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安 이야기] 장로가 잡은 멱살, 생명줄이라네

2021년 01월 26일

반가워서 눈물을 흘릴 뻔 했다. 학부 시절, 수업에 함께했던 집사님을 2년 만에 만났다. 지난주에 교회에서 임직받자 입술의 호칭도 집사에서 장로로 옮겨갔다. 나와 장로님에게 대학교 4학년은 분노의 시간이다. 장로님은 믿었던 사람이 뒤통수 치고 기독교인 명목으로 2억 원을 빼돌렸다. 검사를 만나서 자초지종 설명하고 탄원서로 괴로운 감정을 토로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형사사법포털도 어떻게 들어가야 하는지를 알려드리려다 알게 됐다. ‘급살 맞아 뒤질 년지금도 입에 담기 어려운 단어를 구사하고서 분노의 감정을 삭히지 못한 장로님이 걱정됐다.

믿었던 사람에게 뒤통수 맞은 건 나 역시 마찬가지다. 마지막까지도 조별 과제는 다 헤쳐 먹어야 했고, 목회실습 과목답게 찾아갔던 도마동의 모 교회는 장로 한 사람과 싸우느라 풍비박산 난 상태였다. 마지막 4학년 2학기를 보내던 신학도로서 그마저도 잃지 않으려던 기독교인에 대한 예의는, 이 시국에 찾아온 귀빈에게 선물까지 준 담임목사의 미소에서 완전히 어그러졌다. 거기에 나를 질투하고 시기하는 목사님 아들은 최후의 비수였다. 1학년 땐 목사님이고, 2학년 땐 전도사고, 3학년 땐 집사에다 4학년 땐 무신론자로 졸업한다던 속설과 다르지 않게 나는 지금 명목상 유신론자(라 말하고 불가지론자로 읽는다)로 살아가고 있다.

장로들과 담임목사 사이의 권력 다툼은 어제 오늘 얘기가 아니다. 장로 한 사람이 교회 하나 말아 먹었다는 이야기를 초등생 시절부터 전해 들었고 그게 익숙했다. 담임목사 권력을 강하게 키우기 위한 정치적 목적일 테지만, 실제 장로들의 권력 싸움은 이루 말하기 어렵다. 교회의 전권을 이미 쥔 장로의 정치적 만행이 고스란히 드러난 주원규의 소설 나쁜 하나님에서 룸싸롱은 낯설지 않은 과장법이다. 따라서 한국교회의 정치적 문법은 담임목사 파워가 더 센가, 당회의 전권이 더 센가 이 둘 뿐이다. 그 사이에 교인들은 담임목사 파워에 기대느냐, 장로의 돈줄에 기대느냐 이 뿐이다. 그런 어른들의 싸움을 본 적도, 당해본 적도 없었던 참여교회도 담임목사의 영적 파워가 워낙 셌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런 장로님을 앞에 두고 농담 섞어 말씀드렸다. “장로 한 사람에 의해 무너지는 교회 정말 많았는데, 집사님께서 장로님이 되셨으니 그렇지만 않다는 게 드러나겠습니다.” 이어지는 장로님이 말씀하셨다. “실은 안 받으려 그랬어.” 되 물었더니, 장로로서 위세 부리고 싶지 않았다며 8월부터 임직을 한사코 거부했다는 말씀을 들었다. 그제야 희끗해진 머리, 아니 그보다 어눌해진 당신의 말투가 비로소 귀에 익기 시작했다. 분명 2년 전의 모습과는 달라진 확연한 모습에 눈물을 흘릴 뻔했다. 돈도 많고, 인복도 많은 이 분이 동아리 방에서 부끄러운 마음을 토로하던 때가 떠올랐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날 보며 믿음 없다고 말해서 더 봉사하고 하나님 일에 충실하고 싶었다고. 마음으로는 이렇게 말씀드렸다. 이제껏 본 장로님의 모습에서 믿음 없다는 걸 거짓말로 느꼈다고.

가진 자의 여유를 모르지 않는다. 굳이 전 법무장관 거들먹거리지 않아도 말이다. 그러나 하루하루 노쇠해져가는 자신을 보면서 절망하지 않으며, 오히려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자신을 견제하고 경건하게 근로소득하며 건실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궁리하는 장로님이, 신학교에서 만났던 모든 어른들 중에서 가장 존경스러웠다. 연배 차이만 3-40년 나거늘, 배우겠다는 마음으로 서평을 요구한 집사님은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그런 분이었다. 당신의 희끗한 머리카락, 어눌해진 말투. 답답해서 풀어헤친 넥타이에서 마음은 더욱 먹먹해져갔다. 지금의 교회는 자기 주먹 자랑하러 오는 수많은 멍청한 존재들로 득실거린다. 그런 장로님이 뭐가 아쉬워서 장로 임직을 반년이나 만류했을까. 그 분은 신학교를 졸업하고 자신이 하고 싶었던 사역, 공동체 설립에 헌신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미 학부 때부터 땅 알아보느라 이곳저곳 돌아다닌 사실을 잘 알았다. 장로 임직도 그 목표 중 하나일지 모른다. 유독 긴장도, 짜증도 아닌, 장로라는 훈장엔 관심 하나 없다는 사진 속 표정이 장로님다웠다.

자유의 새노래

자유의새노래

정론직필의 자유·시대성의 창달·주체자의 기록

답글 남기기

Previous Story

[사진으로 보는 내일] 경계선에 서자 이제야 보이는 뒷모습

Next Story

[현실논단] 아아, 순진한. 이 순진함이여

Latest from 칼럼

증인의 전도지, 외면 못한 이유

광주에 쏟아진 빗방울 412㎜는 말 그대로 극한 호우였다. 내가 타던 KTX는 16분이나 지연되고 말았다. 마지막 역도 목포역에서 광주송정역으로 바뀌었다. 나야 거기서 내리면 됐지만 김제나 목포로 향하던 이들은 안내 방송에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는 한창 칼럼을 마감하던 길이었다. 한 시가 급한 상황이었지만 어떤 문장을 구성할지에 잠기고 말았다. 마지막 역이 바뀌었다는 갑작스러운 안내 방송에 옆자리 할아버지가 욕설을 내뱉고 말았다. 몹시 화가 난 모양이었다. 그는 한참을 스마트폰 화면을 노려다 보았다. 시간이 지나 할아버지는 화가 풀렸는지 모니터를 향해 손짓하더니 한 말씀을 건넸다. “글씨가 이렇게 작은 데 보여요?” 눈앞 마감보다는 할아버지의 화를 풀어드리고 싶어졌다. “그럼요. 잘 보이고 말고요. 어디까지 가시는데요?”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말문을 터뜨렸다. 무려 한 시간이나 대화를 나눈 것이다. 할아버지와의 대화는 내가 바라던 주제가 아니었다. 나라 걱정과 애국, 온통 가짜 뉴스로 가득한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앞뒤 좌석에 아무도 없었기에 가능한 대화였다. 나는 때론 맞장구를 치기도 했고, 할아버지를 치켜세워드리기도 했다. 이 또한 과거에 나 역시 애국 보수였기 때문에 가능한 대답이었다. 그가 자신만의 애국 세계를 말할 때마다 나는 조심스레 그가 어떤 일을 하는지, 무엇을 하러 호남 지역으로 내려가는지를 물었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자녀들이 캐나다에서 잘 살고 있다는 얘기를 꺼낼 때마다 얼굴이 환해지는 것을 보았다. 동시에 쓸쓸하고 외로운 단면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머니 이야기에 이르러서야 나는 당신의 우국충정을 외면할 수 없었다. 마지막 우리는 세 차례나 악수를 했다. 나는 그에게 축복해 마지않았다. 건강하시라고 말이다. 며칠 전 아시아문화전당으로 향하던 길목이었다. 칠순에 가까워 보이는 할머니, 여호와의증인이 내게 전도지를 건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만의 신앙 세계를 말했고, 나는 조심스레 맞장구를 치다 이번 폭우 잘 견디셨는지를 물었다. 다행히 아무 일 없었다고 한다. 주저리 이어지는 신앙 이야기에 나는 근처 다리 이름의 유래를 물었다. 물음을 통해 이 지역에 얼마나 관심이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었다. 이 또한 나 역시 과거에 독실한 신앙인이었기에 가능한 대화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질문, 어디 가시는지, 어느 버스를 기다리는지, 이곳 근처에 사시는지를 물었다. 그는 중간중간 여호와를 믿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증언했지만, 그의 대답을 들으면 들을수록 인심 좋은 할머니가 내 앞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두 손을 맞잡았고 서로를 축복했다. 애국 보수와 독실한 신앙, 사람은 겪어 본 세계만을 이해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세계를 온몸으로 겪을 때에야, 지금 여기의 현실을 외면하지 못하는

교회 방송실의 추억

10년 전 이맘때는 밤을 새는 일이 잦았습니다. 교회 일 때문이었는데요. 11월 마지막 주 추수감사 절기를 보내고 곧바로 대림 절기를 맞아 업무가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방송실 근무가 만만치 않더군요. 예배 때 사용할 PPTX 자막을 만드는 일부터 동영상 제작까지, 교회학교와 학생부, 청년부에서 떠넘긴 자료가 한 아름이었습니다. 저를 바쁘게 만든 부서들이 한두 곳이 아니었습니다. 거기에 교회학교 교사직까지 감당해야 했으니 열 몸이라도 모자란 상황은 중학생 때부터 매년 반복되었습니다. 교회에서 방송 일을 시작한 건 중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그리고 대학생 2학년과 일병 달 때까지 일하다가 교회 다니기를 관뒀으니, 7년쯤이겠네요. 10년 전 이맘때는 군 입대를 앞두고 슬슬 교회 일을 인수인계해야 할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언제나 일들로 가득한 방송실에 발 디디겠다던 학생과 청년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아무에게도 물려줄 수 없는 위기의 상황에서 당당히 두 손 들고 들어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재현쌤이 불쌍해 보여서 방송실에 들어왔다”던 저의 동지 안중현 형제였습니다. 그때의 고마움과 설렘은 독자 여러분도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방송실 근무에 신바람이 났습니다. 오랜 시간 혼자 근무하던 방송실에 생기가 불기 시작한 것이죠. 방송 일을 가르쳐 주기도 했고요. 오히려 피드백을 받기도 하면서 변화를 느꼈습니다.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구나’를 깨달은 순간이었습니다. 어느 날은 문학의 밤을 준비한다며 중현 형제가 대본을 가져온 일이 있었습니다. 내용은 처참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이런 걸 연극이라고 하기에 스토리도 없었고 교훈도 없었습니다. 재미도 없었고요. 편집으로 커버 쳐야 할 생각에 오히려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연극에 필요한 배경을 손으로 만들기엔 인력이 들 테니 빔 프로젝터로 우리가 그래픽을 활용해 배경을 만들자고 말입니다. 마이크를 들고 일일이 대사를 읊기엔 학생들도 힘을 테니 저는 아예 미리 녹음하자고 조언했습니다. OST와 효과음도 마련했습니다. 영상으로 만들어 연극할 땐 재생만 하면 된다는 신박한 아이디어였습니다. 중현 형제는 옆에서 영상 편집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사실 저에게는 곁에 누군가 있어준다는 사실 자체에서 큰 힘을 얻었습니다. 그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사람에 대한 한줄기 빛을 발견한 것 같습니다. 제가 교회를 탈퇴해도, 유일하게 연락하고 안부 인사를 건네주는 유일한 사람이 중현 형제입니다. 그 고마운 인연, 지금까지 이어가고 있는 게 왠지 모르게 고맙네요. 티스토리 오블완 챌린지도 오늘로 끝입니다. 그러나 이 지면의 칼럼은 앞으로도 쭉 이어질 것입니다. 이 마지막 칼럼을 고마운 중현 형제의 이야기로 끝맺고 싶습니다.

모든 기록이 멈춘 순간

초등학생 2학년, 선생님이 쓰라던 날에만 꾸준히 쓰던 일기를 8년 전부터는 매일 컴퓨터로 쓰고 있습니다. 저는 일기를 달리 부르고 있습니다. 바로 ‘감회록’으로요. 일기의 확장판인데 감회가

운전면허와 선생님

수능을 마치면 하나둘 자동차 면허를 딴다고 하죠. 게을렀던 저는 반값으로 면허를 따게 해준다는 유혹에도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4년 전 여름, 삼촌의 도움으로 어렵지 않게
Today소랑 2026년 6월 22일 월요일
Go to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