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눈금] 18세 국민연금

10대 국민연금 임의가입자 순 출처: 국가데이터처 청년의 기피 대상인 국민연금을 자진해서 가입한다는 통계가 눈에 띄었다. 국민연금 10대 임의가입자가 2023년 4814명에서 올해 1월 1만2245명으로 2년 새 두 세 배 늘었다는 기사였다. 18~ 19세 인구 대비 10대 임의가입률이 높은 지역은 경기도 과천시(3.63%), 서울 강남구(2.88%), 종로구(2.45%), 동작·송파구(2.41%) 순이다. 전국 평균 1.28%의 2~3배다.

[사설] ‘김용철 새능력’이 체제경쟁 대상이라 생각하는 정신머리

예수의 부활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새능력의 김용철은 유독 ‘믿음’에 방점을 두었다. 그의 스크립트를 분석해 보면 ▲믿음=74회 ▲부활=54회 ▲사망·죽음=54회 ▲하나님=26회 ▲죄=22회를 언급했다. 특히 그가 “~줄로 믿습니다”를 말한 맥락을 살펴보면 종결의 강박을 확인할 수 있다. 이 표현이 수십 번 나오는데 LLM 인공지능 클로드는 “기능이 독특하다”고 평했다. 주장을 사실처럼 만들지 않고 ‘믿음의 영역’에 가둬버린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회복시키십니다”가 아니라 “회복시키실 줄로 믿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반증 불가능해지는 구조다. 안 되면 ‘믿음이 부족한 것’이 되고 되면 ‘믿음의 결과’인 것이다. 이 종결 어미 하나가 설교 전체를 검증 불가한 구조로 만들었다. 김용철의 스크립트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몇 가지 특징이 선명하게 보인다. ①설교 전체에서 대여섯 번 반복되는 ‘위기-해결’ 구조: 단일한 구조가 청중이 어디에 있든 ‘내 문제도 해당되겠다’는 느낌을 받도록 설계돼 있다. 문제는 이게 설득이 아닌 패턴 주입이라는 것이다. 부활이 왜 그 위기의 해답인지를 한 번도 연결하지 않는다. 그저 위기 다음에 부활이 나오니까 청중이 연결되는 것처럼 느끼게 할 뿐이다. ②예수가 부활했다(전제)-믿으면 너도 산다(결론)-아버지가 나았고, 쌀통에 쌀이 나왔고, 바울이 순교했다(근거): 이건 신학적 논증이라 할 수 없다. 귀납도 연역도 아니다. A가 B와 비슷하니까 A에서 일어난 일이 B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주장을 하려면 A와 B가 왜 비슷한지 먼저 보여야 한다. 그러나 김용철의 스크립트에서는 그 과정이 없다. 성경은 전부 결론을 지지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될 뿐이다. 로마서 6장, 고린도전서 15장, 요한복음 11장을 인용하지만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지, 그 문맥이 무엇인지, 원어가 무엇인지 단 하나의 설명도 없다. 성경은 감정 고조의 타이밍에 삽입되는 장치로 기능하는 것이다. 김용철의 스크립트는 오직 청중을 위기 속의 존재로 몰아넣는다. “삶이 무너졌나요” “건강에 어려움이 찾아왔나요” “절망 가운데 계십니까” 청중의 현재 상태를 결핍으로 규정하고 그 결핍의 해답을 설교자가 독점하는 구조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해답은 언제나 교회 안에 있다고 주장한다.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려면 예배당에 와야 하고, 믿음을 고백해야 하고, 설교자의 언어를 따라 해야 한다. 청중이 스스로 접근할 수 있는 경로가 없다. 설교자를 경유해야만 한다. 교인의 실명과 자산 규모를 비유하는 것도 이 맥락에서 봐야 한다. 단순한 농담이 아니라 설교자가 교인의 삶을 알고 있다는 과시를 의미한다. 알고 있는 사람이 권력을 가지는 이 섬뜩한 맥락을 어떻게 무시할 수 있는가. 새능력은 10년이 넘는 기간,

낯섦

2021년 03월 04일
갈대밭 서듯 아무것도 보이지 않음에서 낯섦과 마주한다. 낯섦, 너라는 낯섦 앞에 서노라면. 나는 분노를 느낀다. 너를 대하지 못해서, 만지지 못해서 한탄한다. 낯섦이니까. 또 하나의

[시대성의 창] 가해자 文法

2021년 03월 01일
모든 사람을 두 부류로 분류할 수는 없다. 인간의 다양한 결을 관찰하다 마주치는 아름다움이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 내 편과 네 편으로 구분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타인은 비정상이고, 나는 정상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문법을 발견했고, 이 문법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관찰했다. 고등학교 1학년 입학하고 실장으로 자처한 녀석도 같았다. 나보다 훤칠한 키에 잘 생긴 미모가 누가 봐도 호감을 주었고 선생님의 신임을 받기에 적절하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나와 사이가 틀어졌다. 실장이란 녀석이 특정 과목 선생님을 왕따 시키려고 모의하질 않나, 철없는 친구들의 주먹 다툼에도 아랑곳 않으며 말리지도 않으니. 그 녀석의 인간적 평가를 저급하다고 평가한 마지막 이유는 다름 아닌 내 사랑하는 친구를 어렵고 힘든 지경에 밀어 넣은 사건들 때문이다. 하나의 날(日)도 아니라 오랜 시간 내 친구를 격투기 경기장으로 밀어 넣고서도 침묵으로 방조한 역겨움을 보고 가장 정상적인 인간이야 말로 가장 역겨울 수 있다는 교훈을 알아차렸다. 석식 다 먹을 시점에 또 다시 내 친구의 말꼬리를 잡으며 괴롭혀대기에 나서서 사실은 이게 아니고 저게 진실이라 말하기에 이르렀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네 녀석이 무엇이관대 끼어드느냐.’ 침묵으로 일관하자던 선동에도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그 날 보충 1교시 수업에서 유일하게 대답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수업에 성실히 참여하던 사람은 나뿐이었다. 나 하나 때문에 친구들의 흥미로운 재밌거리가 사라졌다. 그 광경, 실장이 주도해 반 아이들이 싫어하던 영어 선생 왕따 시키려던 계획이 물거품으로 돌아갔다는 분위기가 느껴지자 웃음이 나왔다. 즐거웠다. 내 뒤에는 내가 믿는 신념, 야훼 하느님이 자리했다. 괴롭힘 당하던 친구와 학교 바깥에서 놀고, 공부했다. 그 친구를 제외하면 반 아이들과 딱히 소통하지 않았다. 성경 보기에 바빴기 때문이다. 여자 아이돌에 관심조차 없었던 시절이다.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옳은 일은 옳다고 그른 일은 그르다 말할 줄 아는 사람이 멋있는 거라고 철저한 외부인 자리에 서자, 누구와도 이해관계에 얽히지 않은 자유인의 해방감을 만끽했다. 외롭지 않았다. 늘 내 할 일에 최선을 다했고, 해야 할 일에 집중할 생각으로 매일매일 가슴이 설렜다. 바람이 부는 하늘 구름 바라보며 하느님의 손길에 감격했고, 성경 읽지 않은 날이라면 꽃과 나비를 보면서 사귀자고 고백도 했다. 그걸 지켜보던 문학 선생님은 당황하지 않았고, 순수 문학 청년이라며 외부인의 공원을 지나쳤다. 실장이란 놈은 학기가 끝나갈 무렵까지도 왕따 당하던 또 다른 친구 하나 보살피지 못했다. 탄핵도 이런 인간이 당해야 하지 않은가. 일 하나 못하는, 왕따 하나 대처 못해 기어이 친구의 사진속 얼굴이 압정으로 뚫리는 광경을 보고만 있는 무능한 정권. 담임은 실장이 아니라 나를 불렀다. 그 친구에 대해 아는 게 있느냐고. 언제부터 실장 녀석 괴롭힘은 사라졌다. 담임을 욕하며 미워하는 말들을 쏟아내자, 선생님께 말씀드린 직언이 잘 통했다고 생각했다. 그 녀석은 체육계와 연예계 폭력 논란이 벌어지는 작금의 상황에 무슨 감정을 느낄는지. 10년이 지나서도 스스로를 정상으로 상정하는 인간들의 문법을 접하거든 가장 비정상일 가능성을 재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은 다양한 군상에 불과하다. 엄연한 사실 앞에 정상과 비정상의 분류가 무슨 소용인가. 멋들어지게 꾸며낸 아이돌을 예찬하고, 찬미하는 근거도 멋있기 때문이다. 순환논리가 만들어낸 아이돌의 허상이 깨어지기 시작했다. 실장 아우라에 보이지 않았던 그간의 민낯. 담임의 충격도 가볍지 않았을 것이다. 1학년으로서 마지막 등교가 다가왔다. 평소라면 성경책을 읽었어야 했다. 그날은 읽기 싫었다. 복도 끝 같은 자리를 뒷짐 지고서 맴돌았다. 브로콜리너마저 ‘졸업’을 불렀다. 가사가 완전히 와 닿지는 않았다. 담임께서 나를 불렀다. 자신의 마음을 담은 파란색 봉투를 건넸다. 두 장 빼곡 담긴 선생님의 문체에서 마음과 마음이 통한 그간의 관계가 생각났다. 나는 이 미친 세상을 믿지 않기 위해서는 세상에 맞설 힘을 갖춰야 한다고 다짐했다. 그 힘은 옳은 일에 옳다고 말하며, 그른 일에 그르다고 말하는 사람과의 연결된 관계에서 갖출 수 있다. 옳은 일은 무엇인가. 코로나 파동에도 광화문에 떠들어 댈 자유? 예배당 문 열어 놓고 일천 명이 예배할 자유? 웃기지 마라. 정의란 인간마다 다르다는 정의로 우매한 인간 등쳐먹는 거짓말쟁이 참교육시켜주는 게 그게 옳은 일이다.

[에셀라 시론] 든든함이 이렇게 말하는 걸 들었어

2021년 02월 28일
자네에게 늘 감사한 마음을 가지는 이유가 단지 내 생일에 몸살감기 걸려 한 발자국 내딛지 못할 때 집까지 찾아와 부축해 주었기 때문만은 아니네. 점심시간 방송실에 찾아갈 때마다 멋있게 일하던 성실함도, 그저 같이 있는 게 좋아서 자정까지 컨테이너 자네 방에서 대화한 그 밤도, 고입고사 한 시름 놓았다고 먼저 집에 돌아가 서운했던 이유도, 자고 있는 선욱 깨어나거든 친구들과 박수치며 당황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던 정겨운 풍경도. 느껴지던 든든함이 못내 겨워 잊을 수 없었기 때문만도 아니라네. 과거 모든 기억들이 실오라기 남김없이 사라지는 이 시대에 자네에게 느껴지는 든든함이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네. 모든 전통적인 것들이 무너지는 광경을 바라보며 무너지지

[지애문학] 잊어버려야 할 때

2021년 02월 24일
D+1100. 지울까 말까 고민만 수백 번. 달달해서 짜증났다. 어제의 네 미소가 오늘의 쓰디쓴 망상으로 이어질 줄은 정말로 몰랐다. 가끔은 폭발하는 내가 너무 싫었다. 연례행사라도 하듯 한 달에 한 번쯤 예민해지는 시기가 미웠다. 그래서 어제는 이해해주는 줄로만 알았다. 착각이었다. 만나자 해도 확인 하나 없었고 연락을 해도 받지를 않는다. 고작 네 글자, 그 한 마디 꺼내려 잘해줬다고 생각하니 화가 치밀었다. 마지막 한 모금 마시고서 찌그러뜨리고 나서야 일어났다. 추웠다. 지애야, 패대기치고 나오는 순간만큼은 좀 이성적이면 안 될까. 하고 달래도 소용없었다. 목도리 하나 걸치지 않고 니트 한 조각만 입고서 나왔으니. 거지같았다. 떠는 몸 이고서 이곳저곳 배회할 존심만 남았다. 햇살에 몸을 쬐니 따뜻해지기는 한다. 정신 차려지는 것 같자 물었다. 어디서부터 문제였을까. 며칠쯤부터 적신호였을까. 스케줄을 뒤져봐도 아무리 뒤져도 모르겠다. 그을 수 없는 선 넘어 어리광부리던 순간과 패대기치려는 순간이 모호해졌다. 벤치를 지나서 한 발자국 내딛는 저 커플은 오늘로써 며칠 째일까. 저 홀로 외롭게 걷는 남자는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있을까. 사람들이 바라보는 유지애 나란 인간에게 1100일 정확히 천백일 째 깨졌다는 사실을 알기나 할까. 쪽팔림과 부끄러운 모호한 경계에 서 허둥지둥 대는 멍청한 유지애 바보 같은 유지애 지껄여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다시 카톡을 열었다. 지울까 말까 고민했다. 아직도 선언해선 안 되었다. 못 받아들이겠다는 거다. 아직도 1은 사라지지 않았다. 또 다시 전화를 거는 순간 말려드는 거다. 절대로 조용히, 입 다물고 있어 유지애하고 매듭졌다. 이쯤하면 연락은 주겠거니 예측했다. 틀려먹었다. 바짝 고개라도 숙여야 할지, 정면돌파할지 두 가지 갈림길에 서자 다리가 후들거렸다. 갑작스런 오늘의 날씨만큼이나 혼자서 홀로 서기에 돌입해야 할 유지애가 가련하고 불쌍했다. 그렇다고 널 만난 게 당당한 유지애를 바래서 만났던 건 아닌데. 어쩌다 네가 내 자리 한 가운데 서 있었을 뿐이고, 네가 있어 웃음꽃 피었을 뿐이고. 단지 너에게 패대기 한 번 쳤을 뿐인데 그 웃음꽃이 시들어 혼자서 겨울을 나야 한다는 게 슬펐을 뿐이고. 맞아, 후회해. 후회한다고. 그니까 제발 돌아오라고. 적당히 배회하다 돌아와 부장 눈빛 스캔하고 자리에 앉았다. 아무 일 없다는 듯, 잘해 한 마디 던지는 눈빛이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라디오에선 잔잔한 음악이 끝나갈 채비를 마쳤고, 사연을 읽으며 소박한 하루를 지껄일 테지만 나아졌던 마음은 또 다시 상승 곡선을 그려 내려갈 준비를 끝낸 것 같았다. 헤어지자는 네 글자 한 마디 본 순간 올라갔다 내려갔다 끝 보이지 않을 롤러코스터 오르고 내리다 또 오르고 내린다. 두 시간 배회했으니 그 만큼 늦게 나가면 되는데 상관없다. 어차피 야근이었으니까. 짜증이 밀려온다. “유 과장님 대신해서 다 끝냈어요. 밀린 원고 오탈자 확인 했으니까 바로 편집 들어가면 되겠어요.” 대답하기 귀찮았다. 두 다리 쭉 뻗고 몸을 뉘었다. 퇴근할 시간이 되어서야 매듭지을 수 있었다. 좀 나아졌다는 걸 캐치했는지 나 아니었으면 유 과장님 큰일 났을 거라고 알랑방귀 뀌었다. “여자친구랑 싸웠다면서?” 대답도 하기 전에 이런 말들을 늘여놓았다. 미안. “맘대로 지껄여도 돼. 근데 처음이었다고만 말하지 마. 그거 추하니까.” 모니터에 올려둔 무슨 고교 학교신문 칼럼이 아른거렸다. ‘잊어버려야 할 때’ 최예림 학생의 이름으로 올라온

[지애문학] 퇴근 길

2021년 02월 24일
“저도 그 방면인데…. 타세요!” 괜시리 들킬까봐서 말 못하던 차 말할 때까지 기다린 꼴이었다. 바보 등신. 좀체 멀미가 낫지를 않으니 태워주는 아량도 무의미했다. 지금쯤 지하철 안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단어 외우고 있어야 할 시간. 몸은 편해져도 속 버리느냐 몸은 힘들어도 속 편하느냐. 하지만 이 남자 옆에서는 말짱했다. 이름 모를 적당한 향수. 운전대에 올려둔 손목의 시계. 힐끔 쳐다볼 때마다 반하게 만드는 날카로운 턱선. 차체의 흔들림 하나 없는 고요한 분위기가 좋았다. 이 남자에게 풍기는 색다른 느낌이 만날 때마다 좋아하게 만들었다. “자유의새노래 제1라디오 7시 뉴습니다. 살인 및 사체유기 등 혐의로 구속기소 된 김지수 씨 공판에서 재판부가 사형을 선고하자…….” 이 남자는 정신없이 일에 치이다 퇴근할 무렵 귀에 꼽은 이어폰에서 울리는 고요한 노래 같다. 자기 할 일에 열심히 살아가면 생기는 느낌일까. 하루 종일 졸지 않고 피곤함 없는, 오히려 퇴근길에서야 머리가 맑아지는 그런 느낌. 마스크 없이도 숨 쉴 수 있는 믿을만한 그런 사람. “제 어떤 부분이 좋으세요?” “… 네? 숲 같아서 좋아요.” 아, 그러시구나. 하하. 그렇죠. 자신만의 색깔이 뚜렷한 아이니까요. 라고 말하는 순간 ‘제’가 실은 ‘쟤’였다는 걸 뒤늦게 알아먹었다. 이 바보. “진유 씨네 논설위원하고 밥 먹었어요. 겉으론 치고받는 것 같아 보여도 따로 만나거든 곧 친해요. 오늘 사설도 기막히던데요?” 기막혀서 할 말이 없다. 동시에 말한 사설 제목. 같은 소속사 멤버를 잔혹하게 살해하고도 죽일만해서 죽였다고 말하다니. 그런 악마를 변호하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지 물은 논설위원의 글. 차장이 갑자기 빼고 넣으라는 이 사설 때문에 퇴근도 늦어졌다. 한때 좋아했던 가수인데, 하루아침에 악마가 되고 살인자가 되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매일 지하철 타고 걸어서 출퇴근하면 힘들지 않으세요?” “힘들기야 하죠. 그치만 지하철에서 읽는 소설 무지 좋아해요. 버스는 흔들림이 커서 읽지도 못하는 걸요.” 숲 같다던 말, 사실 당신에게 어울리는 칭찬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모두에게 미움 받는 악마조차도 마음껏 숨 쉴 수 있게 만드는 숲. 언제든 찾아와 머물고 지나가도 불평 한 마디 않는 편안한 숲. 가끔 찾아와도 서운한 티 드러내지 않는 안아줄 숲. 소설과 논문, 단독 기사로 죽어버린 연애세포가 살아난다. “근데 찢어버렸어요. 지수가….” 잠시간 우리의 대화는 끊어졌다. 가로로 한 번 세로로 한 번 찢어진 상고장 앞에서 애써 웃으려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신호에 멈추자 노을을 바라본다. 들이 마신다. “어른들은 늘 만들어준 길대로 살아가면 편할 거라고들 하죠. 그 길 벗어나려던 피해자가 원망스러웠을 겁니다. 매일 꿈에 찾아와 망치를 들고서 가슴을 내리칠 때면 ‘미안해’ 한 마디에 멈추고서 사라지는 원혼. 정신과 진료로 밀고 들어가자고 해도 듣질 않아요. 이런 고민도 사치라고.” 플레이리스트에서 완전하게 사라진 김지수…. 아니 악마의 이름은 내게도 당연했다. 창 밖 바라보던 노을이 어쩌면 머잖은 마지막 하늘이란 생각에 먹먹했지만 상관없었다. 나와 먼 거리에서 숨 쉬고 있을 뿐이니까. 그런 악마에게도 안아줄 숲이란 게 대단해 보였다. 더는 악마 만날 기회조차 사라진 당신이 마지막 발갛게 물드는 노을을 바라보자 신호가 바뀌었다. 조용히 움직이는 차 안 라디오에선 단신이 끝나 있었고 노래 하나가 먹먹한 분위기를 전환할 뿐이었다.

[에셀라 시론] 너라는 관성에서 벗어난다

2021년 02월 12일
켜켜이 쌓인 십여 년 전 써 놓은 글을 읽다 보면 표현할 방법을 몰라서 자신만의 언어로 작성한 딱딱한 문체에 주목하곤 한다. 학창시절, 사람들과 일상을 주제로 한 대화보다 꽃과 나뭇잎, 하늘 구름 바라보며 아름다움에 주목하는 일들이 더 익숙했다. 일상 언어를 습득하지 못할 만큼 집단과 공동체, 학교라는 공간과 교회의 장소에서 벗어나 고독함을 즐겼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한나 아렌트가 목격한 아이히만의 상투적 언어처럼 일상 언어와 자신의 언어로 나누어 사용하던 시대였다. 유행어와 여자 아이돌에 관심조차 없어서 성경과 기도가 익숙해 떼려야 뗄 수 없었던 고등학교 1학년. 0교시 수업 전부터 정독한 성경을 9교시 마치는 시간까지 틈틈이 읽었다. 빈 틈, 빈 공간을 병적으로 싫어했다. 때로는 점심시간, 산책을 나서며 침묵의 공간에 머물러 무엇이든 관찰했지만, 캄캄한 교실 책상에 앉아서 뮤직비디오 보는 것만큼 낭비가 또 있을까 두 눈 감고 기도하듯 되뇌었다. 아이들이 허벅지와 가슴에 열광하며 다음 영상 재촉하던 모습에서 마치 외부인의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성(聖)과 속(俗)의 이분화 속에서 신앙의 세계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게 끌어당긴 신앙의 관성(慣性)이 외부인으로 만들었다. 고독한 연습을 이 무렵 시작했다. 미처 준비 못한 교과서도 반성의 여지라 생각하고 없는 상태로 지내보기로 했다. 대학교에서 신문을 읽으며 혼밥하던 습관도 이때의 고독한 연습 덕분이다. 빈 교실 어두워져 방언으로 기도했고 신기하듯 코딱지를 혀 끝에다가 발라도 아랑곳 않았다. 묵주까지 가져와 성경 읽던 옆에다가 두어도 밉지가 않았다. 외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교 후엔 커피와 신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빈 공간을 용납하지 않은 채 할 일에 열중하고 몰입했다. 앞만 보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고독한 연습은 외부인의 신분에서 이뤄졌으니까. 모든 선생님과 친밀하게 지내온 덕분에 아이들과 사사로운 이해관계에 붙들리지 않았다. 외부인에게 친구처럼 다가온 낯섦이 오히려 스스로를 견고하게 만들었고 성실하게 살아갈 힘을 제공했다. 신분 제도로 이해하던 피라미드 구조는 나와 상관없는 먼 세계의 것이었다. 학교폭력에 분개하여 관성으로 이리 끌리고 저리 끌리던 이들에게 반항하던 이유도 애초에 그 세계가 나와 아무 상관도 없었기 때문이다. 유별난 학생이 유별나게 좋아하던 선생에게 이르기라도 할까봐서 교실 문 닫고 치고받아도, 아무도 모르게 문자 한 방으로 아이들 뒤통수 때리며 폭력에 대항했다. 철없던 실장은 싫어하던 선생에게 수업 중에 대답하지 말자고 단합을 요청했다. 비웃기라도 하며 그 실장 보라는 듯 당당하게 대답했고, 평소처럼 반응으로 너스레를 떨었다. 식판 들고 친구의 말꼬리를 잡을 때면 대신 잡아뗐다. 정의실현 때문이 아니다. 스스로를 지킬 힘조차 없어서 눈물만 흘리던 친구의 얼굴이 대항할 힘을 만들었다. 마침내 그 실장 녀석을 붙잡고 당기던 또 하나의 관성을 확인했다. 존경하는 선생님을 괴롭히고, 사랑하는 친구의 가슴을 찢어발긴 그 녀석이 가고자 적었던 고려대학교 공책에는 자기소개서란 제목이 자리했다. “나는 _______한 학생이다” “나는 _______ 같은 사람이다” 아직 채우지 않은 빈 공간을 보았다. 그 아이의 빈 공간은 내가 싫어하던 빈 공간과 달랐다. 허벅지 사이의 공허함이 아니었다. 하루아침에 사라질 유행어도 아니었다. 채워 넣지 않으면 안 되는, 빈 공간에서 불안을 읽었다. 자기가 버려둔 공책, 어디에 있느냐고 짜증내던 모습을 외부인의 시선으로 지켜보며 조용히 불안한 목소리를 들었다. 관성처럼 그 애를 끌어당긴 힘은, 혼자서 실행하지 못하는. 반드시 누군가가 필요해 누군가로부터 의지해야 비로소 쓸 수 있는 빈 공간이었다. 고독과 거리가 먼, 그 애 여자친구 향기를 맡으며 과연 무엇을 채워 넣으려고 했을는지 궁금했다. “따라서 해당 대학의 인재상에 부합하며, 입학 후 입학할 만한 능력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지. 진심을 묻고 싶었다. 강제하던 야간자율학습 사라지고 매몰차게 뺨 때리던 나쁜 교사도 없어졌지만. 대중독재, 상위 포식자를 세우고서 스스로 노예 삼을 이 이상한 관성은

[지애문학] 지하철 역사(驛舍)

2021년 02월 10일
후회라는 단어에서 시작한 것 같다. 내뱉지 말았어야 했던 말, 하지 않아도 되었을 행동. 같은 장면이 같은 말과 같은 행동으로 반복되어 패치워크 모양으로 덧대어져 모였다. 한데 모아 눈앞에서 뒤통수까지 둥그런 모양으로 가로막아 내딛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러야 하지 말아야 했을 생각으로 알아차렸다. 불현듯 나타난 패턴이 반복과 반복으로 모아졌듯 되돌아온 하지 말았어야 했다던 입말들이 하나로 모아 심장을 건드려 올라가는 박동 속에 걸음을 멈추었다. 후회라는 단어가 곧 자책으로 연결되는 순간. 두 번째 국면을 맞는다. 뒤로부터 새까매진 그림자가 머리와 얼굴, 가슴에 이르러 덮었고 광장에 즐비한 간판이 내 앞으로 다가온다. 가루처럼 흩어지던 아스팔트 반사되던 네온사인 박동처럼 들뜨던 소리들이 먹먹함을 입으며 질주하는 터널로 뛰어간다. 맞아, 길다고 생각하던 터널도 밝아지고 어두워진 여러 번의 순간들을 지나쳐야 벗어나지. 그렇게 생각하고 표정 관리를 떠올렸다. 자각이 드는 걸 보면 아직은 세 번째 국면에 도달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여지없이 다가오는 어두움과 빛으로의 이동이 혼선을 만들며, 세 번째 국면을 맞는다. 두 눈은 반짝이던 랜턴처럼 아파오기 시작하고 조금씩 호흡이 불안해져 불규칙적 내뱉음이 빠르게 마셔야만 산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패치워크는 사라진지 오래다. 그을린 타오름도 잊었지만 지금, 여기가 강박처럼 모든 것을 잊어버리게 만든다. 어제의 일도 내일의 일도 찾을 수 없었다. 부끄러움, 추한 날 생각할 겨를도 없이 짧아져간다. 가다듬을 새 없이 후들거린 다리가 어디라도 앉아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보통은 세 번째 단계에 그쳤을 때에야 사라지건만 지금의 지나칠 터널은 중간인지 끝에 도달했는지 좀체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아서 끝나갈 지점을 추측하지 못한다. 멈추지 않고서 지나칠 수 없기에 입말의 흐름도 리듬처럼 하나 둘, 호흡의 흐름으로 바꾸어 나간다. 내쉬고, 마시고 잊어버린 터널 랜턴 고장 난 것처럼 시야에서 사라진다. 들고 있던 물을 마셨다. 고장 난 랜턴의 터널은 껌껌했다. 저 앞 출구가 보인다. 작은 원 조금씩 다가와 터널의 끝임을 말해준다. 네 번째가 오기도 전에 끝난다는 사실에 화색이 돋는다. 마음속에 잊었던 한 가지를 선언했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그건…….’ 주문처럼 되뇌는 음성언어가 이미지로 텍스트화 되지 않도록 내 입말에 주의했다. 입을 벌어 그에서 야까지 멈추지 않고 터널에서 나올 때까지 주문으로 소환했다. 다가오지 않아도 괜찮을 그 이름 덧붙여 중요하지 않다고 선언했다. 터널을 넘어서지 않기 전에는 선언을 싫어했다. 무속신앙 부적처럼 보이던 유감스런 빨간 글씨 쓰듯 효능 없는 농담으로 보였기에. 분위기를 고양하고 친근하게 다가가는 농담처럼 조크를 배우면서 터널에서 견뎌내는 방법으로 터득해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건 터널뿐만이 아니었다. 조금씩 웃음도 들었지만 싸맨 머리에 떨군 나의 고개가 멀리서 지켜본 것 같지 않아 움직여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갈 길이 멀다는 생각도 지금은 중요치 않았다. 잠시만. 잠시만, 앉아서 눈 감아 완전히 지나가기를 기다려야 했다. 처음 했던 그 단어가 잊혀진지 오래다. 다행이다. 떠올릴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생각에서 생각으로 단어가 단어들로 연결되는 느낌을 좋아한다. 서로가 끌어주고 부족함을 채워주는 그림으로 떠오르듯 그 단어에서 한 발자국 내딛었을 따름이다. 이따금 걷히는 안개에서 터널로 들어올 때면 놀라곤 한다. 피할 수 없어서 슬프지만 할 수 있는 건 생각뿐이다. 누군가 건드리는 순간을 느끼기 전까지 앉아 있었다. “저기요, 괜찮으세요?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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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day소랑 2026년 6월 22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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