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조한 기억모음④] [1] 가나안이라 믿었던 신학교에서 모든 것이 무너지고

2023년 10월 02일

유아교육과 여자애들이 내 번호를 물어봤다는 선배의 말이 농담인 줄 알았다. 지금이라면 모든 번호 다 캐내었을 테지만 그땐 그럴 마음이 없었다. 신문과 성경을 든 블랙 톤 뿜뿜인 내게서 어떤 매력을 느꼈을진 모르겠다. 신비주의 끝판 왕과도 친해지고 싶다는 의미 아니었을까. 뒤늦게 깨닫는 일들이 있다. 소중한 줄 알지 못하는 순간들이 얼마나 많은지. 돌이키지 못할 시점 언제나 과거와 만날 때면 아쉬움만 뒤따른다.

의외였다. 후회의 낯빛이 머문 자리는 여자애가 아니라 남자애였다. 같은 날 신학교에 입학한 영어과 동기에게 측은지심 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신학과를 같은 믿음, 같은 신앙 가진 이들이 비슷한 소명을 가지고 오는 데라고 생각한다. 나도 그런 줄 알았다. 학부 4년 동안 눈으로 본 믿음의 개수만 가지처럼 뻗어나갔다. 중도에 보험설계사, 바리스타, 편의점 알바로 꺾인 신앙인만 부지기수다. 뜨거운 믿음을 가지고 걸어간 인간도 있었지만 왜 왔는지 모를 인간도 있었다.

소명(召命·calling)
하느님의 일을 하도록 하느님이 인간을 선택해 부름을 이르는 말. 개신교회에서는 일반 신자에게 성경 구절을 개인적으로 깨닫고 하느님께서 자신을 불렀다고 믿으며 목회자에게는 목회자로서의 할 일을 성경으로 말씀한다고 믿는 신앙을 가진다.

◇특명, 대학 첫 과제
2013년 대학 입학한 그 시절은 빡센 기도와 뜨거운 신앙이면 다 되는 줄 알았다. 오리엔테이션 같은 조로 배정 받은 서안이를 보며 든 생각이었다. 르호봇 프로젝트로 알려진 조장이 조용히 나를 불렀다. “재현아, 사실 서안이가…”로 시작해 “약도 먹고 있고…”로 이어져 “알았지? 그러니까…”로 마무리되는 순간 고지식한 나라도 눈치 채지 않을 수 없었다.

생각보다 이상한 애는 아니었다. 웃어야할 때 같이 웃었고 진지할 땐 진지했다. 거리낌 없는 녀석으로 보였다. 어둔 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마음에 품은 여자애를 말하며 이야깃거리 중심에 선 걜 보며 ‘쟤가… 우울증?’ 같은 의구심도 들었다. 이따금 “약 먹고 왔다” 귀띔할 때면 마음 졸이게 만드는 그런 애였다. 그러다 조용히 나를 불러 심리적 압박을 토로할 때면 우울증 환자임이 실감났다. 함께 마음 모아 기도했다. 식사 때마다 서안이의 심리를 위해 기도했다. 이서안은 숫기도 없었고 믿음도 없었다. 자존감도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오티를 마치고 서안에게 힘이 되는 고백을 받았다. “도와줘서 고마워.” 조장 선배도 “수고했다. 재현.” 기분 좋게 한 학기 시작할 에너지를 얻었다. 덤으로 윤대풍, 최시규라는 친구도 사귀었다.

서안이와의 관계는 계속 이어졌다. 식곤증이 몰려올 때마다 대풍이 방에서 놀던 중 찾아왔다. 이것저것 얘기하는 주제들이 가볍지 않았다. 서안이 문제는 모조리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일들이었다. 논리만으로 풀기 어려운 사적이고 감정적인 실타래였다. 문장 몇 마디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총체라고나 할까.

서안이 문제라서 대충 얼버무리고 끝낼 문제가 아니었다. 인간의 문제였고 더 나아가 영적인 시각으로 보면 풀 수 있는 문제라고 믿었다.

◇뜻밖의 공격, 기도하면 달라지리라 믿었는데
시규와 대풍이를 불렀다.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보통 문제가 아니더라.”

“매일 7시에 대강당에서 기도한단 말야. 데려가서 같이 기도하면 되지 않을까?”

“나도 재현이처럼 기도하고 금식하면 된다고 생각해.”

나와 대풍이는 기도 하나면 충분하다고 믿었다. 같이 성경을 읽으면 하나 둘 눈이 뜨이면서 삶이 달라질 거라고 믿은 것이다. 시규는 달리 생각했다. 어차피 인간은 달라지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괴물 앞에서도 그러려니 바라만 보는 성향의 녀석다웠다. 난 시규를 무기력한 놈쯤으로만 생각했다.

내일 당장 수업을 마치고 도서관에서 성경을 정독했다. 매일 저녁 7시면 서안이와 대강당으로 달려가 기도했다. 기도하면 마음이 편안했다. 퀘스트 달성하듯 만족감이 밀려온 것이다. 서안이도 나처럼 생활하면 달라질 거라 굳게 믿었다. 처음에는 나를 따라 대강당에서 기도하는 모습에 흡족했다. 서안이를 키우는 기분이랄까. 얼마 지나지 않아 만족감은 약발을 다해갔다.

대풍이네 방에서 쉬던 중, 시규가 묵직하게 한 마디했다.

“재현. 인간은 아무 것도 못한다네.”

그땐 알아듣지 못했다. 계획대로 서안이를 끌고 가 매일 저녁 대강당에서 1시간씩 기도했다. 옆에서 자는지 노는지 모를 어둠 속 서안이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서안이를 위해 기도했을 뿐이다. 나아지게 해 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옆에서 서안이가 물었다. 

“네가 듣는 노래 나도 들을래.”

두 줄로 나뉜 이어폰에선 예수전도단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가 울렸다. 저녁 7시부터 한두 사람으로 시작한 기도 소리는 두 세 사람 모이기 시작하면서 기도 소리로 자욱해졌다. 밤 9시. 밀도 높은 공간에서 내 목청도 높아져갔다.
“주의여…….”

“예쑤!”

한 달쯤 지났을까. 두 시간 기도 시간은 9시에서 8시 반. 8시 반에서 8시로 줄어들었다. 서안이는 진즉 사라진지 오래다. 기도 소리는 날이 갈수록 줄어들었다. 어느 날은 피곤해 졸면서 찬양만 듣다가 주여 삼창에 화들짝 깨기도 했다. 문제는 낮에도 이어진 졸음이다. 성경만 보면 눈꺼풀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불안이 휘몰아치면서 하나의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나 같은 게 신학교에 온 것만으로도 사치일지 몰라.’ 

수빈이와 첫 만남
“우울증 약 복용하고 있대”
겉으론 평범하게 보였어도
하나 둘 드러난 정신 문제

해결이랍시고
기도와 성경이면 되리라고
매일 저녁 기도 열중했지만
갑자기 닥친 번아웃 신드롬

매서운 고독
신의 침묵에 괴로운 마음
‘신학교는 내 길 아닐지도’
뒤늦게 깨달은 인간관계

너답게 살고 있니?
복학 후 만난 그 아이에게
갈라진 미소 보며 묻는다

◇한 번도 신은 나를 부른 적 없었다는 충격 속에서
내가 선 이곳이 종착역이라 굳게 믿는 착각. 흔히 빠질만한 포트홀에 생각은 곁가지로 뻗어나갔다. 정말로 신학교에 입학한 결정이 하나님 당신의 뜻인지 의문이 들었다. 남들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라며 구절까지 꺼내들었지만 나에겐 내가 좋아하는 구절들뿐이었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이 복음은 유대 사람을 비롯하여 그리스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로마 1,16)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지, 제사가 아니다. 불살라 바치는 제사보다는 너희가 나 하나님을 알기를 더 바란다.”(호세 6,6)

자진해서 선택한 구절은 많았다. 많았지만 신은 내게 어떠한 신호도 주지 않았다. 신학교로 오기까지 고난은 많았다. 구약성경 탈출기에는 이집트에서 빠져나와 야훼가 명령한 곳 가나안으로 모험하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나온다. 막상 도착해 “쳐 죽이라”는 야훼의 명령을 지키지 않아 슬금슬금 이방 사상에 젖어버린 사건들이 벌어진다. 어쩌면 신학교도 가나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 말씀만 하소서.”

걸어갈 길이 아닐 가능성 앞에서 고개를 떨구었다. 슬픔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몸과 마음이 지쳐버릴 때면 일찍 대강당에 가서 기도(라 읽고 취침이라 말하는)를 마치고 나왔다. 어느 날은 답답해진 마음에 아무도 없는 대강당에서 바락바락 소리만 지르고 나온 적도 있었다. 

고독. 아무도 없음이 가슴에 와 닿았다. 힘들 땐 위로로 구해준 사람들이 정작 내가 힘들 땐 아무도 없는 미소의 역설을 느꼈다. 신조차 아무 말도 않는 이 상황이 괴로웠다. 기도만 한다고 성경만 읽는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일요일이면 담임목사는 귀신을 내쫓는 축사도 서슴없었지만 아무 짝에도 소용없었다. 힘없이 방학을 맞이했다. 무기력은 우울증만큼 나 모르게 스며들었다. 우울하지는 않는데 무얼 해야 할지 모르는 답보 상태가 이어졌다. 이와 중에 교회는 새벽예배나 나오라고 독촉했다. 심리적 파산 상태에서 뭐라도 시켜 노동력 쥐어짜려는 적극적인 의지였다.

신학교 입학 한 학기 만에 모든 꿈과 계획 그리고 희망이 박살났다. 남은 건 번아웃이었다. 무기력의 늪에 빠져든 것이다.

◇모든 것이 박살나자 유일하게 남은 교훈
시간이 흐르고 어른이 된 지금 서안이 같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말을 아낀다. 삶, 그 위로 수많은 층위가 켜켜이 쌓인 것을 본다. 그땐 다층적인 결을 보지 못했다.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귀신을 보고 영적인 눈이 뜨이기 바란 나머지 삶의 다층성을 보지 못한 역설이다. 모든 것을 영적으로 해석한 탓이다. 기도면 다 되리라고 믿었다. 현실은 서안이조차 원하는 대로 바꾸지 못했다. 정작 나 자신도 바뀐 게 없었다.

한국 사회에서 인간관계는 논리적이기보다 감정적인 태도에 더 가깝다. 학교만 해도 그렇다. 학교만 다녀오면 되리라 생각하지만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같은 반 아이들 사이의 보이지 않는 감정의 문제까지도 고려해야 한다. 3년이란 시간 꾹 참고 공부만 하면 된다고들 생각한다. 취업은 또 어떨까. 군대라고 무엇이 다른가. 인간이랍시고 계획을 세우지만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그 시절에는 알지 못했다.

적당히 학부 생활 즐기다가 정해진 시간에 맞추어 졸업만 하면 꿈을 이룰 거라 믿었다. 결과적으로 아무 일도 이뤄내지 못했다. 가장 큰 한 가지를 잃어버렸다. 꿈을 잃은 것이다. 눈빛에는 청년의 열정을 이용하던 교회만이 남아버렸다. 알 수 없는 신의 뜻에 자신의 의지를 담아 욕망을 성취하는 기독교인들이 보였다. 인간의 다층성을 회피하고 기도만이 전부라고 지껄이는 교회를 떠났다. 선의의 욕망을 이루려 수없는 청년들의 노동력을 낭비한 현실이 교회를 떠난 결정적 이유였다.

기억 속에서 지워진 서안이를 다시 만난 건 복학한 후였다. 한껏 기세등등해진 그에게 되도 않는 약속을 건넸다. “언제 한 번 밥 먹어야지.” “야, 말만 하지 말고 좀 사줘라.” 사실 상투적인 인사였다. 이후 카톡 프로필 사진으로 마주했다. 선글라스 끼고 주위 동기들로 둘러싸여 한껏 허세를 부리고 있었다. 그러나 금으로 갈라진 네 얼굴의 균열 속 미소에는 본연의 이서안이 또렷하게 보였다. 삶의 다층성 만큼이나 서안이의 얼굴에는 다채로운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이제 이서안은 없다. 언제나 남 눈치로 힘들어한 이서안은 없었다. 그런 이서안을 지워버리는 이서안만이 남았다. 성공적으로 이미지 메이킹에 성공한 서안이의 미소를 바라보았다.

그런 서안에게 이렇게 물었다.

‘너는 너답게 살고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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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조한 기억모음⑥] [1] 11년 전, 금빛 하늘 아래… 아이들의 힘찬 응원가 “빠따빠따빠따팀”

크리스마스 시즌도 벅찼는데, 여름방학까지 바빠진 건 신학교에 들어간 뒤부터였다. 교회 수련회에 따라다녀야 했는데,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교회학교와 중고등부, 청년부까지 모두 세 번. 한 번에 2박 3일에서 3박 4일씩, 한 달 가까운 시간을 교회에 바쳐야 했다. 그래서 가기 싫었다. 혼자 유유자적하게, 내 시간대로 여름을 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알바비 때문에 그러니? 목사님이 줄 테니까, 좀 가라.” 나는 결국, 하는 수 없이 교회 스케줄에 맞춰야 했다. 중고등부와 청년부까지는 수월했다. 어차피 프로그램은 이미 짜인 각본대로 움직이면 되었기 때문이다. 큰 업체에서 진행하는 행사라 교사 자격으로 아이들을 케어만 하면 됐다. 예배도 드리고, 물놀이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었다. 밤에는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산책도 하면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몸치 박치였던 내가, 이 세계에선 인기 교사? 문제는 교회학교였다. 중고등부와 청년부가 전국 단위로 여는 빅 텐트라면, 교회학교는 강원도 영동 지방의 교회들이 모여서 여는 스몰 텐트 수준이었다. 그러니까 나의 일손이 필요한 규모의 여름성경학교인 것이다. “선생님, 나가서 율동 좀 추세요.” 몸치 박치인 내가? 예배 중 갑작스러운 부탁에 시끌벅적했던 대성전이 한순간 고요해졌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거부 의사를 밝혔지만 두어 번만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시작부터 어긋나 버렸다. 말 그대로 무대 위로 나올 때까지 기다린 것이다. 나는 마지못해 무대 위로 올라갔고 속으로는 울면서 어설프게 율동하고 말았다. 동시에 마음의 상처도 입었다. 나와 이 여름성경학교는 맞지 않는 옷 같았다. 혼자 상처를 다독이다가 문득 한 가지를 깨달았다. 규모도 작고 나의 손길이 필요한 여름성경학교라…. 반대로 내가 나설 수 있는 무대이지 않을까. 무언가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할 수 있다’는 희망과 용기를 안고 예배 중 율동과 게임 등 다양한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풀이 죽어 있던 교사가 갑자기 의욕 넘치는 모습을 보게 된 아이들도 나를 따르기 시작했다. 툴툴 거리는 아이에게는 “대충대충춤추면서 하나님을예배해도돼 뭐든지 강제로하는건 하나님도좋아하지않으셔” 싸우는 아이에게는 “아니아니무슨일이야? 누가널화나게했니데리고와” 이제는 내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율동도 추면서 찬양 인도자보다 더한 성령 충만한 몸동작을 선보이며 아이들에게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문제가 터지면 터진 대로 찾아가 수습하고, 물어보면 물어보는 족족 방언 터진 것 마냥 성경적으로 대답하니 나도 아이들도 가까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믿을 수 없었다. 교회에서도 매일 방송실에서만 살다 보니, 내가 이렇게 붙임성 있는 인간인 줄은 몰랐다. 특히나 아이들과 이렇게 가까워질 줄은 상상조차 못한 것이다. 죽어도 하기 싫은 일 몸치 박치인 내게 선뜻“선생님, 율동해주세요” 어색한 강요 분위기에끝끝내 마상까지 입고 그래, 좋아, 그거야 ‘오히려 내 무대 아냐?’180도 달라진 내 모습 율동도 인솔도

[건조한 기억모음⑥] [2] 한여름 소년은 보았다 목마른 너의 가능성을

신학교에만 입학하면 뭐든 다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나의 허상은 단 한 달만에 산산히 부서졌다. 방학이 오기 전까지 나는 무력하게 지내야 했다. 목사는 끊임없이 “할 수 있다”는 새 능력만을 설교 했지만 나는 할 수 없다 는 무기력을 느꼈다. 1980년대의 부흥을 제창하는 교회에서 2014년도의 신앙을 가진 나와는 맞지 않았던 것이다. 우울증은 더욱 깊어만 갔다. 할 수 있는 사회에서 할 수 없다는 절망감은 나를 더욱 슬픔으로 몰아 갔다. 행위로 구원을 받는 교회의 능력주의가 빚어 만든 결과인 것이다. 필요할 땐 은혜를 찾으면서, 정작 중요한 순간엔 행위를 강조하는 교회의 이중적 신앙이 나를 절망의 수렁으로 빠뜨리고 말았다. 그런 어두운 수렁에서 나를 구해준 것은 하느님도, 목사도 아니었다. 먼 타지에서 나와 함께해 준 루디아 선교사였다. 루디아 선교사는 내가 다니던 학부 부설 기관에서 선교 활동을 위해 잠시 머물렀던 중년의 여성이다. 할 수 없다는 무기력에 사로 잡혔을 시절, 내게 가능성을 일 깨워준 사람이다. 11년 전 신문은 기록한다. “‘형제는 사람의 마음을 간파하고 그 사람에게 맞도록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방법론을 알고 있는 자다’라고 어두움 가운데에서 빛을 소개해주는 일이 있었다.” 교회에서는 무능력한 신학생, 할 줄 아는 게 없는 녀석, 심지어 눈치를 주기도 했다. 그러나 루디아 선교사는 남들이 보지 못한 나의 가능성을 선명하게 보았다. 그는 나에게 부활의 복음을 가르쳤고, 머지 않아 나는 신 죽음의 시대를 경험해야 했다. 그럼에도 루디아 선교사가 일깨워준 가능성은 훗날, 내게 재림 신앙을 되살리는데 영향력을 발휘한다. 언제나 교회에서 여름성경학교는 아이들의 삶을 바꿔 줄 기회라고들 광고한다. 그러나 정작 그해 여름성경학교는 아이들의 삶과 나의 삶을 바꾸지 못했다. 발견한 것은 있었다. 목마른 소년의 간절한 가능성을. 연결 기사 [건조한 기억모음⑥] [1] 11년 전, 금빛 하늘 아래… 아이들의 힘찬 응원가 “빠따빠따빠따팀”[건조한 기억모음⑥] [3] 수련회 때마다 반복된 ‘마귀의 역사’… 외로움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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