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셀라 시론] 소녀의 이름으로

나는 이제껏 김용철의 새능력을 왜 더 빨리 탈퇴하지 못했는가에 대한 괴로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좀 더 빨리 탈교(脫敎) 했다면, 조금 더 빨리 관계를 정리했더라면…. 소년을 구하지 못한 죄책감은 우연히 입수한 18년 전, 한 영상을 보면서 오롯이 해소되었다. 연세중앙교회 YBS 인터뷰에 담긴 소년은 짐짓 말할 수 없는 모든 죄를 짊어진 표정으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알고 지은 죄인데 왜 그걸 지금까지 해결하지 못했는가….” 도대체 중학교 2학년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카메라 앞에 서서 자책하며 스스로를 옥죈단 말인가. 새능력을 탈퇴하고서 나는 단 한 번도 김용철의 설교를 끝까지 들어본 일이 없다. 양심에 찔려서도 아니고 눈물이 감격으로 앞을 가렸기 때문도 아니다. 1시간 설교 모든 문장 옭아맨 감정 동원과 협박 구조, 의미 없는 아멘의 반복, 철학도 신학도 없는 감정만 휘젓는 수준의 처참한 호통은 그의 설교를 들어보면 누구나 깨닫게 된다. 그는 오로지 의식의 흐름에 의지한 채 청중을 감정적으로 끌고 다닐 뿐이다. 각 단락 사이의 논리적 연결은 찾아볼 수 없다. 자기도취에 빠진 간증을 서사로 가져다가 어떻게든 이어 붙이는 게 전부다. 모든 것 공허함의 파도밖에 보이지 않던 시절, 나는 죽을 용기를 가지고 어둠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시절 스물 두 살의 나는 미지(未知)의 두려움을 견뎌야 했다. 이제는 지옥에 가는 건가 싶었다. 가족도, 연고도 없이 새능력에 붙잡혀 노동 착취를 당했어도 불안함은 가시지 않았다. 그로부터 10년이 흘렀다. 그동안 탈출이 재생되었다. 때로는 방송실 귀퉁이에서 일을 하는 장면이 꿈으로 재생되었고, 어쩔 땐 빠져 나오는 꿈을 꾸기도 했다. 많으면 한 달, 뜸하면 서너 달에 한 번 연속된 꿈은 새능력으로부터의 완전한 탈출을 가리키고 있었다. 과거의 나로부터 찾아오는 ‘시간의 죄책감’이 나를 오랜 시간 사로잡은 것이다. 몸은 난파선을 벗어났지만 아직도 나의 혼은 그곳에 갇혀 있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허물어지는 시간. 탈교는 무너진 영혼 속에서 재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저 어른들이 주입한 죄책감은 남은 인생의 각도를 비틀었다. 어그러진 관념과 여성성에 대한 왜곡된 이해는 긴 시간의 교정이 아니었으면 영구히 손상되었을 것이다. 바로 그 소년이 자신의 입으로 토설한 ‘알고 지은 죄’는 이브가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따먹은 상징이다. 왜곡된 여성 이해의 뿌리는 기독 담론 그 자체다. ‘성숙한 소녀’라는 어른들의 거짓말이 빚어 만든 망상이 소녀의 노동을 착취했고, 소년의 미래를 짓밟은 것이다. 탈교 이후 나는 차근차근 기독 담론을 해체하기 시작했고 비로소 소녀를 다시 발견하게 되었다. 그 소녀는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지,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천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악과를 먹은 후 야훼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침잠한 것처럼 나는 소녀 앞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되어가는 과정을 순연(純然)하게 바라보듯 과거의 시간을 다시 배열하고 재건하는 소녀의 손길을 말없이 볼 뿐이었다. 소녀는 잃었던 재주, 놓쳤던 이름, 잊혔던 얼굴을 되찾았다. 에덴의 난민, 아담과 이브는 재건의 기회조차 잃었으나 소녀는 신의 질서를 거스르고 마침내 ‘지금 여기(hic et nunc)’의 자리에 섰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소녀의 일하는 광경 속에서 기록하는 것뿐이었다. ‘기억의 화해’가

[사설] 그저 ‘병사1’로만 생각하는 정신머리 이런 게 해병 없는 ‘해병 정신’

2023년 7월 19일 경상북도 예천군 내성천에서 13명의 해병대원과 폭우 실종자를 수색하는 작전에 투입된 채수근 상병이 급류에 휩쓸려 순직한지 2년 10개월 만에 법원은 1심에서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다.(2026.05.08) 포병 대원이 구명조끼도 없이 허리 깊이까지 물에 들어가는 건 수색 작전이라 할 수 없다. 상급 지휘관의 성과 집착이 대원의 몸으로 지불된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임 전 사단장은 수중 수색 사진을 보고받고도 멈추지 않았다. 재판부는 이를 두고 “구체적 위험을 인지한 상황에서 위험을 가중시키는 지시”라고 밝혔다. 과실이 아니라 선택이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죗값은 징역 3년이었다. 특검은 5년을 구형했음에도 대원의 생명을 담보로 작전 성과로 밀어붙인 지휘관에게 법원이 매긴 값이 고작 그뿐이었다. 채 상병의 어머니는 선고 직후 법정을 떠나지 못했다. 군 복무로 나라를 바친 이들이면 먹먹해질 물음이다. “아들의 희생에 대한 책임이 이렇게 가볍다면 어느 부모가 안심하고 자식을 군에 보내겠느냐.” 임 전 사단장은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 “수중 수색을 지시한 건 내가 아니”라는 장문의 이메일과 문자를 보냈다. 재판부는 “오랜 재판 경력에서 이런 피고인을 본 적이 없다”고 질타했다. 해병 정신을 입에 달고 살던 사람이 해병의 죽음 앞에서 한 행동이 그것이다. 임 전 사단장의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를 적시한 2023년 7월, 해병대수사단이 경찰에 이첩하려 했을 때, 누군가 그것을 가로 막았다. 대통령실 번호로 걸려온 통화 뒤 14초 후 이첩 보류 지시가 내려간 것이다. 수사단장은 ‘집단항명의 수괴’로 입건됐다. 이첩을 막은 혐의로 기소된 윤석열의 재판이 진행 중이다. 1심 법원이 임 전 사단장의 과실치사를 인정했다는 것은 그 이첩을 막을 이유가 없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재판부는 말단 지휘관에게만 책임을 떠넘기는 군의 관행을 지적했다. 그 관행을 깨려 한 건 해병대수사단이었고 그것을 다시 덮으려 한 것이 침묵의 권력이었다. 해병 정신을 가르치던 이들이 누구보다 해병의 죽음을 덮으려 했다.

[에셀라 시론] 잘 지내, 퍼피레드

2023년 12월 07일
브라우저가 오디오를 지원하지 않습니다.  내가 본 이용수 대표는 넉살스러운 아저씨였다. 운영진들 사이에서 조용히 있다가 말없이 등장해 자기 할 말 풀어내던 지긋한 나이의 포스. 적절히 가벼운 캡 모자 하나가 어울릴 듯한 익살맞은 제스처. 한눈에 봐도 평범한 아저씨로 보였다. “20대를 다 바친 게임” 긍정의 에너지를 바라던 절실한 호소를 폄하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퍼피레드M 1차 테스트 때 일이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대표와 이런 말을 주고받았다. “게임 문 닫기 두 달 전 서버가 닫혀 있더라고요. 서버 운영도 만만치 않았을 텐데요.” “그렇죠. 그땐 가끔 들어와서 웹사이트 관리하다 메일 확인하고 그랬죠.” 퍼피레드 개발에 앞서 이 대표를 둘러싸고 말들이 많았다. 그 대표적인 논리는 자칭 원작자의 지지층에게서 출발했다. 그가 퍼피레드를 개발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신상조차 공개되지 않은 불명의 사람이었다. 회사를 운영할 만한 자질도 공개된 바 없었다. 지적재산권(IP)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회사를 운영하겠다는 건지, 게임을 무료로 풀겠다는 건지, 서버를 운영해 관리하겠다는 건지 구체적인 청사진이 없었다. 컬러버스 전신 소울핑거가 퍼피레드를 개발하겠다고 나서자 ‘퍼피레드 같은 게임’이라는 괴이한 이름의 지난한 과정을 돌연 중단했다. 유감스럽게도 이 무렵 원작자를 지지하던 사람들은 나와의 관계를 정리했다. 나는 영문도 몰랐지만 떠나는 이들을 붙잡지 않았다. 이 신문은 당시 어느 쪽도 두둔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훗날 이 신문이 이 대표를 밀어준 이유는 단순했다. 적어도 퍼피레드가 문 닫기 직전 서버를 운영한 사람이고 마지막까지 서버 종료 소식을 건넨 운영자였기 때문이다. 회사 경영자라는 점에서도 재론의 여지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퍼피레드는 문을 닫았지만 말이다. 얼마나 부활을 바랬으면 불명의 사람 바짓단이라도 붙잡는 걸까 생각했다. 현실은 달랐다. 너무도 가혹했다. 앱 분석 회사 모바일인덱스의 ‘실시간 마켓별 순위’를 보면 퍼피레드가 들어갈 구석이 없다는 걸

[사설] 버뮤다순복음, 영원한 작별

2023년 11월 30일
18년 역사의 유일 메타버스 종교시설 버뮤다순복음교회가 오늘 문을 닫는다.(2023.12.01) 유구한 전통을 생각해보면 초라한 결말이 아닐 수 없다. 퍼피레드 개발사 컬러버스는 이용수 대표의 이름으로 서버

[지애문학] 널 잊기까지 23일

2023년 10월 22일
너랑 자던 밤이 생각났다. 다리로 포갠 너의 허리. 데일 때까지 스친 입술. 가지고 싶어서 남겨 놓은 키스마크까지. 닿았던 살결. 안아 주면서 맡았던 냄새. 온몸을 끌어다 안다 못해 서로 가지고 싶어서 안달난 새벽. 또 일어나자마자 입술을 덧대어 하루를 시작했던 그 아침. 아랫입술을 가득 메울 때면 따뜻한 바람이 불어왔고 날 놀라게 하던 또 다른 입맞춤에 날 “사랑해”라고 말하게 만들었어. 알아? 처음 너랑 자고 나서 가벼운 감기에 걸렸던 거. 조금은 아팠어. 적당히. 콜록 거려도 괜찮았어. 들이키는 숨에서 너의 온기가, 내쉬는 날숨에서 네 냄새가 더 지독하게 남았으니까. 그동안 괜찮은 척 연기하느라 힘들었어. 안 보고 싶은 척. 그럭저럭 잘 지내는 척. 실은 무지 연락하고 싶었어. 정말 정말 보고 싶었고 만나고 싶었어. 견디지 않은 척. 기억에조차 사라져 까먹은 척. 하지만 몸은 널 잊지 않고 있더라. 퇴근길. 너랑 자던 그 밤이 생생하게 떠오른 저녁.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단 걸 깨달았다. 며칠이 지나야 할까. 널 완전히 잊기까지. 기억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정말 정말 보고 싶어서 나는 괴로운데. 너와의 밤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안달나 있는데. 내 곁에 잔상이 이리도 오래 갈 줄이야……. 다정히 부르던 나의 이름. 사랑스러운 너의 퉁명한 대답. 침 삼키는 소리까지도 들릴 만치 가까웠던 우리 사이. 사라지고 만 너와의 밤. 공허함 속에서 널 잊었다고 생각했을 때. 마지막까지 남았던 작은 불꽃이 더욱 강렬하게 타오르다 꺼지고 말았다. 이제 더는 몸조차 너를 그리워하지 않는다. 더는 생각나지 않고. 기억나지 않는다. 어느 순간 너에게 빠져든 것처럼, 갑자기 부는 바람처럼 네 마음 바깥으로 스치고 말았다. 단숨에 벌어진 이 일에 완전히 너를 잊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동안 괜찮다고 생각하면 괜찮아지는 줄 알았는데. 정말 정말 보고 싶어도 정말 정말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 다 되는 줄 알았는데. 너를 완전히 잊기까지 23일. 그 긴 시간을 견디고 또 견뎌내어 다시 살아난 마음. 이제야 숨 쉴 틈을 발견했다. 언제나 넌 마지막 순간에 “사랑해”라고 말했어. 끝까지 밀어 넣을 듯 날 가지고 싶다더니. 그건 아니었나봐. 날 사랑한다는 말은, 다시 말해 날 책임지겠다는 말이니까. 책임까지는 지고 싶지 않은 그런 관계였으니까. 허공에 사라진 고백에 더는 신을 믿지 않기로 했다. 신이 나를 배반한 게 아니라 신을 믿는 사람들 때문에서라도 믿지 않기로 결심한 것이다. 가끔은 잠만 자고 그러려니 하는 사람들이 부러워. 나도 책임 없는 쾌락만 느끼고 손절하고 싶은데. 그게 안 돼. 그만큼 사랑해 주고 싶은 마음이 크니까. 나쁘다는 거 알지만 어쩌면 책임 없는 쾌락이 더 나을지도 몰라. 너무 힘드니까. 힘들 바에야 쉽게 고통을 잊어버릴 수 있었으면 싶을 정도로 힘들었으니까. 긴 시간이었다. 책임 없는 쾌락이 이어졌다면 짧아졌을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참아야 했다. 더는 그런 관계를 원하진 않으니까. 이제껏 사랑인 줄 알았던 관계가 몸조차 원하지 않는 아픔뿐이라는 걸 지금에야 알았으니까. 날이 풀린 게 느껴졌다. 이제껏 견뎌낸 지난한 계절처럼. 더는 네가 떠오르지 않게 된 지금처럼. 모든 일이 풀릴 것만 같았다. 신혜야, 견뎌내느라 고생 많았어. 더욱 내 마음을 끌어 안아주었다.

회사 일도 못하는데 됨됨이도 없는 인간

2023년 10월 21일
무능한 인간을 상사로 둔다는 건 비극적인 일이다. 월급 더 받는 건 고사하고 일 수습은 아랫사람이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머리도 없고 이간질이나 한다면 더욱 그렇다. 하는 일이라곤 농땡이나 피우는 주제에 남들보다 덜 일하고도 힘든 내색 보일 때면 헛웃음만 나온다. 그런 무능한 상사가 지난 겨울 회사에 투하 됐다. 경력직이란다. 첫 만남부터 심상치 않았다. 대표에게 부장의 학력을 물으며 비웃던 그 저녁을 잊을 수 없었다. 얼마나 잘난 인간이기에 실무에서 한창 뛰던 우리 부장을 비웃는 건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무능한 상사의 업무 능력은 처참할 지경이다. 하나를 요구하면 두 일감 되돌려주는 꼴이다. 인수인계 문제가 아니었다. 문자 그대로 업무 능력 자체가 없었다. 당연히 소통이 될 리 만무했다. 말만 전공자일 뿐이지 이쪽 일과는 아무 관련 없는 인간이었다. 대표는 여러 차례 강조했다. “일손 모자라는 마당에 어렵게, 어렵게 모신 분이다” 그러니 잘 대하라는 말이었다. 한두 달하다 관둘 줄 알았다. 웬걸 버티기에 돌입했다. 낙하산 인사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아니란다. 정체가 궁금했다. 처음 회사에 오면 가장 먼저 피해야 할 사람을 찾는다. 인간관계야 언제든 멀어지기도 하고 붙기도 하는 법이다. 이간질은 다르다. 이간질하는 인간은 상종 자체를 말아야 한다. 성장 가능성도 없고 영양가도 없기 때문이다. 말하는 이, 속은 후련할지 모른다. 그런 얘길 이제 막 입사한 사람에게 말한다는 건 인간관계가 고르지 않다는 증거다. 제1배제 대상인 이유다. 문제는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는 경우다. 대표가 그런 인간이다. 무능한 상사를 감싸느라 우리 부서를 나쁜 사람들이 모인 부서 취급하기 바빴다. “부장이 말이야 새로 들어왔으면 업무도 가르쳐주고 친하게 지내야지….” 무능한 상사는 이간질도 마다하지 않았다. 내 부서 사람들을 악마로 만들었지만 시간은 착한 사람들 편이었다. 무능한 상사가 입사한지도 열 달이 지났다. 이제 사람들은 무능한 상사의 무능을 알아차린지 오래다. 인간관계도 엉망인지라 평판도 시원찮다. 요즘 좀 달라졌다. 어떡해서든 일감 구하느라 요란하게 뛰어 다닌다. 재계약 시즌이 다가와서야 발을 동동 구르기 시작한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가장 잘려야 할 톱3에 꼽혔다고 한다. 이젠 잘리거나 말거나 관심 없다. 때론 세상은 불공정하게 돌아가는 것만 같다. 어차피 무능한 상사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살아온 만큼 관성대로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과속기록] 네 삶 속으로

2023년 06월 06일
불가지론자인 내 취미는 기독교인 관찰이다. 한국에서 꽤 많은 종교인을 보유한 개신교는 다른 종교와 다르게 사람들이 다채롭다. 시간 순으로 나열하자면 상고적 토테미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부터 우주를 뚫고 신과 한판 승부 보려는 이들까지 광활한 경계가 흥미롭다. 개신교인 분류 속에 다시 샤머니즘과 현대 기독교로 나뉜다는 걸 사람들은 알까. 넓디넓은 스펙트럼 안에서 ‘저 사람은 어떤 삶을 살까’ 관찰한다. 한 달에 두 번 방문하는 전문의도 대상이다. 처음엔 교회 집사나 장로라고 짐작했다. 책장에 가득한 조직신학서, 성경책, 컴퓨터 화면 속 숨은 신학 논문까지. 어쩌면 목사일지 모른다. 지하 약국 들렀다가 낯익은 이름의 기독교 서적을 집에서 검색해보았다. 같은 사람이었다. 의사를 겸하면서도 목사를 하다니. 대단했다. 약사도 읽던 중인걸 보면 이곳저곳 전도에 충실한 모양이다. 진료를 마치자 시간이 남았다. 내 직업이 기자라는 것 정도는 알던 사이다. 슬쩍 교회를 다니냐 묻기에 나도 모르게 “전공은 신학”이라고 답했다. 그리 답하는 게 아니었는데. 하필 전문의가 졸업한 학부와 같은 학교였다. 자신이 집필한 창공한 하늘색 저서를 가져다 싸인 후 선물했다. 보름 지나 진료 예정이니 그때까지 읽어야 하나 고민했다. 성서신학이 아니라면 읽지도 않는데. 더는 나 스스로를 기독교인으로 분류하지 않는다. 기독교 핵심 교리를 일부 변형해서 믿거나 어떤 건 아예 믿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원죄론은 믿지 않지만 부활은 희미하게 믿으면서 재림은 또 믿지 않는 짬뽕 신앙이다. 늘 종교는 없지만 신은 믿는다고 말하는 이유다. 열에 일곱은 무책임한 정체성에 의문을 가한다. “그런 신앙도 있나요?”라고. “그게 왜 불가능하냐”고 반문한다. 신학 박사까지 취득한 전문의도 그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전문의 전공처럼 조직신학은 경직된 성서를 촉촉하게 만든다. 그러나 성경은 드넓은 이 땅 지구의 문제를 다루기엔 한정적인 메시지다. 변론이랍시고 부드럽게 내뱉은 대답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 미약하게나마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저 믿기 때문이고 믿어야하기 때문인 신앙이다. 그럼에도 경직된 교리는 신자들에게 일시적인 위안 정도는 제공한다. 며칠 전 나는 신을 죽이고 싶었다. 고단한 삶 틈으로 스며들 경직된 교리란 없었다. 신 정도는 믿으니까 내뱉은 원망이었다. 그래도 성서는 지혜문학을 통해 ‘겸손히 살라’고 일갈한다. 그 시간 너의 것이 아니라 신의 것이라고 말이다. 짜증나게도 신은 하룻밤 불평불만에도 오늘의 마실 공기와 시간을 베푸는 것처럼 군다. 까닭 없이 지구가 존재함에도 신은 인자한 미소나 지으며 자기 세상인 마냥 근엄한 척한다. 나그네 되어 묵묵히 임차 받은 지구를 가꾸며 사는 삶. 내 것처럼 소유하는 게 아니라 내 것처럼 쓰다 돌려주는 삶을 생각했다. 어차피 이 지구는 인간의 것도 신의 것도 아니지 않은가. 욕망 섞어 천국을 만들어갈 때 끔찍한 지옥을 마주할 뿐이다. 어차피 자기 것도 아니면서. 서신서는 나그네의 삶을 강조한다. 이 땅, 너의 것이 아니라고. 신조차 이 지구를 자신의 것이라 생각할 때 심판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신의 이름으로 이 지구를 가지려 할 때 등장한 모든 비극적인 사건들이 뒷받침한다. 이제는 죽어서 받을 심판 개념을 믿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받을 업보라고 생각한다. 기독교인인 척하면서 기독교 시장에서 돈

[시대성의 창] 노동력 쥐어짜는 나라라면

2023년 03월 16일
브라우저가 오디오를 지원하지 않습니다. 병사 월급 200만원에 장교·부사관 사기가 저하된다는 1등 신문 사설 댓글 창을 읽어보니 가관이었다. “이 나라는 휴전 중인데 의무사병보다 직업 군인 급료가 더 적다는 건 기강과 사기에도 걸림돌이 될 것” “당연히 사병들의 처우는 개선해야 하지만 지나친 혜택은 장교와 갈등만 생기게 한다” “형평성에 안 맞는다. 군대가 놀다 나오는 곳이 아니잖은가” 지난 7일 통계청이 발표한 ‘2022년도 청년 삶 실태조사’에서 만 19세~34세 월 평균 임금은 252만원이었다. 병신 같은 댓글 말마따나 한국 안보 가치는 월 평균 임금만도 못한 수준인가보다 생각했다. “방산비리는 생계형 비리”라던 생계형 국방장관도 있는 마당에 말해 뭐하나. 언제나 늙은이는 고상한 가치를 들먹이며 자기 이익 챙기기 바쁘다. 다른 말로는 명분인 것이다. 학창시절부터 숱하게 보았다. 자기 이익이 걸린 사안에 대고 명분을 끌어와 잉여 노동 착취하는 수법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10년 몸담은 교회가 그랬다. 허울 좋은 하느님 나라의 가치에 수많은 청년 노동이 착취됐다. 아무런 보상도 급여도 없었다. 번아웃에 교회를 탈출했고 목사는 탈퇴 청년들에게 악담을 퍼부었다. 교회뿐만 인가. 광의적 의미인 국방의 의무를 20대 남성에게 한정 지어 군복무로 해석하던 한국 사회는 대선에서마저 젊은이를 자극했다. 병사 월급 200만원 공약을 ‘군사 표퓰리즘’으로 정의한 그 신문은 말한다. “월급 200만원 공약을 철회하면 찬성하는 국민이 훨씬 많을 것이다.” 지난해 12월 직장갑질119가 엠브레인퍼블릭에 의뢰해 직장인 1천명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자유로운 법정유급휴가(연차) 사용이 어렵다는 응답이 30.1%에 달했다고 밝혔다. 같은 조사에서 직장인 중 육아휴직을 자유롭게 쓰지 못하는 경우가 43%에 달했고 출산휴가를 자유롭게 쓰지 못하는 경우가 36%였다. 여성은 각각 50%, 45%로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사측의 거짓말은 노동자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①국민연금·건강보험은 순차적으로 납부할 예정이다 ②연차 사용하기 쉽게 조치를 취하겠다 ③무분별한 업무 분장 바로 잡겠다는 세 가지 약속은 세 달 지나도 고쳐지지 않았다. 바뀌지 않을 것이다. 노동자에게 불합리한 환경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다수 사용자의 인식 때문이다. 주 69시간 근무 제시 병사 월급 공약 절충 값싼 자유·애국 앞에 여론 들끓자 尹 깨갱 지난해 8월 국민건강보험공단은 ‘연도별 건강보험 체납현황’을 공개했다. 1개월 이상 건보료 누적 체납 현황을 처음으로 공개한 것이다. 2021년 건보료 누적 체납은 395만 4000건에 체납액만 4조 7057억원이다. 그마저도 2018년 5조 109억원에서 감소한 수준이다. 그럼에도 고용노동부는 바쁠 때 최대 69시간 일할 수 있도록 노동법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2023.03.06) 1주 단위 연장근로시간 관리 단위를 월 또는 연 단위로 확대하겠다는 것이다. 직장갑질119는 “정부가 휴가를 모아 ‘제주 한 달 살이’ 가라고 말하지만 한 달 휴가 가려면 최소 11시간 연장 근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하루 12시간씩 30일을 일해야 가능하다. 그리고 한국은 합계출산율 0.78명 시대에 도달했다. 세계에 유례없는 수치다. 이제 더는 회복 불가능한 상황이다. 저출생과 혼인 감소는 노동 시장과 무관하지 않다. 취업해야 결혼을 계획할 수 있고, 안정적인 직장을 구해야 아이를 낳을 수 있다. 돈 앞에서 각자도생이 되어버린 이 나라에서 누가 애국으로 헌신하고 애사심 가지고 노동한단 말인가. 대통령에게 이 나라 애국은 당연한 가치인가. 자유가 당연한 가치가 아니듯, 노동의 가치도 당연하지 않다. 한국은 저성장 국면에 돌입한지 오래다. 인구경제학자 전영수 교수는 인구 감소가 국내총생산 하락으로 이어진 점을 지적했다. 위기의 순간에도 노동자를 쥐어 짜 성장의 막차를 늘리기 위해 아등바등 한다. 대통령부터 200만원 비용을 치루고서라도 지켜야 할 애국이라는 가치를 보였다면 공약 철회 같은 소리는 듣지 않았을 것이다. 대표 본인부터 야근수당을 아깝게 생각하지 않았다면 신뢰를 잃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늘 또 한 사람 동료가 신문사를 떠난다. 중간 관리직이 없어 고생만 하고 이곳을 나선다.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대표에게 내민 시정 사항이 많았다고 한다. 돌아보아도 단 하나 바뀐 게 없다면서 웃을 뿐이다. 무책임한 낙하산 인사는 동료 앞에서 일부였다. 누군가의 노동을 물 쓰듯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비용은 치루지 않으려 한다. 그만한 가치가 없다는 의미다. 2021년 기준 한국의 노동 시간은 1915시간으로 OECD 회원국 중 5위다. 그마저도 더 늘리자고 말한다. 과격한 커뮤니티 언저리에서는 이런 말이 나돈다. “이 정도로 착취하지 않으면 망한다고? 그럼 쳐 망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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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랑 2026년 9월 19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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