 신던 양말까지 던져 때리는 행동도 일삼았다. 중방1은 분노를 억누른 덕분에 다행히 그날 밤은 무사히 지나갔다.”(2015.03.02)

마지막 칼날이 나에게 향하자 기숙사의 비극은 끝이 났다. 중방이 나를 폭행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단순한 말다툼이 주먹까지 불러일으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중방은 방문이 고장 난 틈을 타 문을 잠갔다. 나를 일방적으로 구타했다. 문을 고치러 온 수리 기사가 아니었으면 고문은 계속 되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 두 해가 흘렀다. 군생활하던 중이었다. 중방이 생각났다. 다짜고짜 연락했다. 중방은 내 목소리를 알아 들었다. 그의 첫 마디를 잊지 않고 있다. “재현아,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나는 이미 용서한 상태였다.

왜 중방은 분노를 조절하지 못했을까. 도화선은 고립된 삶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봤다. 어느 시점부터 중방의 주변 사람들이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언제는 나 빼고 방장부터 모두가 도둑질 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모두가 당했으니 다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다음엔 중방만 도난 당했을 땐 중방은 몹시 억울해 했다. 그 억울함을 들어주는 이 아무도 없었다. 아마 그 즈음이었을 것이다. 중방은 늘 혼자 다녔고 혼자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 무렵 나는 교회전도지원단을 다녀와 1500명 앞에서 성공적인 발표를 마친 후였다. 학교에 내 이름이 알려진 마당에 소문은 금세 퍼졌다. 더는 학교 생활이 어려웠을 것이다. 그는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그의 체질상 선택적 분노 조절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신학교 기숙사라고 일반 대학과 다르지 않았다. 방장은 똥군기만 가득하지 중방까지 품어줄 만한 인품을 가진 인간은 아니었다. 딱 그 수준의 기숙사인 것이다.“괜찮아요. 그 때 형님도 많이 힘드셨잖아요.” 상병을 단 2015년 11월 우리는 대전에서 다시 만났다. 시내 한복판, 서로 얼싸 안기도 전, 형은 내게 큰절을 하며 사죄했다. 나도 민망해서 같이 큰절을 올렸다. 뜻밖의 만남에 우리는 오래도록 회한을 풀었다.

신학교라는 곳은 처참했고
막내에게 가혹했던 기숙사
세탁에 청소까지 떠맡기고
치킨 야식 강제로 내돈내산
구린내 나는 신학교 똥군기 

방장이란 인간은 자격 없고
천박하고 가벼워 우스운 놈
교회 예배당 크기 자랑하며
동생이나 괴롭히는 주제에
‘그런 놈이 신학생이라고?’

중방은 고립 되어 홀로 남아
방장에 이어 막내인 나까지
중방의 이유 모를 분노 어택
언젠가부터 고립된 생활에
폭발할 지경에 이르렀을 것

“재현아 미안해” 연락 2년만
대전에서 넙죽 절하며 사죄

“시규, 나 얻어 맞았다” 통화 한마디에 “재현, 너 지금 어디야”

문을 고치러 온 수리 기사를 보자 중방이 협박했다. “옷 단정하게 하고 아무 일 없다는 듯 행동해라.” 나는 곧바로 생활관 사무실로 내려가 부관장에게 폭행 사실을 알렸다. 오른쪽 팔뚝에는 시퍼런 멍이 들었다. 부관장이 증거를 남기기 위해 사진 촬영했다. 시규에게 전화했다. “시규야, 지금 내가 폭행 당해서 병원 가야 하는데 교수님한테 수업 오늘 참석 못할 거라고 전해 줘.” 수화기 너머 깜짝 놀란 분위기가 엿보였다. “지금 어디야!”

그토록 궁금했던 대답 ‘왜’
날 돌봐준 친구들과 지인
끝내 발견한 용서하는 법

부관장의 차에 오르고 시규와 함께 병원을 방문했다. 안경도 새로 맞추었다. 허나 마음에 진 응어리는 상처로 남았다. 폭행을 당하고 며칠 동안은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왜 이런 일을 당한 걸까’를 되물었다. 사건 당일 수요예배를 다녀왔다. 구타 당하던 장면이 여러 차례 반복 재생 되었다. 고통은 살갗을 파고드는 깨진 유리 같았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다음날에도 시규와 수업을 빠지고 세종시로 놀러갔다. 우리는 오래도록 걸었다. 오래오래 대화를 나누었다. 이 또한 신의 섭리라고 믿었다.

그래도 나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수리 기사가 아니었으면 계속 고문을 당했을 것이다. 시규가 아니었다면 고독한 마음을 가누지 못했을 것이다. 계절이 여뎗 번 바뀌는 동안 아픔은 여전했다. 반대로 중방의 상황을 재구성해보았다. 아물지 않을 줄 알았던 상처는 오히려 중방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 조금씩 아무는 듯했다. 진정한 화해는 합의금을 받은 이후에 이뤄졌다. 돈과 법적 절차의 방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마음과 마음을 주고 받는 사과와 화해가 큰 트라우마를 남기지 않게 도왔다. 무엇보다 내 주변의 친구와 가족, 지인, 교수들이 아니었다면 영원히 남을 상흔이 되지 않았을까.

폭행 한 달 지나 목사는 “합의금 200만원 십일조 왜 안 내냐”

폭행 사건에 모든 어른들이 나에게 미안해했다. 생활관장은 방장의 폭압에 모자라 중방의 폭행까지 대비하지 못했다. 폭행 전날, 누추한 방까지 찾아와 대책까지 수립했지만 폭행까지는 예상하지 못한 건 당연했다. 생활관은 나와 막내 형에게 게스트룸을 일주일 대여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담당교수도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선교훈련원 원장이기도 한 그를 저녁에 만났다. 파스도 받았고 우환청심환도 받았다. 대학시절, 선배에게 혼쭐난 이야기를 들었다.

수차례 미안하다는 고백에
조용하게 한참을 흐느끼고
사죄에 끝끝내 합의하기로

한 층을 관리하는 층장도 한 마디 했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직접 찾아가 ‘왜 애를 그렇게 때렸냐’고 물었는데 자긴 잘못이 없다는 듯 얘기해서 화가 나더라” 지인들은 모두가 중방에게 분노했다.

가장 기억에 남은 장면은 중방의 아버지를 만났을 때의 일이다. 생활관장이 주도해 관장실에서 만날 수 있었다. 짧은 악수를 나누고 관장을 중심으로 얼굴을 마주 보고 앉았다. 아버지는 수차례 미안하다는 말을 꺼냈다. 미안하다는 말밖에는 하지 않았다. “자식을 잘못 키운 내 죄”라는 말도 꺼냈다. 그리고 한참을 흐느껴 울었다. 그제서야 나는 합의하겠다고 밝히면서 사건은 매듭지을 수 있었다.
내 나이 스무살, 중방 스물 세 살 젊은 청춘에게 닥친 가슴 아픈 사건이었다.

한 달이 좀 지나고 담임목사가 나를 불렀다. 이제야 폭행 사건을 거론한 것이다. 그가 한 말이 지금도 생생하다. “근데 합의금으로 받은 돈 말이야. 그거 십일조 왜 안 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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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접 때 잘 봤어. 그 새끼 싸가지 없더라. 그럴 거면 뭐 하러 면접관 타이틀 달고 앉아 있었대? 지 할 일이나 할 것이지. 잘 됐어. 그런 회사 가봐야 별 의미 없었을 거야. 마지막까지 예의를 갖추고 “회사의 번영을 기원합니다” 인사했던 거, 잘 했어. 너도 잠시 면접관 노릇 좀 해봐서 알 거야. 무얼 질문해야 할지를 모르는 인간은 면접에 참여할 자격조차 없다는 사실 말이야. 뭘 물어봐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무슨 면접을 보라는 거야. 그렇지? 처음 떨리는 마음, 직접 손으로 공고를 올리던 긴장된 너의 숨결, 너의 손길, 기억할 거야. 무엇부터 물어봐야 할지, 떠오르는 질문들을 쏟아내고 ‘이건 물어봐야 해’ ‘이건 묻지 말아야 해’ 고민하던 순간들. 밀려오는 면접자를 대하던 너의 숙고를 생각하면 그날 그 회사의 면접은 이미 꽝이야. 기억나니. ‘이 분은 이 회사에 적합하지 않아’라고 생각했던 사람들 말이야. 능력은 출중한데 이런 험한 데 와서 고생하지 않았으면 했을 지원자들 말이야. 마음속으로 ‘지원자들 모셔두고 배워보자’고 생각나게 만든 능력자들 말이야. 네가 떨어진 이유도 똑같아. 능력이 출중하니까, 머리 잘 굴러가니까, 금방 뛰쳐나갈 거란 것도 알았을 거야. 그러니 공고에도 없는 ‘행사 보조’ ‘전화 응대’ 같은 단어로 에둘러 지껄였겠지. 그것도 면접장에서. 그래서 그 놈 회사는 꽝이라는 거야. 난 말야. 회사 선임에게 된통 당하며 혹독하게 살아왔던 그 분이 가장 기억에 남더라. 동변상련이라 해야 할까. 규모가 있는 회사일 수록 분업화가 잘 돼 있잖아. 전문적일수록 디테일함에 몸서리치기도 했고. 오자(誤字) 하나에 광분하는 선임을 보면 볼수록 때론 두려움을, 때론 자책이 들기도 했겠지. 그렇지만 그 혹독한 시간들을 보냈기에 지금의 섬세한 네가 다듬어졌잖아. 그렇게 하나 둘, 성장하는 거겠지. 그분의 눈망울에는 아직도 그 선임이 존경하는 자리에 서 있는 걸 느꼈어. 섬세하고 예리하다 못해 예민해서 갈구고 또 갈구는, 그러나 그 손길이 없었다면 결코 몸에 익힐 수 없었던 실무 경험 말이야. 그런 회사를 가야 하는 거 아니겠니. 일하면서 빼먹을 게 있는 곳, 혼은 나지만 존경심이 드는 곳, 지치지만 배울 수 있는 곳. 무력감이 아니라 성장통을 느낄 수 있는 곳. 하긴, 그런 회사가 아니라서 귀한 시간 내 가지고 온 면접자에게 그따위 질문이나 던지는 거겠지. ‘한 놈만 걸려라’ 심보로 말이야. 가운데 앉아 가지고 좌장처럼 보이고는 싶었는지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공고에도 없는) 이 일들, 감당할 수 있겠냐”고 묻는 놈 밑에서 뭘 배우겠니. 갈 데 없는 건 똑같은 처지에다, 나이만 열 다섯살 더 많아 이직은 꿈도 꾸지 못할 텐데. 나이 좀 많다고 깝죽대는 게 전부인 놈이 말이야. 잘 됐어. 어차피 됐어도 안 갔을 거잖아. 주제도 모르고 콧대만 높은 것들, 넘치는 노동 인구의 수혜를 받는 한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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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day소랑 2026년 6월 21일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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