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읍. 들이마시고. 내 안의 기운을 서서히 흘리면서…. 후우……. 쉿. 웃지말자 웃지말자. 지금 수행 중이잖아. 중얼중얼. 간절한 염원을 담아 소원을 비는 고객님에게서 느껴지는 아찔한 기운.
마우스를 조작하는 중후한 손. 한 40대 아저씨는 모니터 앞에서 절망했고, 나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박연우, 나 대신 채팅 좀 쳐 봐라. 아오 답답해가지고.”
프롬프트가 뭔지조차 모르는 고객님을 위해 나는 쪼그려 앉았다. 조판하듯 키보드로 한 글자, 한 글자 진심을 담으려 했다.
‘야. 이. 새. 끼. 야. 그. 것. 밖. 에….’
고객님은 키보드를 낚아 채 분노의 질주를 이어갔다.
“못 쳐. 그리냐. 그러고도. 네가. 인공지능. 이냐. 자슥아.”
고객님은 감정을 실어 엔터를 찰싹 눌렀다. 채팅창에는 무척 밝은 표정의 킹 받는 이모티콘이 짧은 사과문과 함께 출력 됐다. 고객님은 자포자기한 듯, 마우스에서 손을 내려놨다.
“왜 나만 안 돼? 딸깍이면 된다며?”
“쌤. 이거 백날 해도 안 돼요. 전공자 불러야 한다니까요?”
“연우야, 이거 환불 어떻게 안 되냐?”
“이미 늦었죠. 샘 올트먼한테 디엠 보내보세요.”
담임의 수행은 이렇게 실패로 돌아갔다. 책상에는 신문지가 널브러져 있었다. 모두 전면광고였다. 대기업도 딸깍 하나로 이만한 광고 포스터를 만든 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최신 모델이라 굳게 믿은 쌤의 챗지피티 모델은 플러스가 아닌 프로였다.
쌤의 숙제는 나의 중간고사만큼 무거워 보였다. 학교 홍보 포스터 말이다. 저 신문에 실린 광고 퀄리티만큼은 해야 했다. 아마 날 부른 이유도 알바 거리 던져주려던 목적 같았다. 근데 혼자서?
발뒤꿈치를 내려놓자 화들짝 놀랐다. 이름 모를 여자애가 서 있었다.
“아이코, 이 누추한 곳에 귀하신 분이…. 앉으시죠.”
저 능글맞는 미소.
“자. 김보라 디자이너님. 3일. 포스터 한 장이면 되는데. 얼마면 되냐? 20?”
보라는 싱긋 웃으며 절레절레 손을 흔들었다.
“우리 학교를 위해서라는데요. 괜찮아요. 포트폴리오에만 쓸 수 있게 해주세요.”
뭐? 20만원을 그렇게 날린다고?
“역시, 전문가는 달라. 겸손함부터가 다르다고.”
보라는 “아니, 아니에요!”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곧바로 이어지는 보라의 생글한 대답에 담임의 미소는 약발이 다했다.
“중간고사가 코앞이라 한다고는 말씀 못 드릴 거 같아요. 죄송해요.”
“그래? 생각 정리하고 말해줘라.”
보라랑 교실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정색하며 내뱉는 말에 흠칫했다.
“포스터 시안 한 장에 20? 내가 병신인 줄 아나.”
내 파트너가 사라지나 싶었다.
“김도진 말야. 걘 무급으로 모델 선다던데?”
말없이 멈춘 발걸음. 보라를 사로잡은 건 아마 그 이름 세 글자였을 것이다.
따끈하게 떼어낸 남자 아이돌 포스터를 나는 발뒤꿈치로 밀어 넣었다.
“어…. 실례하겠습니다.”
공손하게 모은 두 손과 달리 보라의 발소리는 총총거렸다. 책상 위에 가방을 내려놓은 보라의 시선은 표지로 가득 메운 벽면으로 이어졌다. 아차 싶었다. 무지개 물결의 두 소녀, 취임 선서를 하고 있는 이재명 대통령, 다시 만난 세계가 그려진 응원봉 일러스트…. 그렇게 다소곳이 굳어지는 저 입술.
“너…. 진보, 뭐 그런 거야?”
우물쭈물. 귀가 빨개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거 자세히 봐도 돼?”
생각하지 못했던 너의 반응.
보라는 재킷을 벗어다가 바닥에 두었고, 스크랩해둔 나의 표지들을 하나 둘 훑어보기 시작했다. 옹알거리는 저 입술. ‘페미니즘’ ‘정치적 희생양’ ‘프레임 전쟁’ 매일 보던 단어들이 오늘따라 오글거렸다.
내 최애 일러스트 작가가 실린 표지에 다다르자 그 애 시선이 멈추었다. 프레임 바깥으로까지 새어 나오는 꿈과 책과 힘과 벽, 쟁쟁한 작품 속 파묻힌 등줄기, 누가 봐도 작업실로 보이는 뒷모습, 그 아래의 담백한 손 글씨.
“‘꺼지지 않는 불꽃’……. 직접 손으로 쓴 거겠지?”
나는 눈을 떼지 못하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 발 좀 씻고 와도 돼?”
이미 반쯤 벗어든 보라의 양말을 알아차리기까지 약간의 로딩에 걸렸다. 씻는다고? 남의 집인데?
나는 얼른 부엌 의자를 방에다가 놓았다. 스크랩 자료는 대기업에서부터 독립 영화에 이르기까지 양으로는 뿜뿜했다. 잠시 멈칫했다. 무엇을 보여줘야 놀라려나. 트랙패드에 손가락을 올렸다. 화면을 이리저리 쏘다니는 바람에 보라의 걸음이 가까워지는 걸 뒤늦게 알아차렸다.
“이거 뭐야?”
“트… 랙패드?”
포스터 만들려는 애가 트랙패드를 모른다고? 그리고 이어지는 보라의 말.
“컴퓨터를 내 맘대로 써본 적 없어서….”
두 손 뻗고 스트레칭하려다 푸시시 웃음이 새어 나오고 말았다.
“그럼 포스터는 어떻게 만들 거야?”
“소, 손으로.”
그래, 발로 만드는 건 아니니까. 보라는 급히 핸드폰에서 사진 앱을 뒤적거렸다. 빨라지는 손가락. 진짜 잘 그릴 수 있는데 못 믿어주는 분위기. 또 한 번 웃음이 샐 뻔했다.
유화로 두껍게 올려 질감으로 표현한 하늘과 대지. 그걸 보자마자 휘둥그레진 건 나였다. 보라가 1초에 한 번씩 넘겨주는 작품을 뺏다시피 들고서 한 장 한 장 눈여겨보았다. 수채화로 덧대어 레이어를 쌓아 올린 듯한 저녁노을 담원역. 지나가는 고양이를 목탄으로 담아낸 크로키. 광각렌즈 시야로 담아낸 점으로 된 어딘지 알 수 없는 달동네 골목길.
“진짜로 직접 만든 거야? 선생님 도움 없이?”
“왜…. 이상해?”
“대박.”
보라의 입가에서 미소 지는 걸 보았다. 그저 한 마디였을 뿐인데.
삽살개 같은 미소, 다소곳한 태도, 착실한 옷차림. 때로는 욕도 내뱉을 줄 아는 저 피곤해 보이는 낯빛의 낙차. 저녁을 먹으면서도 보라의 대답은 담임 앞에서처럼 구는 것 같았다. 그 특유의 아니, 아니에요.
“보라는 엄마가 걱정 안 하셔?”
“아니, 아니에요. 오히려 좋아하시는걸요.”
“그래서 딸, 한 이틀이면 돼?”
“응! 설거지랑 빨래는 내가 할게.”
째지는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자근자근 밥알 씹는 보라의 밥그릇 위에다 고기반찬을 마구마구 올려 뒀다. 갑자기 몰려오는 혈당 스파이크! 많이 먹어선지 귀찮음이 밀려왔다. 분명 설거지를 마쳐서까지는 열심히 그릴 열의가 넘쳤었다. 조용히 몰려오는 졸음에 무거워진 몸을 침대에 눕히고만 싶어지는 건 왜일까. 흰 화면의 아이패드, 애플 펜슬 한 자루. 스케치만 하면 되는데….
“여, 연우야….”
보라 앞에서 웃음이 파하하 쏟아졌다. 앙증맞은 파자마. 보라는 움츠린 자세로 서 있었다. 색감이 마음에 들어서 작년에 산 건데 좀 컸나 보다. 바지 끝단이 바닥에 쓸려도 불편하지 않았다. 귀여웠기 때문이다.
“어머, 사모님! 파자마 장인이시네요!”
사모님? 전신 거울을 보면서 보라가 되물었다. 가벼워진 입가에서 덧니가 살짝 삐죽했다.
“너 덧니도 있었구나!”
급하게 입을 가리는 보라 옆에 섰다.
“파자마 입은 거, 우리 얼렁뚱땅 같지 않아?”
“우리?”
0.5초의 정색, 또 한차례의 낙차. 그게 보라의 본능일까.
더는 이 상황이 어색해지지 않도록 나는 털썩 컴퓨터 책상에 앉았다. 비장한 마음으로 창가에 커튼을 쳤다. 이 기세를 몰아 먼저 운을 떼보자 싶었다. 방에 불을 끄고 스탠드의 간접조명에 의지하듯 오른손을 이마에 댔다.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어깨로. 두 손 모아 경건하게 트랙패드에 올려 두었다. 드디어 보라에게 마술을 보여줄 시간이 온 것이다.
“컴퓨터로 편집하면 좋은 점!”
나의 물음과 함께 캔버스의 도진이만 따로 누끼로 땄다. 하나…. 둘…. 셋! 한순간 사라진 도진이를 보며 화들짝 놀라는 보라의 표정에 예상 적중.
두 번째 마법, 두 손 들고 활짝 뛰는 도진이의 옷을 선택해 입력창에 ‘한복’이라고 적어봤다. 하나, 둘, 셋! 물음표, 느낌표가 번갈아 나오는 저 앙증맞은 표정 역시 적중했다.
“그럼 우리가 보던 모든 포스터는 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거야?”
“아무래도?”
나의 경건한 손놀림에 트랙패드님께서 감동하셨는지 뭔가 영감을 주시는 듯했다.
그 이미지를 붙잡기 위해, 도진이를 캔버스에 다시 올려두었다. 내가 받은 건 학교 본관이 배경인 사진이었다.
“여기에 도진이가 서 있단 말이지….”
하늘 부분이 넓게 찍혀 있어 그 위에다가 문구를 올려두면 좋을 것 같았다. 나는 사진을 배치하고 그 위에 더미 글자를 얹혀놨다. 다시 막막해졌다. 방금 떠오른 그 영감이 사라지고 나서였다.
“아…. 놓쳤어.”
“어떤 거?”
“포스터 시안. 머리에서 생각났는데 방금 날아갔어.”
발끝까지 찌릿해지는 하품. 나는 침대에 드러누워 버렸다. 보라도 내 옆에 눕는 걸 보니 서로가 피곤에게 항복하는 것 같았다. 평소에도 피곤해 보이는 그 애 눈가가 안 그래도 더 피곤해 보였다. 웃음이 터졌다.
“왜?”
보라가 물었다.
“아니, 넌 항상 피곤해 보이잖아.”
아, 그거 어렸을 때부터 그랬대. 매일매일이 피곤해 보였어서. 퀭한 것도 있구. 아, 소혜가 그러더라. 피섹? 내가? 그래서 무슨 뜻이냐니까 피곤 섹시라잖아. 소혜가 남자였음 나랑 사귀었을 거라고. 후후, 걘 말도 어른같이 한다니까.
말하는 문장 사이에 낀 뭉글뭉글 단어 하나하나가 내 귀에 울렸다.
“너 방금, 애교 부렸지.”
“내가?!”
느낌표와 물음표를 섞은 말투가 딱 그랬다.
“보라야, 너한테 온도차 느껴지는 거 알아?”
진짜? 응, 아까 네 입에서 나온 병신 말이야 진짜 평소에도 그런 욕해? 아, 그건…. 또 아까 작품 봤을 때 나 진심 놀랐다. 정말?
우리는 마침내 온몸을 대자로 뻗고 말았다. 완전히 항복이다.
“연우야, 나 그림 어떻게 그렸게.”
“여러 작품 많이 보면 되지 않아?”
눈꺼풀이 조금씩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보라는 뭐라고 속삭이던 중이었다.
그게, 좀. 뜸을 들이는 사이 눈꺼풀이 조금씩 감기는 걸 도무지 막을 수 없었다. 귀로 듣는 대신 보라의 나긋한 목소리에 집중하자고 다짐하며 눈을 감고 말았다.
“그게…. 그림이 보이는 순간, 단 한 장의 이미지가 서 있어. 그게 보일 때면 그때가 그릴 때인 거야. 마음의 눈이라 해야 할까.”
그게 뭘까. 아트보드 위에 학교 사진을 올려 두고, 도진이를 세우고, 글자를 얹어다가… 비네팅도 넣어주고… 그러다가. 완성되는 거….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방에 불이 켜져 있는 상태였고, 보라는 눈을 감은 채 양말을 신고 있었다. 옆에는 종이가 널브러져 있었고 고개를 살짝 들어 7:40이라는 숫자를 확인하고서야 나는 개 빠르게 앞머리에 물을 적시고 교복에 몸을 쑤셔 넣기 시작했다. 우리는 속이 뒤집어질 정도로 달리고 달렸다. 753, 저걸 놓치면 우리는 끝이다. 숨이 가슴 깊은 곳에서 터져 나왔다가 들이마실 때 허하게 비어지는 느낌이 들어져서야 정류장에 도착했다. 문을 닫은 버스가 막 출발하려던 참이었다. 운명이 떠나는 건가 싶을 그때 기사님하고 눈을 마주쳤다. 통학과 지각의 아슬한 경계선에 몸을 실어서야 나는 보라와 마주한 채 빙긋 웃었다. 버스 문이 닫히면서 철봉에 매달린 카피바라 인형과도 ‘안녕’했다. 달리는 버스 차창 바깥에서 퍼지는 파릇한 나뭇잎. 이 기분, 이대로만 쭉 이어졌으면.
그러나 마지막 교시가 지나갈 때까지 인연은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웃고 있는 화면은 아이패드, 길게 뻗은 건 한 자루의 애플 팬슬이었다. 손등을 턱에다 괴고 생각에 잠겨 그림자로 얼룩지는 순간, 나는 보라가 내 앞에 앉아 있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거 비싸?”
보라가 가리킨 건 나의 아이패드 프로였다.

“그러니까 컴퓨터로 사진을 얹고 내 붓 터치로 완성?”
“응응. 여기에 도진이가 서 있을 거란 말이지. 내가 받은 건 학교 본관이 배경인 사진이야. 하늘 부분이 좀 넓게 찍혔어. 그 위에다가 글자를 쓰면 될 것 같아. 근데 도진이만 들어가면 좀 썰렁하잖아. 뭐라도 넣으면 좋을 것 같아.”
컴퓨터 그래픽과 손으로 그리는 아날로그의 결합. 파자마를 작업복처럼 입은 우리가 생각해낸 결론이었다. 다시 경건한 의지로 마음을 가다듬던 순간 보라는 내 말에 아이디어를 얹었다.
“도진이가 은근 다리가 길어. 키 큰 다리가 부각 되게 입시 원서 정보를 양쪽에 배치하는 거지.”
“잠만….”
나는 아예 새 캔버스를 열었다. 사진을 배치하며 더미 글자를 얹혀놨다.
다시 막막해졌다. 정보가 양쪽으로 나뉘게 되면 읽기의 흐름이 끊어지게 된다는 걸 깨달았다. 도진이만 따로 누끼를 따 배경과 분리했다.
“그니까 도진이를 가운데 크게 놓고, 아래 어두워지도록 비네팅을 넣고 정보를 넣잔 말이잖아.”
막상 어두워진 배경에도 도진이의 긴 다리, 정보 텍스트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실패다.
보라가 거들었다.
“도진이는 웃을 때랑 무표정일 때 온도차가 커. 사진에선 힘차게 뛰는 사진이니까 배경은 파랗게, 얼굴은 살짝 노랗게 비치게 하면….”
문득 도진이의 퍼스널 컬러가 궁금해졌다.
“보라야, 차라리 우리….”
말보다 앞선 건 나의 손가락이었다. 그럴 바에는 학교 배경을 날리고 단색으로 바꾸면 어떨까 싶었다. 일단 오렌지부터 먹여보고 보라의 표정을 확인했다. 살짝 놀라는 낌새. 파랑은? 의아하다는 표정. 이번엔 보라? 오- 괜찮은 것 같은 느낌.
보랏빛 배경은 스마트오브젝트를 먹여 노이즈로 입혔다. 자글자글한 입자가 고급스러운 맛을 살려내는 조미료 같았다. 도진이와 배경 사이에 붓으로 그림자를 그렸다. 되살아난 입체감에 우리는 그럴싸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앞니가 귀엽게 도드라지는 도진이의 얼굴을 보니 얼개가 맞춰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반쪽짜리 일 뿐이었다.
“여기가 매화고라는 걸 표현할 방법이 없을까.”
“꽃.”
“꽃?”
보라는 빈 종이를 가져다가 4B연필로 선을 죽죽 긋기 시작했다. 뾰족하게 튀어나와 각지게 꺾이는 건 나뭇가지인 듯했다. 힘차게 뻗어 나가는 손가락에는 매화가 가지가지 형체부터 피어나고 있었다. 보라는 손가락으로 문대 흑연을 흩뿌리듯 눙쳐댔다. 검지와 엄지가 더는 거멓게 되지 않을 정도로 시커메졌다. 더는 문대지 못할 만큼 말을 듣지 않자 보라는 손가락을 혓바닥에 꾹꾹 눌러 댔다. 침이 가득 묻은 그 손가락을 종이에 다시 문대자 매화 잎이 은은하게 번져갔다.
“내가 이렇게 그리면 연우 네가 색상 반전해서 넣는 거야. 괜찮을까?”
그러니까 보랏빛 노이즈가 자글자글하게 깔린 배경에 환하게 웃고 있는 도진이를 가운데 두고, 머리 위에 매화 일러스트를 흐리게 두면 되었다. 커브와 레벨을 열어 선명하게 대비되게 보정하고 분위기를 느껴보기로 했다.
“그럴싸 한데?”
“이건 매화가 한몫한 거다. 진심.”
이대로 끝내기엔 1% 부족했다. 솔직히 이거 하나론 학교 홍보 포스터로 보일 리가 없었다.
“뭔가 모자라.”
“꺼지지…. 않는 불꽃….”
“좀 담대하고, 도전적인 그런 문구 없을까?”
입에서는 매화, 도전, 진취 흔하디흔한 단어들만 맴돌았다.
“이럴 땐 마시면서 생각하는 거랬어.”
보라의 가방에서 마구 쏟아지는 과자와 이온음료.
“까봐, 다 까보자!”
신이 난 나머지 귀에 입이 걸리고 말았다. 부엌에서 와인 잔을 가져다가 얼음을 최대한 조용히 담았다. 시계를 보니 새벽 1시였다.
“우리 이러니까 파자마 파티 같아.”
“흐흐.”
나는 보라의 잔에 음료를 따랐다. 두 손으로 받는 보라의 입에서 “앗, 감사합니다. 박연우 디렉터님!” 소리가 나오자 우리는 키득키득 웃음을 삼켰다.
“좋아.”
“뭐가?”
“편하잖아. 이 분위기. 드디어 보라 네가 완전히 나랑 가까워진 것 같아서.”
“연우, 네가 캔버스 같은 사람이라서 난 그게 더 좋아.”
캔버스? 아무 편견도 아무런 색안경도 안 끼고 있는 그런 사람. 내가? 응, 난 그런 사람한테만 편해지는 것 같아. 사실 나, 대통령도 싫고 진보도 싫거든. 너한테 만은 이야기해도 괜찮겠단 생각이 들었어.
“그게 왜. 네가 벽에다 스크랩해 둔 표지들 꼼꼼히 봐줬잖아. 그럼 됐지.”
“생각하는 게 달라도 결국 우리는 작품으로 서로를 알아본 거네?”
나는 정색하면서 보라를 빤히 봤다.
“왜, 그건 아니야?”
“나, 너 별명 생각났어.”
“어?”
“CMYK.”
뜬금없는 나의 네이밍에 보라의 얼굴에는 당황스러운 표정이 역력했다.
“아니, 컴퓨터 그래픽은 RGB 빛이 섞이면 섞일수록 하얘지거든. 근데 잉크를 풀어서 완성하는 캔버스 작업에선 색감을 섞으면 섞을수록 시커메져. 뭔가 보라 넌, 시커먼 색감을 이용해서 인간의 내면을 잘 포착하는 것 같아. 네가 작품 만들 때 잉크를 섞어서 완성하는 것처럼.”
보라가 감자칩을 마저 입에 넣고선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연우야, 나한테 걸어봐.”
뚜두두, 흩어지는 소리. 화면에는 그라데이션으로 알록달록한 배경 위로 ‘RGB’ 세 글자만 떴다. 우리는 키득키득 웃었다. 보라와 잔을 들고 짠하며 디렉터님, 주식회사 RGB 대표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네 CMYK 디자이너님. 주거나 받거니 배에 힘을 빡주고 말았다.
웃음의 순간이 지나고 방 안은 급 고요해졌다. 주황빛 무드 등 저 벽 번져가는 여명 같았다.
“연우야 그거, 문구. 뭐라고 지을까?”
“소혜가 그랬어. 문장을 지을 때 생각이 나지 않으면 좋아하는 사람의 말을 가져다가 비틀어보라고.”
나는 책꽂이에다가 스윽 문지르듯 좋아하는 그 책을 향해 손가락으로 문지르기 시작했다. 책등의 매끈한 감각을 느끼며 마침내 다다른 그 책. 입술을 굳게 다문 저 표정. 보라의 눈빛이 무거워지는 듯했다. 나는 책을 훑어다가 한 문장을 비틀어 낼 수 있었다.
“필 수 있어, 너도. 여름의 서원에서.”
“연우야, 일단 넣어보자.”
그러니까 우리의 포스터 최종판은 이렇다. 두 손 들고 활짝 뛰고 있는 도진이를 가운데 두고, 자글자글한 노이즈의 보랏빛 배경, 도진이 위로 보라의 손가락으로 빚어 만든 흰 매화, 그리고 마지막, 포스터를 압도하는 문구 ‘필 수 있어, 너도/여름의 서원에서.’
새벽 5시. 나는 담임 메일로 최종본을 보내고서 완전히 뻗어버렸다. 보라도 살며시 침대에 올라와 내 옆에 누웠다.
무드 등에 반사되는 별 모양의 목걸이. 어깨에 가닿기 전에 스러지는 단발. 도톰한 질감의 낯빛. 진하게 파인 너의 쌍꺼풀. 우리는 오래도록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속삭이듯 물었다.
“이렇게 열심히 하는 이유가 뭐야?”
보라는 오래도록 답이 없었다. 못 들은 건가. 말하기 어려운 질문이었을까. 보라는 입술을 떼었다 붙였다를 반복했다.
“조용하니까”였는지 “좋아하니까”였는지 나는 알아듣지 못했다. 그게 포스터를 만드는 일을 말하는 건지, 도진이를 좋아해서였는지 나는 물어보지 못했다.
이어진 말은 보라가 보라 자신에게 하는 말 같았다.
“너무 열심히 안 살아도 돼. 연우야, 난 도무지 견딜 수 없을 때 하나 둘 셋 하고 눈을 감아.”
하나
둘
셋.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방에 불이 켜져 있는 상태였고, 보라는 눈을 감은 채 양말을 신고 있었다. 옆에는 종이가 널브러져 있었고 고개를 살짝 들어 8:40이라는 숫자를 확인하고서야 나는 안도하며 눈을 감았다가 가슴이 철렁해진 채로 다시 금요일임을 확인한 후 개 빠르게 앞머리에 물을 적시고 교복에 몸을 쑤셔 넣기 시작했다.
어렵게 얻어 탄 엄마의 차 뒤편에서 따사로운 햇살을 맞는 기분이 생각보다 얼얼했다. 보라는 다소곳이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교실 밖 뒷문 앞에 서서 나는 말없이 서 있었다. 담임과 눈이 마주치자 나는 놀라 고개를 숙였다. 판서를 시작한 걸 확인한 후 교실 안으로 살금살금 들어갔다. 칠판을 받아 적고 있는 소혜와 눈이 마주쳤다.
“녀누, 히사시부리.”
저 요망한 것.
“수업은 여기까지. 박연우, 인사!”
나는 움찔했고 가방도 내려놓지 못한 채 차렷, 경례를 내뱉었다. 아저씨는 교실을 나섰고 나는 부랴부랴 출석부부터 열어봤다. 박연우 칸에는 결석이나 지각에 아무런 표시가 없다는 걸 알고 나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후 하교할 때였다.
우리 학교에는 벌써부터 하나 둘 보랏빛 물결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보라의 정원을 걷는 기분으로 복도를 걷자 맞은편 건물 저편에서 보라를 발견했다. 보라는 어떤 남자애랑 포스터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말을 거는 저 남자애가 포스터의 주인공이란 걸 알았을 때 보라의 표정은 얼어붙어 있었다. 오래도록 서 있는 두 사람을 멀찍이서 지켜보았다. 드디어 보라와 눈이 마주쳤다. 어느새 희미하게 웃고 있는 그 애를 뒤로하고 나는 마지막 문장을 곱씹었다.
필 수 있어, 너도. 여름의 서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