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셀라 시론] 소녀의 이름으로

나는 이제껏 김용철의 새능력을 왜 더 빨리 탈퇴하지 못했는가에 대한 괴로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좀 더 빨리 탈교(脫敎) 했다면, 조금 더 빨리 관계를 정리했더라면…. 소년을 구하지 못한 죄책감은 우연히 입수한 18년 전, 한 영상을 보면서 오롯이 해소되었다. 연세중앙교회 YBS 인터뷰에 담긴 소년은 짐짓 말할 수 없는 모든 죄를 짊어진 표정으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알고 지은 죄인데 왜 그걸 지금까지 해결하지 못했는가….” 도대체 중학교 2학년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카메라 앞에 서서 자책하며 스스로를 옥죈단 말인가. 새능력을 탈퇴하고서 나는 단 한 번도 김용철의 설교를 끝까지 들어본 일이 없다. 양심에 찔려서도 아니고 눈물이 감격으로 앞을 가렸기 때문도 아니다. 1시간 설교 모든 문장 옭아맨 감정 동원과 협박 구조, 의미 없는 아멘의 반복, 철학도 신학도 없는 감정만 휘젓는 수준의 처참한 호통은 그의 설교를 들어보면 누구나 깨닫게 된다. 그는 오로지 의식의 흐름에 의지한 채 청중을 감정적으로 끌고 다닐 뿐이다. 각 단락 사이의 논리적 연결은 찾아볼 수 없다. 자기도취에 빠진 간증을 서사로 가져다가 어떻게든 이어 붙이는 게 전부다. 모든 것 공허함의 파도밖에 보이지 않던 시절, 나는 죽을 용기를 가지고 어둠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시절 스물 두 살의 나는 미지(未知)의 두려움을 견뎌야 했다. 이제는 지옥에 가는 건가 싶었다. 가족도, 연고도 없이 새능력에 붙잡혀 노동 착취를 당했어도 불안함은 가시지 않았다. 그로부터 10년이 흘렀다. 그동안 탈출이 재생되었다. 때로는 방송실 귀퉁이에서 일을 하는 장면이 꿈으로 재생되었고, 어쩔 땐 빠져 나오는 꿈을 꾸기도 했다. 많으면 한 달, 뜸하면 서너 달에 한 번 연속된 꿈은 새능력으로부터의 완전한 탈출을 가리키고 있었다. 과거의 나로부터 찾아오는 ‘시간의 죄책감’이 나를 오랜 시간 사로잡은 것이다. 몸은 난파선을 벗어났지만 아직도 나의 혼은 그곳에 갇혀 있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허물어지는 시간. 탈교는 무너진 영혼 속에서 재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저 어른들이 주입한 죄책감은 남은 인생의 각도를 비틀었다. 어그러진 관념과 여성성에 대한 왜곡된 이해는 긴 시간의 교정이 아니었으면 영구히 손상되었을 것이다. 바로 그 소년이 자신의 입으로 토설한 ‘알고 지은 죄’는 이브가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따먹은 상징이다. 왜곡된 여성 이해의 뿌리는 기독 담론 그 자체다. ‘성숙한 소녀’라는 어른들의 거짓말이 빚어 만든 망상이 소녀의 노동을 착취했고, 소년의 미래를 짓밟은 것이다. 탈교 이후 나는 차근차근 기독 담론을 해체하기 시작했고 비로소 소녀를 다시 발견하게 되었다. 그 소녀는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지,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천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악과를 먹은 후 야훼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침잠한 것처럼 나는 소녀 앞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되어가는 과정을 순연(純然)하게 바라보듯 과거의 시간을 다시 배열하고 재건하는 소녀의 손길을 말없이 볼 뿐이었다. 소녀는 잃었던 재주, 놓쳤던 이름, 잊혔던 얼굴을 되찾았다. 에덴의 난민, 아담과 이브는 재건의 기회조차 잃었으나 소녀는 신의 질서를 거스르고 마침내 ‘지금 여기(hic et nunc)’의 자리에 섰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소녀의 일하는 광경 속에서 기록하는 것뿐이었다. ‘기억의 화해’가

[사설] 그저 ‘병사1’로만 생각하는 정신머리 이런 게 해병 없는 ‘해병 정신’

2023년 7월 19일 경상북도 예천군 내성천에서 13명의 해병대원과 폭우 실종자를 수색하는 작전에 투입된 채수근 상병이 급류에 휩쓸려 순직한지 2년 10개월 만에 법원은 1심에서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다.(2026.05.08) 포병 대원이 구명조끼도 없이 허리 깊이까지 물에 들어가는 건 수색 작전이라 할 수 없다. 상급 지휘관의 성과 집착이 대원의 몸으로 지불된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임 전 사단장은 수중 수색 사진을 보고받고도 멈추지 않았다. 재판부는 이를 두고 “구체적 위험을 인지한 상황에서 위험을 가중시키는 지시”라고 밝혔다. 과실이 아니라 선택이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죗값은 징역 3년이었다. 특검은 5년을 구형했음에도 대원의 생명을 담보로 작전 성과로 밀어붙인 지휘관에게 법원이 매긴 값이 고작 그뿐이었다. 채 상병의 어머니는 선고 직후 법정을 떠나지 못했다. 군 복무로 나라를 바친 이들이면 먹먹해질 물음이다. “아들의 희생에 대한 책임이 이렇게 가볍다면 어느 부모가 안심하고 자식을 군에 보내겠느냐.” 임 전 사단장은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 “수중 수색을 지시한 건 내가 아니”라는 장문의 이메일과 문자를 보냈다. 재판부는 “오랜 재판 경력에서 이런 피고인을 본 적이 없다”고 질타했다. 해병 정신을 입에 달고 살던 사람이 해병의 죽음 앞에서 한 행동이 그것이다. 임 전 사단장의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를 적시한 2023년 7월, 해병대수사단이 경찰에 이첩하려 했을 때, 누군가 그것을 가로 막았다. 대통령실 번호로 걸려온 통화 뒤 14초 후 이첩 보류 지시가 내려간 것이다. 수사단장은 ‘집단항명의 수괴’로 입건됐다. 이첩을 막은 혐의로 기소된 윤석열의 재판이 진행 중이다. 1심 법원이 임 전 사단장의 과실치사를 인정했다는 것은 그 이첩을 막을 이유가 없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재판부는 말단 지휘관에게만 책임을 떠넘기는 군의 관행을 지적했다. 그 관행을 깨려 한 건 해병대수사단이었고 그것을 다시 덮으려 한 것이 침묵의 권력이었다. 해병 정신을 가르치던 이들이 누구보다 해병의 죽음을 덮으려 했다.

[지애문학] 배제

2021년 05월 25일
아침부터 차장한테 깨져야 했다. 일러스트 그따구로 그릴 거면 때려치우라고. 언제부터 신문이 개인 연애편지 쪼가리였느냐고. 그딴 종이 쪼가리 윤전기에서 태어나자마자 외국에 버려지잖느냐 내뱉을 뻔 했다.

[지애문학] 위로

2021년 05월 24일
남의 집 냄새는 언제나 맡아도 낯설다. 남자친구 작은 원룸 나서던 순간까지도 홀아비 냄새가 익지를 못했다. 낯설다는 풍경이 내게 가져다준 불편함은 너에게 내 사람이 될 수 있을지를 직감으로 깨닫게 만드는 감정이다. 어머니가 출근하고 빈 현호의 집에도 낯선 냄새가 가득했다. 순전히 현호의 냄새뿐이었다. 아기자기 알록달록 쿠션 위 가족사진과 식탁처럼 보이는 공간에 누가 봐도 현호가 만든 걸로 보이는 나무 모형이 옹기종기 항해할 요량을 갖추었다. 늦점심이 되어서야 베란다 앞으로 져가는 햇빛이 외로운 저녁으로 들어가는 현호의 마음을 그리는 것 같았다. 가방을 내려놓고 소파에 앉아서 생각했다. 무어라 말해주어야 할지, 어떤 말로 놀라지 않게 다가갈지, 혹시나 싫어하지는 않을지. 무릎에 팔꿈치를 올려두고 손가락을 펴 마주친 상태로 고개 숙인지 5분이 채 되지 않은 찰나에 해는 완전히 지고 말았다. 인기척에도 나오질 않는 걸 보면 자고 있는 것 같았다. 문 앞에 노크하고 조심히 들어가도 등진 채로 꿈쩍 않는 모습이 뒷방 늙은이 같았다. 바보. “…….” 겨우 들릴 만하게 한숨을 쉬는 걸 들었다. 안 자고 있었어. 라고 말한다.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말 안할 줄 알고 물었다. 그냥 해본 말이다. 맛있는 거 먹어도, 게임을 해도, 샤워하고 뽀송해져도, 친구를 만나고, 키스를 해도, 나아지지 않는 무언의 벽이 섰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말을 해줘도 달라질 게 없으니 나에게조차 말없이 등진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대로 방 안이 컴컴해질 때까지 침대 발치에 조용히 앉아 기다렸다. 삐걱 소리도 안 나게 앉았고 침 넘기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교회학교 선생님은 현호가 입시에서 찾아오는 설움이 컸다고 언질을 주었다. 요새 오르락 내리는 기분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을까.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는데서 찾아오는 안도감, 이내 찾아오는 할 수 없을 거라는 불확실감, 그래도 열심히 살아가면 뭐라도 되지 않을까하는 실낱의 희망, 그렇지만 언제까지 얼만큼 노력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지 예측도 예상도 하지 못하는 무능력함. 무기력의 근원은 항상 할 수 있는 희망에서 시작한다. “좀 잘래? 이따가 깨워줄게.” “갈래요.” “저번에 거기?” 크게 숨을 들이키자 베개에 품었던 얼굴을 빼내어 일어나려는 모습을 힐긋 안 보는 척했다. 자리에 일어나 기지개를 폈다. 딱 키스하기 적당한 정도의 밝기. 오히려 주말 새벽에 일어난 설렘이 밀려왔다. “불 켜지 마요. 안 씻었으니까.” 귀여워서 엉덩이를 토닥여주고 싶었다. 적당한 정도의 키, 적당히 불쾌한 남자애 냄새, 적당히 헝클어져서 대놓고 보게 만드는 걸 참느라 힘들었다. 소파에 앉아서 도도한 척했다. 그새 익숙해진 이 집 냄새가 나쁘지 않았다. 그래, 적당함.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는 않겠지만. 적당한 너라서 좋다고. 적당하게 못 살도록 내버려 두는 이 세계가 나도 싫다고. 이렇게라도 말해주면 웃어줄까. 싸늘해질 때로 싸늘해진 전임자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바빠 두 글자만 보내고

[에셀라 시론] 두 번의 실패와 좌절 앞에서

2021년 05월 15일
두 차례 실패를 경험하고 두 번의 좌절을 맞이해서야 방도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변화라는 건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했다. 그 엄청난 용기는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았다. 누군가로부터 얻는 선물도, 마음만 먹는다고 주어질 일시적 단호함도 아니다. 그저 순간의 선택으로 보이지만 인생 항로의 몇 도를 틀만한 강력하고 영향력을 가지는 엄청난 용기를 두 번의 좌절을 맞아서도 발휘하지 못했다. 바로 ‘나는 낡았구나’라고 생각한 끝에 스스로가 부끄러워진 이유다. 전통적이고 당연했던 공간에서 벗어나는 순간 경험한 감정인 해방감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현실이란 공간에 이르러서야, 해방 너머 풍경을 직시했다. ‘나는 낡았구나’ 좌절 앞에 변화의 필요를 깨달았지만, 무엇을 어떻게 바꾸어야 할지를 알지 못했다. 코로나를 겪으며 사람들이 디지털 담론장에 몰려든다. 왼편에서는 철학자가 눈앞에 서 있는 존재를 가리켰고 오른편엔 세상 돌아가는 작동 방식을 기술자가 묘사한다. 재미있고 흥미로운 강연이 연잇자 댓글에는 저마다 살아가는 방식을 간증하듯 써 내려간다. 마이크를 들고서 발언권을 얻은 사람처럼 당당하게 인생철학을 설파하는 이를 관찰했다. 헬조선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나만의 지식을 습득하셔야 한다고 가르쳤고, 댓글에는 동감하는 목소리로 가득했다. 그런 자신만의 인생철학을 획득하고 하나 둘 실천해가며,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하나 둘 지나쳤다. 철학자가 아니어도 살면서 경험한 진리 조각을 덧대어 자신만의 담론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가르치던 핵심은 주체적 삶이었다. 생각보다 힘겨워하는 사람들의 댓글이 많았다. 밤잠을 설치고서 입력한 ‘자는 방법’. 연애하고 싶어서 ‘남자가 여자한테 관심 있을 때’ 우울하고 불안해서 ‘우울할 때 듣는 노래’ 혹시나 경력이 없어도 괜찮을지 싶어서 ‘서른 취업’ 10년 전 ‘베토벤 바이러스’와 10년 후 ‘로스쿨’ 속 김명민. 가슴이 먹먹했다. 전례 없는 상황과 뜻밖의 여정에 헤매는 사람들이 일을 하지 않는다. 게으른 탓이 아니다. 그저 기회를 준비할 뿐이다. 희망을 얻었다는 고백과 위안을 받았다는 꾸며내려야 꾸며낼 수 없는 담담한 문체 속에 오늘도 비경제활동인구 1,686만 명(2020.11.04)이 이곳저곳 떠돌아다닌다. 꼰대와 불편한 감정의 사건 사고 댓글창을 보지 않은지 오래다. 그러나 교훈과 감동을 주는 동영상 하단에는 즐거운 댓글이 연이었다. 정확히 무엇을, 어떻게 바꾸어야 할지를 모르는 상황임은 여전했다. 즐거운 댓글들 사이에서 즐거운 한 가지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코로나 블루는 변화를 두려워하고 변화하는 세계 속의 이들을 가로 막았다. 보수화가 대표적이다. 보수주의가 나쁜 게 아니다. 마땅히 바뀌어야 함에도 바꾸지 않으려는 반동과 다를 바 없는 보수화가 문제다. 청년 세대에까지 바꾸지 않으려는, 기어이 관성 속에 살려는 분위기가 흩날린다. 따라서 청년의 시간에 소확행 속에서 소소한 즐거움과 오늘의 행복을 찾는 광경이 서글프다. 즐거운 게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교훈과 감동은 때로 살아갈 원동력이 될지언정 해결할 방도 그 자체가 되지는 못한다. ‘나는 낡았구나’ 스스로가 부끄러워진 그 밤저녁을 두 번이나 경험해서야, 두 번째로 찾아온 좌절 앞에 비로소 그 엄청난 용기의 실마리를 찾아내었다. 좌절 속에서 침대에 누워 울기만 하는 아이 앞에 무어라 말해 줄지를 먼저 생각했다. 당연히 “알아. 괜찮아. 나라도 그랬을 거야.” 말했을 것이다. “좀 잘래? 이따가 깨워줄게”라고. 당연하다. 지금은 슬퍼해야 할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 아이의 시간표엔 오늘의 좌절이 당연하다기보다, 차근히 진행해야 할 과목들을 미루고, 지우고, 다시 써서 붙인 ‘우는 시간’, ‘좌절 앞에 서는 시간’이기에 ‘울지 마라, 원래 인생은 고단한 거란다’ 따위의 하등 쓸모없는 말 대신 잠시간 잠들고 깨기까지 기다려줄 수 있지 않을까. 그 누워 있는 사람이 나였다면 내가 무어라 말했을까. 당연히 “알아. 괜찮아.”로 시작하는 앞서 나열한 말들 그대로 말해주지 않았을까. 내가 나를 위로하는 광경을 상상만 했을 뿐인데, 나와 내 관계가 돈독해졌음을 느꼈다. 뜻밖에도 나와의 동침(同寢)은 쾌락 너머 자존감을 형성했다. 나를 사랑할 줄 알아야, 타인을 사랑할 줄 안다는 말이 이런 의미일까.

[에셀라 시론] 슬픔을 거슬러 네 얼굴 쓰다듬고서

2021년 05월 05일
이제 곧 청력을 잃는다던 상황에서 신발을 벗고 맨발로 나무 바닥에 엎드린다. 열 두 살에 청력을 잃은 에버린 글레니(Evelyn Glennie)처럼 듣겠노라 다시금 들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자 루미는 건우의 솔직한 말을 듣지 못했다. 그래도 상관없던 루미의 미소에는 슬픔도 있었고 희미한 즐거움과 애틋한 감정이 있었다. 진짜 얘기 좀 해보라는 말에 그 때 미워서 내친 게 아닌 것을 알지 않느냐던 건우의 음성 언어를 듣지 못해도 그 마음을 알고 있었다. 사랑은 음성 언어라는 한계를 뚫고 상대의 마음에 가닿는다. 늦가을임에도 냉기를 만져가며 오감을 느끼려던 루미의 슬픔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도처에 기온이 싸늘한 시대에 아무 것도 듣지 못하고 느끼지도 못하는 이들이 넘쳐난다. 모든 것이 상품으로 전시되고 소비된다. 계량할 수 없고 측정하기 불가능한 것들조차 숫자로 세어진다. 사랑하면 끝까지 갈 수 있다던 말조차 눈으로 보이는 것으로 환원된다. 그러나 알다시피 사랑을 어떻게 숫자로 셀 수 있고 아끼는 마음을 글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알면서도 넘어가는 무책임에 어쩔 수 없다고들 말한다. 어쩔 수 없어서 해고하는 것이고 어쩔 수 없어서 버리는 거고, 어쩔 수 없으니 잊는 거라고. 이별은 다음의 만남을 위한 어쩔 수 없는 방어막이라고. 사회 갈등을 전면으로 내세우고 돈 벌면서도 책임은 개인에게로 돌리는 기막힌 상황을 누가 버텨 낼 수 있을까. 숫자로 셀 수 있으면서도 현실의 벽 앞에서 와르르 무너지는. 숫자로 세고만 정의와 사랑, 미래라는 가치가 공중분해 된다. 한 순간에 벼락거지가 되고도 또 하나 둘 숫자를 세어가며 쌓아 올린다. 일찍이 신 죽음의 시대를 경험한 본 회퍼를 소환하여 저 놈의 독재 정권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지껄인다. 신의 죽음에조차 다가가본 일 없는 인간들이 기독교가 죽으면 어떻게 될지를 걱정한다. 행동으로 드러난 본심은 교회가 없어지면 무엇으로 벌어먹고 살지를 궁리하는 것들뿐이다. 예수를 시체팔이하여 돈 버는 인간들일수록 코로나에 강한 척한다. 한낱 죽으면 흙으로 돌아갈 인간들이면서……. 이런 사람들은 외로움의 감정을 느껴본 일이 없는 자다. 외로우면 저렇게 살 수 없다. 정말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죽은 이를 이용해 먹지를 않는다. 누군가를 적으로 세워두고 허수아비 논법으로 광기에 젖지를 않는다. 어떻게 부모의 상을 치루면서 지 할 일을 다 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상주가 죽은 부모 앞에서 주먹을 휘두르며 술주정한단 말인가. 사랑하면 그 사람이 한 말의 의미를 곱씹고, 되새김질한다. 죽은 이의 기억과 말을 되풀이하며 슬픔을 곱씹는다. 너와 지내던 날들, 네가 했던 말들, 행동, 웃음, 냄새. 이걸 어떻게 언어로 말로써 표현할 수 있을까. 제자들은 하느님 아들을 사랑하지 않았다. 뒤늦게 예수의 흔적을 느끼며 사랑을 깨달아간 제자의 공동체가 문자언어로 그 사랑을 고스란히 담아낼 수 있겠는가. 건우의 생각과 마음에는 루미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청력이 살아있을 때조차 그 말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 사랑하는 마음을 알았던 루미는 건우의 싫다고 거부한 말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맨발로 시린 바닥에 엎드리지 않아도 이미 알았다. 문자언어와 음성언어로도 서술하기 어려운 언어를 알고 있었다. 오늘도 죽은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도 생각난다. 뒤이은 수많은 박탈자들이 있다는 사실도 기억난다. 생각보다 세상은 밝지 않다. 얼굴도 모르는 구조자 생각하며 죽음을 대비하는 시대다. 친구와 이웃의 죽음에도 책임지지 못하는 시대라서 슬프다. 모든 것이 개인의 책임이고 짐으로 떠넘겨진다. 시린 바닥은 루미뿐만이 아니다. 메시아를 기다리는 시린 바닥 민도의 온도는 당연하다. 민도를 비난할 수 없다. 그래서 약한 메시아를 기다린다. 혼자서 질 수 없는 십자가를 나누어진다면 가벼워질 수 있는 것처럼. 슬픔은 나누어 절감하기 힘들 테지만 짐이라도 나누어 질 수는 있지 않겠냐고. 그래서 사랑의 가치를 말한다. 돈으로, 상품으로, 비교로 살 수 없는 네 얼굴 네 입술. 희생하지 않아도 괜찮고 실패해서 넘어져도 괜찮다, 울지 말고 먹으면서 기운차리라고, 대신 그 짐 가벼우니까 건네 달라고. 슬퍼하지 말라고. 사랑해라는 말을 믿을 수 없다는 거 잘 아니까, 그 말 대신 들어주겠다던 말 한 마디면 되겠냐고. 웃는 얼굴조차 믿을 수 없는 오늘의 슬픔에 사람들은 훗날 루미와 건우가 만날 거라고 믿는다. 분명히 청력을 상실해 듣지 못함에도 사람들은 루미의 청력보다 보이지 않는 사랑에 집중한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간 건우가 루미를 만났을까. 루미라면 청력을 잃어도 웃으며 꿋꿋하게 살아가지는 않았을까. 폭풍을 견뎌내고 살아줘서 고맙다며 루미의 그 얼굴 쓰다듬고서 좋아한다고 말해주지 않을까. 신의 죽음과 함께 상실한 사랑의 가치를 보이지 않는 곳에다가 남겨놓는다. 신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실의 슬픔을 경험해야 사랑의 가치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웃는 얼굴을 볼 수 없어서 슬프다. 신의 죽음보다 더.

[지애문학] 하고 싶다고 진짜

2021년 04월 27일
아이고, 우리 진유! 하고서 반겨주실 줄 알았다. 같은 교회 다니는 집사님을 엄마 앞에서 만나게 될 줄은 상상정돈 해봤지만 이렇게 급작스레 마주할 줄은 몰랐다. 교복 입은 시절 성실하게 교회 오가다가 대학 진학과 함께 쓸려나간 이후 한 번도 뵙지를 못했다. 그렇게 10년, 나보다 작은 키에 여전히 적당하게 자글자글한 주름살 건조한 눈매 푸석한 입술. 한복 곱게 차려입고서 생기롭게 주보 건네던 분위기만 달랐을 뿐 분명히 정겨운 얼굴을 뵈니 마음은 즐거웠다. 예뻐졌다는 말에서부터 어른다워졌다, 결혼할 나이잖느냐는 말까지 기어이 무슨 일하고 있다며 말하기 전까진 식은땀조차 생각할 겨를 없이 정수기 물 한잔 겨우 마실 수 있었다. “저어기 자유의새노래 편집국에서 일하고 있어요…….”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니라서 주워 담을 수 없었다. “와따매, 집사님은 자랑도 않으셨다만 좋은 데라서 입 꾹 닫고 있었고만.” “허허 망해가는 신문인데요.” 엄마의 팔을 때리는 바람에 성적도 잘 안 나와서 백수 생활 몇 년 하던 내용은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1등 신문사에 사원으로 일하는 것. 거기엔 기자들이 유출되어 부수(部數) 조작까지 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닥 쓸모없었다. “네, 새로 디지털 업무 시스템을 도입해서요, 저 같은 디자이너들도 뽑아주고 있대요. 가며는 프로그램으로 지면신문을 편집하는데요. 사설도 여러 번 바뀌거든요. 그거 갈아주고 들어온 일러스트도 배치하고….” “햐, 뭐 지금 시대에 취업이라도 하면 어디겠니?” 마스크를 잠시 벗어다가 방울토마토 집어넣는 모습에서 생각에 잠기고 말았다. 이제 내가 할 말은 다 끝났으므로. 익숙한 이야기들이 흘러나오는 동안, 엄마 옆에 앉아서 조용히 바깥을 내다봤다. 아…. 다함께교회. 나의 비극적인 시대가 담긴 동네. 건물 하나 믿고 많은 것들이 오가던 공간. 거기에 묶여버린 나의 사랑도 지금까지 찾아가질 못했다. 낳아주셔서 감사하다는 생각만으로도 즐거웠던 시절이 있었다. 귀엽고 착하게 생겨서 자빠트리고 싶은 그 남자를 만나던 날들. 학생들이 주도해서 만든 24클럽에도 자발적으로 들어간 이유도 사실은 오빠랑 오래도록 같이 있고 싶어서였다.

[지애문학] 내 이름

2021년 04월 07일
어디에도 집단 감염을 보도하는 데가 없었다. 다양한 사건들이 사람들 기억에서 코로나 세 글자를 밀어냈고, 발병하고 정확히 2년하고도 반년이 지나서야 다른 뉴스들로 뒤덮였다. 뉴스로 뉴스를 덮는다, 이거 현실 정치에서도 유용하겠지만 여자와 남자 사이 관계에서도 무척이나 유효하다. 오늘처럼 적당히 쓴 알콜로도 애매한 기운을 덮기가 어렵다면 말이다. 한 달이 지나도 응답 없음 유지하던 우리 관계도 잠시 주춤하는 건지 영원히 멀어지는 건지. 발걸음도 주춤했다. 지하철 환승 통로 한 편에 마련한 전시회에 다다른 직후였다. 익숙한 전신의 찰리 채플린이란 점 때문만이 아니었다. 머리에서 분리된 얼굴, 부르튼 발에서 벗겨진 신발, 천사의 날개를 겨드랑이에 끼운, 누구라도 느낄 수 있는 마르크 샤갈 냄새. 웃고는 있지만 그림에서 느껴지는 채플린의 표정은 밝지 않다. 광대도 외로움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 채플린의 영화 <키드>(The Kid)를 보면 샤갈의 의도를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결코 사람의 얼굴은 한 가지 표정으로 구성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화사한 그림도 낯익다. 붉은 배경의 꽃다발. 1970. 피카소에 대한 일화를 접하고 그날부터 피카소를 시기한 샤갈이 와 닿았기 시작했다. 상처받기 쉬운 그의 작품 앞에 서면 고스란히 마음이 보이는 투명한 유리가 느껴진다. 붉은 배경이라 파랗고 보랏빛 하얀 얼룩한 꽃들이 돋보이는 작품에서 피카소에게 열등감을 느꼈을 샤갈을 상상했다. 구석에서 유령처럼 서 있는 정장과 웨딩드레스는 누가 봐도 사랑을 의미한다. 풋풋했던 사랑이 떠올랐다. 다시 시를 써볼까 싶었다. 그림 그릴 줄 모르니 노래 가사처럼 한 구절 끼적이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뉴스로 뉴스를 덮듯, 하고 싶은 일로 슬픈 마음을 덮어 버리기. 일에 치여 전시회도 가지 못하는 날이면 우리는 놀러가듯 서점으로 향했다. 배워본 일 하나 없는 미학 용어 늘여놓기 일쑤지만 책 하나 들고 버티다 보면 뒤에서 안아주던 향기에 서점 냄새가 덮이고 말았다. 잔잔한 음악도 귓가에 속삭이는 끈끈한 말들로 덮이는 것처럼, 끝끝내 흐트러진 생각에 못 이기고 돌아가곤 했었는데.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에서 떠나가자 그토록 어려웠던 글줄이 풀리면서 샤갈의 생애를 읽어 내려갔다. 첫 사랑이 아니어도 온종일 생각나는 너의 얼굴. 주말 드라마보다 익숙하고 뻔한데도 알고 싶고 두드리고 싶고 열고 싶은 네 마음. 가녀린 영혼도 상처 받기 쉽고 상처 받을 존재라고 지긋이 웃으며 말해줄 샤갈의 색채에서 사랑을 느낀다. 액자 가까이 얼굴을 들이댈 때마다 다소곳이 서 있는 내 얼굴이 비친다. 다시 연애하면 쓰고 싶다. 시. 잠시 샤갈의 화사한 빛깔에서

[지애문학] 기억을 기억하는 이유

2021년 04월 07일
각이진 턱에서 돋아나는 입가의 주름 그 입에서 쏟아지는 무책임한 단어들. 몇 년이 지나도 여전했다. “얼마만이죠?” “그러게요. 마주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요. 호호.” 새신자환영회실 지나쳐 곧바로 12교구 담당 전도사와 바쁘게 걷는 걸 특권처럼 생각하던 이 분위기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했다. 도착한 상담실에선 그 여러 해 동안의 회포가 이어졌다. “이 교회 저 교회 전전하고 교구장까지 해봐도, 우리 교회 만하지는 않더만. 시설 좋지, 목사님 좋지, 성도들 좋지, 분위기 어때, 신앙심도 이만한 데가 없다고.” “네.” 어처구니없고 기가 막힐 때마다 나오는 특유의 표정을 잘 안다. 살짝 고개를 기울어 다문 윗입술로 아랫입술 닫아줄 때 발생하는 무표정. 마구 휘갈겨 적는 종이 위엔 정자로 인쇄된 교적 전입처리가 바싹 말라 있었다. “그 때 일 유감스레 생각해. 내가 오죽 입방정이겠어? 세상 살다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거지. 깔깔깔.” “네.” 순간 아랫입술 깨무는 게 보일까 싶어 고개를 숙이고 끼적여 놓은 글들을 일부 수정했다. 인터넷 칼럼에서 읽은 글이 떠올랐다. 난파선을 벗어날 때 스쳤던 파수꾼 앞에서 무슨 말을 더 하느냐던 물음. 물어도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꺼내길 좋아하던 당신의 글에서 가슴을 못 박은 구절을 발견했다.

보고 싶은 얼굴, 채현국

2021년 04월 03일
가끔 엄마가 보는 드라마 내용이 궁금해 물어볼 때가 있다. 내용 이해가 될 만큼의 전달력 가진 드라마일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다. 근데 저 드라마는 다르다고 말했다. 감동을

벚꽃

2021년 03월 31일
길가에 버려져 주워서 당신에게 드렸을 뿐인데 교무실 한 자리, 물 담은 종이컵에 고이 둔 광경을 벚나무 꺾여서 이탈한 나뭇가지 바라볼 때마다 생각한다. 곧 시들어
1 10 11 12 13 14 25
소랑 2026년 9월 19일 토요일
Go to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