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의 탄핵을 겪은 2016년 겨울은 지금만큼 추웠다. 바깥 어디라도 나갈 수 없는 갑갑함이 방 안 가득 밀려온 것이다. 이전 칼럼에선 허상의 공포심이라 표현했다. 공포심은 공포심이나, 무엇으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부전감(不全感) 속에서 추운 겨울을 보낸 것이다. 박근혜의 탄핵은 그동안 쌓아올린 모든 탑이, 공들여 세운 노고가 완벽히 무너졌음을 내보인 역사적 사건이었다. 오랜 시간 옳다고 생각한 생각이 이념에 불과했고 부끄러운 감정뿐이라는 사실을 가리키며 반성한 계기가 탄핵인 것이다. 그동안 보수와 애국은 민족주의라는 이름으로 하나로 뭉쳤다. 민족주의는 감정과 다르지 않았다. 기존의 여성해방이 감정적으로 아이돌을 지지하고 영향력을 행사한 것과 같았다.
허상의 공포심이 하나 둘 해체되면서 남은 감정은 부전감 뿐이었다. 옳은 길을 걸은 것 같았으나 옳은 길을 걷지 않고 있었다는 현실 앞에 눈이 뜨이자 보이지 않았던 진실을 본 것이다. 이제껏 진실을 부르짖으며 애국심 사이에 숨은 나라와 민족을 위한 감정이 진짜라고 믿어왔건만. 사실은 최순실에 온몸을 내던져 나라를 운영하던 구멍가게만도 못한 경영 의식이 진실로 드러나자 공포심은 이내 다가온 것이다. 사람이기 때문에 판단이 틀릴 수 있다. 따라서 징조가 드러날 때 틀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걷는 이 길이 옳은 걸음인지, 방향은 맞는지를 언제나 늘, 날마다 심사숙고해야 하는 것이다. 탄핵의 겨울 앞에 한파를 그대로 맞닥뜨리며 현실의 눈을 뜬 그 때의 아픔을 생각하면 고민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지금도 탄핵의 겨울을 생각하면 눈물을 머금고 부끄러움을 말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변함없는 부전감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든든하게 생각했던 신 존재가 무너지고, 허상일 뿐인 대통령의 민낯을 바라만 보며 공허감을 느끼고 공포심 앞에 몸을 떠는 것처럼 부전감이 남아 있다. 그동안 이념과 정치의 목적에 눈이 멀어 진실을 보지 못했으므로 받아들인 징계와 같은 아픔이 부전감으로 남은 것이다. 어쩌면 탄핵의 겨울은 신 죽음의 시대를 겪기 위한 전조 현상이었을지도 모른다. 최상의 존재로 남은 신 존재조차 무너진 시대에 부전감은 오히려 공포심을 넘어 현실을 살아갈 힘으로 다가왔다. 죽음의 역설인 것이다. 관계 청산과 새로운 시대를 여는 힘도 신 죽음에 이르러서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전임자를 만났다.
콩깍지로는 설명할 수 없는 친밀한 감정 속에서 이제껏 경험해지 못한 마음의 손길을 주고받았다. 전임자는 좋아함을 넘어 사랑을 갈구했고, 끈끈한 관계 속에 이제껏 보지 못한 모습을 보았다. 그러나 좋던 시절은 오래지 않았다. 격랑 속에서 흔들리는 감정을 경험했다. 전임자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신문은 여러 차례 지적했다. 탄핵의 카드를 꺼내서라도 돌이켜야 한다고 말해왔다.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파멸을 맞이했다. 언론의 숙명은 진실을 말하는 데 있다. 이 신문은 탄핵의 겨울에도 슬픔을 추스르는데 초점을 맞추었고, 전임자의 탄핵을 맞이해서도 진실을 가리켰다. 달라지는 것은 없었지만 스스로의 가치를 지켜나갔다.
또 한 번의 탄핵을 맞이할 위기에 처해 있다. 이번에는 보수당 정권이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사태 앞에 맥조차 추리지 못하고 있다. 여성해방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의 본질은 겉돌기만 하는 담론에 있다. 새 판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담론의 장을 허물어뜨려야 한다. 스스로 허물어뜨려야 하기에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신문을 통해서 탄핵의 겨울을 견뎌내었고, 신 죽음의 시대를 살아내었으며, 전임자의 탄핵 앞에서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으며 걸어가야 할 길을 내딛었다. 그러나 여전히 탄핵의 위험 앞에서도 문제를 자각하지 못하는 이 정부가 개탄스러울 따름이다. 기존의 아픔을 잊지 못하고 여전히 헛돌기만 하는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다.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 한들 아픔을 해결하지 못하는 데엔 기억 담론을 바로 세우지 못한 탓이 크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관계로만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모든 사람이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경험이기 때문이다. 유독 전임자 사례를 드는 건 이해할 수 없다.
현대 한국 정치가 탄핵의 강조차 넘어서지 못하는 것과 달리 전임자의 탄핵을 겪고 나서 하나 둘 순차적으로 잊어가고 있다. 그저 아픔은 아픔으로 흘러 보낼 수 있었다면 큰 고통으로 다가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파할 만한 일이었기에 아파하는 게 옳았다. 앞으로도 아파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배워야 할 교훈이 있다면, 아프면서 어른으로 자라가는 진부한 경험칙일 뿐이다. 두 차례의 아픔을 경험하며 이 신문의 가치(價値)가 세워져 가듯. 더는 전임자의 이름으로 저주 받은 과거의 기억을 그때의 향기로만 덮어버리지 않도록, 전임자가 아닌 기억을 되살려가며 왜곡된 감정을 복구해야 할 시점이다. 지금 우리는 여성해방도, 보수도 정답이 아니라는 진부한 교훈 앞에 서 있다. 그 다음 정권이 누가되든 새 담론을 마련해야 할 상황이다. 용기를 가지고 덤덤히 기록해 나갈, 걸어갈 존재. 그가 어디에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