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눈금] 18세 국민연금

10대 국민연금 임의가입자 순 출처: 국가데이터처 청년의 기피 대상인 국민연금을 자진해서 가입한다는 통계가 눈에 띄었다. 국민연금 10대 임의가입자가 2023년 4814명에서 올해 1월 1만2245명으로 2년 새 두 세 배 늘었다는 기사였다. 18~ 19세 인구 대비 10대 임의가입률이 높은 지역은 경기도 과천시(3.63%), 서울 강남구(2.88%), 종로구(2.45%), 동작·송파구(2.41%) 순이다. 전국 평균 1.28%의 2~3배다.

[사설] ‘김용철 새능력’이 체제경쟁 대상이라 생각하는 정신머리

예수의 부활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새능력의 김용철은 유독 ‘믿음’에 방점을 두었다. 그의 스크립트를 분석해 보면 ▲믿음=74회 ▲부활=54회 ▲사망·죽음=54회 ▲하나님=26회 ▲죄=22회를 언급했다. 특히 그가 “~줄로 믿습니다”를 말한 맥락을 살펴보면 종결의 강박을 확인할 수 있다. 이 표현이 수십 번 나오는데 LLM 인공지능 클로드는 “기능이 독특하다”고 평했다. 주장을 사실처럼 만들지 않고 ‘믿음의 영역’에 가둬버린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회복시키십니다”가 아니라 “회복시키실 줄로 믿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반증 불가능해지는 구조다. 안 되면 ‘믿음이 부족한 것’이 되고 되면 ‘믿음의 결과’인 것이다. 이 종결 어미 하나가 설교 전체를 검증 불가한 구조로 만들었다. 김용철의 스크립트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몇 가지 특징이 선명하게 보인다. ①설교 전체에서 대여섯 번 반복되는 ‘위기-해결’ 구조: 단일한 구조가 청중이 어디에 있든 ‘내 문제도 해당되겠다’는 느낌을 받도록 설계돼 있다. 문제는 이게 설득이 아닌 패턴 주입이라는 것이다. 부활이 왜 그 위기의 해답인지를 한 번도 연결하지 않는다. 그저 위기 다음에 부활이 나오니까 청중이 연결되는 것처럼 느끼게 할 뿐이다. ②예수가 부활했다(전제)-믿으면 너도 산다(결론)-아버지가 나았고, 쌀통에 쌀이 나왔고, 바울이 순교했다(근거): 이건 신학적 논증이라 할 수 없다. 귀납도 연역도 아니다. A가 B와 비슷하니까 A에서 일어난 일이 B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주장을 하려면 A와 B가 왜 비슷한지 먼저 보여야 한다. 그러나 김용철의 스크립트에서는 그 과정이 없다. 성경은 전부 결론을 지지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될 뿐이다. 로마서 6장, 고린도전서 15장, 요한복음 11장을 인용하지만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지, 그 문맥이 무엇인지, 원어가 무엇인지 단 하나의 설명도 없다. 성경은 감정 고조의 타이밍에 삽입되는 장치로 기능하는 것이다. 김용철의 스크립트는 오직 청중을 위기 속의 존재로 몰아넣는다. “삶이 무너졌나요” “건강에 어려움이 찾아왔나요” “절망 가운데 계십니까” 청중의 현재 상태를 결핍으로 규정하고 그 결핍의 해답을 설교자가 독점하는 구조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해답은 언제나 교회 안에 있다고 주장한다.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려면 예배당에 와야 하고, 믿음을 고백해야 하고, 설교자의 언어를 따라 해야 한다. 청중이 스스로 접근할 수 있는 경로가 없다. 설교자를 경유해야만 한다. 교인의 실명과 자산 규모를 비유하는 것도 이 맥락에서 봐야 한다. 단순한 농담이 아니라 설교자가 교인의 삶을 알고 있다는 과시를 의미한다. 알고 있는 사람이 권력을 가지는 이 섬뜩한 맥락을 어떻게 무시할 수 있는가. 새능력은 10년이 넘는 기간,

회사 일도 못하는데 됨됨이도 없는 인간

2023년 10월 21일
무능한 인간을 상사로 둔다는 건 비극적인 일이다. 월급 더 받는 건 고사하고 일 수습은 아랫사람이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머리도 없고 이간질이나 한다면 더욱 그렇다. 하는 일이라곤 농땡이나 피우는 주제에 남들보다 덜 일하고도 힘든 내색 보일 때면 헛웃음만 나온다. 그런 무능한 상사가 지난 겨울 회사에 투하 됐다. 경력직이란다. 첫 만남부터 심상치 않았다. 대표에게 부장의 학력을 물으며 비웃던 그 저녁을 잊을 수 없었다. 얼마나 잘난 인간이기에 실무에서 한창 뛰던 우리 부장을 비웃는 건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무능한 상사의 업무 능력은 처참할 지경이다. 하나를 요구하면 두 일감 되돌려주는 꼴이다. 인수인계 문제가 아니었다. 문자 그대로 업무 능력 자체가 없었다. 당연히 소통이 될 리 만무했다. 말만 전공자일 뿐이지 이쪽 일과는 아무 관련 없는 인간이었다. 대표는 여러 차례 강조했다. “일손 모자라는 마당에 어렵게, 어렵게 모신 분이다” 그러니 잘 대하라는 말이었다. 한두 달하다 관둘 줄 알았다. 웬걸 버티기에 돌입했다. 낙하산 인사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아니란다. 정체가 궁금했다. 처음 회사에 오면 가장 먼저 피해야 할 사람을 찾는다. 인간관계야 언제든 멀어지기도 하고 붙기도 하는 법이다. 이간질은 다르다. 이간질하는 인간은 상종 자체를 말아야 한다. 성장 가능성도 없고 영양가도 없기 때문이다. 말하는 이, 속은 후련할지 모른다. 그런 얘길 이제 막 입사한 사람에게 말한다는 건 인간관계가 고르지 않다는 증거다. 제1배제 대상인 이유다. 문제는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는 경우다. 대표가 그런 인간이다. 무능한 상사를 감싸느라 우리 부서를 나쁜 사람들이 모인 부서 취급하기 바빴다. “부장이 말이야 새로 들어왔으면 업무도 가르쳐주고 친하게 지내야지….” 무능한 상사는 이간질도 마다하지 않았다. 내 부서 사람들을 악마로 만들었지만 시간은 착한 사람들 편이었다. 무능한 상사가 입사한지도 열 달이 지났다. 이제 사람들은 무능한 상사의 무능을 알아차린지 오래다. 인간관계도 엉망인지라 평판도 시원찮다. 요즘 좀 달라졌다. 어떡해서든 일감 구하느라 요란하게 뛰어 다닌다. 재계약 시즌이 다가와서야 발을 동동 구르기 시작한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가장 잘려야 할 톱3에 꼽혔다고 한다. 이젠 잘리거나 말거나 관심 없다. 때론 세상은 불공정하게 돌아가는 것만 같다. 어차피 무능한 상사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살아온 만큼 관성대로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과속기록] 네 삶 속으로

2023년 06월 06일
불가지론자인 내 취미는 기독교인 관찰이다. 한국에서 꽤 많은 종교인을 보유한 개신교는 다른 종교와 다르게 사람들이 다채롭다. 시간 순으로 나열하자면 상고적 토테미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부터 우주를 뚫고 신과 한판 승부 보려는 이들까지 광활한 경계가 흥미롭다. 개신교인 분류 속에 다시 샤머니즘과 현대 기독교로 나뉜다는 걸 사람들은 알까. 넓디넓은 스펙트럼 안에서 ‘저 사람은 어떤 삶을 살까’ 관찰한다. 한 달에 두 번 방문하는 전문의도 대상이다. 처음엔 교회 집사나 장로라고 짐작했다. 책장에 가득한 조직신학서, 성경책, 컴퓨터 화면 속 숨은 신학 논문까지. 어쩌면 목사일지 모른다. 지하 약국 들렀다가 낯익은 이름의 기독교 서적을 집에서 검색해보았다. 같은 사람이었다. 의사를 겸하면서도 목사를 하다니. 대단했다. 약사도 읽던 중인걸 보면 이곳저곳 전도에 충실한 모양이다. 진료를 마치자 시간이 남았다. 내 직업이 기자라는 것 정도는 알던 사이다. 슬쩍 교회를 다니냐 묻기에 나도 모르게 “전공은 신학”이라고 답했다. 그리 답하는 게 아니었는데. 하필 전문의가 졸업한 학부와 같은 학교였다. 자신이 집필한 창공한 하늘색 저서를 가져다 싸인 후 선물했다. 보름 지나 진료 예정이니 그때까지 읽어야 하나 고민했다. 성서신학이 아니라면 읽지도 않는데. 더는 나 스스로를 기독교인으로 분류하지 않는다. 기독교 핵심 교리를 일부 변형해서 믿거나 어떤 건 아예 믿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원죄론은 믿지 않지만 부활은 희미하게 믿으면서 재림은 또 믿지 않는 짬뽕 신앙이다. 늘 종교는 없지만 신은 믿는다고 말하는 이유다. 열에 일곱은 무책임한 정체성에 의문을 가한다. “그런 신앙도 있나요?”라고. “그게 왜 불가능하냐”고 반문한다. 신학 박사까지 취득한 전문의도 그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전문의 전공처럼 조직신학은 경직된 성서를 촉촉하게 만든다. 그러나 성경은 드넓은 이 땅 지구의 문제를 다루기엔 한정적인 메시지다. 변론이랍시고 부드럽게 내뱉은 대답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 미약하게나마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저 믿기 때문이고 믿어야하기 때문인 신앙이다. 그럼에도 경직된 교리는 신자들에게 일시적인 위안 정도는 제공한다. 며칠 전 나는 신을 죽이고 싶었다. 고단한 삶 틈으로 스며들 경직된 교리란 없었다. 신 정도는 믿으니까 내뱉은 원망이었다. 그래도 성서는 지혜문학을 통해 ‘겸손히 살라’고 일갈한다. 그 시간 너의 것이 아니라 신의 것이라고 말이다. 짜증나게도 신은 하룻밤 불평불만에도 오늘의 마실 공기와 시간을 베푸는 것처럼 군다. 까닭 없이 지구가 존재함에도 신은 인자한 미소나 지으며 자기 세상인 마냥 근엄한 척한다. 나그네 되어 묵묵히 임차 받은 지구를 가꾸며 사는 삶. 내 것처럼 소유하는 게 아니라 내 것처럼 쓰다 돌려주는 삶을 생각했다. 어차피 이 지구는 인간의 것도 신의 것도 아니지 않은가. 욕망 섞어 천국을 만들어갈 때 끔찍한 지옥을 마주할 뿐이다. 어차피 자기 것도 아니면서. 서신서는 나그네의 삶을 강조한다. 이 땅, 너의 것이 아니라고. 신조차 이 지구를 자신의 것이라 생각할 때 심판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신의 이름으로 이 지구를 가지려 할 때 등장한 모든 비극적인 사건들이 뒷받침한다. 이제는 죽어서 받을 심판 개념을 믿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받을 업보라고 생각한다. 기독교인인 척하면서 기독교 시장에서 돈

[시대성의 창] 노동력 쥐어짜는 나라라면

2023년 03월 16일
브라우저가 오디오를 지원하지 않습니다. 병사 월급 200만원에 장교·부사관 사기가 저하된다는 1등 신문 사설 댓글 창을 읽어보니 가관이었다. “이 나라는 휴전 중인데 의무사병보다 직업 군인 급료가 더 적다는 건 기강과 사기에도 걸림돌이 될 것” “당연히 사병들의 처우는 개선해야 하지만 지나친 혜택은 장교와 갈등만 생기게 한다” “형평성에 안 맞는다. 군대가 놀다 나오는 곳이 아니잖은가” 지난 7일 통계청이 발표한 ‘2022년도 청년 삶 실태조사’에서 만 19세~34세 월 평균 임금은 252만원이었다. 병신 같은 댓글 말마따나 한국 안보 가치는 월 평균 임금만도 못한 수준인가보다 생각했다. “방산비리는 생계형 비리”라던 생계형 국방장관도 있는 마당에 말해 뭐하나. 언제나 늙은이는 고상한 가치를 들먹이며 자기 이익 챙기기 바쁘다. 다른 말로는 명분인 것이다. 학창시절부터 숱하게 보았다. 자기 이익이 걸린 사안에 대고 명분을 끌어와 잉여 노동 착취하는 수법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10년 몸담은 교회가 그랬다. 허울 좋은 하느님 나라의 가치에 수많은 청년 노동이 착취됐다. 아무런 보상도 급여도 없었다. 번아웃에 교회를 탈출했고 목사는 탈퇴 청년들에게 악담을 퍼부었다. 교회뿐만 인가. 광의적 의미인 국방의 의무를 20대 남성에게 한정 지어 군복무로 해석하던 한국 사회는 대선에서마저 젊은이를 자극했다. 병사 월급 200만원 공약을 ‘군사 표퓰리즘’으로 정의한 그 신문은 말한다. “월급 200만원 공약을 철회하면 찬성하는 국민이 훨씬 많을 것이다.” 지난해 12월 직장갑질119가 엠브레인퍼블릭에 의뢰해 직장인 1천명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자유로운 법정유급휴가(연차) 사용이 어렵다는 응답이 30.1%에 달했다고 밝혔다. 같은 조사에서 직장인 중 육아휴직을 자유롭게 쓰지 못하는 경우가 43%에 달했고 출산휴가를 자유롭게 쓰지 못하는 경우가 36%였다. 여성은 각각 50%, 45%로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사측의 거짓말은 노동자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①국민연금·건강보험은 순차적으로 납부할 예정이다 ②연차 사용하기 쉽게 조치를 취하겠다 ③무분별한 업무 분장 바로 잡겠다는 세 가지 약속은 세 달 지나도 고쳐지지 않았다. 바뀌지 않을 것이다. 노동자에게 불합리한 환경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다수 사용자의 인식 때문이다. 주 69시간 근무 제시 병사 월급 공약 절충 값싼 자유·애국 앞에 여론 들끓자 尹 깨갱 지난해 8월 국민건강보험공단은 ‘연도별 건강보험 체납현황’을 공개했다. 1개월 이상 건보료 누적 체납 현황을 처음으로 공개한 것이다. 2021년 건보료 누적 체납은 395만 4000건에 체납액만 4조 7057억원이다. 그마저도 2018년 5조 109억원에서 감소한 수준이다. 그럼에도 고용노동부는 바쁠 때 최대 69시간 일할 수 있도록 노동법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2023.03.06) 1주 단위 연장근로시간 관리 단위를 월 또는 연 단위로 확대하겠다는 것이다. 직장갑질119는 “정부가 휴가를 모아 ‘제주 한 달 살이’ 가라고 말하지만 한 달 휴가 가려면 최소 11시간 연장 근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하루 12시간씩 30일을 일해야 가능하다. 그리고 한국은 합계출산율 0.78명 시대에 도달했다. 세계에 유례없는 수치다. 이제 더는 회복 불가능한 상황이다. 저출생과 혼인 감소는 노동 시장과 무관하지 않다. 취업해야 결혼을 계획할 수 있고, 안정적인 직장을 구해야 아이를 낳을 수 있다. 돈 앞에서 각자도생이 되어버린 이 나라에서 누가 애국으로 헌신하고 애사심 가지고 노동한단 말인가. 대통령에게 이 나라 애국은 당연한 가치인가. 자유가 당연한 가치가 아니듯, 노동의 가치도 당연하지 않다. 한국은 저성장 국면에 돌입한지 오래다. 인구경제학자 전영수 교수는 인구 감소가 국내총생산 하락으로 이어진 점을 지적했다. 위기의 순간에도 노동자를 쥐어 짜 성장의 막차를 늘리기 위해 아등바등 한다. 대통령부터 200만원 비용을 치루고서라도 지켜야 할 애국이라는 가치를 보였다면 공약 철회 같은 소리는 듣지 않았을 것이다. 대표 본인부터 야근수당을 아깝게 생각하지 않았다면 신뢰를 잃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늘 또 한 사람 동료가 신문사를 떠난다. 중간 관리직이 없어 고생만 하고 이곳을 나선다.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대표에게 내민 시정 사항이 많았다고 한다. 돌아보아도 단 하나 바뀐 게 없다면서 웃을 뿐이다. 무책임한 낙하산 인사는 동료 앞에서 일부였다. 누군가의 노동을 물 쓰듯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비용은 치루지 않으려 한다. 그만한 가치가 없다는 의미다. 2021년 기준 한국의 노동 시간은 1915시간으로 OECD 회원국 중 5위다. 그마저도 더 늘리자고 말한다. 과격한 커뮤니티 언저리에서는 이런 말이 나돈다. “이 정도로 착취하지 않으면 망한다고? 그럼 쳐 망해라.”

[에셀라 시론] 전임자와 탄핵

2022년 12월 17일
박근혜의 탄핵을 겪은 2016년 겨울은 지금만큼 추웠다. 바깥 어디라도 나갈 수 없는 갑갑함이 방 안 가득 밀려온 것이다. 이전 칼럼에선 허상의 공포심이라 표현했다. 공포심은 공포심이나, 무엇으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부전감(不全感) 속에서 추운 겨울을 보낸 것이다. 박근혜의 탄핵은 그동안 쌓아올린 모든 탑이, 공들여 세운 노고가 완벽히 무너졌음을 내보인 역사적 사건이었다. 오랜 시간 옳다고 생각한 생각이 이념에 불과했고 부끄러운 감정뿐이라는 사실을 가리키며 반성한 계기가 탄핵인 것이다. 그동안 보수와 애국은 민족주의라는 이름으로 하나로 뭉쳤다. 민족주의는 감정과 다르지 않았다. 기존의 여성해방이 감정적으로 아이돌을 지지하고 영향력을 행사한 것과 같았다. 허상의 공포심이 하나 둘 해체되면서 남은 감정은 부전감 뿐이었다. 옳은 길을 걸은 것 같았으나 옳은 길을 걷지 않고 있었다는 현실 앞에 눈이 뜨이자 보이지 않았던 진실을 본 것이다. 이제껏 진실을 부르짖으며 애국심 사이에 숨은 나라와 민족을 위한 감정이 진짜라고 믿어왔건만. 사실은 최순실에 온몸을 내던져 나라를 운영하던 구멍가게만도 못한 경영 의식이 진실로 드러나자 공포심은 이내 다가온 것이다. 사람이기 때문에 판단이 틀릴 수 있다. 따라서 징조가 드러날 때 틀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걷는 이 길이 옳은 걸음인지, 방향은 맞는지를 언제나 늘, 날마다 심사숙고해야 하는 것이다. 탄핵의 겨울 앞에 한파를 그대로 맞닥뜨리며 현실의 눈을 뜬 그 때의 아픔을 생각하면 고민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지금도 탄핵의 겨울을 생각하면 눈물을 머금고 부끄러움을 말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변함없는 부전감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든든하게 생각했던 신 존재가 무너지고, 허상일 뿐인 대통령의 민낯을 바라만 보며 공허감을 느끼고 공포심 앞에 몸을 떠는 것처럼 부전감이 남아 있다. 그동안 이념과 정치의 목적에 눈이 멀어 진실을 보지 못했으므로 받아들인 징계와 같은 아픔이 부전감으로 남은 것이다. 어쩌면 탄핵의 겨울은 신 죽음의 시대를 겪기 위한 전조 현상이었을지도 모른다. 최상의 존재로 남은 신 존재조차 무너진 시대에 부전감은 오히려 공포심을 넘어 현실을 살아갈 힘으로 다가왔다. 죽음의 역설인 것이다. 관계 청산과 새로운 시대를 여는 힘도 신 죽음에 이르러서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전임자를 만났다. 콩깍지로는 설명할 수 없는 친밀한 감정 속에서 이제껏 경험해지 못한 마음의 손길을 주고받았다. 전임자는 좋아함을 넘어 사랑을 갈구했고, 끈끈한 관계 속에 이제껏 보지 못한 모습을 보았다. 그러나 좋던 시절은 오래지 않았다. 격랑 속에서 흔들리는 감정을 경험했다. 전임자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신문은 여러 차례 지적했다. 탄핵의 카드를 꺼내서라도 돌이켜야 한다고 말해왔다.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파멸을 맞이했다. 언론의 숙명은 진실을 말하는 데 있다. 이 신문은 탄핵의 겨울에도 슬픔을 추스르는데 초점을 맞추었고, 전임자의 탄핵을 맞이해서도 진실을 가리켰다. 달라지는 것은 없었지만 스스로의 가치를 지켜나갔다. 또 한 번의 탄핵을 맞이할 위기에 처해 있다. 이번에는 보수당 정권이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사태 앞에 맥조차 추리지 못하고

[에셀라 시론] 아기새는 날개를 펴 날았을까

2022년 10월 27일
브라우저가 오디오를 지원하지 않습니다. 조금씩 누나에게 스며든 것도 이 무렵이다. 신앙에 눈을 뜬 누나의 종교에는 관심이 없었다. 누나라는 사람 그 자체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누나를 알고 싶었다. 누나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누나의 바라보는 시선에 맞추고 싶었다. 곁가지 누나에 관해서가 아니라 누나라는 사람을 이해하고 싶었다. 눈을 마주하고 마음을 나누는 관계를 원했다. 한갓 고등학생뿐인 내가 누나의 마음을 이해할 리 없었다. 고등학생이라서가 아니다. 서로 다른 환경이 누나를 이해하지 못하게 가로막았다. 스며든 마음이 아려오기 시작했다. 누나를 모르던 시절로 돌아갈 수 없기에 먹먹한 가슴만 부여잡았다. 누나는 약대를 졸업한 후 선교사로 일하고 싶어 했다. 신학생도 읽지 않을 두꺼운 교리서 ‘기독교 강요’를 꺼내 들었다. 영적인 대화를 추구했다. 하나님의 일만 하다가 하나님의 영광만 드러나기를 바랬다. 누나에게 사람들은 선교의 대상자였다. 따라서 나를 성경 지식 물어볼 영의 눈이 뜨인 고등학생으로 보았다. 누나의 관심은 마음을 즐겁게 했다. 누구도 물어보지 않을 신앙에 대답하며 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남들보다 대단하게 바라봐준 시선에 애틋한 감정을 느꼈다. 아무도 우리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둘만의 공간. 세상은 미쳐 돌아가지만 우린 무해하고 올바른 신앙으로 세상에 맞서는 드라마 같은 감성이 등줄기 날개로 돋았다. 누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좋아한다는 말의 의미도 알지 못했다. 이성(二姓)의 감정을 모르던 탓이다. 단지 누나가 함께해 주길 바랬다. 좀 더 마음에 머무르기를 바랬다. 누나가 내 신앙이 아닌 내 마음에 관심 가져주기를 바랬다. 그러나 누나와 사귀고 싶은 건 아니었다. 누나가 여자로 보이지 않았다. 누나의 쇄골을 보아도 누나는 누나였다. 누나는 나를 대단한 신앙인으로 추켜세웠다. 누나에게 나는 고등학생이 아니었다. 고등학생이면서도 누구에게나 ‘영적인 티’를 내는 담대한 신앙인이었다. 하지만 ‘나는 신앙인이 아닌데’ 생각했다. 수능 앞둔 고등학생, 사람 좋아하는, 삶을 신앙의 언어로 표현하는, 그래서 고독을 느끼며 성서의 문체로 글 써 내려가는 고등학생. 남자아이. 나는 나를 그렇게 생각했다. 누나를 만나며 돋아난 날개에서 쓰라린 감정을 느꼈다. 생겨나면 안 될 하찮은 상처로 치부했다. 이미 자라기 시작한 날개를 찢을 수도 꺾을 수도 없었다. 다시 누나를 모르던 시절로 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누나는 감정을 배제했다. 다채로운 감정을 ‘애정표현’ 이 한 단어로 정의했다. 정욕이란 이름으로 고등학생 남자아이를 밀어냈다. 오히려 누나는 신앙인 그 자체에 눈길이 가 있었다. 나를 표현할 수많은 정의 대신 ‘신앙인’ 이 한 단어에 욱여넣은 게 싫었다. 누나는 신앙에 방해될 인간관계를 정리했다. 5년 남자친구 관계도 구조조정했다. 오직 신앙, 그 하나를 위해 성경을 공부하고 또 공부하는 수험생이었다. 메신저 한 편, 아래로 깔리는 대화방이 못 미더웠다. 필요할 때만 찾는다던 절망이 생각을 지배했다. 누나는 누나의 갈 길이 있었다. 나도 내 갈 길 걷다 우연히 누나를 만났을 뿐이다. 누나와 나는 같은 언어를 공유했지만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동그라미 같은 삼각형 관계였다. 삼각형이면 삼각형이고 동그라미면 동그라미지 삼각형 같은 동그라미가 세상 어디에 있을까. 지금에서야 동그라미 같은 삼각형 관계가 실존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능은 하다. 닳고 닳아 각이 사라지고만 과거의 삼각형이라면 말이다. 운 좋게도 각이 닳아 사라지기 전 누나와 헤어지고 말았다. 누나에게서 도망쳤기 때문이다. 날개가 다 자랄 무렵 가볍게 날아올랐다. 누나에게서 벗어나며 생각했다. 날개가 자라난 과정은 견디기 어려울 만치 고통스러웠다고. 고통의 크기만큼 단단해진 날개로 비로소 누나에게서 벗어났다고. 저 밑에서 누나는 새로운 날개가 돋아나기를 기도했다. 꺾이고만 옛 날개를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내 눈에는 누나의 옛 날개가 가장 아름다웠다. 누나도 나처럼 죄인의 몸을 입고 사느라 힘들어했다. 누나는 마지막까지 자신이 무해한 사람이 되리라고 믿었다. 인생 처음 교회를 다니지 않으면서 형편없는 내 민낯을 있는 그대로 보았다. 나는 죄인도 아니었고, 신앙인도 아니었다. 날개를 펴 날아다니는 동안 바깥 세계를 구경했다. 인간의 다채로운 감정을 경험했다. 복합적인 언어를 체험하며 사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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