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닷컴 할아버지를 고소하기로 작정한 날

2024년 11월 24일

고소를 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고소장을 적어야 하고, 경찰서에 가서 조사를 받아야 하는 참으로 번거로운 일입니다. 경찰을 만난다는 게 뭐 쉬운 일이겠습니까. 웬만하면 “허허” 웃고 넘어갔습니다. 그냥 기분 나쁜 정도면 참고 넘어가겠는데요. 이 날 만큼은 아니 꼬운 거였어요. 곧장 아래아 한글을 열어 고소장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고소장을 우편으로 접수했고, 며칠 후 형사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피고소인은 조선닷컴에 한 할아버지였습니다.

그 할아버지는 정말 무례한 사람입니다. 무례한 도를 넘어서 한대 쥐어박아주고 싶은 그런 사람입니다. 하는 말이 얼마나 예의가 없는지, 무지함이 철철 흐르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동성애는 감염병도, 정신병도 아니”라는 저의 댓글에 굳이 “너희 어머니가 동성애자라서 너도 동성애를 옹호하느냐”고 조롱하질 않나 “학살자 전두환” 댓글에는 제 이름을 섞어서 욕설을 내뱉는 것이었죠. 언제나 늘, 흔하게 있는 경우입니다. 하지만 제 트리거는 따로 있었습니다. 그 트리거를 건드니 저도 흥분하게 되더군요.

신상정보를 밝히고 마지막으로 경고했습니다. 또 한 번 욕설을 내뱉으면 고소한다고 말이죠. 이 할아버지는 하루 종일 조선닷컴에 상주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 새 없이 댓글을 다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뭐 하는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활동량은 대단한 사람입니다. 할아버지는 깐족 거리며 고소할 테면 해 보라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단단히 열받은 저는 그래서 고소장을 작성하고 송파경찰서에 우편으로 바로 쏴버렸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은 형사를 만나고 나서 바뀌었습니다. 돌아오는 길, 현타가 몰려오더군요. 첫째는 합의금이 뭐라고 이 고생을 하나였고, 둘째는 이런 정도의 멘털리티로 할아버지 댓글 부대를 상대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가였고, 셋째는 어차피 조선닷컴 독자 수준을 알고 있으니, 그만 상대하자는 생각이 앞선 것이었습니다. 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저를 욕하는 사람들에 대해 굳이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대놓고 욕하지 않으면 말이죠. 그런 사람들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습니다. 저는 늘 제가 좋아하는 일로 바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허나 영원히 적이라고만 생각했던 그 할아버지가 또 댓글을 달았습니다. 제 댓글에 대댓글을 단 것인데요. 북한에 대한 쓴 소리를 담은 글이었습니다. “이 새끼, 그래도 옳은 말을 할 때도 있구나!” 저도 한 마디 했습니다. “그래, 이 새끼야! 점심 맛있게 먹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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