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김용철 새능력’이 체제경쟁 대상이라 생각하는 정신머리

예수의 부활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새능력의 김용철은 유독 ‘믿음’에 방점을 두었다. 그의 스크립트를 분석해 보면 ▲믿음=74회 ▲부활=54회 ▲사망·죽음=54회 ▲하나님=26회 ▲죄=22회를 언급했다. 특히 그가 “~줄로 믿습니다”를 말한 맥락을 살펴보면 종결의 강박을 확인할 수 있다. 이 표현이 수십 번 나오는데 LLM 인공지능 클로드는 “기능이 독특하다”고 평했다. 주장을 사실처럼 만들지 않고 ‘믿음의 영역’에 가둬버린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회복시키십니다”가 아니라 “회복시키실 줄로 믿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반증 불가능해지는 구조다. 안 되면 ‘믿음이 부족한 것’이 되고 되면 ‘믿음의 결과’인 것이다. 이 종결 어미 하나가 설교 전체를 검증 불가한 구조로 만들었다. 김용철의 스크립트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몇 가지 특징이 선명하게 보인다. ①설교 전체에서 대여섯 번 반복되는 ‘위기-해결’ 구조: 단일한 구조가 청중이 어디에 있든 ‘내 문제도 해당되겠다’는 느낌을 받도록 설계돼 있다. 문제는 이게 설득이 아닌 패턴 주입이라는 것이다. 부활이 왜 그 위기의 해답인지를 한 번도 연결하지 않는다. 그저 위기 다음에 부활이 나오니까 청중이 연결되는 것처럼 느끼게 할 뿐이다. ②예수가 부활했다(전제)-믿으면 너도 산다(결론)-아버지가 나았고, 쌀통에 쌀이 나왔고, 바울이 순교했다(근거): 이건 신학적 논증이라 할 수 없다. 귀납도 연역도 아니다. A가 B와 비슷하니까 A에서 일어난 일이 B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주장을 하려면 A와 B가 왜 비슷한지 먼저 보여야 한다. 그러나 김용철의 스크립트에서는 그 과정이 없다. 성경은 전부 결론을 지지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될 뿐이다. 로마서 6장, 고린도전서 15장, 요한복음 11장을 인용하지만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지, 그 문맥이 무엇인지, 원어가 무엇인지 단 하나의 설명도 없다. 성경은 감정 고조의 타이밍에 삽입되는 장치로 기능하는 것이다. 김용철의 스크립트는 오직 청중을 위기 속의 존재로 몰아넣는다. “삶이 무너졌나요” “건강에 어려움이 찾아왔나요” “절망 가운데 계십니까” 청중의 현재 상태를 결핍으로 규정하고 그 결핍의 해답을 설교자가 독점하는 구조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해답은 언제나 교회 안에 있다고 주장한다.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려면 예배당에 와야 하고, 믿음을 고백해야 하고, 설교자의 언어를 따라 해야 한다. 청중이 스스로 접근할 수 있는 경로가 없다. 설교자를 경유해야만 한다. 교인의 실명과 자산 규모를 비유하는 것도 이 맥락에서 봐야 한다. 단순한 농담이 아니라 설교자가 교인의 삶을 알고 있다는 과시를 의미한다. 알고 있는 사람이 권력을 가지는 이 섬뜩한 맥락을 어떻게 무시할 수 있는가. 새능력은 10년이 넘는 기간,

[되새김질] 지구를 구하자는 것도 아니고

나와 함께 일을 한지 네 달. 신입 동료를 따로 불러 윽박을 질렀다. 이유는 다섯 가지, 사진을 꺼내 들어 문제점을 거론했다. “편집의 기본이 안 돼 있다.” “상식 아닌가.” “그동안 뭘 하고 있었나.” 말투만 조근조근했지 속에는 칼날이 서려 있음을 나는 안다. 잘 못하는 건 당연하다. 신입이기 때문이다. 있는 놈, 없는 놈 화(火)란 화는 다 내다가 내지를 화가 다 떨어졌는지 조금씩 마음이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이미 동료는 눈물 한 바가지를 쏟고 나서였다. 이렇게 마음 여린 사람에게 너무 윽박을 지른 건 아닌가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그리고 나는 이 말을 꺼냈다. “우리가 지구를 구하자는 건 아니잖아요.” 오랜 취준 이어가던 여자친구는 어느 날 내 위에 올라타 엎드렸다. 어두운 표정은 이내 눈물 바다가 되고 말았는데. 내 맘대로 되지 않는 취업이 서러웠는지 한참을 울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한 달에 25만원이라도 지원해준다는 이재명식 약속과 이 말이었다. “우리가 지구를 구하자는 것도 아니고, 평범하게 살자는 건데. 세상 참 각박하게 구네.” 체념일까, 정당화일까. 완벽을 요구하고 몰입할 때마다 나는 이 말을 되뇐다. 상대방을 몰아붙이지 않기 위해, 나를 망가뜨리지 않기 위해. 입사 다섯 달, 동료는 드디어 일 감각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여자친구는 새 회사에서 일한 지 두 달째다.

[사설] 그저 ‘병사1’로만 생각하는 정신머리 이런 게 해병 없는 ‘해병 정신’

2026년 05월 09일
2023년 7월 19일 경상북도 예천군 내성천에서 13명의 해병대원과 폭우 실종자를 수색하는 작전에 투입된 채수근 상병이 급류에 휩쓸려 순직한지 2년 10개월 만에 법원은 1심에서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다.(2026.05.08) 포병 대원이 구명조끼도 없이 허리 깊이까지 물에 들어가는 건 수색 작전이라 할 수 없다. 상급 지휘관의 성과 집착이 대원의 몸으로 지불된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임 전 사단장은 수중 수색 사진을 보고받고도 멈추지 않았다. 재판부는 이를 두고 “구체적 위험을 인지한 상황에서 위험을 가중시키는 지시”라고 밝혔다. 과실이 아니라 선택이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죗값은 징역 3년이었다. 특검은 5년을 구형했음에도 대원의 생명을 담보로 작전 성과로 밀어붙인 지휘관에게 법원이 매긴 값이 고작 그뿐이었다. 채 상병의 어머니는 선고 직후 법정을 떠나지 못했다. 군 복무로 나라를 바친 이들이면 먹먹해질 물음이다. “아들의 희생에 대한 책임이 이렇게 가볍다면 어느 부모가 안심하고 자식을 군에 보내겠느냐.” 임 전 사단장은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 “수중 수색을 지시한 건 내가 아니”라는 장문의 이메일과 문자를 보냈다. 재판부는 “오랜 재판 경력에서 이런 피고인을 본 적이 없다”고 질타했다. 해병 정신을 입에 달고 살던 사람이 해병의 죽음 앞에서 한 행동이 그것이다. 임 전 사단장의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를 적시한 2023년 7월, 해병대수사단이 경찰에 이첩하려 했을 때, 누군가 그것을 가로 막았다. 대통령실 번호로 걸려온 통화 뒤 14초 후 이첩 보류 지시가 내려간 것이다. 수사단장은 ‘집단항명의 수괴’로 입건됐다. 이첩을 막은 혐의로 기소된 윤석열의 재판이 진행 중이다. 1심 법원이 임 전 사단장의 과실치사를 인정했다는 것은 그 이첩을 막을 이유가 없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재판부는 말단 지휘관에게만 책임을 떠넘기는 군의 관행을 지적했다. 그 관행을 깨려 한 건 해병대수사단이었고 그것을 다시 덮으려 한 것이 침묵의 권력이었다. 해병 정신을 가르치던 이들이 누구보다 해병의 죽음을 덮으려 했다.

[돌아보는 사건] 기본급 150만원

2026년 02월 26일
1> 저의 첫 월급은 113만5600원이었습니다. 편의점에서 일하던 시절, 2019년 최저임금은 8350원이었습니다. 그마저도 전년보다 10.9% 오른 수준이죠. 한 달 23영업일 출근하고서 받은 정식 기본급은 150만원 언저리였습니다. 주휴수당은 없었고 최저시급으로만 받았으니 하루 품삯으로 따지면 6만5000원이었습니다. 물가가 누적 18~19% 오르고, 최저임금이 20.1% 오를 때 저의 하루 품삯은 2019년에서 2025년, 102% 올랐습니다. 두 배가 오른 셈이죠. 이 정도면 지금의 회사에서 격세지감 느끼는 이유를 아실 겁니다. 2> 개선된 근무 환경과 강도(強度)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밤 11시에서 다음 날 7시까지 꼬박 8시간 일하던 시절에 비해 같은 노동시간 임에도 아침 7시에 출근해 저녁 5시에 퇴근하는 지금의 근무 형태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밤 근무는 그 자체로 고통이지만 상쾌하게 일어나는 이른 아침과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한 달에 두 번 재택근무, 한 달에 한 번은 아무 이유 없이 내 마음대로 퇴근할 수 있는 회사라는 점에서 편의점과는 다른 복지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3>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도 비교하면 근무 환경이 개선된 곳에서 일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매번 고객사로부터 새로운 디자인을 요구 받습니다만, 저의 커리어를 생각하면 고마운 사람들입니다. 이유 있는 피드백과 구체적인 회신, 메일이라는 문자 전송으로 이루어지는 근무 환경이 저의 정신을 단단하게 만듭니다. 일을 못하면 혼을 내는 게 아니라 ‘누구나 초기 근무에는 실수할 수 있다’고 격려해주는 고마운 선배와 동료들. 진상 고객을 만날 때마다 스트레스 받던 편의점 시절과는 다릅니다. 매번 폐쇄회로(CC)TV를 들여다보며 감시하는 사장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4> 편의점 시절의 저는 그저 버티는 사람이었습니다. 진상 고객과 CCTV 앞, 그리고 새벽 3시의 편의점 안에서 성장보다 생존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생존의 공간이 지방 편의점이었다는 건 그저 직종의 차이가 아니라 기회의 밀도 차이였습니다. 서울로 발걸음을 옮긴다는 건 더 많은 선택지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편의점에서 일하던 시절, 저는 제대로 된 임금을 받지 못했습니다. 주휴수당은 법적인 권리였지만 저는 에둘러 묻지 않았고 사장은 모른 체했습니다. 지금의 격세지감은 단지 월급이 두 배 올랐다는 얘기만이 아닙니다. 5> 2023년 기준 한국의 1인당 생애주기적자를 보면 만 45세에 노동소득 정점을 찍고 61세부터 다시 적자 구간으로 돌아선다고 합니다. 어쩌면 더욱 부단히 일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의 격세지감을 발판 삼아, 더욱 발전하는 삶을 위해서 말입니다. 내일은 한 시간 일찍 퇴근하는 날입니다. 회사에 더욱 고마운 마음이 싹틉니다.

[사설] “환단고기는 위작이다” 대통령은 이 한 마디가 어려운가

2025년 12월 15일
1979년 이유립이 출간한 ‘환단고기’는 논란의 대상이 아니라 문제점이 명확한 위작(僞作)이다. 가장 근본적인 결함은 원본 자료의 부재다. ‘환단고기’는 1911년 계연수가 편찬했다고 주장되지만 이유립이 이를 출간한 1979년 이전까지 검증 가능한 실본이 존재하지 않는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계연수는 1916년까지도 천부경의 존재를 알지 못했던 인물이다. 그런데 그가 1911년에 편찬했다는 ‘환단고기’에는 이미 천부경이 수록되어 있다. 편찬 연대와 인물의 실제 행적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다. ‘환단고기’가 위작이라는 점은 주류 역사학계에서 이미 결론이 난 사안이다. 기경량은 이를 “전형적인 날조 문헌”이라고 규정했고, 정요근은 “전문 역사학의 연구 결과와 유사역사학의 주장을 동일 선상에 놓고 진위를 따지는 것 자체가 매우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반병률 역시 “‘환단고기’ 논쟁은 연구 방법론과 검증 기준이 전혀 다른 주장을 학문적 이견처럼 포장하면서 발생한 문제”라고 밝힌 바 있다. 문제가 불거진 계기는 12일 교육부 업무보고 자리였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환단고기’를 언급하며 검증된 역사학과 유사역사학을 마치 ‘관점의 차이’인 것처럼 발언했다. 이는

[일과속기록] 4박 5일, 오사카에서의 마지막 밤

2025년 09월 30일
간사이(関西) 지역은 도쿄와 달리 압도적이었다. 교토와 오사카. 평범한 도시라기엔 각자의 색채가 진했다. 가을 웜톤으로 물든 교토의 각진 건물들, 화려한 간판으로 물든 오사카의 다채로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우리 연인은 4박 5일을 이곳에 머물며 일본의 진한 내음을 즐길 수 있었다. 도쿄의 여행이 아카사카를 기반으로 둘러보는 도시 관광이었다면 간사이 여행은 결이 달랐다. 교토, 오사카의 숙소를 기반으로 은각사와 청수사, 도톤보리와 우메다 등을 돌아다니며 각 도시에 맞는 색깔을 경험했다. 감격은 호텔 앞 택시에서 내렸을 때부터 시작됐다. 노란 모자를 쓰고 하교하는 초등생들, 가모강(鴨川) 부근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여고생의 가벼운 미소, 정류장을 지나갈 때마다 안전 운행하는 영혼 없는 버스 기사의 목소리까지. 오래된 신사 후시미 이나리에서 본 일본 고유의 건축물, 이치조지(一乗寺)에서 체감한 일상의 상가 건물들은 가슴을 푸근하게 했다. 어딜 가나 갓길 주차 하나 없는 깔끔한 골목, 오래된 역사(驛舍)임에도 깔끔한 마감의 타일, 제각기 독특한 형체를 갖춘 주거지와 상점가. 고유한 개성 속에서 느껴지는 일본의 질서를 온몸으로 체득하자 감동을 느낀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우리는 일본인의 깍듯한 예의와 태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숙소까지의 교토역 길목에서 대접 받은 택시 기사의 정중함. 프론트에서부터 우리를 기다리던 직원의 단정함. 우리가 사온 사발면을 거절하지 않고 기꺼이 식당의 자리를 내어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다정함. 나는 문득 무엇이 이들을 일하게 만드는 것일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나와 같은 관광객을 한두 명 대한 게 아닐텐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첫 일본여행과는 달리, 두 번째 여행에서는 일본에 대한 환상에 금이 갔다. 모든 일본인이라고 친절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를 딱딱하게 대하는 사람들도 보았다. 삶에 치여 고단하게 사는 현대인의 모습은 세계를 막론하고 어디서든 존재했다. 불친절한 태도에 기분이 나쁘기도 했지만 곧바로 당신들의 치열한 일상이 떠올랐다. 그래서 내 입술에선 “고멘나사이(ごめんなさい)”가 때로는 “아리가토고자이마스(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가 흘러 나왔다. 굳어 있는 표정 속에서도 굳이 나의 인사를 받아는 주었다. 30년을 한국에서만 살았으니, 이곳 일본에서의 경험은 즉각 한국과 비교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본 일본의 기억 조각들을 모으고 모아 봐도 우리를 대해준 모든 일본인에게 고마울 뿐이었다. 각자가 고유한 색채를 지켜나가는 삶의 강인한 체력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야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먹고사니즘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보이지 않는 힘을 일본인을 보면서 느꼈다. 치열하지만 강인하게 살도록 만드는 힘 말이다. 친절하든, 친절하지 않든 말이다. 여자친구와 오사카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며 지난날을 돌아보았다. 우리의 결론은 여행을 마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간다 해도 아쉽지 않다는 점이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돌아다녔고, 후회하지 않을 날들을 일본에서 경험했다. 일본은 일본만의 삶의 결이 있고, 한국은 한국만의 독특함이 있다는 감동을 마음에 새길 수 있었다. 나에게 4박 5일, 짧지 않은 일본 여행이 한국을 더욱 사랑할 수 있는 선물이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일본인의 따뜻하면서도 각진 대접을 받으며

[사설] 열한 번의 여름, 미디어그룹을 만든 겨울의 언어

2025년 08월 11일
자유의새노래 미디어그룹의 출범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오롯이 한 사람의 기억을 담던 그릇이 이제 많은 이들의 기록을 품는 그릇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 서기까지 열한 번의 여름을 지나쳐야 했다. 그 사이 겨울의 언어로 아로새긴 추위와 고독, 결의가 지금도 선명하다. 이 신문의 방향을 가른 것은 외부의 세력도, 미지(未知)의 존재도 아니었다. ‘바뀌어야 산다’는 절박한 마음이 오늘을 만든 것이다. 10여 년의 세월, 새능력교회의 비정상적 신앙은 세상을 둘로 가르고 인간성을 거세했다. 그 거세된 인간성 속에서 내면의 아이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 것이다. 그 아이를 오래도록 ‘소녀’라고 불렀다. 소녀는 인간을 사랑하고 삶의 작은 목소리에도 귀 기울일 줄 아는 하나된 자아를 추구하는 존재였다. 동일한 인간이 느끼는 감정과 감각을 상징했다. 그러나 교회의 극단적 교리는 소녀의 존재를 부정했고, 신의 침묵은 소녀가 죽음에 이르도록 방치했다. 이 신문의 역할은 죽은 소녀를 되살리는 일이었고, 할 수 있는 것은 ‘기억 보도’뿐이었다. 다채로운 기억을 되살리고 다시 배치함으로써 소녀의 숨결을 느끼고, 그리워하며, 애도(哀悼)하는 일뿐이었다. 겨울의 언어는 죽은 소녀를 기억하고, 기록하며, 기약했다. 그렇게 죽은 줄만 알았던 소녀를 다시 살려낸 것은, 교회로부터 해방을 맞고 몇 년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죽은 줄 알았던 감정이 되살아나고,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추억이 기억의 재편을 통해 자신의 색깔을 되찾자, 숨죽이며 기다리던 소녀를 발견한 것이다. 비로소 소녀의 역할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하나의 서사로 연결하며 삶을 다시 재편하는 일이었다. 자신과의 화해는 과거의 나를 용서하고, 미래의 나에게 현재의 나를 의탁(依託)하는 일로 확장되었다. 부모와의 화해, 지인과의 화해 그리고 악마라고 믿었던 이들과의 화해로 이어졌다. 그렇게 열한 번의 여름이 지나갔다. 드디어 한 시대, 서사의 끝에 서 있다. 오랜 시간 고대하던 본지 미디어그룹의 출범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본지 미디어그룹의 출범은 곧

증인의 전도지, 외면 못한 이유

2025년 07월 24일
광주에 쏟아진 빗방울 412㎜는 말 그대로 극한 호우였다. 내가 타던 KTX는 16분이나 지연되고 말았다. 마지막 역도 목포역에서 광주송정역으로 바뀌었다. 나야 거기서 내리면 됐지만 김제나 목포로 향하던 이들은 안내 방송에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는 한창 칼럼을 마감하던 길이었다. 한 시가 급한 상황이었지만 어떤 문장을 구성할지에 잠기고 말았다. 마지막 역이 바뀌었다는 갑작스러운 안내 방송에 옆자리 할아버지가 욕설을 내뱉고 말았다. 몹시 화가 난 모양이었다. 그는 한참을 스마트폰 화면을 노려다 보았다. 시간이 지나 할아버지는 화가 풀렸는지 모니터를 향해 손짓하더니 한 말씀을 건넸다. “글씨가 이렇게 작은 데 보여요?” 눈앞 마감보다는 할아버지의 화를 풀어드리고 싶어졌다. “그럼요. 잘 보이고 말고요. 어디까지 가시는데요?”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말문을 터뜨렸다. 무려 한 시간이나 대화를 나눈 것이다. 할아버지와의 대화는 내가 바라던 주제가 아니었다. 나라 걱정과 애국, 온통 가짜 뉴스로 가득한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앞뒤 좌석에 아무도 없었기에 가능한 대화였다. 나는 때론 맞장구를 치기도 했고, 할아버지를 치켜세워드리기도 했다. 이 또한 과거에 나 역시 애국 보수였기 때문에 가능한 대답이었다. 그가 자신만의 애국 세계를 말할 때마다 나는 조심스레 그가 어떤 일을 하는지, 무엇을 하러 호남 지역으로 내려가는지를 물었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자녀들이 캐나다에서 잘 살고 있다는 얘기를 꺼낼 때마다 얼굴이 환해지는 것을 보았다. 동시에 쓸쓸하고 외로운 단면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머니 이야기에 이르러서야 나는 당신의 우국충정을 외면할 수 없었다. 마지막 우리는 세 차례나 악수를 했다. 나는 그에게 축복해 마지않았다. 건강하시라고 말이다. 며칠 전 아시아문화전당으로 향하던 길목이었다. 칠순에 가까워 보이는 할머니, 여호와의증인이 내게 전도지를 건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만의 신앙 세계를 말했고, 나는 조심스레 맞장구를 치다 이번 폭우 잘 견디셨는지를 물었다. 다행히 아무 일 없었다고 한다. 주저리 이어지는 신앙 이야기에 나는 근처 다리 이름의 유래를 물었다. 물음을 통해 이 지역에 얼마나 관심이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었다. 이 또한 나 역시 과거에 독실한 신앙인이었기에 가능한 대화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질문, 어디 가시는지, 어느 버스를 기다리는지, 이곳 근처에 사시는지를 물었다. 그는 중간중간 여호와를 믿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증언했지만, 그의 대답을 들으면 들을수록 인심 좋은 할머니가 내 앞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두 손을 맞잡았고 서로를 축복했다. 애국 보수와 독실한 신앙, 사람은 겪어 본 세계만을 이해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세계를 온몸으로 겪을 때에야, 지금 여기의 현실을 외면하지 못하는

[에셀라 시론] 가난 선생님, 이제 울지 마세요

2025년 07월 17일
잔나비의 정규 4집 Sound of Music pt.1 수록곡 ‘무지개’에는 비장한 제목이 붙어 있다. ‘모든 소년 소녀들2’. 그 뮤직비디오에서 나는 서글픈 직감에 사로잡혔다. 바닥에 쓰러진 채 날지 못하는, 새의 형상을 한 인간. 그리고 멀찍이서 말끔한 정장을 입은 이들이 언덕 위에 서 있었다. 망원경인지 요지경인지 알 수 없는 쌍안경을 들고, 그들은 하늘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결코 날 수 없는 이의 날갯짓은 외로워 보였다. 정장을 입은 다수의 사람들과 선명하게 대비되는 그 몸짓은 이룰 수 없는 ‘시궁창에서 별 바라보기’ 같았다. ‘무지개’는 앞선 곡 ‘모든 소년 소녀들 1 : 버드맨’의 연작처럼 들린다. 두 개의 뮤비가 말없이 이어지며 메시지를 완성하는 것이다. 말끔한 교복을 입고 졸업 사진을 찍는 소녀와 소년들. 미래를 약속받은 듯한 모습으로 사회에 나아가는 희망에 찬 장면들. 그러나 제목이 가리키듯, 버드맨은 아기새를 의미한다. 갓날개를 펴고 꿈을 향해 발버둥치는 존재. 그리고 그 꿈은 결국 말끔한 정장 차림으로 저 너머의 하늘만 바라보게 되는 운명으로 귀결된다. 이룰 수 없는 꿈, 닿을 수 없는 이상. 버드맨은 그렇게 다수가 되는 법을 배운다. 뮤직비디오를 보고 나는 올해가 가기 전 글을 쓰기로 다짐했다. 이 직감을 기록할 수 있다면 언제가 되었든 글로 남기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나 더욱 글로 남기고 싶은 강렬한 불꽃이 타오른 것은 가난 선생님과 헤어질 무렵이었다. 가난 선생님과 가까워진 건 전임자가 인수인계를 완전히 완수하고 떠난 후였다. 회사에서 영상을 촬영하면 편집한 후 고객들이 볼 수 있도록 홍보 영상을 만드는 게 가난 선생님과 나의 주 업무였다. 때로는 내가 보조로 촬영을 도와드리기도 했고 내가 가난 선생님에게 도움을 받기도 했다. 그러다 얼굴을 마주한 지 3일 만에 통성명을 했다. 가끔은 한국어 이름이 익숙하지 않아선지 내 이름을 잊어버리곤 했다. 하지만 가난 선생님은 유능한 통역 업무로 나를 놀라게 했다. 본사 직원이 아닌 대행사 직원임에도 내게도 따뜻하게 대해준 노동자였다. 가난 선생님은 자신의 일이 아님에도 자신의 일처럼 회사를 대했다. 회사 사람들에게도 화사했고, 당찬 사람이었다. 자신에게 피해가 돌아간다 하더라도 꿋꿋하게 버티고 견디는 그런 사람이었다. 도대체 무엇이 그녀를 일하게 만들었는지 궁금했다. 무엇이 그녀를 움직이게 만드는 원동력인지 알고 싶었다. 그 노력을 임원들이 알았더라면 좋았겠지만 원체 세상은 무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선한 마음의 가난 선생님은 두 번이나 내 앞에서 눈물을 훔쳐야 했다. 이놈 회사는 당신에게 속상한 대우로 가슴을 아프게 만든 것이다. 어느 날은 축 늘어져 의자에서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가난 선생님 옆에서 앉아만 있어야 했다. 해줄 수 있는 말이라고는 “고생했어요” “고생 많으셨네요” 뿐이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가난 선생님의 아픔과 고통에 함께하는 일뿐이었다. 송구스럽게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진정 그것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원고를 쓰기 시작했다. 원래 나의 퇴사 기사에는 이곳 회사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풀어갈 생각이었다. 사무실에서 벌어진 크고 작은, 내가 속상했던 순간들, 화가 났던 기억들. 그것들을 남겨 놓기로 마음 먹었었다. 말 없이 문장을 쌓고, 쌓다 보니 이상하게도 사건은 사라졌고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언제부턴가 나는 가난 선생님에 대해 글을 쓰기 시작했고, 그 옆에서 묵묵히 버텨준 다른 통역사 선생님들의 얼굴도 떠올리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일’을 기록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함께 견뎌낸 사람들’을 기억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가난 선생님을 통해 변해가는 와중에도 변하지 않는 것을 나는 보았다. 묵묵히 일하는 자의 항상성(恒常性). 웃음이 났다. 그 항상성은 가벼운 토대가 아닐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변하는 와중에도 변하지 않는 건 사랑, 정의 같은 추상적 가치나 개념 따위만이 아닐 수 있겠구나라고. 이 비참한 사회를 흐름잡고 있는 건 돈의 가치, 힘의 논리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런 굵은 권능이 세상을 움직이고 있을 때 삶의 토대를 이루는 이름 없는 것들이 항상성을 만들 수 있겠구나를 깨달은 것이다. 마침내 원고를 마감하다 한 가지 질문을 떠올렸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공동체성과 과거의 전통, 사랑에 스며든 고귀한 희생 정신을 잃은 채 그저 삶에 치여 목적과 방향을 잃어버린 채 돈에 절인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뮤직비디오에서 느낀 서글픈 직감은 내게 청춘을 가리켰다. 사회의 모순을 견뎌야만 하는, 끝내 꿈을 간직한 채 살아내야 하는 방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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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day소랑 2026년 6월 20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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