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눈금] 18세 국민연금

10대 국민연금 임의가입자 순 출처: 국가데이터처 청년의 기피 대상인 국민연금을 자진해서 가입한다는 통계가 눈에 띄었다. 국민연금 10대 임의가입자가 2023년 4814명에서 올해 1월 1만2245명으로 2년 새 두 세 배 늘었다는 기사였다. 18~ 19세 인구 대비 10대 임의가입률이 높은 지역은 경기도 과천시(3.63%), 서울 강남구(2.88%), 종로구(2.45%), 동작·송파구(2.41%) 순이다. 전국 평균 1.28%의 2~3배다.

[사설] ‘김용철 새능력’이 체제경쟁 대상이라 생각하는 정신머리

예수의 부활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새능력의 김용철은 유독 ‘믿음’에 방점을 두었다. 그의 스크립트를 분석해 보면 ▲믿음=74회 ▲부활=54회 ▲사망·죽음=54회 ▲하나님=26회 ▲죄=22회를 언급했다. 특히 그가 “~줄로 믿습니다”를 말한 맥락을 살펴보면 종결의 강박을 확인할 수 있다. 이 표현이 수십 번 나오는데 LLM 인공지능 클로드는 “기능이 독특하다”고 평했다. 주장을 사실처럼 만들지 않고 ‘믿음의 영역’에 가둬버린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회복시키십니다”가 아니라 “회복시키실 줄로 믿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반증 불가능해지는 구조다. 안 되면 ‘믿음이 부족한 것’이 되고 되면 ‘믿음의 결과’인 것이다. 이 종결 어미 하나가 설교 전체를 검증 불가한 구조로 만들었다. 김용철의 스크립트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몇 가지 특징이 선명하게 보인다. ①설교 전체에서 대여섯 번 반복되는 ‘위기-해결’ 구조: 단일한 구조가 청중이 어디에 있든 ‘내 문제도 해당되겠다’는 느낌을 받도록 설계돼 있다. 문제는 이게 설득이 아닌 패턴 주입이라는 것이다. 부활이 왜 그 위기의 해답인지를 한 번도 연결하지 않는다. 그저 위기 다음에 부활이 나오니까 청중이 연결되는 것처럼 느끼게 할 뿐이다. ②예수가 부활했다(전제)-믿으면 너도 산다(결론)-아버지가 나았고, 쌀통에 쌀이 나왔고, 바울이 순교했다(근거): 이건 신학적 논증이라 할 수 없다. 귀납도 연역도 아니다. A가 B와 비슷하니까 A에서 일어난 일이 B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주장을 하려면 A와 B가 왜 비슷한지 먼저 보여야 한다. 그러나 김용철의 스크립트에서는 그 과정이 없다. 성경은 전부 결론을 지지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될 뿐이다. 로마서 6장, 고린도전서 15장, 요한복음 11장을 인용하지만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지, 그 문맥이 무엇인지, 원어가 무엇인지 단 하나의 설명도 없다. 성경은 감정 고조의 타이밍에 삽입되는 장치로 기능하는 것이다. 김용철의 스크립트는 오직 청중을 위기 속의 존재로 몰아넣는다. “삶이 무너졌나요” “건강에 어려움이 찾아왔나요” “절망 가운데 계십니까” 청중의 현재 상태를 결핍으로 규정하고 그 결핍의 해답을 설교자가 독점하는 구조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해답은 언제나 교회 안에 있다고 주장한다.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려면 예배당에 와야 하고, 믿음을 고백해야 하고, 설교자의 언어를 따라 해야 한다. 청중이 스스로 접근할 수 있는 경로가 없다. 설교자를 경유해야만 한다. 교인의 실명과 자산 규모를 비유하는 것도 이 맥락에서 봐야 한다. 단순한 농담이 아니라 설교자가 교인의 삶을 알고 있다는 과시를 의미한다. 알고 있는 사람이 권력을 가지는 이 섬뜩한 맥락을 어떻게 무시할 수 있는가. 새능력은 10년이 넘는 기간,

[사설] 교회학교 교사들과 전도사를 쥐어짜 만들어낸 ‘41%’

2021년 10월 25일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확산 이후로 등장한 한국 대형교회 유튜브 채널은 전체 380채널 중 241채널에 달했다. 전체에서 63%가 코로나 이후 개설한 채널인 것이다. 일반인 브이로그(V-log)가 익숙해진 시대에 동영상 제작이 과거에 비해 문턱이 낮아졌지만 여전히 동영상 제작은 버겁긴 마찬가지다. 본지 취재에 따르면 스물여섯 대형교회 유튜브 채널을 연령별로 계산한 결과 2-30대 22%, 공통 채널이 37%, 교회학교 채널은 41%로 추산되었다. 그러나 통계청과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측 자료에 의하면 인력 낭비를 명확히 볼 수 있다. 2016년 9월 발표한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한국 개신교회 10대 인구는 불과 22%에 달하고 교회가 자체 조사한 통합 측 10대 인구는 단 12%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최소 12%에서 최대 22% 인구를 위해 41% 인력이 소모되고 있었다. 채널 수가 인력 그 자체를 대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스물여섯 대형교회가 게시한 평균 영상 수를 보면 인력 낭비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유명 유튜버도 통상 1200개 영상 수를 넘기지 않건만 스물여섯 대형교회 평균 영상 수는 5000개에 달한다. 찍어내듯 물 밀려든 영상들을 누가 게시했는가를 물으면 인력 낭비라는 단어가 프레임이 아닌 팩트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콘텐츠를 들여다보면 가슴 아픈 현상들을 마주한다. 적은 인구 보유한 교회학교를 위해 교회학교 교사들은 메타버스를 활용해 캐릭터로 변신하고서 주일예배를 송출한다. 예능과 교육, 토크쇼를 내세워 교회학교 학생들을 위한 자체 콘텐츠를 발굴해 제작한다. 이들은 방송국 직원이 아니었고 급여 받은 적도 없다. 단지 ‘교회학교 교사’라는 일념으로 방송국 수준의 기상천외한 콘텐츠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전도사라고 다르지 않다. 혀에 대기도 힘겨운 불닭볶음면을 먹으며 ‘지옥의 맛, 천국의 맛’ 눈물겨운 영상을 만들었고 개인 시간을 내어 아이들과 리그 오브 레전드(LOL)를 즐기며 소통에 나섰다. 방학에는 담당 목사와 보이는 라디오를 진행하며 아침을 깨웠고 또 다시 이들은 새벽 예배까지 투입되어 설교를 이어간다. 본지 취재 과정에서 유튜버 미망이는 충격적인 증언을 꺼냈다. 직접 조사하며 느낀 부실한 청년부 콘텐츠가 사실은 “이게 최선”이라는 일설이다. 유명 지상파 방송국 프로그램을 복제한 수준임에도 젊은 전도사들 피와 땀이 서리지 않은 작품 하나 없었다. 모두가 눈물과 서글픔 삭히며 고통스러운 코로나 파동을 한 차례, 두 차례 넘기고 있었다. 교회학교 교사들과 전도사들이 만들어 낸 콘텐츠를 보면 정말로 “이게 최선”이라는 말밖에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새능력이란 공동체 이름의 참여교회를 포함한 담임목사들은 유유자적 뒷짐만 진 채 고고한 척 3분 메시지, 위클리 메시지 따위나 읊느라 일말의 감정이라도 느껴지지 않는가. 기획과 대안을 내놓아야 할 세대가 바로 당신들이다. 청년들도 대형교회 세습과 사회적 물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교회를 떠나지 않는 이유에 이 한 단어를 말한다. 양심을 느끼고, 미래를 생각한다면 대형교회 목사들과 한국의 개신교회 목사들은 말도 안 되는 유튜브 세계에 인력을 낭비하지 말고 사람 먼저 생각하라. 예수도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게 아니”(마가 2,27)라고 말했다. 서글픈 마음에 입 밖 꺼내지 못한 이 한 단어, 파수꾼이 되어 마지막 기독교 시대 교회를 지키려는 이름에게 “잘했다”, “쉬어라” 이 두 마디만 말하라.

[에셀라 시론] 그 녀석, 여학생의 꿈이 박살난 순간

2021년 10월 18일
서울대를 동경하던 그 녀석 입에서 꿈에 그리던 순간들이 사라지자 예측은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세달 전이다. 녀석이 좋아하던 꿈들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아내기 위해서는 시간의 검증이면 충분하다고 봤다. 정말 사랑하면 오랜 시간 지나도 소중한 꿈으로 새겨갔을 테고, 사랑하지 않았다면 헌신짝 버리듯 버리고 말 거라는 검증이다. 일년하고도 반 년 남은 시간 서울대에 합격하겠다던 만들어진 이야기를 보면서 하느님을 만났다는 듯, 삶은 달라져갈 것이고 새로운 나날만이 드리울 거라 믿었던 학부 때 모습이 겹쳐 보였다. 착각 속에서 신을 만난 줄 알았던 완전한 믿음을 검증할 방법 하나 없었고 오로지 시간이 지나서야 깨달은 거짓은 서글픈 감정을 가리켰다. 박살난 꿈 조각, 빛 잃은 별 되어 잊혀서야 눈물을 머금고 나약한 소녀가 에둘러 한 조각, 한 조각 줍던 뒤늦은 당혹감을 보았다. 이 지면에는 여학생 이름 담긴 글 하나가 실릴 예정이었다. 여고생 그 녀석을 끌어당기는 별. 세 번 첨삭 두 번 탈고 끝에 마무리한 글 한 문단만 바꾸고 ‘교회 바깥 나서면서 시작되는 것’이라는 무미건조하고 재미없는 글로 탈바꿈해 게재한 이유에는 사실로 드러나지 않은 시간의 검증이 자리했다. 꿈을 가지라, 희망을 새겨라 따위의 글은 아니다. 그저 모름의 바다를 유랑하는. 어쩌면 답이 아니면서도 답일지 모르는 탈합치(De-coincidence)만을 예고할 뿐이다. 이해는 했다. 남들 열심히 공부하고, 촘촘하게 쌓아가는 듯 보이는 희망의 탑 고공행진 보면서 누구라도 두려움과 불안함을 느끼지 말라는 법이 어딨겠나. 고작 신학교 하나 믿고 알량한 믿음 따위 맹신했던 10년 전 나보다 더 현실적이고 더 철든 녀석 앞에서 탈합치니 유랑이니, 헤매는 모름의 바다 따위 단어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의 검증은 그 때의 칼럼을 게재하려던 순간에도 보이지 않던 사실을 일러주었다. 서울대라는 단단한 반석 앞에 모든 바라던 것들이 일순간 녹아버려 사라지는 환상이란 점에서 모든 바라던 것들이 진정 바라던 것들이 맞는지를 묻었다. ‘너 밖에 없다’던 말도 서울대 앞에서 스러져 녹아버렸고, ‘사랑하는 일이잖아’하던 습관들도 단단한 반석 앞에서 스스럼없이 사라지자 가나안에 도착하고 비로소 하느님과 줄다리기 벌이던 그 때의 공동체가 떠올랐다. 신학교만 도착하면, 도달하면! 다 될 줄 알았던 착각이 허무하게 녹아 사라져 버렸다. 시간은 반 년 만에 검증을 마쳤다. ‘네가 가지던 그 꿈이 진짜인 줄 알았냐’며 감사 보고서를 내던졌고, 한 줄 한 줄 읽어가며 ‘틀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틀렸다’ 조용히 읊조리며 적막한 대강당서 어둠 속 눈물을 흘렸다. 지금이야 유랑으로 말하지만, 불안히 외줄 타던 시절엔 유랑 같은 단어 따위조차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공포 그 자체였다. 헛발이라도 딛는 순간 죽을 것만 같았다. 교재라도 있으면 했다. 교재대로 살아가면 ‘아, 이만하면 충분한 삶이구나’ 자위라도 하지 않았을까. 어찌어찌 살아가다보니 지금으로 흘러왔고 오늘에 이르렀다. 삶에는 정답이 없다고들 한다. 남에게 피해만 주지 않으며 자기 살고 싶은 대로 살면 된다고 말한다. 나쁘지 않은 말들이다. 꽤 단순하다. 어렵지 않다. 그러나 기어이 어렵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 인생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훈수 두는 인간들. 지금의 삶도 버거운데, 이후의 삶도 설계해야 한다고 선동하는 이들이 있다. 천국과 지옥, 썩은 내 나는 주술적 단어를 읊조리며 인생이란 이런 거라고 오만한 말들을 내뱉는다. 그들은 표준을 만드는 자들이다. 자기가 표준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서른에는 취업할 것, 여자라면 서른다섯까진 결혼할 것, 네 살 차이는 만나지 말 것, 이런 사람 특징 네 가지를 나열하고 이래라저래라 지껄인다. 그 아래 동조하던 댓글들과 아멘들은 가관이다. 유유상종 따로 없다. 표준이란 단어는 매혹적이다. 모른다는 말보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표준이 더 있어 보인다. 티키타카 못해도 괜찮은데. 밀당 못할 수도 있는데. 표준에 미달하면 스스로를 못난 사람 취급하는 행동과 정신이야 말로 표준에 달하는지. 싱어송라이터 박소은의 정규 앨범 ‘고강동’ 첫 번째 수록곡이 인상적이다. ‘인생이 박살나던 순간.’ 당혹스러움일까, 분노일까, 배신감일까. 처음 내뱉던 글줄부터 할 말을 잃는다. ‘아무것도 모르겠을 때/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았네’ 어려서부터 어른들이 만들어준 표준이 맞는다고 생각하며 달려왔지만, 막상 어른이 되어보니 하등 쓸모없는 현실 앞에서 이 노래가 떠올랐다. 시간의 검증은 이럴 때 유용하다. 시간의 검증은 가장 일차원적 방법이다. 이조차 견디질 못하고 사라져 녹아버린다면 아무 것도 아닌 게 맞는다. 서울대 앞에 녹아 사라져버린 그 녀석의 꿈처럼. 하지만 모른다. 애써 외면했던 그 녀석, 10년 후 그 소녀처럼 박살난 꿈 조각 하나하나 주우며 뒤늦게나마 제 로(路)로 걸어갈지. 뒤늦다는 말조차 틀렸음을 깨달을지. 박살나도 괜찮은데. 그래도 망가진 삶 아닌데. 끝까지 아껴주고 싶었는데. 힘이 되어주고 싶었는데. 오늘도 이 칼럼, 미안하다는 말로 마치고 싶지 않았는데. 미안해.

[에셀라 시론] 녹림청월 이후의 시대에서 보내는 편지

2021년 10월 14일
이제 두 달 후면 이 신문, 자유의새노래를 창간하게 될 겁니다. 아무도 없는 한글날, 복지관 건물에서 매니저 ‘그린냥’을 필두로 개설한 녹림청월을 보고도 놀라면 안 됩니다. 반대진영 무찌르기 위해서 여론조작 일삼고 가면까지 쓰고 친밀한 척 연기하던 자료 눈으로 확인해보면 기막힌 감정부터 느끼게 될 겁니다. 그 어처구니없는 사실들을 글줄로 담기 위해 신문 제작에 열 올리게 될 테구요. 황당하죠. 필명 대한제국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라고, 백 서른하나 계정을 이용해 댓글 공작 펼친 걸까 물을 겁니다. 허나 그리 물어서는 곤란합니다. 시선을 돌려서 녹림청월은 무엇을 얻으려고, 무엇을 위해서, 무엇 때문에 백 서른하나 계정으로 여론조작 했는지를 물어야 비로소 보입니다. 필명 대한제국을 둘러싼 이 사태의 진상은 그들 녹림청월 자신의 욕망. 이것뿐입니다. 어떤 욕망일까요. 더 취재하다보면 보일 겁니다. 초딩 디시인사이드라 불리는 원류(源流)에선 찾을 수 없습니다. 내면의 솔직한 감정을 마구잡이 드러내던 지류(支流), 녹림청월에서 명확해집니다. 녹림청월 말하려고 쓴 편지는 아닙니다. 오늘은 다른 시선으로 보려고 합니다. 어른들 얘기요. 초등학교 6학년 학생에게 스태프 역할 던져주고, 일선에서 물러난 어른들요. 유명세를 이용하는 건 먹고 사는 일에 매달린 어른들에게 주요한 덕목이겠죠. 그 인간도 다르지 않습니다. 자리 하나 던져주고 부려 먹는 것도 모자라 책 한 권 던져주고 사인만 갈긴다고 끝날 일은 아니죠. 정상적이지 못한, 지극히 중2병다운, 사춘기 흑화된 소녀들을 상대로 관리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이 책 한 권으로 끝날 문제겠습니까. 그때의 어른들도 인력 보강 대신 무책임한 열정페이를 요구했습니다. 잘하고 있다, “대단해 대한건아!” 한 마디 던지던 과거의 말들이 지금이라고 무엇이 다를까요. 아이돌 포토 사진만도 못한, 방 한 편 버려져 이제는 읽지도 않아서 외면 받은 그 책을 볼 때마다 어른들 욕망이 되살아납니다. 그럼에도 한 때의 기억이고, 과거이기에 오랜 시간이 지나도 버리지 않기를 잘했습니다. 기억과 함께 보관하기로 마음먹은 그 때의 결정처럼요. 지금도 그 책 겉면을 보면서, 손 안 대고 코 푸는 책임 없는 어른들을 증오합니다. 그러니 값비싼 노동으로 받아 낸 18권, 어른들에게 고마워 마십시오. 마땅히 일해서 받은 것뿐입니다. 대대공작 일삼던 자들이 녹림청월을 어둠 속 장막으로 감춘지도 5년이 지났습니다. 어째서 15년 전 녹림청월에 의한 대대공작(對大工作) 사건을 지금까지도 거론하느냐 물을 겁니다. 먼 미래에는 매듭진 거 아니냐고 하면서요. 원류조차 바싹 마른지 오래입니다. 이 신문 창간호엔 상단에 배치한 녹림청월 발(發) 대대공작 사건보도 뿐만 아니라 반 지성으로 얼룩진 신앙 세태 비판하는 글도 실렸습니다. 지금은 참여교회 담임목사를 대단하다 자부할 테지만 시간만 지나보십시오. 다양한 어른들을 만나면서 자연스레 악질로 분류하고 말 겁니다. 그 인간의 수준을 알기까지 10년이 지나야 합니다. 인생 절반을 전체주의와 다르지 않은, 인간성을 상실한 집단에 몸담았다는 점에서 비극을 느낄지도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이제껏 어떻게 살아왔는지보다 중요한 건, 현재에도 무책임한 어른들을 마주하느냐는 겁니다. 환경이란 담을 넘어보니, 과거의 삶에서 비극을 느낄 여력 하나 없더군요. 여전히 세상은 요지경입니다. 이제 곧 지류를 만들어 낸 원류를 벗어나 원류라고 생각했던 지류를 바라보며 두 가지 종류의 어른들을 마주하게 될 겁니다. 책임을 지느냐, 지지 못하느냐. 두 기준으로 보면 명확하게 그 어른을 따라갈지 말지를 알게 될 겁니다. 어른이라고 다 올바른 말들만 하지는 않습니다. 순진하고 착해서 그렇습니다. 좀체 남의 말 의심치 않고, 농담조차 먹히질 않으니. 고지식한 보수적 태도가 때로는 안정적인 삶으로 이어갈 동력일 테지만, 세상만사 일장일단(一長一短)일 뿐입니다. 그러니 어른들을 의심하십시오. 눈 하나 깜박이지 않은 채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말하는 원류적 어른들이 많습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듯, 방치 된 스태프, 필명 대한제국은 허망하게 무너졌습니다. 당신의 시간에선 그 자체를 비극으로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원류를 벗어난, 지류로 보일 원류 앞에선 비극이 아닌 희극으로 보일 따름입니다. 멍청하고 어처구니없는 공간은 벗어나야만 합니다. 그게 당연한 겁니다. 그분도 지류로 보이는 원류 앞에서 공허감을 느꼈을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곧 당신이 지지하게 될 그분의 기일입니다. 왜 그 세계로 갔을지,

[사설] 보랏빛 저무는 순복음 시대

2021년 09월 14일
오중복음·삼중축복과 순복음 신앙을 세계에 알린 영산(靈山) 조용기 원로목사가 서거했다.(2021.09.14) 80만 교인 수를 상징하던 여의도 순복음교회는 조 목사의 순복음 신앙으로 태동했다. 번영신학(繁榮神學)으로도 알려진 순복음 신학은 ▲중생의

[에셀라 시론] 51%

2021년 09월 01일
가영이 누나에게 탈출을 권했어도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1층 작은 예배실은 토요일 저녁이면 컴컴했다. 한편에 들어찬 사무실 미닫이 문 열고서 바라본 누나의 뒷모습은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온다. 웃음이 많았고 미소가 은은했다. 한 숨을 쉬어가며 마치지 못한 그 일을 끝내 내 앞에 가져온 저녁이 떠오른 건. 그 일을 한 집사와 학생, 셋이서 만들어갈 무렵이다. 교회를 나오지 않으며 저절로 승계가 이루어진 것이다. 기억을 더듬었다. 자격증 시험을 위해서 주일 예배를 빠져도 되겠냐던 물음에 하나님 일이 더 중요하지 않겠냐던 대답과, 그 자리 떠난 누나의 온기도 사라지기 전 목사의 지껄이던 “쟤는 돈을 너무 좋아해” 한 마디는 지금도 황당한 마음을 지우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 한심한 교회는 지금에서야 리빌드(rebuild) 운동을 펼치는 중이다. 웃기는 소리다. 내 사람도 못 챙겨서 뿔뿔이 흩어진 그 교회가 청년들 데려 온다고 티셔츠나 만들어서 찬양 집회 따위나 열고 있으니. 있을 때도 못 챙겨준 당신의 교회가 교회 밖 젊은이를 끌어나 올 수 있을는지. 기막힌 건 설교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하고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듯 사람도 성숙해 간다. 그러나 이 교회 목사는 격(格)이 다르다. 성숙치 않은 퇴행적 단어들을 내뱉는다. 이슬람이 어쩌고 동성애가 저쩌고, 대면 예배가 안 되니 여의도 순복음 저 부지 팔아 2000억 차익 본 이야기나 지껄인다. 교인 수 300명도 안 되는 교회가 80만 대형교회 손가락질이다. 크기 얘기가 아니다. 한다는 설교가 증오의 정치나 작동시키며 말세와 소수자 탄압, 교회 생활 강요로 점철돼 프로파간다만도 못한 웅변이나 내걸고 있으니 기막힐 따름이다. 이 교회의 문법은 좆소라 불리는 부실기업과 다르지 않는다. 함께 성장한다는 이유로 되도 않는 희망, 미래, 천국, 열정, 성령충만 단어를 성경구절 명언처럼 섞으며 인재처럼 대우한다. 그러나 인력이 부족해 사람을 갈아 넣는다. 사람이 없으므로 모든 일이 주먹구구 이뤄진다. 사수도 없으므로 인수인계를 기대하지 말자. 일요일도 나와야 한다. 토요일도 요구한다. 급성장 시절 화려한 영광에 취한 채 그때의 열정을 교인들이 내보이길 바란다. 너희는 죄인이고 회개해야 산다며 가스라이팅을 진행한다. 그러다 교회를 옮기면 언급 금지 대상자가 된다. 심하면 신천지를 앞세우며 지옥에 갈 수 있다고 겁박한다. 꼬박꼬박 십일조를 내야 한다, 교회에. 좆소는 월급이라도 챙겨주지만 이 교회는 봉사라는 명목으로 한 푼도 챙겨주지 않는다. 하나님에게 마땅히 해야 할 봉사라며 ‘사역’이란 단어로 얼버무린다. 그런 교회를 누가 다니고 싶겠나. 탈출도 지능 순이라지 않은가. 통계청이 발표한 2019 사망원인통계에는 믿기 어려운 숫자가 적혀 있었다. 이 제목 51%는 20대 사망 원인인 고의적 자해를 의미한다. 자살이란 단어 말이다. 헬조선이 무상하다. 더는 내려갈 곳 없어 이 세상을 떠나는 슬픈 청년들을 생각한다. 망할 좆소 욕지거리 내뱉으며 추노한다. 도무지 1% 되지 못한 고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숫자는 생각보다 강하다. 어른들은 숫자에 약하다. 생산가능인구가 떨어지고 학령인구가 줄어들자 대학들이 벌벌 떤다. 아직까지는 숫자로 내세울 가짓수가 많을 테니 피부에 와닿지 않을 것이다. 크게 잃은 건 없을 테니 리빌드니 부흥이니 헛소리 할 여유는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리빌드 운동을 제창하던 눈망울엔 불안이 서려 있었다. 나와 같은 청년들이 없었다면 그 목사는 리빌드 운동조차 떠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떠나간 청년들 숫자가 목사를 움직였다. 더 이상 청년들이 죽어서는 안 된다. 사회생활 가르치던 어른들 목 주위가 서늘하다. 나이 들어 고독사하는 어른들이 많아졌다. 청년의 때에는 누구든지 연약하니 강해져야 하는 건 맞는 소리다. 사회생활 앞세우며 노동 착취하는 철없는 어른들이 문제일 뿐이다. 그런 어른들 혼내줄 방법은 그 공간을 벗어나는 일에서 출발한다. 태극기를 빙자해 정치권을 팬클럽 따위로 전락시킨 인간들을 쫓아내고,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지도자를 세우는 변화로 이어져야 한다. 정치를 몰라도 괜찮다. 하나 둘 배워가면 된다. 앞으로도 모르면 나쁜 어른들을 답습해 갈 뿐이다. 더러운 어른들 문법을 배우는 이유도 앞으로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 어른들은 순진한 청년들을 꼬드긴다. 가스라이팅도 이 단락에서 시도한다. 결국은 개인의 힘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으므로, 구조를 뒤엎자는 얘기다. 리빌드 운동은 1123 운동처럼 실패할 것이다. 코로나가 끝나면 콘셉트도 애매한 그런 중소형 교회부터 무너질 것이다. 그런데도 다른 목사들의 걱정에도

[현실논단] 태평로1가 61-28번지 조선일보에서

2021년 09월 01일
어느 날 토요일이었다. 조선일보 1면을 정독하다 하단의 기사를 보고 놀랐다. 1면 상단에나 어울릴 크기의 커다란 세 줄 제목에 띄었기 때문이다. 우병우 전 민정수석을 겨냥한 기사 이후 4년 만에 정정보도문을 대문만한 크기로 게재했다. 박근혜와 조선일보 싸움은 송희영 주필을 몰아내고, 최순실이 터져서야 막을 내렸다. 둘 중 하나가 이긴 것이 아니다. JTBC 보도로 부랴부랴 토해낸 TV조선 기사에 국민들 시선이 잠시간 이동했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렇다 할 특종을 보지 못했다. 저널리즘의 승리라고 말할지 모른다. 나비효과로 보이는 이유가 무엇일까. 지금까지 이렇다 할 특종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조국의 호(號)가 단독이 되었을 무렵 사람들은 조선일보에 주목하지 않았다. 쏟아지는 단독 기사에 조국 사태 네 글자만 뇌리에 남았다. 보수와 진보로 갈라진 이 나라에 프레임을 섬세히 짜던 조선일보 손길보다 위선적인 조국의 엘리베이터 속 웃음을 기억한다. 대중 매체라곤 텔레비전과 신문, 라디오가 전부였던 시대가 지나갔다. 사회 담론이 복합적으로 얽히고설켜 다양하게 소비된다. 하나의 담론이 편중된 여론을 만드는 시대에 도달했다. 섬세한 손길이라 말했다. 신문의 예술적인 섬세한 손길이 이제는 헛발도 짚는 걸 보면서 ‘조선일보도 늙었구나’ 생각했다. 늙은 건 조선일보 그 신문뿐이 아니다. 원고지로 쓰는 맛을 느껴가던 고문(顧問) 자리에서 내려온 김대중 전(前) 주필에게서도 느꼈다. 조선닷컴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글에만 댓글 창을 막아버린 언론인. 할 말은 반드시 하기에 기자가 천직(天職)이라 자랑하던 조선일보 어른. 그가 쓴 칼럼을 읽으며 ‘당신도 늙었구나’ 생각했다. 안기부를 가리키며 남산에서 설렁탕 먹던 시절 험한 세상 살았다고 여겨오던 당신이 이젠 그게 아니라는 걸 안다고 인정해도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다. 섬세한 손길로 지면신문 판짜듯 프레임 짜던 당신의 판단이 오늘의 조선일보를 만들었기에 자승자박(自繩自縛)이란 말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인간을 전통적인 기독교의 의인(義人)과 죄인(罪人)을 딱 잘라 구분하기 어려운 것처럼 김대중 전 주필 말마따나 사실이 반드시 진실일 수는 없다. 그러나 사실이 아닌 건 사실이 아니다. 매일 조선일보 A2면에 실리는 ‘바로잡습니다’가 그렇다. 사실이 아닌 건 바로잡아야 한다. 지금까지 조선일보가 눈 가리고 아웅이던 기사가 얼마나 될까. 디테일하게 예술적으로 교묘히 사실을 가려버린 수없는 바로잡지 않은 오보들을 조선일보가 더 잘 알 것이다. 단지 바로잡는다는 명분으로 전시(展示)로써 끝나버려 죽어버린 오보 앞에 바로잡는다고 될 일인가. 선배 주필들 사진조차 쳐다볼 수 없어 글로써 사과한 지금의 주필만 했더라면 어땠을까. 그런 조선일보가 하루아침에 만들어졌느냐고 묻는다면. 김대중 본인은 무어라 답할 수 있을까. 수많은 기자들 땀방울 서린 기사들이 늙은이 손가락에 의해 잘려나간 슬픔으로 세워진 신문이라면 무어라 대답할까. 책임지는 자리에서 사과 한 마디 없이 편집 기자 손길로 만들어진 [바로잡습니다] 한 꼭지면 충분하다 진심으로 믿는 건가. 노무현 시대에 이은 대통령 때리기 놀이가 오늘의 사랑제일교회를 만들었고 대한민국 담론장의 질(質)을 저하시킨 원인 앞에 김대중은 일말의 책임도 없다고 단언할 수 있나. 지난 해 신문 열독률은 10.2%다. 지면신문 영향력은 앞으로도 사라져 갈 것이다. 허나 신문사는 사라지지 않는다. 디지털 방식으로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화려했던 80년대, 지면신문에다 촘촘하게 수놓던 프레임 장인 조선일보를 보기는 힘들 것이다. 조선일보 구독을 해지한지 1년이 가까워진다. 신문이 없으면 어쩌나 걱정도 앞섰다. 걱정도 바보 같다. 신문이 없어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안다.

[지애문학] 그날 밤 연락하지 않은 건 자존심 따위를 지키려는 게 아니야

2021년 08월 15일
옛날 일들이 떠올랐다. 갑자기 떠오른 일들에 기분이 울적해졌다. 그리고 생각했다. 휴우증은 여전히 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떠오르는 걸까. 아닌 것 같다. 그때 그 상황으로 돌아간다면. 분명히 뺨을 때리고 말았을 거다. 불쾌감, 적의, 분노, 배신, 파괴, 한순간의 말들로 사랑했던 그 사람과의 모든 기억이 얼룩지고 말았다.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은 ‘새로운 친구’ 목록에서 적의로 가득한 그 얼굴이 역겨웠다. 오늘은 그냥 두지 않았다. 마음먹은 대로 움직였다. 프로필까지 차단. 이젠 기억에서 완전히 지워졌으면 좋겠다. “누구랑 톡하는데 심각해?” “아냐, 오빠.” 볼 새라 폰을 끄고 배에 누워 만지작거리며 발을 흔들었다. 뚫어지게 바라보는 눈빛이 닿았다가, 미끌거리다 다시 닿으며 마주치고 떠나기를 반복했다. 또 시작이다 그런 표정. 귀여워. 관심 끌고 싶은 마음마저 귀엽게 봐주는 느낌이 귀여워 미치겠다. 힘들다는 듯 머리 위에 손을 대고 쓰다듬는 이 순간이 마냥 좋았다. 너무 가볍지도 너무 무겁지도 않은 그런 기분. 사람으로 받은 상처 사람으로 해결하란 말이 떠올랐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 같다. 후유증조차 경험할 겨를도 없이 빠르게 기억에서 사라지면 좋을 텐데. 오빠와의 데이트 중에도 아문 상처는 이따금 되살아난다. “삐질 때마다 달래주는 거 안 힘들어?” “웬일이야? 그런 걸 물어보고.” 아니……. 여기까지. 더는 잇지 않았다. 오빠는 아직도 생각이 많아질 때마다 하는 특유의 생각을 모른다. 그냥 내뱉은 말인 줄 안다고. 장난감처럼 만지작만지작, 그러다 상상에 빠진다. 힘들었을 그 때, 너한테 연락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딱 한 번 있었다. 추했다. 뒤돌아보지 않기로 했는데 금세 돌아서 엉엉 울고 말았으니. 그 모습 하나까지 남김없이 발라먹듯 이용해 먹었다. 그리고 더는 외로워도 슬퍼도 힘들어도 뒤돌아서지 않기로 했고 한 번도 뒤돌아서지 않았다. 며칠 전 그 밤만큼은 불안감에 휩싸인 마음을 달래느라 정말 많이 힘들었다. 힘겨운 그 밤을 한 걸음 한 걸음 빠져나오자 걸어온 발걸음을 되짚어봤다. 칭찬했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우리 지애 많이 컸어. 연락하지 않기를 정말 잘했어. 만약에 말이야. 다시 그 새끼에게 돌아갔다면, 그 품에 안겼을 땐 괜찮을지는 몰라도 또 다른 차원의 후유증을 남겼을지도 모른다고. 때로는 외롭고 고달픈 순간을 정면으로 맞서야 할 때도 있는 거라고. 하나의 교훈을 깨달았다. 넘어서기 어려운 산을 지나가면 육체적으로든 감정적으로든 감당 못할 기쁨이 찾아온다는 걸. 왜 삶의 맛 중에서도 쓴 맛이 진정한 맛이라고 말했는지 알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잠시의 후유증도 또 넘길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이미 넘긴 건 아닐까.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오빠.” 그새 내 마음처럼 부풀어 올랐다. 게이지 충전 완료. 조금씩 올라가는 입술에 달아오른 기분이 후유증조차

[지애문학] 그러라고 있는 사람들

2021년 08월 08일
“하하하!” 정확히 세 번 하!하!하! 예, 아니오도 아니었다. “그랬으면 좋겠네요”란다. 누가 취재한 걸까. 그 소식통 줘 패야 돼. 또 나만 바보 됐어. 힝. “마지막 날 상고장 제출하면서 조마조마했어요. 또 마음 바뀌는 건 아닐까…. 간혹 인선 자료 떠돌아도 틀릴 때 많아요. 결국 오늘 1면에 제 이름만 안 실린 것처럼요. 데스크는 그러라고 있는 사람들이니까요.” 안도했다. 그럼 그렇지 이렇게 착한 사람이 누가 누굴 이용해 먹어? 지금 당장은 김지수 공판 준비하느라 정신없을 뿐이고 대통령 당선하기 전부터 몇 번 만나본 사이일 뿐이라고. 국민의 악마를 변호하는 사람을 자기 대변인으로 뽑을 리 있겠냐던 말에서 황당해진 건 나였다. 당연히 그렇지. 신문사 들어가고 나서부터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모르고 살아서 당연한 소리에도 훅 넘어가버렸다. “지수도 절 필요로 하는 사람이니까요. 변호사로서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저도 너님이 필요해요.’ 라는 생각을 말로 내뱉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수임료도 받지 않았다는데 그럼 그 필요란 뭘까. 한때 사람들에게 사랑 받았던 그때의 감정을 독려해주는 유일한 사람? 모든 사람은 욕할지라도 악마까지도 변호해 줄 단 한 사람의 응원? “근데 왜 데스크 사람들이랑 밥 드신 거예요?” 라는 말을 생각 필터에 거치지 않고서 내뱉었다. 아, 음, 아. 그건……. 보기 드문 추임새. 변호사님도 감추는 게 있었을까. “돈 버는 사람들이니까요.” 변호사님 비유가 필터 없이 귀에 들어왔다. 제3막으로 구성한 한 사람의 인생 뮤지컬. 학생 때부터 꿈꾸어 온 미래를 향하여 정신없이 달려가는 소녀로서의 1막. 가장 아름답고 짜릿해야 했건만 현실의 벽 앞에 거칠게 쓰러지고 맞서 싸우는 현재로서의 2막. 덤덤하게 죽어가는 이들 앞에서 삶을 정리하고 주변을 지켜만 보아가는 과거로서의 3막. 빠르게 재편되어가는 사회, 바뀌어가는 직업, 쉴 새 없는 출근길, 변해가는 가족, 조금씩 삐걱대는 몸과 마음. 사람의 봄여름가을겨울 저무는 계절 속에서 고작 돈 때문에 죽어가는 광경을 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 속삭임에 말을 잇지 못했다. “둘로 찢어진 상고장보다도 눈가에 고인 듯한 눈물이 저를 필요로 한다는 걸 말해줬어요. 말은 필요 없다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걸…….”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누군가를 무시하며 살아간다. 반대로 자존감이 필요 이상으로 높을 땐 자의식이 과잉되어 누군가를 숨 막히게 만든다. 학벌과 돈, 명예. 모든 것은 자신을 치장하는 액세사리에 불과하다. 자유의새노래, 라는 1등 신문사의 명예도 누군가를 무시하고 숨 막히게 만드는 매개에 불과하다. 그러나 변호사 배지에도 이 남자와 같이 있을 때면 느낀다. 숲처럼 정화되는 맑은 햇살. 높고 낮음도 없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존중해주는 밝고 맑은 자존감. 확실히, 확실히 ENFJ 같아. MBTI 같은 건 안 믿겠지? “정론직필의 자유란 사실 신문이 살아남기 위한 구호겠죠. 누군가 아버지의 밥벌이로 보일 때면 조금은 다르게 보일 거예요.” 하나도 안 부럽다. 멋들어지게 치장한 자기 자신이 대단하게 보일지는 모르겠다. 근데 내 눈엔 그 나물에 그 밥이다. 돈 벌기 위해 몸뚱아리 돈으로 쳐 바르기 위해 안달 난 사람들. 그러라고 있는 사람들이라기엔 비참했다. 1등 신문사 만들어 놓고도 순수했던 그때의 자신을 잃어버리는 기분이란 무엇일까. 그런 지수가 자기 자신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죽음을 목전 앞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이 남자와 만나면 왠지 어두워 보이는 그늘을 조금이나마 밝혀줄 수 있을까. 어렵게 취업하고 나서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 으, 말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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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day소랑 2026년 6월 22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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