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눈금] 18세 국민연금

10대 국민연금 임의가입자 순 출처: 국가데이터처 청년의 기피 대상인 국민연금을 자진해서 가입한다는 통계가 눈에 띄었다. 국민연금 10대 임의가입자가 2023년 4814명에서 올해 1월 1만2245명으로 2년 새 두 세 배 늘었다는 기사였다. 18~ 19세 인구 대비 10대 임의가입률이 높은 지역은 경기도 과천시(3.63%), 서울 강남구(2.88%), 종로구(2.45%), 동작·송파구(2.41%) 순이다. 전국 평균 1.28%의 2~3배다.

[사설] ‘김용철 새능력’이 체제경쟁 대상이라 생각하는 정신머리

예수의 부활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새능력의 김용철은 유독 ‘믿음’에 방점을 두었다. 그의 스크립트를 분석해 보면 ▲믿음=74회 ▲부활=54회 ▲사망·죽음=54회 ▲하나님=26회 ▲죄=22회를 언급했다. 특히 그가 “~줄로 믿습니다”를 말한 맥락을 살펴보면 종결의 강박을 확인할 수 있다. 이 표현이 수십 번 나오는데 LLM 인공지능 클로드는 “기능이 독특하다”고 평했다. 주장을 사실처럼 만들지 않고 ‘믿음의 영역’에 가둬버린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회복시키십니다”가 아니라 “회복시키실 줄로 믿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반증 불가능해지는 구조다. 안 되면 ‘믿음이 부족한 것’이 되고 되면 ‘믿음의 결과’인 것이다. 이 종결 어미 하나가 설교 전체를 검증 불가한 구조로 만들었다. 김용철의 스크립트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몇 가지 특징이 선명하게 보인다. ①설교 전체에서 대여섯 번 반복되는 ‘위기-해결’ 구조: 단일한 구조가 청중이 어디에 있든 ‘내 문제도 해당되겠다’는 느낌을 받도록 설계돼 있다. 문제는 이게 설득이 아닌 패턴 주입이라는 것이다. 부활이 왜 그 위기의 해답인지를 한 번도 연결하지 않는다. 그저 위기 다음에 부활이 나오니까 청중이 연결되는 것처럼 느끼게 할 뿐이다. ②예수가 부활했다(전제)-믿으면 너도 산다(결론)-아버지가 나았고, 쌀통에 쌀이 나왔고, 바울이 순교했다(근거): 이건 신학적 논증이라 할 수 없다. 귀납도 연역도 아니다. A가 B와 비슷하니까 A에서 일어난 일이 B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주장을 하려면 A와 B가 왜 비슷한지 먼저 보여야 한다. 그러나 김용철의 스크립트에서는 그 과정이 없다. 성경은 전부 결론을 지지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될 뿐이다. 로마서 6장, 고린도전서 15장, 요한복음 11장을 인용하지만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지, 그 문맥이 무엇인지, 원어가 무엇인지 단 하나의 설명도 없다. 성경은 감정 고조의 타이밍에 삽입되는 장치로 기능하는 것이다. 김용철의 스크립트는 오직 청중을 위기 속의 존재로 몰아넣는다. “삶이 무너졌나요” “건강에 어려움이 찾아왔나요” “절망 가운데 계십니까” 청중의 현재 상태를 결핍으로 규정하고 그 결핍의 해답을 설교자가 독점하는 구조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해답은 언제나 교회 안에 있다고 주장한다.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려면 예배당에 와야 하고, 믿음을 고백해야 하고, 설교자의 언어를 따라 해야 한다. 청중이 스스로 접근할 수 있는 경로가 없다. 설교자를 경유해야만 한다. 교인의 실명과 자산 규모를 비유하는 것도 이 맥락에서 봐야 한다. 단순한 농담이 아니라 설교자가 교인의 삶을 알고 있다는 과시를 의미한다. 알고 있는 사람이 권력을 가지는 이 섬뜩한 맥락을 어떻게 무시할 수 있는가. 새능력은 10년이 넘는 기간,

[일과속기록] 교보문고 대전점

2022년 06월 27일
학부 시절 매일 가다시피 찾아갔다. 지금도 첫 순간을 기억한다. 이 좋은 델 이제야 오다니. 특유의 향기 속에서 탄식 섞인 감탄이 흘렀다. 몇 년 만일까. 코로나19가 한창이던 지난 11월 입구 앞에 서자 반가운 마음에 미소를 머금었다. 익숙한 글판. ‘이토록 넓은 세상에서 이토록 많은 사람들 중에 나는 당신을 만났다’ 이젠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로 바뀐지 오래인 듯하다. 중앙에 위치한 카페를 지나쳐 제일 먼저 달려간 곳은 기독교 코너였다. 늘 그랬듯 ‘볼 게 없다. 볼 게 없어’ 내뱉을 뿐이다. 음악과 철학, 인문 코너에 이르자 학부 시절 조별과제가 생각났다. 항상 총대를 메었기에. 오래된 책을 찾거든 도서관으로, 싱싱한 책 찾으려면 이곳으로 향했다. 간학문(間學問) 명목으로 과제에 필요한 책을 이곳에서 헤매었다. 하여 단행본과 논문까지 포함해 열군데 인용한 처음이자 마지막인 기독교윤리 최종점수가 떠올랐다. 과제는 열심히 했지만 수업을 세 번이나 빠진 고로 처분 받은 C+이 되살아났다. 선배와 마주친 우연도 생각났다. 한없이 신세만 졌으므로 모른 체 넘어가고 싶었다. 정다운 인사를 건넨 선배를 피하지 못했다. 미안하고 죄송하다는 대답만 흘린 매대 앞, 교복 입은 여학생 남학생 무리가 스쳐갔다. 선생님 향하여 가리킨 손가락이 그저 부러웠다. 소설 코너에 이르자 청소년 문학을 살폈다. 잠실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지만 낯익은 책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인생에 몇 없는 힘든 시기에 접한 소설 앞에 섰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허상의 세계에 몸을 기대었을까 물었다. 가능하지 않을 것 같은 가능성으로 돌아온 상상의 힘이 이 자리에 설 때마다 솟아났다. 그 힘은 다채로운 지식을 모아 하나의 소설로 엮어낼 능력을 안겨주었다. 지금은 낯선 직원만이 곳곳 돌아다니며 서고 정리 중이다. 의자도 사라진지 오래다. 핫초코 마시며 과제 위한 독서에 여념인 내 모습을 생각했다. 그때 나는 참 열심히 살았지. 지금 이 일로 먹고 살 줄 꿈에도 몰랐는데 말이야. 괴로워하고 불안해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속까지 따끈한 핫초코 내음을 졸업 앞둔 마지막 순간까지 즐겼다. 추워지던 가을이었다. 카페에선 항시 스탬프 이벤트를 진행했다. 열 번 다 찍으면 음료 한 잔 무료로 준다기에 성실히 사 마셨다. 사실 눈여기던 직원이 있었다. 그분 계실 때만 주문한 덕분에 마지막 도장도 그분 계실 때 찍으리라 다짐했다. 하루 이틀 일주일 지나서도 안 보이자 그만뒀나 싶어 마음의 갈등 속 마지막 한 잔 사먹었다. 다음 날 거짓말 같이 출근했다. 새 카드 내밀자 “다 찍으신 거예요?” 물었고 서로가 아쉬워했다. 코로나는 그조차 모른다고 말하듯 카페를 매대로 치워버렸다. 덕분에 수많은 이름들 속 문예은도 지워져버렸지만 나는 기억한다. 저녁 9시 45분이면 영업 종료 방송이 나온다. 지겨운 학교로 돌아갈 생각에 발걸음은 무겁지만. 헤어짐이 있으면 다시 만날 그날도 온다는 사실을 되새기며 나설 채비를 마치곤 했다. 발걸음을 멈추게 만든 마감 음악 ‘Good bye’. 그때마다 꼿꼿하게 서서 가사를 음미했다. 오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노래는 오르골 멜로디였다. 낭만적으로 기억을 연주하는 작은 음악가 앞에서 바뀌어가는 그림을 가늠했다. 오래도록 머물고픈 그리움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서 있었다. 교보문고 대전점은 복학하기 1년 전인 2016년 재입점했다. 2007년 이후 9년 만에 다시 연 셈이다. 입점 무렵 글판이 인상적이다.

[시대성의 창] 예수가 다시는 부활하지 않았어도

2022년 04월 18일
브라우저가 오디오를 지원하지 않습니다. 향린교회가 재건축조합으로부터 예배당 침탈을 당했을 때의 일이다. 교인들은 향린교회 바깥 어두운 골목길에서 초라해 보이는 고난주간을 보내야 했다. 찬송가 147장 ‘거기 너 있었는가’ 힘없이 부르는 침참속 교인들 풍경이 낯설었다. 낯선 것은 예배뿐만이 아니었다. 기도하는 신자 분 메시지가 가슴에 와 닿았다. “십자가도 없이 싸늘하게 식은 저 예배당 안에서 홀로 눈물의 기도를 드리고” 있을 “그 예수를 우리가 구원해야 할 때”라고 규명한 그분은 예수의 힘없는 무력한 광경을 목도했다. 기독교인에게 신의 전능성은 ‘무소부재’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무엇이든 구해낼 수 있는, 무엇이든 가능한, 미래의 일들까지도 감찰하고 영향력을 발휘하는. 그러나 현대인에게 기독교적 신은 허상으로 보일 뿐이다. 전쟁을 막지 못했고, 죽어가는 사람들조차 구하지 못했으며, 고통 속에 신음하는 노동자와 절망으로 스러지는 노인들의 고의적 자해를 막지도, 없애지도 못한다. 한국 개신교회에서 유행처럼 번진 현대 찬송 ‘nothing is impossible’은 말 그대로 신은 인간에게 성도 무너뜨리고 눈먼 자도 눈 뜨게 할 것 같은 착각을 심어준다. 새능력교회도 그렇다. 이름 자체에서 느끼는 것처럼 무능력한 기독교인을 일깨울 담임목사의 욕망 그 자체를 담았다. 이들이 믿는 모든 것 가능한 신 개념과 이들이 살아가는 무능력한 신이 다스리는 지구와 충돌하며 벌어진 불일치는 인지부조화로 이어진다. 전 교인을 상대로 저지른 노동 착취와 “회개하지 않아서” “예배 생활하지 않아서” 행위 중독을 신앙 덕목처럼 설파하는 현상으로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복음서에서 예수는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예수는 모든 이들이 바랬던 로마의 해방을 이뤄내지도, 제자들이 바라던 인사도, 손목에 묶인 포승줄조차 풀어내지 못했다.

[현실논단] 최문정, 널 마감하고서

2022년 03월 09일
학부 4학년 때 일이다. 뒤늦게 확인한 페이스북 메시지엔 “학보사 문제로 뵐 수 있을까요?” 묻는 선배의 한 마디만 있었다. 일면식도 없는 선배라 지인 선배에게 이미 전달 받고 확인한 부탁이었다. 정중히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학보사는 생활관장과 정치적 싸움을 이어가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때도 신문은 정치적인 매체이자 일상과 동떨어진 종이일 뿐이었다. 정치적인 싸움은 165호에서 출발한다. 침신대학보는 지면신문 뿐 아니라 홈페이지 ‘학보사’ 카테고리 속 PDF를 통해서도 학교 안 소식을 전달한다. 유독 165호가 올라오지 않았다. 보통 한 학기에 한 두 호 정도는 발행해 왔거늘. 편집국장에게 물었다. 홈페이지에 올릴 수 없다는 이유로 한글 파일을 건네 받았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영부영 완성된 느낌적 느낌이 싸했다. 학교에서 재정 지원은 없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었지만 묻지 않았다. 복학하자 학보사를 둘러싼 소문을 접했다. 사람들은 ‘오탈자 하나 잡아 내지 못하는’ ‘예의없고 싸가지 없는’ ‘반성경적이면서 진보적인’ 집단으로 함축했다. 학보사에 들어가려던 내 결정도 접어야 했다. 사람들이 흘려 낸 정보들 때문이 아니었다.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진학이 앞섰기 때문이다. 지인들은 “네가 학보사 들어가지 않아서 다행이야” “정치적으로 이용 당했을지도 몰라” 그렇게 말했다. 그럼에도 꼬박꼬박 읽었다. 어떻게 만들었을지 궁금했지만서도 어떤 내용으로 만들었을지가 궁금했다. 종합 일간지는 정치적 의도와 목적으로 만든다. 학보도 그런 정치성이 보일지 궁금했다. 진보적인 신문은 아니었다. 당연히 박근혜는 탄핵되어야 했다. 기독교 인이라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마땅하다. 예수의 가르침 대로 가난한 자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말들도 진보와 보수라는 이념과 무관하게 당연했다. 창조설에도 여러 이론이 있기 마련이다.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성서 구절로 창조설이 진리라던 문장을 보면 확실히 진보적인 신문은 아니다. 그러나 영적인 세계를 위시해 음모론을 말하던 박성업에 관해서는 비판했다. 대법원 앞 거대하게 탑 쌓아가던 사랑의교회를 지적했다. 공동체 정신을 잃어가던 와중에 아나벱티스트에 주목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정상화가 요원한 이 학교 총장 직무대행을 꼭두각시로 보이도록 곰돌이 인형을 만평으로 풍자했다. 총학생회장은 정기총회에서 공개적으로 교수의 비리 의혹을 제기했다. 교수들 중 한 사람이 친인척을 학교 이사로 꽂은 상황이라 말을 꺼냈고 방학 기간 틈 타 징계 당할 뻔 했다. 그럼에도 누구 하나 학교 문제에 말을 아꼈다. 대자보라도 내야 할 상황에도 침묵했다. 법원이 직무집행정지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이자 비품을 아껴 쓰라는 말만 돌았다. 공론장 잃은 사람들은 우왕좌왕했다. 교수들 알력 다툼만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무엇이 문제인지 누가 잘못했는지 물어볼 질문은 많았지만 물어볼 수 없었다. 정치적 일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런 학보의 인쇄 자금을 끊은 건 학교 당국이었다. 아래아 한글판 165호도 배곯던 상황에서 만들어졌다. 학보사에서 일할 학우 구하는 일이 상당히 어렵다고 들었다. 나를 영입하려던 부탁도 한 두 번이 아니었을 것이다. 기사를 쓴다는 건 취재하는 일이고 취재 지시를 받은 다음 일이다. 누군가는 지면 신문을 기획해야 한다. 누군가는 백지 위에 기사를 배치해야 한다. 누군가는 오탈자를 확인해야 한다. 그래픽은 또 누가 만드나. 한 두 사람만으로 만들어질 수 없다. 공동체 의식은 나라는 존재가 사회라는, 학교라는 토대 위에서 살아간다는 인식 속에서 피어난다. 하지만 누구도 학교 문제에 나서지 못했다. 용기가 없었을지 모른다. 문제가 어떻게 얽혔는지 풀어낼 자신도 없었을 것이다. 또래 정치 싸움 너머 어른들 다툼에 끼어드는, 분명히 다른 차원의 문제다. 어른들이 공론장을 박살 내는 동안 젊은 것들은 무시 당했다. 그런데도 대학원에 들어가려 하다니. 내 아둔한 지각에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본지 문화섹션 나우에서 선보인 단편소설 ‘너에게 맞설 수 있는 치트키’에서 주인공 최문정은 아무도 없는 밤 기숙사에서 남자애와 키스한다. 문정은 잠 못 이루는 감정을 느꼈다. 키스를 그리는 장면에서 상상했다. 만일 선배의 부탁을 받아 들고 학보사에 들어갔다면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루라도 더 빨리 장신대 신학대학원 진학이란 허황된 꿈을 버리지 않았을까. 사람들과 부대끼며 현실의 벽을 조금 더 일찍 마주치지 않았을까. 지면신문 배치마저 인쇄소에 맡기던 “에휴, 자유의새노래 만도 못한 학보구나” 탄식 대신. 기획실장, 아니 편집국장과 싸우며 침신대학보라 쓰고 공론장으로 읽는 희망의 탑을 하나씩 쌓아가지 않았을까. 최문정을 이용해서라도 과거로 돌아가 세상을 바꾸고픈 열망이 샘솟는 지금. 우리는 대한민국 20대 대선을 맞았다. 정치인을 아이돌로 추앙하던 20세기와

발바닥이 보일 만큼

2022년 03월 01일
거센 파도 앞에서 제법 몸 가누기 힘들었다. 하룻밤 사이 내린 폭설에 허리춤까지 쌓아둔 덕분이다. 파도 앞에 서기 위해 발 한걸음 조심스레 내딛지만 이내 발가락부터 젖고 만다. 푹 파이지는 않을까 바짓단에 묻는 건 아닐까 더 젖어버리진 않을까 순간 이어지는 왼발 오른발 박자에 맞추어 나도 몰래 종종걸음 뛰어간다. 파도 굉음 아랑곳 않은 채 총총걸음 빗기어 내 앞에 선 너. 가볍게 오르는 발바닥 보니 누구에게 맞서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수많은 갈림길 끝에서 오늘에 도달한 너도 이 파도가 무겁게 들리지 않았을 거야. 엇나간 줄 알았던 발바닥은 다시금 돌아와 내 앞에 서 기록으로 남긴다. 두 손 맞잡고 “언제나 어디서든 같이 있자” 이 한 마디 족적으로 남겨두고서 묻는다. 드넓은 대지로 남은 이 파도는 어디에서 온 걸까. 먼 이국땅에 도달할 줄 너도 몰랐겠지.

[신앙칼럼] 진짜 사과 들고 와서 사과하면 다 되는 줄 아는 목사

2022년 01월 21일
물리 법칙을 거스를 수는 없는 법이다. 1초 만에 서울에서 부산까지 이동하지 못하고, 죽었다가 깨어나도 과거라는 시간으로 돌아가지 못하듯이 물리 법칙도 거스를 수 없다. 큰 폐를 끼치고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이 생각날 무렵, 사과 한 마디로도 끝나지 않는다는 일종의 물리법칙을 깨닫곤 한다. 아무리 보상해도 보상으로 위로할 수 없고 잘못하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기에 사과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사과문에는 건조한 잘못을 저지른 사실 관계, 경위, 재발방지, 반성, 잘못하기 이전으로 최대한 복구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상심한 마음을 풀어주는 것까지도 포함되어야 한다. 그러나 사과에는 진정한 마음이 담겨야하기에 어떻게 사과해야 할지 정해져 있지 않다. 따라서 ‘진짜’를 내걸 이유도 없으며 ‘미래’라는 명분을 가져다가 용서를 요구할 수도 없다. 사과하는 가해자가 어떻게 사과하는지, 이후 화해와 복구의 의지 여부에 따라 용서할 수도 있고, 용서하지 않을 수 있다. 사과와 용서를 지켜보는 사회 역시도 사과의 정황에 포함 돼 있다. 가해자를 어떻게 받아주어야 할지, 영구히 분리해야 할지. 그리고 잘못 이상의 사과를 요구하는 피해자의 일방적인 주장도 바로 잡기 마련이다. 이 과정을 통해 사과와 용서는 결코 ‘사과가 과거를 풀고 용서는 미래를 연다’ 따위의 구호들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작업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과를 해본 적 없는 고개를 빳빳하게 드는 인간일수록 속 시원하게 사과하면 된다고 착각한다. 용서를 해본 적 없는 인간이기에 경제적 신앙적 이해가 맞아 떨어지면 어제의 적군도 오늘의 아군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런 게 사과이고 용서라고 말하는데, 참 철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만사 돈에 의해 돌아간다고 믿는 순진한 사고방식이다. 참여교회는 한 해를 마치기 전, ‘사과데이’라는 이름으로 이벤트를 내걸었다. 교회는 실제 사과를 건네며 사과하면 용서해주는 캠페인을 진행했다. “사과를 주고 싶은
1 7 8 9 10 11 25
Today소랑 2026년 6월 22일 월요일
Go to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