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눈금] 18세 국민연금

10대 국민연금 임의가입자 순 출처: 국가데이터처 청년의 기피 대상인 국민연금을 자진해서 가입한다는 통계가 눈에 띄었다. 국민연금 10대 임의가입자가 2023년 4814명에서 올해 1월 1만2245명으로 2년 새 두 세 배 늘었다는 기사였다. 18~ 19세 인구 대비 10대 임의가입률이 높은 지역은 경기도 과천시(3.63%), 서울 강남구(2.88%), 종로구(2.45%), 동작·송파구(2.41%) 순이다. 전국 평균 1.28%의 2~3배다.

[사설] ‘김용철 새능력’이 체제경쟁 대상이라 생각하는 정신머리

예수의 부활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새능력의 김용철은 유독 ‘믿음’에 방점을 두었다. 그의 스크립트를 분석해 보면 ▲믿음=74회 ▲부활=54회 ▲사망·죽음=54회 ▲하나님=26회 ▲죄=22회를 언급했다. 특히 그가 “~줄로 믿습니다”를 말한 맥락을 살펴보면 종결의 강박을 확인할 수 있다. 이 표현이 수십 번 나오는데 LLM 인공지능 클로드는 “기능이 독특하다”고 평했다. 주장을 사실처럼 만들지 않고 ‘믿음의 영역’에 가둬버린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회복시키십니다”가 아니라 “회복시키실 줄로 믿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반증 불가능해지는 구조다. 안 되면 ‘믿음이 부족한 것’이 되고 되면 ‘믿음의 결과’인 것이다. 이 종결 어미 하나가 설교 전체를 검증 불가한 구조로 만들었다. 김용철의 스크립트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몇 가지 특징이 선명하게 보인다. ①설교 전체에서 대여섯 번 반복되는 ‘위기-해결’ 구조: 단일한 구조가 청중이 어디에 있든 ‘내 문제도 해당되겠다’는 느낌을 받도록 설계돼 있다. 문제는 이게 설득이 아닌 패턴 주입이라는 것이다. 부활이 왜 그 위기의 해답인지를 한 번도 연결하지 않는다. 그저 위기 다음에 부활이 나오니까 청중이 연결되는 것처럼 느끼게 할 뿐이다. ②예수가 부활했다(전제)-믿으면 너도 산다(결론)-아버지가 나았고, 쌀통에 쌀이 나왔고, 바울이 순교했다(근거): 이건 신학적 논증이라 할 수 없다. 귀납도 연역도 아니다. A가 B와 비슷하니까 A에서 일어난 일이 B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주장을 하려면 A와 B가 왜 비슷한지 먼저 보여야 한다. 그러나 김용철의 스크립트에서는 그 과정이 없다. 성경은 전부 결론을 지지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될 뿐이다. 로마서 6장, 고린도전서 15장, 요한복음 11장을 인용하지만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지, 그 문맥이 무엇인지, 원어가 무엇인지 단 하나의 설명도 없다. 성경은 감정 고조의 타이밍에 삽입되는 장치로 기능하는 것이다. 김용철의 스크립트는 오직 청중을 위기 속의 존재로 몰아넣는다. “삶이 무너졌나요” “건강에 어려움이 찾아왔나요” “절망 가운데 계십니까” 청중의 현재 상태를 결핍으로 규정하고 그 결핍의 해답을 설교자가 독점하는 구조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해답은 언제나 교회 안에 있다고 주장한다.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려면 예배당에 와야 하고, 믿음을 고백해야 하고, 설교자의 언어를 따라 해야 한다. 청중이 스스로 접근할 수 있는 경로가 없다. 설교자를 경유해야만 한다. 교인의 실명과 자산 규모를 비유하는 것도 이 맥락에서 봐야 한다. 단순한 농담이 아니라 설교자가 교인의 삶을 알고 있다는 과시를 의미한다. 알고 있는 사람이 권력을 가지는 이 섬뜩한 맥락을 어떻게 무시할 수 있는가. 새능력은 10년이 넘는 기간,

[에셀라 시론] 보이지 않는 나라를 꿈꾼다

2021년 08월 07일
박원순과 나경원이 맞붙던 시절의 이야기다. 종북(從北) 단체와 친밀하게 지낸다는 박원순 후보의 일설을 믿고 순진한 마음으로 누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누나의 답변은 간단했다. 정치는 단순한 이념으로 보는 게 아니라고. 이념으로 사람을 보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답변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새로운 눈이 뜨이자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 왜곡된 정치의 시각으로도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신앙의 끝으로 달려가던 와중에 붙잡은 정치 이념이 보수적 깨시민으로 만든 후였다. 대학을 입학했다. 생각보다 ‘보이지 않는 나라’는 많았다. 기독교가 말하는 하느님 나라가 대표적이다. 하느님 나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 하느님 나라를 꿈꾼다. 보수적 성향의 시민도 보이지 않는 나라를 꿈꾼다. 대깨문이 박멸되는 나라. 진보적 성향의 시민도 다를 바 없다. 토착 왜구가 청산된 나라. 학교에서 교과서로 배우는 사회와 다른, 현실 세계에 입문하는 순간 보이지 않는 나라를 경험한다. 사회생활 단어도 ‘보이지 않는 나라’를 설명하는 맥락에서 사용한다. 슬프게도 코로나 파동을 겪은 이 시점에서도. 눈물 흘리지 않고서는 맨 눈으로 보기 힘든 ‘보이지 않는 나라’가 스며든다. 죽음. 고독사가 휩쓸고 지나간 집에서 청소하던 일꾼을 마주했다. 어른이 되면 ‘하고 싶은 대로 살겠구나’ 그리 생각했다. 현실은 달랐다. 보이지 않는 노동의 짐,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불안, 좋소에서 또 좋소로 이직해야 하는 절망. 어른이 되고서야 자기 몸 하나 건재하기 힘겨운 대한민국이란 보이지 않는 나라를 보았다. 2020년에 발표한 통계청 사망원인통계는 20대 사망원인을 고의적 자해 51%를 꼽는다. 노인의 경우는 상상을 초월한다. 같은 자료에서 고의적 자해는 50대부터 급증한다. 미친 나라다. 보이지 않는 죽음의 나라를 선택한다. 도태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한 사람, 두 사람 떨어져 나가는 광경을 지켜만 보던 개개인이 무엇으로 바깥 경계로 내몰린 사람들을 지켜낼 수 있었을까. 박원순과 나경원의 사투를 보면서 나경원이 이기는 것만이 이 나라를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 믿었던 것처럼.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은 나라를 운운하며 보이지 않는 나라를 꿈꾸는 이들도 그저 보이는 대로 손을 뻗는다. 언젠가 보이지 않은 세계가 보이기 시작하면서부터 울컥했다. 저 사람은 오늘의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 편안하게 쉴 수 있을까. 저 부장은 돌아가서 혼자 무슨 반찬을 해먹을지. 팀장은 한 시간도 넘는 퇴근길 버스 안에서 쪽잠이라도 잘 수 있을지. 보이지 않는 노동의 나라 저 끝자락을 상상할 때마다 눈물이 차오른다. 하지만 눈물은 어김없이 분노로 바뀐다. 퇴근하고 내내 욕을 내뱉었다. 속이 타오를 때까지 욕을 했다. 힘겹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을 외면하고 그것도 모자라 그들의 비명에 스피커까지 틀어가며 제 할 말만 떠드는 인간들을 때문이다. 비명이라 말했다. 정치는 나약한 이들을 위해서 작동해야 하건만. 대깨문과 토착왜구 사이에서 성실하게 살아남은 사람들의 비명이 양쪽 스피커에서 깨끗하게 사라진다. 계급으로 전락한 이들의 세계는 ‘보이지 않는 나라’가 된다. 신학자 김진호는 저서 ‘대형교회와 웰빙보수주의’에서 ‘그 바깥’ 단어로 설명을 이어간다. 어느 누구도 그 바깥으로 내몰린 사람들을 책임지지 않는다. 심지어 보이지 않는 나라로 향한다 하더라도. 왜곡된 정치관이 사라진 순간은 조선일보를 절독한 시점이 아니었다. 조선일보가 비로소 조선일보로 보일 때다. 보이지 않는 나라, 저 조선일보가 판을 짜고 프레임을 섬세하게 엮어내던 장인정신 깨닫고서 현실을 알아차렸다. 일찍이 보이지 않는 나라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성숙한 어른이 되어가는 듯했다. 그런 어른은 서로를 ‘친구’라고 부른다. 높고 낮음을 구분하지 않으며, 동등한 인간으로 대한다. 인생 경험 가르치는 인간들의 맥락과 결이 다르다. 더불어 살아가는, 보이지 않는 당신의 나라 속 친구는 서로가 서로를 끌어다주는 독특한 관계를 의미했다. 친구라 부르던 두 어른은 묵묵히 노동자로 하루를 살아간다. 서울대만으로도 이뤄질 수 없는 나라. 권력의 정점에 올라서도 이뤄낼 수 없는 나라. 없는 셈 치더라도 숨길 수 없는 나라. 그저 파란나라 꿈꾸던 혜은이 목소리로 상상하던 나라. 정치인이, 종교인이 만들어 낸 허상의 보이지 않는 나라를 빗금으로 지우고. 나약한 자를 친구로 삼고 보이지 않는 나라를 살아가는 이들의 우정으로 다시 써 넣어 그려본다. 성실히 살아가는 이들의 보이지 않는 나라는 이념의 경도된 시각, 대깨문과 토착왜구라는 단어들 사이에서 이뤄질 수 없다. 죽어가는 사람들의 비명을 외면하고

[시대성의 창] 자격 없는 것들

2021년 07월 12일
남성과 여성의 신음으로 이루어진 ‘게로게리게게게(ゲロゲリゲゲゲ)’ 두 번째 정규 앨범은 기미가요 전주와 히로히토 일왕의 근엄한 표지에서 황당함을 더한다. 이름부터 ゲロ(게로)=구토, ゲリ(게리)=설사를 뜻한다. 두 개 트랙으로 나눠진 이 곡 쇼와(昭和)는 18분59초, 19분8초 내내 신음소리와 오토바이나 숨소리, 여성에게 상태를 묻는 남성과 갈 것 같다는 여성의 목소리가 중간에 삽입되어 이질감을 표현한다. 그 외에 노래는 볼일 보는 소리, 소리 지르거나 치찰음을 섞어 노랜지 소음인지 정신을 혼미하게 만든다. 히로히토가 사망하고 발표한 앨범이니 만큼 전체주의에 대항해 설사와 구토로 우스꽝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려는 목적인지는 모르지만 히로히토의 근엄함이 주는 실소만은 분명하다. 교회와 섹스라는 단어도 이질감을 넘어 황당한 실소를 던진다. 두세 달 사이 두 명의 목사가 성범죄 혐의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대전과 삼척의 두 교회 목사 이야기다. 여성 교역자 신체를 만지고 뽀뽀까지 한 것도 모자라 성 접촉 상황을 보고하라 지시했다. 해명이 웃긴다. 남성에게도 차별 없이 대한다는 해명이다. 목양실에서 여 신도와 부적절한 관계를 가진 목사는 잘못과 해명도 없이 부활절 헌금과 함께 잠적했다. 두 사람 모두 교회 홈페이지와 소셜미디어 계정을 감춰버렸다. 제왕적 목사 권력, 여성 향한 그루밍성범죄와 돈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조건이다. 유튜브에는 이곳저곳 강사로 서서 내가 교회를 이렇게 세웠고 하나님의 일을 했다던 성장론만 남아 메아리로 증언한다. 교회만큼 섹스를 외면하는 공간이 또 있을까. 교회서만 볼 수 있는 이 황당한 실소는 성(聖)과 속(俗) 이분법으로 이질감을 안겨준다. 하고는 싶지만 하지는 말아야 할, 마음에는 들지만 외면해야 할. 사랑에는 국경과 나이도 없다지만 신과의 관계 속 터부(taboo)는 도덕과 윤리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교회는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의 섹스를 향해서 거룩과 경건을 파괴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생각보다 교회 내 성범죄는 히로히토와 신음소리 만큼 이질적인 수준이다. 교회 내 성범죄는 현재 진행형이다. 당장 포털 뉴스에 최신순으로 ‘목사 성범죄’를 검색해보시라. 하루 전 기사가 쏟아진다. 그리고 익숙한 단어가 보인다. ‘그루밍 성범죄’ 지난 2019년 JTBC 취재 결과 2005년부터 2018년까지 법원에서 유죄판결 받은 아동 청소년 대상 성범죄 목사만 79명으로 집계됐다. 면직만 5명. 목사직이 박탈되어야 함에도 당당하게 원로목사까지 된 사례도 3건이나 집계됐다. 앞에선 거룩한 척하고 뒤에선 음란한 목사들 바울은 그리 말하겠지 “가만두지 않겠다”고 기독교반성폭력센터 2018년 상담 통계에서 성별로 분류한 자료를 보면 황당함은 분노로 바뀐다. 미성년 여성 피해자만 21건으로 전체에서 25%를 차지한다. 네 명 중 한 명이 미성년 피해자다. 성범죄자 131명 중 목사만 79명인 자료도 황당한데 그 중 21명은 목회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범죄를 저지른 자격 없는 목사들이 지금도 자신의 이름을 바꾸거나 교회를 옮겨 활동한다. 이 기관 조사에서 가해자 직분만 목회자 61%로 전체에서 55건에 달했다. 성서는 치리(治理)를 다룬다. 이단은 멀리하고 교회에 반하는 사람들을 바로 잡아야 한다. 그러나 교회는 목사 면직에 미온적 태도를 취한다. 목사직을 박탈한다 하더라도 피해자 치유에는 여러 박자가 늦는다. 교회 내 여성혐오 발언이 여전한데, 어떻게 피해자들을 보듬을 수 있을까. 여러 여학생과 부적절한 관계를 가진 인천의 모 목사는 그게 사랑이었다고 말한다. 기가 막힌다. 교회는 교회법이 우선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당신들은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허가 받은 교단에 불과하다. 정교분리 원칙을 말하기 전에 자격 없는 목사들부터 쳐라. 여기는 교회보다 헌법이 위인 대한민국이다. 성경대로 하겠다고? 바울은 부정과 음란, 방탕을 회개하지 않은 자들을 향해 “그런 사람들을 그냥 두지 않겠다”(2고린 13,2)고 말했다. 그러나 교회는 교회 내 성소수자들을 탄압하고 축복 기도한 이동환 목사를 가만두지 않았다. 임보라 목사를 이단으로 규정한 황당한 교단도 있었다. 전통적인 가부장제 사회에서 1인 가구로 변모하는 현대 사회에 혼전순결을 강조하는 것도 우습지만, 목사들부터 경건하지 않으면서 섹스하면 죄라고 가르치는 광경이 히로히토 일왕의 사진 앞에 신음소리를 변주한 게로게리게게게 앨범같이 황당한 웃음만 나온다. 청소년 단체가 자기 단체라고 지껄인 그 인간은 무얼하며 살고 있을까. 언론에 나온 성폭력은 합의된 관계였다며 또 강사 노릇 하겠지. 목사 면직 3년만 지나도 자동 복직 될 테니. 대단하다. K-교회!

[현실논단] 지금, 여기를 꺾은 대가

2021년 07월 12일
한 번의 검색이 전부였다. ‘꽃봉오리를 꺾지 말라’. 현직 교수, 그것도 내일 제출해야 할 과제하다 말고 눈물 흘리며 써 내려갔을 글줄을 눈앞에 두니 아뜩했다. 망할 놈의 교회는 날 가르치던 교수의 학위를 조작이라 고발했다. 직접 웹사이트에 검색해보라며 디테일한 논문 검색 방법까지 담아놓은 글 안에는 총회장으로 보이는 아버지 같은 인간까지 찾아가 눈물 흘리며 호소했던 그 밤 서러움이 생생했다. 하다하다 조작된 학위조작설로 교수 임용 철회를 요구하던 10년 전, 모교라 부르기도 부끄러운 그곳 풍경 이야기다. 돈이면 다 되는 세계라 그렇다. 학부 3학년이 되어서도 새로운 세상은 도래하지 않았다. 우울증은 깊어져 갔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먹고 살지, 해놓은 공부는 있었는지 앞길이 보이지 않았다. 노래도 서점도 햄버거도, 아무 의미 잃어가다 도피할 무언가라도 있었으면 했다. 정확히 2주차부터 무기력했다. 교수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백지 B5 스마트폰 올려둔 채 졸기도 했다. 대놓고 커뮤니티 했고 여자 아이돌 사진을 정리하다 팬픽을 써내려갔다. 즐거웠다. 매일 교보문고를 찾아갔다. 한 번도 생각지 않았던 여자 아이돌 시점에서 생각해 보았다. 아이돌의 작업실부터 화성학까지 모두 잊어버리고 말았지만 공부라는 건 재미있었다. 문제는 밤 10시40분, 무거운 몸 이끌고 도착한 기숙사에서 도드라진다. 현실 세계로 돌아오니 나를 구해 줄 구원자 여자 아이돌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침 6시에 기상해 아침예배를 드리고 또 커피를 마시며 조선일보 읽어야하는 쳇바퀴 돌아가던 하루의 연속이 이어질 따름이다. 죽고 싶었다. 망할 놈의 신학을 전공해도 일할 만한 데가 마땅히 없었다. 목사의 바지가랑이 붙잡아서 속된 말로 똥구멍을 핥아도 시원찮을 판에 교회도 다니지 않았으니 말 다했다. 교수도 허무해졌다고 한다. 수업 열심히 준비했거늘 학생들이 잘 듣지 않으니 “무척 허무하다”고. 학부를 끝마치고 돌아가던 열차에서도 이렇다 할 방도는 없었다. 백수의, 빈 공간의 시간이 이어졌다. 보이지 않는 앞날들과 돌아갈 수 없는 과거, 10년 전 소년을 헤매다 발견하고서 나는 운다 제로로 돌아갔다. 다시 0으로 복귀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탐험했다. 과거로 여행을 떠났다. 10년의 우정이 무엇일지 되짚어보았다. 조선일보, 모루, 노은석, 박준형, 신앙, 기록. 사건이라 하기엔 다발적이고 혁명이라 하기엔 작은 불꽃을 발견했다. 소설을 집필해 책으로 엮는, 누가 봐도 즐겁지 않은 작업을 상상하는 동안 글 짓는 소년을 만났다. 그동안 잘 지냈느냐고 물을 수 없었다. 분명히 외면한, 10년 전 네 앞에 미안한 마음으로 숙연하게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아무 말도 않는 소년 앞에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단출한 브리핑을 이어갔다. 소년은 한 번의 잘못된 선택이 10년 후 견디기 어려운 책임을 불러 올 줄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부끄럽고 죄스러운 마음으로, 계획이란 것을 열거한다. 제로교육은 실패할지 모른다. 촘촘히 엮어내지 못해 뜯어질 지도 모른다. 허나 장신대만 들어가면 인생길이 보일 거라 굳게 믿었던 어리석음에서 일찍 돌이켰다면. 허나 제 로(路)로 돌아간 3년 전 결정이 더 일렀더라면 인생 항로의 몇 도는 더 틀 수 있었을 것이다. 제로에서 밑바닥에서 잘할 수 있고 사랑하는 분야를 발굴하며 발견한 열다섯 소년은 지금이라도 죽기 전에 발견해줘서 다행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묻는다. 사랑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되묻는다. 나를 사랑하는 일은 무엇일지 하나 둘 꺼내어본다. 기록의 힘. 활자의 가치, 텍스트만이 가능한 일을 흩어놓자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던 과거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미래라는 불완전한 시간이 해체되고 현재라는 시각이 보인다. 꽃봉오리 꺾지 말라던 교수가 중간·기말 대체로 과제 하나만 내주었다.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에게 코헬렛을 소개하는 기사, 2페이지 분량.’ 아예 내게 점수주고 싶다는 제스처로 읽혔을 지경이다. 재미있게 과제했다. 재밌어서 눈물 났다. 수업 한 번으로 A+ 받았다. 운과 사랑의 절묘한 조합. 열다섯 소년은 “그때 신학을 포기했어야 했다”고 삿대질 않는다. “발굴할 때까지 10년을 기다렸다”고. 지혜문학연구 만큼은 잘 들었어야 했다던 후회만큼, 글 짓는 소년이 집중하는 ‘지금, 여기’처럼 오늘의 시간에 주목해야 한다고.

[에셀라 시론]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했을 때

2021년 07월 12일
A를 물었으면 A에 대해 말하는 게 정상이다. 대학 이름을 묻지 않는 건 하등 필요없는 논점으로 이어지거나 대화의 핑퐁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대학 이름 대신 전공을 묻는 건 소통에서 실리적이다. 어떤 일을 하는지, 무슨 일이 가능한지 묻는 게 상대방의 관심사를 이해하는데에도 도움을 준다. 나아가 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진다면 살아온 배경을 묻게 되고 자연스레 대학 이름이 나오며 환경을 가늠한다. 하등 쓸데없는 소득 수준, 자가용은 가지고 있는지, 원룸에서 사는지 투룸에서 사는지를 묻지 않는다. 필요 없으므로 묻지 않을 뿐이다. 여럿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아도 단시간 안에 상대를 파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편리한 방법이 시간의 검증뿐이지 않을까.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시간의 검증만이 가능한 판단 말이다. 매번 시험으로 검증할 수 없는 노릇이다. 어떤 질문이 적합한지, 질문은 어떻게 준비할지. 대답하더라도 평가가 올바른지 가늠할 길이 없다. 사람의 능력과 성향, 특질을 이해하는 작업이 가능할지 모른다. 사람들을 줄로 세워두고 점수로 매기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부모가 개입했는지의 여부, 하다 못해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았는지 같은 드러나지 않은 매개들을 합산해서 평가해야 할지, 순수한 개인의 가능성만을 판단해야 할지 기준을 정한다고 하더라도 판단하기 매우 어렵다. 불가능에 가깝다. 표면적으로 가늠할 수 있는 학력 수준이나 수능 점수가 판단 방법이 될지 모르나, 세상은 수능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정치 분과가 그렇다. 정치는 누가 더 수능에서 고득점을 얻었는지에 따라 잘하고 못하고가 결정되지 않는다. 때로는 경험과 입담이 필요한 외교가 있고, 학자들의 고언이 절실한 경제가 있기 마련이다.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의 총합인 이 사회에서 권력의 분배를 위해 존재하는 정치 영역이란 서너 가지도 아닌, 수십만 가지의 문제들이 얽히고설켜있다. 대학 출신이란 정보도 넘을 수 없는 현실의 벽 앞에 서면 누구든지 그리 묻는다. 대학 대신 전공을, 전공 대신 가능한 일을. 내뱉은 말이 현실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를 가다듬고 말 그대로 현실의 언어를 구사하는지 확인한다. 많은 정보를 읽어야 하고, 판단해야 하며, 대입해야 한다. 복합적이고 어려운 과정이다. 따라서 경험은 시간이란 물리 법칙이 작동하는 게 아닐까. 많은 사람들을 경험하여 실패라는 데이터를 축적해 미리 대비하는 것. 물론 경험만이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경험칙을 무시할 수는 없다. 경험이 무조건 옳은 게 아니라 경험에서 얻어지는 물리 법칙을 거스르기 어렵다는 현실 앞에 검증의 도구는 단단해진다. 공정한 룰은 이처럼 현실의 벽이라는 허상 앞에 한낱 무너질 모래성에 불과하다. 공정한 룰 자체가 공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매번 시험을 치를 수 없다. 인기 투표와 능력주의는 하등 관계가 없다. 정치인으로 적격인지 무엇으로 판단하는가. 시험 출제자는 신이라는 말인가. 애초에 인간이기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걸, 수치화로 평가 가능하다고 여기는 건 근대적 해결책일 뿐이다. 전체주의도 불가능한 인간들의 욕망에서 싹 텄다. 사랑도 매번 시험할 수 없다. 상대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테스트하는 줄 안다면 얼마나 불쾌해 할까. 그래서 신도 인간을 시험하지 않는다(야고 1,13). 인간을

[지애문학] 배제

2021년 05월 25일
아침부터 차장한테 깨져야 했다. 일러스트 그따구로 그릴 거면 때려치우라고. 언제부터 신문이 개인 연애편지 쪼가리였느냐고. 그딴 종이 쪼가리 윤전기에서 태어나자마자 외국에 버려지잖느냐 내뱉을 뻔 했다.

[지애문학] 위로

2021년 05월 24일
남의 집 냄새는 언제나 맡아도 낯설다. 남자친구 작은 원룸 나서던 순간까지도 홀아비 냄새가 익지를 못했다. 낯설다는 풍경이 내게 가져다준 불편함은 너에게 내 사람이 될 수 있을지를 직감으로 깨닫게 만드는 감정이다. 어머니가 출근하고 빈 현호의 집에도 낯선 냄새가 가득했다. 순전히 현호의 냄새뿐이었다. 아기자기 알록달록 쿠션 위 가족사진과 식탁처럼 보이는 공간에 누가 봐도 현호가 만든 걸로 보이는 나무 모형이 옹기종기 항해할 요량을 갖추었다. 늦점심이 되어서야 베란다 앞으로 져가는 햇빛이 외로운 저녁으로 들어가는 현호의 마음을 그리는 것 같았다. 가방을 내려놓고 소파에 앉아서 생각했다. 무어라 말해주어야 할지, 어떤 말로 놀라지 않게 다가갈지, 혹시나 싫어하지는 않을지. 무릎에 팔꿈치를 올려두고 손가락을 펴 마주친 상태로 고개 숙인지 5분이 채 되지 않은 찰나에 해는 완전히 지고 말았다. 인기척에도 나오질 않는 걸 보면 자고 있는 것 같았다. 문 앞에 노크하고 조심히 들어가도 등진 채로 꿈쩍 않는 모습이 뒷방 늙은이 같았다. 바보. “…….” 겨우 들릴 만하게 한숨을 쉬는 걸 들었다. 안 자고 있었어. 라고 말한다.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말 안할 줄 알고 물었다. 그냥 해본 말이다. 맛있는 거 먹어도, 게임을 해도, 샤워하고 뽀송해져도, 친구를 만나고, 키스를 해도, 나아지지 않는 무언의 벽이 섰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말을 해줘도 달라질 게 없으니 나에게조차 말없이 등진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대로 방 안이 컴컴해질 때까지 침대 발치에 조용히 앉아 기다렸다. 삐걱 소리도 안 나게 앉았고 침 넘기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교회학교 선생님은 현호가 입시에서 찾아오는 설움이 컸다고 언질을 주었다. 요새 오르락 내리는 기분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을까.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는데서 찾아오는 안도감, 이내 찾아오는 할 수 없을 거라는 불확실감, 그래도 열심히 살아가면 뭐라도 되지 않을까하는 실낱의 희망, 그렇지만 언제까지 얼만큼 노력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지 예측도 예상도 하지 못하는 무능력함. 무기력의 근원은 항상 할 수 있는 희망에서 시작한다. “좀 잘래? 이따가 깨워줄게.” “갈래요.” “저번에 거기?” 크게 숨을 들이키자 베개에 품었던 얼굴을 빼내어 일어나려는 모습을 힐긋 안 보는 척했다. 자리에 일어나 기지개를 폈다. 딱 키스하기 적당한 정도의 밝기. 오히려 주말 새벽에 일어난 설렘이 밀려왔다. “불 켜지 마요. 안 씻었으니까.” 귀여워서 엉덩이를 토닥여주고 싶었다. 적당한 정도의 키, 적당히 불쾌한 남자애 냄새, 적당히 헝클어져서 대놓고 보게 만드는 걸 참느라 힘들었다. 소파에 앉아서 도도한 척했다. 그새 익숙해진 이 집 냄새가 나쁘지 않았다. 그래, 적당함.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는 않겠지만. 적당한 너라서 좋다고. 적당하게 못 살도록 내버려 두는 이 세계가 나도 싫다고. 이렇게라도 말해주면 웃어줄까. 싸늘해질 때로 싸늘해진 전임자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바빠 두 글자만 보내고

[에셀라 시론] 두 번의 실패와 좌절 앞에서

2021년 05월 15일
두 차례 실패를 경험하고 두 번의 좌절을 맞이해서야 방도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변화라는 건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했다. 그 엄청난 용기는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았다. 누군가로부터 얻는 선물도, 마음만 먹는다고 주어질 일시적 단호함도 아니다. 그저 순간의 선택으로 보이지만 인생 항로의 몇 도를 틀만한 강력하고 영향력을 가지는 엄청난 용기를 두 번의 좌절을 맞아서도 발휘하지 못했다. 바로 ‘나는 낡았구나’라고 생각한 끝에 스스로가 부끄러워진 이유다. 전통적이고 당연했던 공간에서 벗어나는 순간 경험한 감정인 해방감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현실이란 공간에 이르러서야, 해방 너머 풍경을 직시했다. ‘나는 낡았구나’ 좌절 앞에 변화의 필요를 깨달았지만, 무엇을 어떻게 바꾸어야 할지를 알지 못했다. 코로나를 겪으며 사람들이 디지털 담론장에 몰려든다. 왼편에서는 철학자가 눈앞에 서 있는 존재를 가리켰고 오른편엔 세상 돌아가는 작동 방식을 기술자가 묘사한다. 재미있고 흥미로운 강연이 연잇자 댓글에는 저마다 살아가는 방식을 간증하듯 써 내려간다. 마이크를 들고서 발언권을 얻은 사람처럼 당당하게 인생철학을 설파하는 이를 관찰했다. 헬조선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나만의 지식을 습득하셔야 한다고 가르쳤고, 댓글에는 동감하는 목소리로 가득했다. 그런 자신만의 인생철학을 획득하고 하나 둘 실천해가며,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하나 둘 지나쳤다. 철학자가 아니어도 살면서 경험한 진리 조각을 덧대어 자신만의 담론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가르치던 핵심은 주체적 삶이었다. 생각보다 힘겨워하는 사람들의 댓글이 많았다. 밤잠을 설치고서 입력한 ‘자는 방법’. 연애하고 싶어서 ‘남자가 여자한테 관심 있을 때’ 우울하고 불안해서 ‘우울할 때 듣는 노래’ 혹시나 경력이 없어도 괜찮을지 싶어서 ‘서른 취업’ 10년 전 ‘베토벤 바이러스’와 10년 후 ‘로스쿨’ 속 김명민. 가슴이 먹먹했다. 전례 없는 상황과 뜻밖의 여정에 헤매는 사람들이 일을 하지 않는다. 게으른 탓이 아니다. 그저 기회를 준비할 뿐이다. 희망을 얻었다는 고백과 위안을 받았다는 꾸며내려야 꾸며낼 수 없는 담담한 문체 속에 오늘도 비경제활동인구 1,686만 명(2020.11.04)이 이곳저곳 떠돌아다닌다. 꼰대와 불편한 감정의 사건 사고 댓글창을 보지 않은지 오래다. 그러나 교훈과 감동을 주는 동영상 하단에는 즐거운 댓글이 연이었다. 정확히 무엇을, 어떻게 바꾸어야 할지를 모르는 상황임은 여전했다. 즐거운 댓글들 사이에서 즐거운 한 가지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코로나 블루는 변화를 두려워하고 변화하는 세계 속의 이들을 가로 막았다. 보수화가 대표적이다. 보수주의가 나쁜 게 아니다. 마땅히 바뀌어야 함에도 바꾸지 않으려는 반동과 다를 바 없는 보수화가 문제다. 청년 세대에까지 바꾸지 않으려는, 기어이 관성 속에 살려는 분위기가 흩날린다. 따라서 청년의 시간에 소확행 속에서 소소한 즐거움과 오늘의 행복을 찾는 광경이 서글프다. 즐거운 게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교훈과 감동은 때로 살아갈 원동력이 될지언정 해결할 방도 그 자체가 되지는 못한다. ‘나는 낡았구나’ 스스로가 부끄러워진 그 밤저녁을 두 번이나 경험해서야, 두 번째로 찾아온 좌절 앞에 비로소 그 엄청난 용기의 실마리를 찾아내었다. 좌절 속에서 침대에 누워 울기만 하는 아이 앞에 무어라 말해 줄지를 먼저 생각했다. 당연히 “알아. 괜찮아. 나라도 그랬을 거야.” 말했을 것이다. “좀 잘래? 이따가 깨워줄게”라고. 당연하다. 지금은 슬퍼해야 할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 아이의 시간표엔 오늘의 좌절이 당연하다기보다, 차근히 진행해야 할 과목들을 미루고, 지우고, 다시 써서 붙인 ‘우는 시간’, ‘좌절 앞에 서는 시간’이기에 ‘울지 마라, 원래 인생은 고단한 거란다’ 따위의 하등 쓸모없는 말 대신 잠시간 잠들고 깨기까지 기다려줄 수 있지 않을까. 그 누워 있는 사람이 나였다면 내가 무어라 말했을까. 당연히 “알아. 괜찮아.”로 시작하는 앞서 나열한 말들 그대로 말해주지 않았을까. 내가 나를 위로하는 광경을 상상만 했을 뿐인데, 나와 내 관계가 돈독해졌음을 느꼈다. 뜻밖에도 나와의 동침(同寢)은 쾌락 너머 자존감을 형성했다. 나를 사랑할 줄 알아야, 타인을 사랑할 줄 안다는 말이 이런 의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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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day소랑 2026년 6월 22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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