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셀라 시론] 소녀의 이름으로

나는 이제껏 김용철의 새능력을 왜 더 빨리 탈퇴하지 못했는가에 대한 괴로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좀 더 빨리 탈교(脫敎) 했다면, 조금 더 빨리 관계를 정리했더라면…. 소년을 구하지 못한 죄책감은 우연히 입수한 18년 전, 한 영상을 보면서 오롯이 해소되었다. 연세중앙교회 YBS 인터뷰에 담긴 소년은 짐짓 말할 수 없는 모든 죄를 짊어진 표정으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알고 지은 죄인데 왜 그걸 지금까지 해결하지 못했는가….” 도대체 중학교 2학년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카메라 앞에 서서 자책하며 스스로를 옥죈단 말인가. 새능력을 탈퇴하고서 나는 단 한 번도 김용철의 설교를 끝까지 들어본 일이 없다. 양심에 찔려서도 아니고 눈물이 감격으로 앞을 가렸기 때문도 아니다. 1시간 설교 모든 문장 옭아맨 감정 동원과 협박 구조, 의미 없는 아멘의 반복, 철학도 신학도 없는 감정만 휘젓는 수준의 처참한 호통은 그의 설교를 들어보면 누구나 깨닫게 된다. 그는 오로지 의식의 흐름에 의지한 채 청중을 감정적으로 끌고 다닐 뿐이다. 각 단락 사이의 논리적 연결은 찾아볼 수 없다. 자기도취에 빠진 간증을 서사로 가져다가 어떻게든 이어 붙이는 게 전부다. 모든 것 공허함의 파도밖에 보이지 않던 시절, 나는 죽을 용기를 가지고 어둠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시절 스물 두 살의 나는 미지(未知)의 두려움을 견뎌야 했다. 이제는 지옥에 가는 건가 싶었다. 가족도, 연고도 없이 새능력에 붙잡혀 노동 착취를 당했어도 불안함은 가시지 않았다. 그로부터 10년이 흘렀다. 그동안 탈출이 재생되었다. 때로는 방송실 귀퉁이에서 일을 하는 장면이 꿈으로 재생되었고, 어쩔 땐 빠져 나오는 꿈을 꾸기도 했다. 많으면 한 달, 뜸하면 서너 달에 한 번 연속된 꿈은 새능력으로부터의 완전한 탈출을 가리키고 있었다. 과거의 나로부터 찾아오는 ‘시간의 죄책감’이 나를 오랜 시간 사로잡은 것이다. 몸은 난파선을 벗어났지만 아직도 나의 혼은 그곳에 갇혀 있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허물어지는 시간. 탈교는 무너진 영혼 속에서 재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저 어른들이 주입한 죄책감은 남은 인생의 각도를 비틀었다. 어그러진 관념과 여성성에 대한 왜곡된 이해는 긴 시간의 교정이 아니었으면 영구히 손상되었을 것이다. 바로 그 소년이 자신의 입으로 토설한 ‘알고 지은 죄’는 이브가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따먹은 상징이다. 왜곡된 여성 이해의 뿌리는 기독 담론 그 자체다. ‘성숙한 소녀’라는 어른들의 거짓말이 빚어 만든 망상이 소녀의 노동을 착취했고, 소년의 미래를 짓밟은 것이다. 탈교 이후 나는 차근차근 기독 담론을 해체하기 시작했고 비로소 소녀를 다시 발견하게 되었다. 그 소녀는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지,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천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악과를 먹은 후 야훼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침잠한 것처럼 나는 소녀 앞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되어가는 과정을 순연(純然)하게 바라보듯 과거의 시간을 다시 배열하고 재건하는 소녀의 손길을 말없이 볼 뿐이었다. 소녀는 잃었던 재주, 놓쳤던 이름, 잊혔던 얼굴을 되찾았다. 에덴의 난민, 아담과 이브는 재건의 기회조차 잃었으나 소녀는 신의 질서를 거스르고 마침내 ‘지금 여기(hic et nunc)’의 자리에 섰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소녀의 일하는 광경 속에서 기록하는 것뿐이었다. ‘기억의 화해’가

고마워

받은 메시지에 희미하게 적힌 사진 속 이름을

[지애문학] 겨울방학, 이별을 앞두고

2024년 12월 29일
마지막 날.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평소라면 책상에 바로 앉아 마음을 가다듬은 채 명상을 하고, 교실 이곳저곳 쓸어다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은 이 아침을 독서로 문을 열어야 했다. 마지막이라는 순간 때문이었을까. 박동하는 심장을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발 닿는 대로 걷기로 결심했다. 복도에는 노을이 꽉 들어 차 있었다. 지금이 새벽이라는 걸 말해주는 것 같았다. 한 걸음, 한 걸음. 이어폰에서 흐르는 멜로디와 가락을 곱씹었다. 아무도 없는 빈 거리를 홀로 거니는 들뜬 이 기분에 오히려 차분해졌다. 한 반씩 스쳐 지나갈 때마다 묻곤 했다. 이곳에서 밤낮을 보낸 너희의 일상은 언제쯤 끝에 도달할까. 황금 빛 파묻힌 책상에는 먼지 하나 없고, 머지않아 새로운 손님을 마주할 부푼 기대만을 머금고 있었다. 이 곳 낯선 땅에 처음 발 디딘 순간을 기억한다. 엄한 군기와 훈육 시스템. 획일화 된 교육 커리큘럼. 똑같은 패션과 헤어스타일. 단연 우리의 꿈 좋은 대학. 척박하고 메마른 땅에 던져진 기분이었다. 아무도 없는 고독한 땅을 개간해야 하는 막막한 심정. 씨앗이라도 심으면 새싹이라도 자랄 수 있을는지 묻고 또 묻기를 1년. 수없이 지나간 밤들. 비로소 사계절을 보내고 새로운 겨울을 맞는구나. 복도의 끝은 적막했다. 하나 둘 교실에 도착해 내는 왁자지껄 소리 풍경과는 달랐다. 누구에게는 반복되는 발걸음일 뿐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지금의 발걸음도 그렇다. 그냥 정처 없이 이곳저곳 떠도는 순간일 뿐이라고만 생각할 것이다. 도무지 견디기 어려우면 나는 발걸음 떼 걷기 시작했다. 낮부터 저녁까지 말없이 걷기만 했고, 밤을 새워 하염없이 걷기도 했다. 물론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를 얻었다. 견딜 수 있는 힘 말이다. 상황은 달라지지 않아도 사람들은 변하지 않아도 사건은 제자리걸음이어도. 내 마음은 환기되었고 나는 조금 더 단단한 사람이 되었다. 나에게 이 걸음은 답답한 순간을 지나가게 해준 터널에서의 여정이었다. 힘든 순간을 견디게 해준 최후의 여정이었다. 자리에 멈춰 섰다. 이어폰에서는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새벽노을은 아침 이슬처럼 차갑고 상쾌했다. 발걸음을 이리저리 옮기기 시작했다. 보편적인 노래, 날들, 일들이 되어버린 메시지를 되뇌고 또 되뇌었다. 마지막이란 단어가 주는 다섯 빛깔에 주목했다.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아련함. 다시 너를 볼 수 없다는 우울함. 다시 너를 느낄 수 없는 서늘함. 다시 사랑할 수 없다는 미안함. 다시 고마움뿐일 우리의 일상. 저 너머 아득히 사라진 지난 날들이 하나의 빛깔로 모여들었다. 그 속에서 나는 새싹을 발견했다. 그 새싹은 조금씩 피어오르고 있었다.열여섯, 그 더딘 시간 안에 자란 새싹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짓밟히고 뜯겨 무참히 박살난 줄 알았던 그곳에서. 그곳에서 발견한 노을 빛이 얼굴에 서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또다시 평범한 나날이 지나고 지나면 더 자라 있겠지. 노래가 더욱 진해져갔다. 이어폰에서 흐르는 멜로디 한 마디 한 마디를 곱씹었다. 그렇게 말없이 이리로 걷다가 저리로 걸었다. “진성아.” 담임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교무실로 나를

[사설] 대통령의 반역

2024년 12월 24일
어처구니없는 대통령의 한밤 내란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행정안전부 장관을 비롯한 야당의 탄핵 시도와 예산 삭감이 그것이다. 대국민 담화에서는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세력’이란 단어가 나왔다. 대한민국에서의 계엄은 언제나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한 카드였다. 박정희의 5·16군사쿠데타와 전두환의 12·12군사쿠데타가 그랬다. 이들은 국회와 야권 세력, 대학생을 점거하는 방식으로 차근차근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 힘써왔다. 그러나 갑자기, 그것도 한밤에 국민의 안온한 평화를 깨뜨린 적은 없었다. 윤석열이 내란을 위해 최소 동원한 장병 수만 1500명에 달한다. 1980년 전국비상계엄 확대 당시 계엄군은 총 98명이었다. 결코 작은 규모가 아닌 것이다. 특수전사령부 산하 707 특수임무단과 제1공수특전여단, 수도방위사령부 군사경찰특임대 등 최정예 부대도 투입됐다. 방첩사령부와 정보사령부 요원들, 경찰들도 가세했다. 경찰은 북파 공작 부대 HID 요원을 운용했다는 정황을 구속영장에 적시하기도 했다. 수사를 통해 드러난 증언에 따르면 윤 씨가 특전사, 수방사, 경찰에 수차례 “의원들을 끌어내라”고 독촉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윤석열은 뻔뻔하게 “국회의원들을 체포하라거나 끌어내라는 용어를 쓴 적이 없다”고 말했으며 ‘경고성 계엄’이었다고 항변한다. 그날 계엄군이 받은 ‘현장 강조 사항’이라는 문자를 보면 ‘지시를 이행하지 않으면 항명죄로 다스린다’ 등이 적혀 있었다. 그러고도 경고성 계엄이라 말할 수 있나. 부정선거 음모론을 믿는 대통령의 놀라운 인식 한밤 내란 한 축에는 ‘부정선거 음모론’이 서 있다. 2020년 4월 15일 총선 당시 야당인 미래통합당의 참패로 끝나자 극우 유튜버들과 온라인 커뮤니티를

교회 방송실의 추억

2024년 11월 27일
10년 전 이맘때는 밤을 새는 일이 잦았습니다. 교회 일 때문이었는데요. 11월 마지막 주 추수감사 절기를 보내고 곧바로 대림 절기를 맞아 업무가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방송실 근무가 만만치 않더군요. 예배 때 사용할 PPTX 자막을 만드는 일부터 동영상 제작까지, 교회학교와 학생부, 청년부에서 떠넘긴 자료가 한 아름이었습니다. 저를 바쁘게 만든 부서들이 한두 곳이 아니었습니다. 거기에 교회학교 교사직까지 감당해야 했으니 열 몸이라도 모자란 상황은 중학생 때부터 매년 반복되었습니다. 교회에서 방송 일을 시작한 건 중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그리고 대학생 2학년과 일병 달 때까지 일하다가 교회 다니기를 관뒀으니, 7년쯤이겠네요. 10년 전 이맘때는 군 입대를 앞두고 슬슬 교회 일을 인수인계해야 할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언제나 일들로 가득한 방송실에 발 디디겠다던 학생과 청년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아무에게도 물려줄 수 없는 위기의 상황에서 당당히 두 손 들고 들어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재현쌤이 불쌍해 보여서 방송실에 들어왔다”던 저의 동지 안중현 형제였습니다. 그때의 고마움과 설렘은 독자 여러분도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방송실 근무에 신바람이 났습니다. 오랜 시간 혼자 근무하던 방송실에 생기가 불기 시작한 것이죠. 방송 일을 가르쳐 주기도 했고요. 오히려 피드백을 받기도 하면서 변화를 느꼈습니다.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구나’를 깨달은 순간이었습니다. 어느 날은 문학의 밤을 준비한다며 중현 형제가 대본을 가져온 일이 있었습니다. 내용은 처참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이런 걸 연극이라고 하기에 스토리도 없었고 교훈도 없었습니다. 재미도 없었고요. 편집으로 커버 쳐야 할 생각에 오히려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연극에 필요한 배경을 손으로 만들기엔 인력이 들 테니 빔 프로젝터로 우리가 그래픽을 활용해 배경을 만들자고 말입니다. 마이크를 들고 일일이 대사를 읊기엔 학생들도 힘을 테니 저는 아예 미리 녹음하자고 조언했습니다. OST와 효과음도 마련했습니다. 영상으로 만들어 연극할 땐 재생만 하면 된다는 신박한 아이디어였습니다. 중현 형제는 옆에서 영상 편집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사실 저에게는 곁에 누군가 있어준다는 사실 자체에서 큰 힘을 얻었습니다. 그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사람에 대한 한줄기 빛을 발견한 것 같습니다. 제가 교회를 탈퇴해도, 유일하게 연락하고 안부 인사를 건네주는 유일한 사람이 중현 형제입니다. 그 고마운 인연, 지금까지 이어가고 있는 게 왠지 모르게 고맙네요. 티스토리 오블완 챌린지도 오늘로 끝입니다. 그러나 이 지면의 칼럼은 앞으로도 쭉 이어질 것입니다. 이 마지막 칼럼을 고마운 중현 형제의 이야기로 끝맺고 싶습니다.

모든 기록이 멈춘 순간

2024년 11월 26일
초등학생 2학년, 선생님이 쓰라던 날에만 꾸준히 쓰던 일기를 8년 전부터는 매일 컴퓨터로 쓰고 있습니다. 저는 일기를 달리 부르고 있습니다. 바로 ‘감회록’으로요. 일기의 확장판인데 감회가

운전면허와 선생님

2024년 11월 25일
수능을 마치면 하나둘 자동차 면허를 딴다고 하죠. 게을렀던 저는 반값으로 면허를 따게 해준다는 유혹에도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4년 전 여름, 삼촌의 도움으로 어렵지 않게

너와의 300일

2024년 11월 22일
저는 한번 붙들리면 강렬하게 사랑하는 스타일입니다. 그게 무엇이든지 간에 말이죠. 신문이 그렇습니다. 이 신문 자유의새노래 말입니다. 신문을 만들 때면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밤이 되든 낮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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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랑 2026년 11월 5일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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