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눈금] 18세 국민연금

10대 국민연금 임의가입자 순 출처: 국가데이터처 청년의 기피 대상인 국민연금을 자진해서 가입한다는 통계가 눈에 띄었다. 국민연금 10대 임의가입자가 2023년 4814명에서 올해 1월 1만2245명으로 2년 새 두 세 배 늘었다는 기사였다. 18~ 19세 인구 대비 10대 임의가입률이 높은 지역은 경기도 과천시(3.63%), 서울 강남구(2.88%), 종로구(2.45%), 동작·송파구(2.41%) 순이다. 전국 평균 1.28%의 2~3배다.

[사설] ‘김용철 새능력’이 체제경쟁 대상이라 생각하는 정신머리

예수의 부활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새능력의 김용철은 유독 ‘믿음’에 방점을 두었다. 그의 스크립트를 분석해 보면 ▲믿음=74회 ▲부활=54회 ▲사망·죽음=54회 ▲하나님=26회 ▲죄=22회를 언급했다. 특히 그가 “~줄로 믿습니다”를 말한 맥락을 살펴보면 종결의 강박을 확인할 수 있다. 이 표현이 수십 번 나오는데 LLM 인공지능 클로드는 “기능이 독특하다”고 평했다. 주장을 사실처럼 만들지 않고 ‘믿음의 영역’에 가둬버린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회복시키십니다”가 아니라 “회복시키실 줄로 믿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반증 불가능해지는 구조다. 안 되면 ‘믿음이 부족한 것’이 되고 되면 ‘믿음의 결과’인 것이다. 이 종결 어미 하나가 설교 전체를 검증 불가한 구조로 만들었다. 김용철의 스크립트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몇 가지 특징이 선명하게 보인다. ①설교 전체에서 대여섯 번 반복되는 ‘위기-해결’ 구조: 단일한 구조가 청중이 어디에 있든 ‘내 문제도 해당되겠다’는 느낌을 받도록 설계돼 있다. 문제는 이게 설득이 아닌 패턴 주입이라는 것이다. 부활이 왜 그 위기의 해답인지를 한 번도 연결하지 않는다. 그저 위기 다음에 부활이 나오니까 청중이 연결되는 것처럼 느끼게 할 뿐이다. ②예수가 부활했다(전제)-믿으면 너도 산다(결론)-아버지가 나았고, 쌀통에 쌀이 나왔고, 바울이 순교했다(근거): 이건 신학적 논증이라 할 수 없다. 귀납도 연역도 아니다. A가 B와 비슷하니까 A에서 일어난 일이 B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주장을 하려면 A와 B가 왜 비슷한지 먼저 보여야 한다. 그러나 김용철의 스크립트에서는 그 과정이 없다. 성경은 전부 결론을 지지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될 뿐이다. 로마서 6장, 고린도전서 15장, 요한복음 11장을 인용하지만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지, 그 문맥이 무엇인지, 원어가 무엇인지 단 하나의 설명도 없다. 성경은 감정 고조의 타이밍에 삽입되는 장치로 기능하는 것이다. 김용철의 스크립트는 오직 청중을 위기 속의 존재로 몰아넣는다. “삶이 무너졌나요” “건강에 어려움이 찾아왔나요” “절망 가운데 계십니까” 청중의 현재 상태를 결핍으로 규정하고 그 결핍의 해답을 설교자가 독점하는 구조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해답은 언제나 교회 안에 있다고 주장한다.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려면 예배당에 와야 하고, 믿음을 고백해야 하고, 설교자의 언어를 따라 해야 한다. 청중이 스스로 접근할 수 있는 경로가 없다. 설교자를 경유해야만 한다. 교인의 실명과 자산 규모를 비유하는 것도 이 맥락에서 봐야 한다. 단순한 농담이 아니라 설교자가 교인의 삶을 알고 있다는 과시를 의미한다. 알고 있는 사람이 권력을 가지는 이 섬뜩한 맥락을 어떻게 무시할 수 있는가. 새능력은 10년이 넘는 기간,

[일과속기록] 작은 거인과 ‘문장의 힘’

2024년 10월 01일
선배의 다급한 요청을 외면할 수 없었다. “학부 3학년임에도 수습기자부터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이었다. 페이스북 메시지에는 절절한 사정이 담겨 있었다. ‘오죽하면 나 같은 사람까지도 필요하단 말인가’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학보사는 학생실천처장과 정치적 싸움에서 밀리던 상황이었다. 지원이 끊겼고 인쇄비마저 없어 허덕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거절했다. 대학원 진학이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결과적으로 진학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2010년 침신대학보는 이사회와 싸움을 벌여야 했다. 한 구약학 교수를 지키려고 학보사가 나선 것이다. 이사회는 자유주의 신학과 학력위조라는 핑계로 재임용에 반대했다. 이 사실을 보도하기 위해 기자들은 붓을 들었다. 사실을 그대로 보도하려 했다. 그러나 편집의 손길은 끝내 톱기사를 킬(kill)했고 딱 그 부분만 백지로 발행되고 말았다. 2년의 군 휴학. 다시 돌아온 학교에 이미 학보는 사라진 상태였다. 동기와 후배들에게 물었다. 학생실천처장과의 다툼 때문이란다. 직접 학보사에 265호를 요청했다. 파일을 받을 수 있었다. 뼈만 앙상한, 아래아 한글로 겨우 조판한 흔적이 역력했다. 탄식이 흘러나왔다. 현실은 가혹했다. 정치적인 싸움보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학생들의 무관심이었다. 아무도 학보를 읽지 않았다. 글조차 기고하지 않은 환경이 신문을 옥죄기 시작했다. 동료와 후배들은 학보사에 가입하려던 나에게 쓴소리를 남겼다. “학보사 애들은 사상이 이상해” “맞춤법도 안 지키는 애들” “좌파 사상에 빠진 것들” 박근혜 탄핵이라는 거대한 국민적 사건 앞에 자기 살길 찾느라 바빴던 것이다. 그리고 이사회 파행이라는 전례 없는 사태가 오래도록 벌어졌다. 총장 직무대행을 둘러싸고 학생들 사이에서는 소문만 무성했다. 누구도 정확한 정보를 다루는 이 하나 없었다. 침신대학보의 빈 자리가 크게만 느껴졌다. 지금도 상상해 본다. 학보사에서 일했더라면. 부족한 일손을 도왔더라면. 수습기자가 어렵다면 내 가진 편집 실력으로 신문이라도 만들어 볼걸. 처음 공적인 신문을 내 손으로 만들어 봤더라면. 대학을 졸업하고도 유일한 후회로 남았다. 지면신문이 사라지는 시대에 도달했다. 신문 열독률은 10%대로 떨어진지 오래다. 보는 시간 ‘30초’로 따지면 피부에 더 와닿을 것이다. 가짜 뉴스가 영상 매체를 통해 침투하고 있다. 대국민 공론장은 광고와 잡담, 농담 따먹기로 전락하고 말았다. 학보사의 기억이 떠오른 이유가 있다. 며칠 전 나는 작가에게 이 신문 자유의새노래 원고를 청탁했기 때문이다. 답변이 늦을 줄 알았다. 아니 거절당할 줄 알았다. 수습기자를 청탁 받던 그때의 나는 선배를 통해 완곡하게 거절했기에 그래서 업보로 돌아올 줄 알았다. 돌아온 건 생글한 답변이었다. “감사한 마음으로 원고 청탁을 받겠습니다.” 작가에게 부탁한 것은 한 가지다. 쓰고 싶은 글을 쓰라는 것. 작가의 글에서 완벽히 어그러진 것 같으나 그 어그러짐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했으므로. 청소년 문학소설 ‘완벽한 사과는 없다’에서 주인공 지민이 다온과 리하를 바라보며 가혹한 현실을 마주하지만 힘이 될 문장을 짓는다. ‘짧은 문장이 떠올랐다. 나는, 우리는, 무력하지 않다.(……) 가늘지만 질긴, 쉽게 구부러지지만 부서지지는 않을, 지팡이처럼 디딜 수 있는 문장이었다’(93,3) 사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글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히 안다. 불완전해 보이는 작가의 문장이 폭풍우를 견디게

[시대성의 창] 4년 만에 다시 ‘ㅅ’ 교회로 돌아간 이유

2024년 09월 23일
브라우저가 오디오를 지원하지 않습니다. 담임목사가 설교 중 고함을 질렀다. “전도해야 합니다! 대상자의 이름을 적으세요! 만일 이름조차 적어내지 못한다면 여러분의 신앙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목사는 과거에도 이런 극단적인 주장을 펴곤 했다. 나는 어이없는 수준의 설교에 분노했고, 6년간 몸담던 ㅅ교회를 떠났다. 그러나 4년 만에 돌아갔다. 떠돌던 3곳의 교회는 모두 비슷했지만, 직전의 교회는 더 심각했다. ㅅ교회의 목사가 양반으로 보일 정도였다. 직전의 교회는 1950년 무렵에 개척한 작은 교회였다. 코로나19가 발생한 때였다. 어느 날 담임목사는 설교 중 방역 때문에 시청 직원과 싸운 이야기, 방역 지침의 허점과 본인이 고안한 꼼수를 설파했다. 그러다 이어진 망언. “코로나19 백신을 맞으면 나노 칩이 혈관을 타고 뇌에 도착합니다. 그러다 나쁜 사람이 5G 주파수로 나노 칩을 조종해 백신 맞은 사람을 조종할 겁니다. 그 백신이 바로 666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헛소리였다. 목사는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목사의 강요는 나의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결국 나는 설교 도중 목사에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가족을 데리고 교회를 떠나고 만 것이다. 나는 ‘이게 정말 기독교 신앙인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진단한 한국교회는 이랬다. 몇몇 목사들은 자신의 욕망, 다시 말해 교인 수 증가와 권력 확대를 위해 문자적으로 자기 입맛에 맞는 성경 구절을 찾아와 교인들을 협박한다. 이때 목사는 ‘자신은 단지 성경을 인용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 이 협박을 들은 교인들은 성경을 모르기 때문에 목사의 지시에 따르게 된다. 안타깝게도 교인들은 이것을 ‘성경이 말하는 순종’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타개할 방법은 스스로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자세였다. 성경을 바로 알면 해결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다짜고짜 쉬운 성경을

[현실논단] “변화를 기다리던 때는 이제 지나갔기에”

2024년 09월 07일
브라우저가 오디오를 지원하지 않습니다. 심심하면 문학광장 글틴에서 청소년 작가들이 쓴 수필을 읽곤 한다. 청소년 작가의 글에서도 완성도 좋은 글을 발견할 때면 즐거움이 배가된다. 글틴에는 재미난 글들이 많다. 오탈자 많거나 줄바꿈 하나 없이 아웃사이더 같은 글에서부터 ‘와 이건 진짜다’ 싶은 정도로 폼 들인 글에 이르기까지. 자의식을 강하게 느낀 나머지 소설 같은 수필을 써도 사랑스럽다. 웹사이트가 괜찮은 디자인으로 구성됐기 때문만은 아니다. 야들야들 밥 한 톨 같은 음절의 모음이 귀엽기도 하고 꽤 젊은 작가의 포스가 느껴지기도 했다. 한때 매주 목요일 저녁이면 문정동 스타벅스에서 청소년 작가들의 글을 정독했다. 한 단어, 한 문장도 놓치지 않았다. 때로는 밑줄 긋기도 했고 내 생각을 덧붙이기도 했다. 그러나 잘 쓰고, 못 쓰고를 평가하지는 않았다. 날 것 그대로의 수필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독자의 시선에서 가장 꼽을만한 특징이라면 청소년 작가의 작품들은 찰나의 순간이 많다는 점이다. 소녀, 소년의 시간이 찰나의 순간이기 때문일까. 그 짧은 순간을 포착해 글로 풀어내는 능력이 뛰어난 작품을 발견할 때면 감탄해 마지않았다. 찰나의 순간마저 절망의 그늘로 해석하는 작가에게는 연민의 마음이 들었다. 심지어 나도 그 십자가 조금이라도 들어주고 싶은 심정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십자가는 각자가 져야 하므로 철저히 작가의 짐이어야 했다. 후회와 한탄, 바뀌지 않는 입시제도와 사회 구조 속에서 질식하는 청소년 작가들…. 애석하게도 이들은 무력감을 느끼고 있었다. 글은 마지막으로 표현하는 그들만의 다잉 메시지 같았다. ‘다신 글 올리지 않겠지’ 싶으면서도 또 올라온 동명 작가의 글을 보면서 안도할 때도 있었다. 나는 청소년 시기에 이런 절망적인 글조차 써본 일이 없다. 일상에서 경험한 글도 쓸법한데도 말이다. 신앙에 경도된 나머지 보수적 이념과 교리에 고취된 프로파간다 논설이나 쓴 게 전부였다. 그 시절의 글을 읽으면 무뚝뚝하고 딱딱하기만 한 소년을 만나는 이유다.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없는 글. 차갑다 못해 얼음장 같은 오탈자 하나 없는 문맥에선 ‘진리’를 다루고 있으나 씨뻘건 신념으로 읽히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과거사를 들여다볼 때마다 무뚝뚝한 소년을 만나거든 ‘꼭 글을 어렵게 써야만 했느냐’고 묻곤 한다. 남들과 똑같은 환경, 똑같은 교복, 똑같은 과목을 공부하며 살았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병적으로 “남들과는 다르다”를 보여주고 싶은 까닭 말이다. 신앙은 독창적이고 나만의 고유한 언어였으니까. 그 시절 교회에서는 묵상의 시간을 가지곤 했다. 나는 나의 고유한 언어로 성경을 해설했다. 토를 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의 독창적 해설에 감탄해 마지않았다. 하지만 누군가가 시비를 걸지 않기를 바랬다. 고유한 언어는 나만의 세계에서 갇혀 지내는 탄탄한 성벽이 되었다. 나를 나 되게 만드는 언어가 역설적으로 나를 가두는 틀이 되고 만 것이다. 그 틀이 나를 구원하리라고 믿었다. 청소년 시기의 나는 이런 용기를 내지 못했다. 변화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세상이 요동치는 것 같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지푸라기라도 붙잡아야 했다. 단락으로 꾹꾹 눌러 담아 쓴 문장들은 곧 부서졌고 나는 저 멀리 폭풍우에 밀려 거센 파도에 휩쓸리고 말았다. 문학광장의 청소년 작가들은 언제나 자신의 글을 모두에게 공개한다. 언제나 피드백을 받는다. 성실하게 답장까지 달아주는 작가도 있다. 청소년 작가들이 쓴 글도 머잖아 부서질 문장일지 모른다. 나의 고유한 언어는 나를 가두었지만 오늘의 청소년 작가는 그 틀을 부수고 있다. 그래서 나는 튼튼하지 않은 문장을 꼼꼼히 읽는다. 나는 문학광장 글틴에서 고유한 언어를 구사하는 소녀, 소년들을 만난다. 용기를 가지고 변하려 몸부림친 흔적을 느낀다. 그래도 청소년 작가의 글이냐고 묻는다면 이제는 성인이 되었을 작가 해나리의 글로 답을 대신한다. “나는

[에셀라 시론] 파수꾼의 마지막 등불

2024년 09월 07일
브라우저가 오디오를 지원하지 않습니다. 10년 만에 다시 만난 가영이 누나는 달라진 게 하나 없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 날 만난 게 정말 반가워서 웃는 미소는 여전히 행복하게 만들었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어서가 아니었다. ‘지금 여기’ 꿋꿋하게 서 있는 당찬 누나의 모습이 여전했기 때문이다. 달라진 외형 하나 있다면 양손 꽉 쥔 두 아이. 이제는 아이 엄마라는 게 믿기지 않을 나이다. 누나를 다시 만난 이유는 단순했다. 누나의 시선에서 바라본 과거의 내 모습이 궁금했다. 솔직히 말해 학창 시절 누나에게 빚진 마음은 둘째였다. 누나는 나와 10년 전 새능력교회를 함께 다닌 교우였다. 어렸을 시절 나의 민낯을 그대로 본 사람인 것이다. 기록가로서 눈망울이 빛나는 이유였다. 누나를 위해 나는 최대한의 예우를 갖추었다. 점심을 대접하는 일과 키즈카페 비용을 내준 일, 누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누나는 예민하고 까다로웠던 나의 학창 시절을 서슴없이 나열했다. “그때는 서운했더라” “그때는 미웠더라” “그때는 마음 아팠더라” 늘 누나에게 상처 준 일은 두고두고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10년 지나서도 사과할 수 있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련하고도 좋은 기억으로 남은 고맙기만 한 누나의 기억 속에 나는 ‘죽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사는 고등학생’이었나 보다. 그러다 달라지지 않은 누나의 성정(性情)을 발견했다. 잡초 같은 누나의 강인한 생명력을 발견한 것이다. 누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갑자기 교회를 나오지 않은 이유가 궁금했다. “부모님이 교회를 그만 다니라고 하셨어.” 내가 알던 퍼즐의 조각과 다른 대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적어도 누나의 입에서 “목사의 신념이 나와 안 맞아서” “교회 일이 너무 힘들어서”라는 말이 나오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허나 적어도 교회의 착취 시스템, 기독교 교리의 한계 정도는 말할 줄 예상하고 있었다. 착각이었다. 누나의 신앙은 “죽지 않고 살아서”(시편118,17) 강인하고 질긴 그 무언가였다. 누나는 10년 동안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과거의 비밀을 풀어 헤쳤다. 나는 그 비밀 앞에 할 말을 잃었다. 누나의 과거는, 그리고 기억은 송명희 시인의 고백처럼 “비밀이 되어 버린 건축가의 버린 돌”이었다. 오히려 힘겨운 비밀이 견디기 어려운 무거운 짐이 되어 오랜 시간 어깨 위에 지워져 있었다. 따라서 교회의 어려움 따위는 힘든 일도 아닌 것이었다. 욱여쌓임 당해도, 믿음젊음을 착취해도, 교회뼈아픈 과거에도, 신앙꿋꿋한 누나의 신앙과달라지지 않은 미소에‘강인하고 즐긴 생명력’악다구니에 피 토하며 너희 교회에 말하노니“파수꾼의 등불 지키라” 나는 지금도 그날 밤 누나의 한숨, 피로, 적막감을 또렷이 기억한다. 무급으로 교회에서 일하던 시절이었다. 토요일은 일요예배를 위해 아예 교회에서 잠을 잤다. 나는 늘 주보를 밤 10시에 발행했다. 방송실 근무를 마치고 사무실 앞에서 가영이 누나를 마주쳤다. 피곤에 절여 있는, 누가봐도 힘겨움에 고통스러워하는 누나를 보았다. 괜챦느냐고 물었다. 괜찮다고는 했지만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누나의 손에는 목사가 준 일감으로 보이는 용지로 가득했다. 대학 마지막 학기와 취업, 교회생활을 병행해야 했으니 심정은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부모님의 교회생활 반대까지 겹칠 때라면 누나는 나보다 더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목사의 한 마디는 정말이지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수준이다. “가영이 쟤가 말야, 돈을 좇고 돈 따라가서 문제야.” 목사 따위가 자격증 시험보러 일요예배 빠질 수밖에 없는 청년의 심정을 알기는 아나. 누나는 교회에 충성했다. 문자 그대로다. 온몸으로 교회에 헌신했다. 누나의 삶을 갈아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목사는 떼를 쓰기 바빴다. 나를 비롯해 청년들을 가리키며 “쟤네들이 사역하는 거 그냥 다 애들 장난 같아 보여. 내가 일하던 때랑 비교하면 노는 것 같다고.” 그러나 목사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으며 젊은이의 한 번뿐인 청춘을 그대로 갈아 넣었다. 최저시급조차 챙기지 않으며 말이다. 젊은이의 숭고한 정신과 고결한 노동력을 귀한 줄 모르니…. 그래서 예수가 이렇게 말했나보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마태,7,6) 그런데도 누나의 기억 속 교회는 착취 구조와 목사의 비정상 신념에 찬 공간이 아니었다. 날마다 놀러 가면 쉴 수 있는 곳, 토요일이면 사람으로 북적대고 반겨주는 곳, 젊은이들이 모여 머리를 맞대고 행사 준비하느라 생동감 넘치는 곳, 가정과 학교에 치여 갈 곳 없는 나를 받아주는 마지막 등불 같은 곳. 세상 모든 사람이 누나처럼 힘듦을 짊어지고 사는 건 아니다. 애초에 짐의 무게가 다를뿐더러 비교

여자친구네에서 세 달 살기

2024년 09월 06일
퇴사는 갑작스러웠다. 여자친구네 집으로 달려갔다. 서울에서 광주까지 약 3시간이 걸렸다. 도착한 건 저녁 늦은 시간이었다. 여자친구는 혼자 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떡볶이를 같이 먹으며 악몽 같았던 직장 이야기를 매듭지었다. 여자친구를 끌어안고 단잠을 잤다. 나를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이제 시작이었다. 개운한 마음으로 새 아침을 열었다. 직장에 간 여자친구를 두고 집에서는 글을 썼다. 한동안 밀린 일기와 기사를 써 내려갔다. 하고 싶은 일을 리스트로 정리했다. 여자친구와 주말에 놀러 갈 장소들도 적어 두었다. 오후에는 스타벅스에 들렀다. 개인 작업을 진행했다. 여자친구의 퇴근 시간에 맞춰 회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자친구 손잡으며 퇴근하는 길이 가벼웠다. 여자친구는 요리를 할 줄 안다. 조리 밖에 할 줄 모르는 내가 여자친구의 조수가 되었다. “셰프”라고 부르며 요리를 도운 것이다. 감자를 씻고 양파를 손질하고 두부를 잘랐다. 김치찌개부터 된장찌개, 카레와 유부초밥, 김밥과 뭇국도 끓였고 묵사발과 파스타도 만들어 먹었다. 어제는 대패삼겹살에 양념을 만들어 부었더니 꽤 괜찮은 대패삼겹살 제육볶음이 되었다. 피곤한 날이면 배달음식도 시켜 먹었다. 일주일에 한 번은 외식이나 배달음식을 먹었을 것이다. 주말에는 여자친구와 근교나 먼 거리로 여행을 떠났다. 전주 한옥마을도 다녀왔고 대전 성심당도 놀러 갔다. 가장 기억에 남은 여행은 고창 상하농원이다. 평일에는 여자친구가 일을 마치면 전남대 후문까지 산책 나가곤 했다. 뜨거운 여름에는 결국 아이스크림 사러 5분 거리 마트 다녀온 게 전부지만 말이다. 집안일은 언제나 나의 몫이다. 여자친구가 맛있게 요리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으니 설거지만큼은 내가 하고 싶었다. 청소기도 밀었고 가끔은 방도 닦았다. 밤이 되면 샤워를 했다. 몹시 개운했다. 직장 생활하던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전혀 다른 쉼이었다. 여자친구의 집은 내 집보다 쾌적하다. 높은 층에 살고 있기에 노을을 볼 수 있다. 바람도 잘 분다. 에어컨도 정속형이 아니라 하루 종일 틀어도 된다. 그 무엇보다 여자친구가 살고 있기에 나는 하루를 충만하게 지낼 수 있었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 혼자 지냈더라면 어땠을까. 밥은 어찌어찌 챙겨 먹었어도 역동적으로 살아갈 수 있었을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여자친구네는 작업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환경이다. 듀얼 모니터도 없고 그 좋던 컴퓨터조차 없다. 맥북 하나가 전부다. 신문과 동영상 모두

고고한 자태

2024년 05월 08일
군생활의 전부를 이곳 동해에서 보냈기에 감회가 새로웠다. 침식이 진행 중인 파도는 여전했다. 늘 보던 거라며 뭐 하러 여까지 바다 한 번 보느라 오느냐고 말하지만, 올 때마다 마음은 뭉클하다. 유려한 옥구슬 같은 파도를 보노라면 잔잔함이 밀려온다. 새벽에만 볼 수 있는 대공초소 앞바다가 어제처럼 가깝게 느껴졌다. 해가 지는 파란 물결 속에 고고한 자태로 서 있는 갈매기를 보았다. 사진으로 담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오랜 시간 그 자리를 지키는 갈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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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day소랑 2026년 6월 22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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