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눈금] 18세 국민연금

10대 국민연금 임의가입자 순 출처: 국가데이터처 청년의 기피 대상인 국민연금을 자진해서 가입한다는 통계가 눈에 띄었다. 국민연금 10대 임의가입자가 2023년 4814명에서 올해 1월 1만2245명으로 2년 새 두 세 배 늘었다는 기사였다. 18~ 19세 인구 대비 10대 임의가입률이 높은 지역은 경기도 과천시(3.63%), 서울 강남구(2.88%), 종로구(2.45%), 동작·송파구(2.41%) 순이다. 전국 평균 1.28%의 2~3배다.

[사설] ‘김용철 새능력’이 체제경쟁 대상이라 생각하는 정신머리

예수의 부활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새능력의 김용철은 유독 ‘믿음’에 방점을 두었다. 그의 스크립트를 분석해 보면 ▲믿음=74회 ▲부활=54회 ▲사망·죽음=54회 ▲하나님=26회 ▲죄=22회를 언급했다. 특히 그가 “~줄로 믿습니다”를 말한 맥락을 살펴보면 종결의 강박을 확인할 수 있다. 이 표현이 수십 번 나오는데 LLM 인공지능 클로드는 “기능이 독특하다”고 평했다. 주장을 사실처럼 만들지 않고 ‘믿음의 영역’에 가둬버린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회복시키십니다”가 아니라 “회복시키실 줄로 믿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반증 불가능해지는 구조다. 안 되면 ‘믿음이 부족한 것’이 되고 되면 ‘믿음의 결과’인 것이다. 이 종결 어미 하나가 설교 전체를 검증 불가한 구조로 만들었다. 김용철의 스크립트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몇 가지 특징이 선명하게 보인다. ①설교 전체에서 대여섯 번 반복되는 ‘위기-해결’ 구조: 단일한 구조가 청중이 어디에 있든 ‘내 문제도 해당되겠다’는 느낌을 받도록 설계돼 있다. 문제는 이게 설득이 아닌 패턴 주입이라는 것이다. 부활이 왜 그 위기의 해답인지를 한 번도 연결하지 않는다. 그저 위기 다음에 부활이 나오니까 청중이 연결되는 것처럼 느끼게 할 뿐이다. ②예수가 부활했다(전제)-믿으면 너도 산다(결론)-아버지가 나았고, 쌀통에 쌀이 나왔고, 바울이 순교했다(근거): 이건 신학적 논증이라 할 수 없다. 귀납도 연역도 아니다. A가 B와 비슷하니까 A에서 일어난 일이 B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주장을 하려면 A와 B가 왜 비슷한지 먼저 보여야 한다. 그러나 김용철의 스크립트에서는 그 과정이 없다. 성경은 전부 결론을 지지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될 뿐이다. 로마서 6장, 고린도전서 15장, 요한복음 11장을 인용하지만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지, 그 문맥이 무엇인지, 원어가 무엇인지 단 하나의 설명도 없다. 성경은 감정 고조의 타이밍에 삽입되는 장치로 기능하는 것이다. 김용철의 스크립트는 오직 청중을 위기 속의 존재로 몰아넣는다. “삶이 무너졌나요” “건강에 어려움이 찾아왔나요” “절망 가운데 계십니까” 청중의 현재 상태를 결핍으로 규정하고 그 결핍의 해답을 설교자가 독점하는 구조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해답은 언제나 교회 안에 있다고 주장한다.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려면 예배당에 와야 하고, 믿음을 고백해야 하고, 설교자의 언어를 따라 해야 한다. 청중이 스스로 접근할 수 있는 경로가 없다. 설교자를 경유해야만 한다. 교인의 실명과 자산 규모를 비유하는 것도 이 맥락에서 봐야 한다. 단순한 농담이 아니라 설교자가 교인의 삶을 알고 있다는 과시를 의미한다. 알고 있는 사람이 권력을 가지는 이 섬뜩한 맥락을 어떻게 무시할 수 있는가. 새능력은 10년이 넘는 기간,

[에셀라 시론] 슬픔을 거슬러 네 얼굴 쓰다듬고서

2021년 05월 05일
이제 곧 청력을 잃는다던 상황에서 신발을 벗고 맨발로 나무 바닥에 엎드린다. 열 두 살에 청력을 잃은 에버린 글레니(Evelyn Glennie)처럼 듣겠노라 다시금 들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자 루미는 건우의 솔직한 말을 듣지 못했다. 그래도 상관없던 루미의 미소에는 슬픔도 있었고 희미한 즐거움과 애틋한 감정이 있었다. 진짜 얘기 좀 해보라는 말에 그 때 미워서 내친 게 아닌 것을 알지 않느냐던 건우의 음성 언어를 듣지 못해도 그 마음을 알고 있었다. 사랑은 음성 언어라는 한계를 뚫고 상대의 마음에 가닿는다. 늦가을임에도 냉기를 만져가며 오감을 느끼려던 루미의 슬픔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도처에 기온이 싸늘한 시대에 아무 것도 듣지 못하고 느끼지도 못하는 이들이 넘쳐난다. 모든 것이 상품으로 전시되고 소비된다. 계량할 수 없고 측정하기 불가능한 것들조차 숫자로 세어진다. 사랑하면 끝까지 갈 수 있다던 말조차 눈으로 보이는 것으로 환원된다. 그러나 알다시피 사랑을 어떻게 숫자로 셀 수 있고 아끼는 마음을 글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알면서도 넘어가는 무책임에 어쩔 수 없다고들 말한다. 어쩔 수 없어서 해고하는 것이고 어쩔 수 없어서 버리는 거고, 어쩔 수 없으니 잊는 거라고. 이별은 다음의 만남을 위한 어쩔 수 없는 방어막이라고. 사회 갈등을 전면으로 내세우고 돈 벌면서도 책임은 개인에게로 돌리는 기막힌 상황을 누가 버텨 낼 수 있을까. 숫자로 셀 수 있으면서도 현실의 벽 앞에서 와르르 무너지는. 숫자로 세고만 정의와 사랑, 미래라는 가치가 공중분해 된다. 한 순간에 벼락거지가 되고도 또 하나 둘 숫자를 세어가며 쌓아 올린다. 일찍이 신 죽음의 시대를 경험한 본 회퍼를 소환하여 저 놈의 독재 정권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지껄인다. 신의 죽음에조차 다가가본 일 없는 인간들이 기독교가 죽으면 어떻게 될지를 걱정한다. 행동으로 드러난 본심은 교회가 없어지면 무엇으로 벌어먹고 살지를 궁리하는 것들뿐이다. 예수를 시체팔이하여 돈 버는 인간들일수록 코로나에 강한 척한다. 한낱 죽으면 흙으로 돌아갈 인간들이면서……. 이런 사람들은 외로움의 감정을 느껴본 일이 없는 자다. 외로우면 저렇게 살 수 없다. 정말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죽은 이를 이용해 먹지를 않는다. 누군가를 적으로 세워두고 허수아비 논법으로 광기에 젖지를 않는다. 어떻게 부모의 상을 치루면서 지 할 일을 다 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상주가 죽은 부모 앞에서 주먹을 휘두르며 술주정한단 말인가. 사랑하면 그 사람이 한 말의 의미를 곱씹고, 되새김질한다. 죽은 이의 기억과 말을 되풀이하며 슬픔을 곱씹는다. 너와 지내던 날들, 네가 했던 말들, 행동, 웃음, 냄새. 이걸 어떻게 언어로 말로써 표현할 수 있을까. 제자들은 하느님 아들을 사랑하지 않았다. 뒤늦게 예수의 흔적을 느끼며 사랑을 깨달아간 제자의 공동체가 문자언어로 그 사랑을 고스란히 담아낼 수 있겠는가. 건우의 생각과 마음에는 루미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청력이 살아있을 때조차 그 말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 사랑하는 마음을 알았던 루미는 건우의 싫다고 거부한 말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맨발로 시린 바닥에 엎드리지 않아도 이미 알았다. 문자언어와 음성언어로도 서술하기 어려운 언어를 알고 있었다. 오늘도 죽은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도 생각난다. 뒤이은 수많은 박탈자들이 있다는 사실도 기억난다. 생각보다 세상은 밝지 않다. 얼굴도 모르는 구조자 생각하며 죽음을 대비하는 시대다. 친구와 이웃의 죽음에도 책임지지 못하는 시대라서 슬프다. 모든 것이 개인의 책임이고 짐으로 떠넘겨진다. 시린 바닥은 루미뿐만이 아니다. 메시아를 기다리는 시린 바닥 민도의 온도는 당연하다. 민도를 비난할 수 없다. 그래서 약한 메시아를 기다린다. 혼자서 질 수 없는 십자가를 나누어진다면 가벼워질 수 있는 것처럼. 슬픔은 나누어 절감하기 힘들 테지만 짐이라도 나누어 질 수는 있지 않겠냐고. 그래서 사랑의 가치를 말한다. 돈으로, 상품으로, 비교로 살 수 없는 네 얼굴 네 입술. 희생하지 않아도 괜찮고 실패해서 넘어져도 괜찮다, 울지 말고 먹으면서 기운차리라고, 대신 그 짐 가벼우니까 건네 달라고. 슬퍼하지 말라고. 사랑해라는 말을 믿을 수 없다는 거 잘 아니까, 그 말 대신 들어주겠다던 말 한 마디면 되겠냐고. 웃는 얼굴조차 믿을 수 없는 오늘의 슬픔에 사람들은 훗날 루미와 건우가 만날 거라고 믿는다. 분명히 청력을 상실해 듣지 못함에도 사람들은 루미의 청력보다 보이지 않는 사랑에 집중한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간 건우가 루미를 만났을까. 루미라면 청력을 잃어도 웃으며 꿋꿋하게 살아가지는 않았을까. 폭풍을 견뎌내고 살아줘서 고맙다며 루미의 그 얼굴 쓰다듬고서 좋아한다고 말해주지 않을까. 신의 죽음과 함께 상실한 사랑의 가치를 보이지 않는 곳에다가 남겨놓는다. 신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실의 슬픔을 경험해야 사랑의 가치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웃는 얼굴을 볼 수 없어서 슬프다. 신의 죽음보다 더.

[지애문학] 하고 싶다고 진짜

2021년 04월 27일
아이고, 우리 진유! 하고서 반겨주실 줄 알았다. 같은 교회 다니는 집사님을 엄마 앞에서 만나게 될 줄은 상상정돈 해봤지만 이렇게 급작스레 마주할 줄은 몰랐다. 교복 입은 시절 성실하게 교회 오가다가 대학 진학과 함께 쓸려나간 이후 한 번도 뵙지를 못했다. 그렇게 10년, 나보다 작은 키에 여전히 적당하게 자글자글한 주름살 건조한 눈매 푸석한 입술. 한복 곱게 차려입고서 생기롭게 주보 건네던 분위기만 달랐을 뿐 분명히 정겨운 얼굴을 뵈니 마음은 즐거웠다. 예뻐졌다는 말에서부터 어른다워졌다, 결혼할 나이잖느냐는 말까지 기어이 무슨 일하고 있다며 말하기 전까진 식은땀조차 생각할 겨를 없이 정수기 물 한잔 겨우 마실 수 있었다. “저어기 자유의새노래 편집국에서 일하고 있어요…….”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니라서 주워 담을 수 없었다. “와따매, 집사님은 자랑도 않으셨다만 좋은 데라서 입 꾹 닫고 있었고만.” “허허 망해가는 신문인데요.” 엄마의 팔을 때리는 바람에 성적도 잘 안 나와서 백수 생활 몇 년 하던 내용은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1등 신문사에 사원으로 일하는 것. 거기엔 기자들이 유출되어 부수(部數) 조작까지 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닥 쓸모없었다. “네, 새로 디지털 업무 시스템을 도입해서요, 저 같은 디자이너들도 뽑아주고 있대요. 가며는 프로그램으로 지면신문을 편집하는데요. 사설도 여러 번 바뀌거든요. 그거 갈아주고 들어온 일러스트도 배치하고….” “햐, 뭐 지금 시대에 취업이라도 하면 어디겠니?” 마스크를 잠시 벗어다가 방울토마토 집어넣는 모습에서 생각에 잠기고 말았다. 이제 내가 할 말은 다 끝났으므로. 익숙한 이야기들이 흘러나오는 동안, 엄마 옆에 앉아서 조용히 바깥을 내다봤다. 아…. 다함께교회. 나의 비극적인 시대가 담긴 동네. 건물 하나 믿고 많은 것들이 오가던 공간. 거기에 묶여버린 나의 사랑도 지금까지 찾아가질 못했다. 낳아주셔서 감사하다는 생각만으로도 즐거웠던 시절이 있었다. 귀엽고 착하게 생겨서 자빠트리고 싶은 그 남자를 만나던 날들. 학생들이 주도해서 만든 24클럽에도 자발적으로 들어간 이유도 사실은 오빠랑 오래도록 같이 있고 싶어서였다.

[지애문학] 내 이름

2021년 04월 07일
어디에도 집단 감염을 보도하는 데가 없었다. 다양한 사건들이 사람들 기억에서 코로나 세 글자를 밀어냈고, 발병하고 정확히 2년하고도 반년이 지나서야 다른 뉴스들로 뒤덮였다. 뉴스로 뉴스를 덮는다, 이거 현실 정치에서도 유용하겠지만 여자와 남자 사이 관계에서도 무척이나 유효하다. 오늘처럼 적당히 쓴 알콜로도 애매한 기운을 덮기가 어렵다면 말이다. 한 달이 지나도 응답 없음 유지하던 우리 관계도 잠시 주춤하는 건지 영원히 멀어지는 건지. 발걸음도 주춤했다. 지하철 환승 통로 한 편에 마련한 전시회에 다다른 직후였다. 익숙한 전신의 찰리 채플린이란 점 때문만이 아니었다. 머리에서 분리된 얼굴, 부르튼 발에서 벗겨진 신발, 천사의 날개를 겨드랑이에 끼운, 누구라도 느낄 수 있는 마르크 샤갈 냄새. 웃고는 있지만 그림에서 느껴지는 채플린의 표정은 밝지 않다. 광대도 외로움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 채플린의 영화 <키드>(The Kid)를 보면 샤갈의 의도를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결코 사람의 얼굴은 한 가지 표정으로 구성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화사한 그림도 낯익다. 붉은 배경의 꽃다발. 1970. 피카소에 대한 일화를 접하고 그날부터 피카소를 시기한 샤갈이 와 닿았기 시작했다. 상처받기 쉬운 그의 작품 앞에 서면 고스란히 마음이 보이는 투명한 유리가 느껴진다. 붉은 배경이라 파랗고 보랏빛 하얀 얼룩한 꽃들이 돋보이는 작품에서 피카소에게 열등감을 느꼈을 샤갈을 상상했다. 구석에서 유령처럼 서 있는 정장과 웨딩드레스는 누가 봐도 사랑을 의미한다. 풋풋했던 사랑이 떠올랐다. 다시 시를 써볼까 싶었다. 그림 그릴 줄 모르니 노래 가사처럼 한 구절 끼적이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뉴스로 뉴스를 덮듯, 하고 싶은 일로 슬픈 마음을 덮어 버리기. 일에 치여 전시회도 가지 못하는 날이면 우리는 놀러가듯 서점으로 향했다. 배워본 일 하나 없는 미학 용어 늘여놓기 일쑤지만 책 하나 들고 버티다 보면 뒤에서 안아주던 향기에 서점 냄새가 덮이고 말았다. 잔잔한 음악도 귓가에 속삭이는 끈끈한 말들로 덮이는 것처럼, 끝끝내 흐트러진 생각에 못 이기고 돌아가곤 했었는데.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에서 떠나가자 그토록 어려웠던 글줄이 풀리면서 샤갈의 생애를 읽어 내려갔다. 첫 사랑이 아니어도 온종일 생각나는 너의 얼굴. 주말 드라마보다 익숙하고 뻔한데도 알고 싶고 두드리고 싶고 열고 싶은 네 마음. 가녀린 영혼도 상처 받기 쉽고 상처 받을 존재라고 지긋이 웃으며 말해줄 샤갈의 색채에서 사랑을 느낀다. 액자 가까이 얼굴을 들이댈 때마다 다소곳이 서 있는 내 얼굴이 비친다. 다시 연애하면 쓰고 싶다. 시. 잠시 샤갈의 화사한 빛깔에서

[지애문학] 기억을 기억하는 이유

2021년 04월 07일
각이진 턱에서 돋아나는 입가의 주름 그 입에서 쏟아지는 무책임한 단어들. 몇 년이 지나도 여전했다. “얼마만이죠?” “그러게요. 마주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요. 호호.” 새신자환영회실 지나쳐 곧바로 12교구 담당 전도사와 바쁘게 걷는 걸 특권처럼 생각하던 이 분위기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했다. 도착한 상담실에선 그 여러 해 동안의 회포가 이어졌다. “이 교회 저 교회 전전하고 교구장까지 해봐도, 우리 교회 만하지는 않더만. 시설 좋지, 목사님 좋지, 성도들 좋지, 분위기 어때, 신앙심도 이만한 데가 없다고.” “네.” 어처구니없고 기가 막힐 때마다 나오는 특유의 표정을 잘 안다. 살짝 고개를 기울어 다문 윗입술로 아랫입술 닫아줄 때 발생하는 무표정. 마구 휘갈겨 적는 종이 위엔 정자로 인쇄된 교적 전입처리가 바싹 말라 있었다. “그 때 일 유감스레 생각해. 내가 오죽 입방정이겠어? 세상 살다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거지. 깔깔깔.” “네.” 순간 아랫입술 깨무는 게 보일까 싶어 고개를 숙이고 끼적여 놓은 글들을 일부 수정했다. 인터넷 칼럼에서 읽은 글이 떠올랐다. 난파선을 벗어날 때 스쳤던 파수꾼 앞에서 무슨 말을 더 하느냐던 물음. 물어도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꺼내길 좋아하던 당신의 글에서 가슴을 못 박은 구절을 발견했다.

보고 싶은 얼굴, 채현국

2021년 04월 03일
가끔 엄마가 보는 드라마 내용이 궁금해 물어볼 때가 있다. 내용 이해가 될 만큼의 전달력 가진 드라마일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다. 근데 저 드라마는 다르다고 말했다. 감동을

벚꽃

2021년 03월 31일
길가에 버려져 주워서 당신에게 드렸을 뿐인데 교무실 한 자리, 물 담은 종이컵에 고이 둔 광경을 벚나무 꺾여서 이탈한 나뭇가지 바라볼 때마다 생각한다. 곧 시들어

[현실논단] 당신의 설교를 듣지 않는 이유

2021년 03월 31일
세계로교회 손현보 목사가 자청한 기자회견에서 황당한 통계인용을 보았다(2021.02.18). 중앙방역대책본부(중대본)가 발표한 자료를 반박하며 균형 잡힌 보도를 요구한 것이다. 크리스천투데이는 손 씨의 행동을 “객관적인 데이터를 제시하며”라고 보도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중대본이 발표한 종교시설 감염자 비율 17%는 국내 코로나 전체 확진자 중 집단감염 45.5% 안에서 꼽은 데이터를 의미했다. 따라서 전체 확진자 중 종교시설 감염자는 8%에 불과하니 교회는 코로나 최대 감염 경로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코로나는 사람을 통해서 사람으로 감염된다. 세 차례 코로나 파동(wave)을 겪으며 우리는 두 차례 집단감염을 목격했다. 두 차례나 종교집단 통해서 감염되었고, 그 종교집단은 개신교

[시대성의 창] 교회 바깥 나서면서 시작되는 것

2021년 03월 31일
채플하기 싫어서 대강당을 나가려던 차에 동급생과 눈이 맞았다. 점심을 먹자기에 식사했고 이대로 헤어지기 아쉬워 대학원 카페에서 2차를 보냈다. 세 시간 이어진 대화는 지난 번 이야기의 연장선이었다. 신학교에 입학해도 무얼 해야 할지 모른다며 한 숨 지었다. 기나긴 대화는 하나님이 어떻게 당신을 이끌어 가셨는지 재차 확인하던 자리였다. 그러나 그 뒤에 찾아오는 빈 공간, 다음 인생사 이야기를 어떻게 써내려가야 할지를 모르는 막막함이 느껴졌다. 촉. 그 때의 촉은 빗나가질 않았다. 미소는 밝지 않았다. 일찍이 자퇴한 친구가 있다고 말했다. 사진까지 보여주며 소개시켜 주겠다고 말했지만 한사코 거절했다. 영적인 세계에 몰두한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은 내 앞에 앉아서 곱상하게 웃기만 하던 이 자매는 인터콥 회원이다. 7년 전에도 인터콥이 어떤 단체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이들 회원을 강하게 붙잡던 거대한 이야기 하나. 복음의 서진(西進)이 이스라엘에 이르면 예수가 다시금 재림할 거라는 강한 믿음체계 신봉하던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이 단체 인터콥 창시자 최바울은 5년 전 목회자 국제선교 컨퍼런스에서 구속사적 신학으로 알려진 신약학자 헤르만 리델보스를 인용했다. “사도바울 관점은 구속 역사 그 자체의 사실이 중심이다. 그것은 ‘구원의 서정’이 아니라 ‘구속의 역사’다.” 구원에는 순서가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이끌어갈 보이지 않는 손에 주목한다. 백 투 예루살렘(back to jerusalem) 운동도 하나님이 만들어가는 마지막 시대, 종말의 때에 인터콥과 대한민국을 사용해 하나님 나라를 완성한다는 믿음체계다. 따라서 통치자가 나타나 세계를 통합해 사람들을 노예로 만든다던 80년대 세대주의 종말론을 재인용한다. 우리 손으로 마지막 시대를 만들어가자는 거창한 구호쯤으로 보일 테지만. 거대한 하나님 나라 비전에 이끌려 기꺼이 헌신하는 착취 구조를 들여다보거든 눈에 띄는 ‘빈 공간’이 거대 담론으로 가득 차 있는 모순이 보인다. 인터콥서 벗어난 심정 누구보다 이해하니까 신앙에서 벗어나 함께 모름의 바다 유랑하자 따라서 하나님 나라 운동에 이끌림을 받았다는 선민사상과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다르다던 우월감은 현상에 불과하다. 너는 꿈이 있니? 그런 시시한 세상의 꿈? 열강으로 가로 막힌 가련한 이 나라 대한민국 통하여 마지막 때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헌신이 필요해 같은 꿈꾸는 자의 담대한 포부는 성경의 특정한 구절을 견지망월(見指忘月)하게 만든다. 압도하는 성령의 역사에 동참하면 지식쯤은 중요하지 않다. 오직 기도와 복음 전파에 힘쓰자는 구호로 한 사람 한 사람 인터콥을 움직이는 부품으로 전락한다. 지금도 바벨탑 세우려던 ‘벽돌’에서 세상지식을 초등학문으로 비유해 하나님을 대적하는 기술쯤으로 묘사한 최바울의 설교가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인터콥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낯설지 않다. 40년 전 오정현이 상품으로 내다팔던 무브먼트였다. 프랑스 철학자 프랑수아 줄리앙은 탈합치(De-coincidence) 개념을 꺼내들었다. 미완성 같은 피카소 작품에서 가장자리를 주목했다. 칠하지 않은 그림과 캔버스가 합치(coincidence)하지 않고 이탈한(de) 어긋남을 발견했다. 사람들은 학교에서 교회에서 무리에서 집단에서 제도권에서 이탈하면 지옥 간다고 겁박한다. 네 마음의 빈 공간을 내가 우리가 만든 별이 끌어당겨야 한다고 말한다. 선한 의도 안에 숨겨둔 악마의 미소로. 내 앞 자매의 미소를 관찰하자 곧바로 감성주의(感性主義)와 척을 두었다. 기독교 신앙을 벗어나기까지 꽤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지옥에도 갈 수 있다는 불안감 말이다. 사람을 물건처럼 부려먹는 허황된 별. 그 별 좇아 자신의 인생을 갈아 넣는 비정상 구조. 그 때의 촉은 지금도 발동한다. 누군가 신념에 차 별을 말하면 믿지를 않는다. 그 별은 머지않아 신념과 함께 빛바랜 청사진처럼 타버리기 때문이다. 모름의 바다로 이탈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변해가고 모든 전통이 무너지는 시대라서 이해한다. 사람이기 때문에 두려워할 수 있고, 불안할 수

[사설] 누구에게나 그리워했을 어린 봄에 주목한 신애의 유려한 글줄을 보며

2021년 03월 27일
떳떳이 과거 기억을 소환해 해명을 요구한 여자 아이돌 (여자)아이들 멤버 서수진의 질문에 배우 서신애가 입을 열었다.(2021.03.26) 서신애는 분명한 글줄로 “무리와 함께 불쾌한 욕설과 낄낄거리는 웃음”으로 ‘별로 예쁘지도 않은데 어떻게 연예인을 할까’ ‘어차피 쟤는 한물간 연예인’ ‘저러니 왕따 당하지’ ‘선생들은 대체 뭐가 좋다고 왜 특별 대우하는지 모르겠어’라고 말했다며 공개적으로 서수진을 지목했다. 일반인 위치에서 서수진 행적(行跡)을 공개한 여덟 차례 증언과 다르지 않게 분명한 글줄로 피해 사실을 주장한 것이다. 학교폭력은 오래 전에 발생했다는 점에서 진실을 규명하기 어렵고, 규명하는 과정에서 사실로써 증명할 만한 증거 확보가 쉽지 않다. 그러나 여덟 차례 게시물은 서수진이 살아온 다층적·복합적 환경을 조명했고 해명을 요구했다. 앞으로 법의 판단으로 시시비비 가려낼 상황에서 우리는 몇 가지에 주목해야 한다. 서수진의 잘못은 자기 잘못이 “있다면”을 전제로 자신의 행적을 직면하지 않은 채 사과와 해명을 소속사에 일임한 점이다. 첫 입장을 발표한 소속사는 통화 사실을 거론하며 학교 폭력 행동은 전혀 아닌 사실로 확인했다고 밝혔다.(2021.02.21) 법적 판단에 앞서 법률대리인과 조율하는 과정에서 잡음이 이어졌다. 피해자로 나선 이들을 가해자로 지목된 서수진이 직접 나서서 용서를 구하고 해명해야 함에도 대중에게 해명했을 뿐, 피해자를 만나지 않았고 이조차 법률대리인에게 일임했다. 지인에게 발생한 사건이고 서수진의 말마따나 한때 좋은 기억을 공유한 이들과의 문제에도 어떻게 자신이 나서지 않았는지. 정말 잘못하고 사과의 뜻이 있다면 대리인을 거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을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법적인 책임을 뒤로하고서라도 피해자가 자신의 과거를 기억해 대중 앞에 펼쳐낸 이유를 생각해보면 서수진이 직접 피해자와 만나야 했다. 아픈 기억이 아물지 않은 이들에게 어른들을 뒤로하고 자연인 서수진으로 나서서 오해라면 오해를 풀고 잘못한 일은 고개 숙여 사과하여 용서를 구해야 마땅했다. 그러나 서수진은 서신애에 이르러서 관계를 명백하게 부정했다. 그리고 자신을 “떳떳”하다 표현한 서수진이 분명한 언어로 서신애에게 해명을 요구했다.(2021.03.19) 그동안 자신과 피해자들을 시린 겨울의 존재로 비유하며 사과하기를 기다렸던 서신애가 분명한 글줄로 서수진의 행위를 공개했다. 서수진은 저 유려한 글줄을 보면서 느껴지는 게 없는가. 글줄 사이에 아로새긴 서신애의 아픔에 선택적 기억을 나열할 자신이 있는가. 자기를 둘러싼 의혹과 시선에 무얼 말하려는가. 서신애의 수신인을 되짚어보면 서수진이 아니라 대중임을 알 수 있다. 피해 보상을 요구하지 않았다. 피해자들은 굳은 땅에 피어오를 어린 봄의 새싹에 주목했다. 서수진은 이 말의 의미를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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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day소랑 2026년 6월 22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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