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셀라 시론] 소녀의 이름으로

나는 이제껏 김용철의 새능력을 왜 더 빨리 탈퇴하지 못했는가에 대한 괴로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좀 더 빨리 탈교(脫敎) 했다면, 조금 더 빨리 관계를 정리했더라면…. 소년을 구하지 못한 죄책감은 우연히 입수한 18년 전, 한 영상을 보면서 오롯이 해소되었다. 연세중앙교회 YBS 인터뷰에 담긴 소년은 짐짓 말할 수 없는 모든 죄를 짊어진 표정으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알고 지은 죄인데 왜 그걸 지금까지 해결하지 못했는가….” 도대체 중학교 2학년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카메라 앞에 서서 자책하며 스스로를 옥죈단 말인가. 새능력을 탈퇴하고서 나는 단 한 번도 김용철의 설교를 끝까지 들어본 일이 없다. 양심에 찔려서도 아니고 눈물이 감격으로 앞을 가렸기 때문도 아니다. 1시간 설교 모든 문장 옭아맨 감정 동원과 협박 구조, 의미 없는 아멘의 반복, 철학도 신학도 없는 감정만 휘젓는 수준의 처참한 호통은 그의 설교를 들어보면 누구나 깨닫게 된다. 그는 오로지 의식의 흐름에 의지한 채 청중을 감정적으로 끌고 다닐 뿐이다. 각 단락 사이의 논리적 연결은 찾아볼 수 없다. 자기도취에 빠진 간증을 서사로 가져다가 어떻게든 이어 붙이는 게 전부다. 모든 것 공허함의 파도밖에 보이지 않던 시절, 나는 죽을 용기를 가지고 어둠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시절 스물 두 살의 나는 미지(未知)의 두려움을 견뎌야 했다. 이제는 지옥에 가는 건가 싶었다. 가족도, 연고도 없이 새능력에 붙잡혀 노동 착취를 당했어도 불안함은 가시지 않았다. 그로부터 10년이 흘렀다. 그동안 탈출이 재생되었다. 때로는 방송실 귀퉁이에서 일을 하는 장면이 꿈으로 재생되었고, 어쩔 땐 빠져 나오는 꿈을 꾸기도 했다. 많으면 한 달, 뜸하면 서너 달에 한 번 연속된 꿈은 새능력으로부터의 완전한 탈출을 가리키고 있었다. 과거의 나로부터 찾아오는 ‘시간의 죄책감’이 나를 오랜 시간 사로잡은 것이다. 몸은 난파선을 벗어났지만 아직도 나의 혼은 그곳에 갇혀 있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허물어지는 시간. 탈교는 무너진 영혼 속에서 재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저 어른들이 주입한 죄책감은 남은 인생의 각도를 비틀었다. 어그러진 관념과 여성성에 대한 왜곡된 이해는 긴 시간의 교정이 아니었으면 영구히 손상되었을 것이다. 바로 그 소년이 자신의 입으로 토설한 ‘알고 지은 죄’는 이브가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따먹은 상징이다. 왜곡된 여성 이해의 뿌리는 기독 담론 그 자체다. ‘성숙한 소녀’라는 어른들의 거짓말이 빚어 만든 망상이 소녀의 노동을 착취했고, 소년의 미래를 짓밟은 것이다. 탈교 이후 나는 차근차근 기독 담론을 해체하기 시작했고 비로소 소녀를 다시 발견하게 되었다. 그 소녀는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지,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천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악과를 먹은 후 야훼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침잠한 것처럼 나는 소녀 앞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되어가는 과정을 순연(純然)하게 바라보듯 과거의 시간을 다시 배열하고 재건하는 소녀의 손길을 말없이 볼 뿐이었다. 소녀는 잃었던 재주, 놓쳤던 이름, 잊혔던 얼굴을 되찾았다. 에덴의 난민, 아담과 이브는 재건의 기회조차 잃었으나 소녀는 신의 질서를 거스르고 마침내 ‘지금 여기(hic et nunc)’의 자리에 섰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소녀의 일하는 광경 속에서 기록하는 것뿐이었다. ‘기억의 화해’가

[사설] 그저 ‘병사1’로만 생각하는 정신머리 이런 게 해병 없는 ‘해병 정신’

2023년 7월 19일 경상북도 예천군 내성천에서 13명의 해병대원과 폭우 실종자를 수색하는 작전에 투입된 채수근 상병이 급류에 휩쓸려 순직한지 2년 10개월 만에 법원은 1심에서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다.(2026.05.08) 포병 대원이 구명조끼도 없이 허리 깊이까지 물에 들어가는 건 수색 작전이라 할 수 없다. 상급 지휘관의 성과 집착이 대원의 몸으로 지불된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임 전 사단장은 수중 수색 사진을 보고받고도 멈추지 않았다. 재판부는 이를 두고 “구체적 위험을 인지한 상황에서 위험을 가중시키는 지시”라고 밝혔다. 과실이 아니라 선택이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죗값은 징역 3년이었다. 특검은 5년을 구형했음에도 대원의 생명을 담보로 작전 성과로 밀어붙인 지휘관에게 법원이 매긴 값이 고작 그뿐이었다. 채 상병의 어머니는 선고 직후 법정을 떠나지 못했다. 군 복무로 나라를 바친 이들이면 먹먹해질 물음이다. “아들의 희생에 대한 책임이 이렇게 가볍다면 어느 부모가 안심하고 자식을 군에 보내겠느냐.” 임 전 사단장은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 “수중 수색을 지시한 건 내가 아니”라는 장문의 이메일과 문자를 보냈다. 재판부는 “오랜 재판 경력에서 이런 피고인을 본 적이 없다”고 질타했다. 해병 정신을 입에 달고 살던 사람이 해병의 죽음 앞에서 한 행동이 그것이다. 임 전 사단장의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를 적시한 2023년 7월, 해병대수사단이 경찰에 이첩하려 했을 때, 누군가 그것을 가로 막았다. 대통령실 번호로 걸려온 통화 뒤 14초 후 이첩 보류 지시가 내려간 것이다. 수사단장은 ‘집단항명의 수괴’로 입건됐다. 이첩을 막은 혐의로 기소된 윤석열의 재판이 진행 중이다. 1심 법원이 임 전 사단장의 과실치사를 인정했다는 것은 그 이첩을 막을 이유가 없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재판부는 말단 지휘관에게만 책임을 떠넘기는 군의 관행을 지적했다. 그 관행을 깨려 한 건 해병대수사단이었고 그것을 다시 덮으려 한 것이 침묵의 권력이었다. 해병 정신을 가르치던 이들이 누구보다 해병의 죽음을 덮으려 했다.

[에셀라 시론] 너라는 관성에서 벗어난다

2021년 02월 12일
켜켜이 쌓인 십여 년 전 써 놓은 글을 읽다 보면 표현할 방법을 몰라서 자신만의 언어로 작성한 딱딱한 문체에 주목하곤 한다. 학창시절, 사람들과 일상을 주제로 한 대화보다 꽃과 나뭇잎, 하늘 구름 바라보며 아름다움에 주목하는 일들이 더 익숙했다. 일상 언어를 습득하지 못할 만큼 집단과 공동체, 학교라는 공간과 교회의 장소에서 벗어나 고독함을 즐겼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한나 아렌트가 목격한 아이히만의 상투적 언어처럼 일상 언어와 자신의 언어로 나누어 사용하던 시대였다. 유행어와 여자 아이돌에 관심조차 없어서 성경과 기도가 익숙해 떼려야 뗄 수 없었던 고등학교 1학년. 0교시 수업 전부터 정독한 성경을 9교시 마치는 시간까지 틈틈이 읽었다. 빈 틈, 빈 공간을 병적으로 싫어했다. 때로는 점심시간, 산책을 나서며 침묵의 공간에 머물러 무엇이든 관찰했지만, 캄캄한 교실 책상에 앉아서 뮤직비디오 보는 것만큼 낭비가 또 있을까 두 눈 감고 기도하듯 되뇌었다. 아이들이 허벅지와 가슴에 열광하며 다음 영상 재촉하던 모습에서 마치 외부인의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성(聖)과 속(俗)의 이분화 속에서 신앙의 세계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게 끌어당긴 신앙의 관성(慣性)이 외부인으로 만들었다. 고독한 연습을 이 무렵 시작했다. 미처 준비 못한 교과서도 반성의 여지라 생각하고 없는 상태로 지내보기로 했다. 대학교에서 신문을 읽으며 혼밥하던 습관도 이때의 고독한 연습 덕분이다. 빈 교실 어두워져 방언으로 기도했고 신기하듯 코딱지를 혀 끝에다가 발라도 아랑곳 않았다. 묵주까지 가져와 성경 읽던 옆에다가 두어도 밉지가 않았다. 외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교 후엔 커피와 신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빈 공간을 용납하지 않은 채 할 일에 열중하고 몰입했다. 앞만 보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고독한 연습은 외부인의 신분에서 이뤄졌으니까. 모든 선생님과 친밀하게 지내온 덕분에 아이들과 사사로운 이해관계에 붙들리지 않았다. 외부인에게 친구처럼 다가온 낯섦이 오히려 스스로를 견고하게 만들었고 성실하게 살아갈 힘을 제공했다. 신분 제도로 이해하던 피라미드 구조는 나와 상관없는 먼 세계의 것이었다. 학교폭력에 분개하여 관성으로 이리 끌리고 저리 끌리던 이들에게 반항하던 이유도 애초에 그 세계가 나와 아무 상관도 없었기 때문이다. 유별난 학생이 유별나게 좋아하던 선생에게 이르기라도 할까봐서 교실 문 닫고 치고받아도, 아무도 모르게 문자 한 방으로 아이들 뒤통수 때리며 폭력에 대항했다. 철없던 실장은 싫어하던 선생에게 수업 중에 대답하지 말자고 단합을 요청했다. 비웃기라도 하며 그 실장 보라는 듯 당당하게 대답했고, 평소처럼 반응으로 너스레를 떨었다. 식판 들고 친구의 말꼬리를 잡을 때면 대신 잡아뗐다. 정의실현 때문이 아니다. 스스로를 지킬 힘조차 없어서 눈물만 흘리던 친구의 얼굴이 대항할 힘을 만들었다. 마침내 그 실장 녀석을 붙잡고 당기던 또 하나의 관성을 확인했다. 존경하는 선생님을 괴롭히고, 사랑하는 친구의 가슴을 찢어발긴 그 녀석이 가고자 적었던 고려대학교 공책에는 자기소개서란 제목이 자리했다. “나는 _______한 학생이다” “나는 _______ 같은 사람이다” 아직 채우지 않은 빈 공간을 보았다. 그 아이의 빈 공간은 내가 싫어하던 빈 공간과 달랐다. 허벅지 사이의 공허함이 아니었다. 하루아침에 사라질 유행어도 아니었다. 채워 넣지 않으면 안 되는, 빈 공간에서 불안을 읽었다. 자기가 버려둔 공책, 어디에 있느냐고 짜증내던 모습을 외부인의 시선으로 지켜보며 조용히 불안한 목소리를 들었다. 관성처럼 그 애를 끌어당긴 힘은, 혼자서 실행하지 못하는. 반드시 누군가가 필요해 누군가로부터 의지해야 비로소 쓸 수 있는 빈 공간이었다. 고독과 거리가 먼, 그 애 여자친구 향기를 맡으며 과연 무엇을 채워 넣으려고 했을는지 궁금했다. “따라서 해당 대학의 인재상에 부합하며, 입학 후 입학할 만한 능력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지. 진심을 묻고 싶었다. 강제하던 야간자율학습 사라지고 매몰차게 뺨 때리던 나쁜 교사도 없어졌지만. 대중독재, 상위 포식자를 세우고서 스스로 노예 삼을 이 이상한 관성은

[지애문학] 지하철 역사(驛舍)

2021년 02월 10일
후회라는 단어에서 시작한 것 같다. 내뱉지 말았어야 했던 말, 하지 않아도 되었을 행동. 같은 장면이 같은 말과 같은 행동으로 반복되어 패치워크 모양으로 덧대어져 모였다. 한데 모아 눈앞에서 뒤통수까지 둥그런 모양으로 가로막아 내딛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러야 하지 말아야 했을 생각으로 알아차렸다. 불현듯 나타난 패턴이 반복과 반복으로 모아졌듯 되돌아온 하지 말았어야 했다던 입말들이 하나로 모아 심장을 건드려 올라가는 박동 속에 걸음을 멈추었다. 후회라는 단어가 곧 자책으로 연결되는 순간. 두 번째 국면을 맞는다. 뒤로부터 새까매진 그림자가 머리와 얼굴, 가슴에 이르러 덮었고 광장에 즐비한 간판이 내 앞으로 다가온다. 가루처럼 흩어지던 아스팔트 반사되던 네온사인 박동처럼 들뜨던 소리들이 먹먹함을 입으며 질주하는 터널로 뛰어간다. 맞아, 길다고 생각하던 터널도 밝아지고 어두워진 여러 번의 순간들을 지나쳐야 벗어나지. 그렇게 생각하고 표정 관리를 떠올렸다. 자각이 드는 걸 보면 아직은 세 번째 국면에 도달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여지없이 다가오는 어두움과 빛으로의 이동이 혼선을 만들며, 세 번째 국면을 맞는다. 두 눈은 반짝이던 랜턴처럼 아파오기 시작하고 조금씩 호흡이 불안해져 불규칙적 내뱉음이 빠르게 마셔야만 산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패치워크는 사라진지 오래다. 그을린 타오름도 잊었지만 지금, 여기가 강박처럼 모든 것을 잊어버리게 만든다. 어제의 일도 내일의 일도 찾을 수 없었다. 부끄러움, 추한 날 생각할 겨를도 없이 짧아져간다. 가다듬을 새 없이 후들거린 다리가 어디라도 앉아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보통은 세 번째 단계에 그쳤을 때에야 사라지건만 지금의 지나칠 터널은 중간인지 끝에 도달했는지 좀체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아서 끝나갈 지점을 추측하지 못한다. 멈추지 않고서 지나칠 수 없기에 입말의 흐름도 리듬처럼 하나 둘, 호흡의 흐름으로 바꾸어 나간다. 내쉬고, 마시고 잊어버린 터널 랜턴 고장 난 것처럼 시야에서 사라진다. 들고 있던 물을 마셨다. 고장 난 랜턴의 터널은 껌껌했다. 저 앞 출구가 보인다. 작은 원 조금씩 다가와 터널의 끝임을 말해준다. 네 번째가 오기도 전에 끝난다는 사실에 화색이 돋는다. 마음속에 잊었던 한 가지를 선언했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그건…….’ 주문처럼 되뇌는 음성언어가 이미지로 텍스트화 되지 않도록 내 입말에 주의했다. 입을 벌어 그에서 야까지 멈추지 않고 터널에서 나올 때까지 주문으로 소환했다. 다가오지 않아도 괜찮을 그 이름 덧붙여 중요하지 않다고 선언했다. 터널을 넘어서지 않기 전에는 선언을 싫어했다. 무속신앙 부적처럼 보이던 유감스런 빨간 글씨 쓰듯 효능 없는 농담으로 보였기에. 분위기를 고양하고 친근하게 다가가는 농담처럼 조크를 배우면서 터널에서 견뎌내는 방법으로 터득해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건 터널뿐만이 아니었다. 조금씩 웃음도 들었지만 싸맨 머리에 떨군 나의 고개가 멀리서 지켜본 것 같지 않아 움직여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갈 길이 멀다는 생각도 지금은 중요치 않았다. 잠시만. 잠시만, 앉아서 눈 감아 완전히 지나가기를 기다려야 했다. 처음 했던 그 단어가 잊혀진지 오래다. 다행이다. 떠올릴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생각에서 생각으로 단어가 단어들로 연결되는 느낌을 좋아한다. 서로가 끌어주고 부족함을 채워주는 그림으로 떠오르듯 그 단어에서 한 발자국 내딛었을 따름이다. 이따금 걷히는 안개에서 터널로 들어올 때면 놀라곤 한다. 피할 수 없어서 슬프지만 할 수 있는 건 생각뿐이다. 누군가 건드리는 순간을 느끼기 전까지 앉아 있었다. “저기요, 괜찮으세요? 괜찮아요?”

[시대성의 창] 대안격 사랑의 죽음

2021년 01월 23일
갑자기 발생한 고열에 죽을 뻔 했다. 코로나는 아니었다. 올 겨울 한 번도 틀지 않은 전기장판 급하게 펴놓고 이틀 종일 앓아 누웠다. 내게 가장 어려운 일은 피아노 배우는 일도,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공부도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바쁘게 살아가는 삶에서는 비로소 몸살에 걸려서야 주의를 기울인다. 피로가 누적된 만큼 생활 패턴이 올바르지 않았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일에 중독된 듯 ‘이 밤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감정이 거짓말 못하는 몸의 언어인 몸살로써 제동이 걸려서야 깨달을 만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잘 못한다. 한병철이 아렌트의 ‘활동적 삶’을 지적한 것처럼 할 수 있음의 세계에서 타버리는 영혼은 사람을 망가뜨린다. 할 수 있음의 세계는 자기 착취적이다. 스스로가 경영인이 되어 자신을 부려먹는다. 제동 장치가 없어서 멈추지도 않는다. 문제는 대안으로 포장하여 괜찮은 상품처럼 전시되어 진짜처럼 행세하는 기만(欺瞞)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우리 사회에 귀감을 준다. 초등학교 1학년. 매일 하교 후에 집을 나섰다. 자전거 타고 마을을 떠돌아 유랑했다. 갇혀 지내는 공간이 싫었기 때문이다. 자유를 느끼고 싶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마음 속 어딘가에 이곳저곳 둘러보며 새로운 세계를 탐험하고 싶은 강렬한 욕구가 자리했다. 모르는 친구를 거쳐 갔다. 넓게는 남의 집 아버지와도 놀기도 했다. 하교 후의 놀이야 말로 진정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음 날, 반복되는 패턴 주입과 좌측통행 같던 교육은 우울하게 만들었다. 선생님께 반항한답시고 숙제도 해가지 않았다. 뺨도 뜨거웠고 손가락도 부어올랐다. 그러다 이런 질문과 마주했다.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걸까. 살아가는 건 무엇일까.’ 다음 날 선생님께 얻어맞기 싫은 불안감에 던진 질문이었지만 지금 나 자신을 추동하는 근본 질문(root question)으로 남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한다는 말이냐.’ 전통적 기반이 무너진 틈 사이에 자라난 代案 이렇게 질문해 보시라 어떻게 살아가야 하냐 모든 것이 대안으로 등장했다. 기존의 전통이 무너진다. 학벌이 나댈 만한 근거조차 되지를 못한다. 그렇다고 돈이 제일일 수는 없다. 윤리적이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돈을 벌지 못하는 현실 때문이다. 그렇다고 철학은 어렵다. 아니 사람들이 철학을 이해하지 못한다. 가장 윤리적일 거라 믿어온 종교도 외면당한다. 그제서 전통의 틈 사이에 피어오른 독버섯이 대안이란 가면을 쓰고서 자라난다. 전통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전통이 아니기에 매력적이다. 보수도 진보도 해결하지 못하기에 대안이 필요하다는 논변을 늘여놓는다. 너 자신을 알라는 명령과 함께 새로운 직업을 붙여 준다. 아티스트, 디자이너 같이 중립적인 요소를 극대화해 아름답게 포장한다. 나답게 살아가는 삶을 아름다운 미덕으로 여긴다. 실은 나다운 것도 사회적 영향 속에서 만들어진 ‘만들어진 것’에 불과한데. 디자인은 죄가 없는데…. 포장은 질문을 숨긴다. 질문을 꺼내어 외치는 이들의 목소리를 집단이란 영향력으로 틀어막는다. 멋들어진 교회 건물에 피피티 화면 속 영양가 없는 설교만 문제가 아니다. 역설적으로 살아남은 엘리야 단 한 사람 대 팔백오십명,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가짜의 개수를 부풀리며 소수자의 목소리를 쥐어 튼다. 좌우를 가리지 않는다. 피아식별이 어렵다. 내일은 내가 그 적이 될지도 모른다. 얼마 남지도 않은 진짜들은 에덴의 숲으로 숨는다. 가짜만이 남은 사회에 횟수와 개수를 가지고 득세한다. 이들이 성과주의와 능력중심 사고를 가질만하다. 이들은 전통이 무너지는 혼란한 사회에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한다는 말이냐’를 질문하지 않는다. 살아남아야 할 공포 속에 백지장 같은 표정으로 연대라는 단어를 들먹인다. 분명히 좌우를 가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단어로 정의하기 어려운 이들을 대항할 방법은 이들 문법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질문이다. 아니라고 말하면 적으로 간주할 테고,

[에셀라 시론] 은진이를 바라보는 마음에서 슬픔을 느꼈을 때

2021년 01월 17일
눈망울을 마주치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네” 한 마디가 전부였다. 말조차 잘 못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본지 러블리즈덕질일기에 실을 요량으로 참석한 러블리즈 오프라인 모임에서 본 생일 카페 기획자의 첫 인상이다. 눈동자를 마주치고 바라보며 대화하길 좋아하던 나조차 옷깃을 저미었다. 다소 사람과 마주치지 않으려는 모습에서 사람 대할 줄 모르는 분위기를 느꼈다. 그는 홀로 배지를 팔다가 사라졌고, 집필하던 기사를 삭제해 싣지 않기로 결정했다. 아이돌 세계에 발 딛고서 경험한 이상한 분위기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지금도 장충체육관 나서면서 약 먹었냐 물어보던 두 남성을 애틋하게 보지 않는다. 누군가의 아픔을 이해하는 척할지언정 적어도 약한 부분 건드리며 비난하는 못된 짓을 멀리하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아픈 부분 드러내고 공격하는 문화가 익숙한 아이돌 세계는 멀리해야 마땅했다. 처음 러블리즈 좋아하던 순간을 떠올렸다. 지애의 생생한 낯빛. 수정의 우는 소리, 명은의 독특한 “-다요”체, 소울의 딱딱한 말투, 지수의 통통한 볼, 예인의 어리숙한 일상, 케이의 희망 담은 목소리, 미주의 서운한 표정. 완벽하지 않아서 좋았다. 내세울 성적 하나 없어도 즐거웠다. 수정이와 예인이의 찌그러진 하트 손동작에 늘 웃었다. 언제라도 토라질 지애를 응원했다. 러블리즈는 이슬만 마시지 않았다. 트로트에까지 와 닿을 성장 서사는 안준영 피디의 구속과 함께 눈 녹듯 사라졌다. 한 여름 밤 꿈처럼 사그라진 그 때의 흥분과 동질감은 많은 이들을 덕질 세계로 이끌었다. 내 아이 키우는 마음으로 투표했다고 한다. 여성상품화와 다르게 남자 아이돌에게는 유난히 관대한 그 신문사 논조가 놀라웠다. 힘겨운 세상에서 내가 만드는 성공 신화였는지 이해되지 않았지만 아무 말 섞지는 않았다. 나도 그런 성장 서사 매력에 흠뻑 빠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3년이 지나 수많은 진리의 죽음을 경험하고 도탄(塗炭)을 바라봤다. 거대한 한국교회 악의 체제에서 벗어났다고 믿었지만 여전히 과거의 굴레라 믿었던 그 속에서 한 발자국 내딛지 못한 현실을 발견했다. 아이돌을 제2오순절로 부른 이유다. 자기 착취적 문화, 뼈를 갈아 만드는 콘텐츠, 바짝 돈 번다는 왜곡된 삶에 대한 인식, 되도 않는 성적 운운하며 한낱 인간에 불과한 이들 멋들어지게 꾸며대고 자신에게 치장하는 인간들. 청년들과 학생들이 어른들의 나쁜 짓을 따라한다. 큰일이다. 1등 신문이나 해댈 밑장빼기를 인터넷 곳곳에서 또 보아야 한다니. 이루다와 알페스가 인터넷에 오르내린다. 대중을 욕한다고 무엇이 달라지나. 모두가 울분에 차있다. 커뮤니티를 닫았다. 조선일보 구독을 해지했다. 뉴스데스크 생방송을 닫아버렸다. 대중의 말들을 멀리했다.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공원소녀 서경이와 서령이의 목소리만 주목했다. “우린 지중해 어느 이름 모를 해변/길 잃은 것 같애 아무렴 어때/아주 멀리 간대도 나를 찾지 말아 줘/내 맘이야이야/내 맘이야이야” 외롭지 않았다. 사람 좋아하던 내게서 사람 한 명 찾을 수 없는 유일한 시기가 아닐까. 머릿속 정화되는 기분 속에서 자신에게 집중했다. 편안함이 전부가 아니었다. 마음의 존재와 가치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음과 정신에서 가치와 의미들이 지면 신문 속 기사들 배치처럼 이동한다. 지각 변동이다. 마음 속 제일의 가치로 떠올랐던 자기 계발 코르셋이 사라졌다. 러블리즈가 지워졌다. 그 자리를 대체한 비비드 색채와 정갈한 언어의 시(詩)가 자리했다. 이제 시작이다. 마지막이 되었을지 모를 러블리즈덕질일기는 이렇게 꾸미고 싶었다. “나는 명은이다요”로 시작한 커버스토리 헤드라인, 한 면 가득 채운 명은이의 얼굴. 러블리즈 멤버들의 성향과 서로가 서로를 부르는 정다운 호칭. 베이비소울 특유의 입술 컷 자세를 움직이는 사진으로 모아 묶고. 여자 아이돌 꿈꾸는 어린 아이 성장기를 담은 ‘마법의 스테이지 팬시 라라’ 리뷰. ‘걸그룹의 조상들’ 서평. 아이돌 바바를 끝내고 성인 배우 채승하로 인사해 출현한 영화 비판. 그리고 보랏빛 저무는 당신들의 시대를 사설로 담아내 그 끝을 또 다른 여덟 면 속보로 채우려고 기획했다. 타블로이드 호외판도 러블리즈가 아니었으면 만들지도 않았다. 콘서트처럼 마지막일지 모르는 상황에서 러블리즈덕질일기 섹션도 그 끝에 다다르지 않을까 상상했다. 하지만 이 마지막 의욕도 은진이의 눈빛에서 느껴졌던 슬픔에 다다르자 깡그리 사라졌다. 시(時)를 쓰기 위해 발 디딘 인스타그램 세계가 아직도 익숙하지 않다. 뚜렷한 이목구비, 가공한 특유의 색채, 만들어진 감정과 장소들, 누가 봐도 비슷한 얼굴 앞 발걸음 떼고서 시선 없음에 집중했다. 교회에서 느껴졌던 똑같은 “아멘”들이 들리지 않는다. 상황과 장소를 가공해야 마땅했던 압박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침묵의 세계로 귀환한다. 저녁노을 져 가는 도시 속 고요한 예배당에서 느꼈던 침잠함은 역겨운 모름의 바다 속에서 건져주던 고마운 시간이다. 이곳엔 가끔씩 솔직하지 못해 어리숙한 자신을 탓하던 소녀는 없다. 애꿎은 내러티브 탓하게 만들던 소녀 3부작도 없다. 앞으로도 없어야 하고 비어져야 한다.

[지애문학] 일탈

2021년 01월 17일
“나 주 안에 늘 기쁘다/나 주 안에 늘 기쁘다/주 나와 늘 동행하시니/나 주 안에 늘 기쁘다” 예배당 바깥으로 나갔어도 귀에서 낭낭하게 들려왔다. 설교를 마치고 부르는 찬송가 멜로디가 내일 아침에도 허밍으로 울릴 걸 생각하면 역겹기 그지없다. 3층 방송실에서 바라본 교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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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랑 2026년 9월 19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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