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성의 창 - Page 2

[시대성의 창] 예수가 다시는 부활하지 않았어도

브라우저가 오디오를 지원하지 않습니다. 향린교회가 재건축조합으로부터 예배당 침탈을 당했을 때의 일이다. 교인들은 향린교회 바깥 어두운 골목길에서 초라해 보이는 고난주간을 보내야 했다. 찬송가 147장 ‘거기 너 있었는가’ 힘없이 부르는 침참속 교인들 풍경이 낯설었다. 낯선 것은 예배뿐만이 아니었다. 기도하는 신자 분 메시지가 가슴에 와 닿았다. “십자가도 없이 싸늘하게 식은 저 예배당 안에서 홀로 눈물의 기도를 드리고” 있을 “그 예수를 우리가 구원해야 할 때”라고 규명한 그분은 예수의 힘없는 무력한 광경을 목도했다. 기독교인에게 신의 전능성은 ‘무소부재’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무엇이든 구해낼 수 있는, 무엇이든 가능한, 미래의 일들까지도 감찰하고 영향력을 발휘하는. 그러나 현대인에게 기독교적 신은 허상으로 보일 뿐이다. 전쟁을 막지 못했고, 죽어가는 사람들조차 구하지 못했으며, 고통 속에 신음하는 노동자와 절망으로 스러지는 노인들의 고의적 자해를 막지도, 없애지도 못한다.

[시대성의 창] 교회 바깥 나서면서 시작되는 것

채플하기 싫어서 대강당을 나가려던 차에 동급생과 눈이 맞았다. 점심을 먹자기에 식사했고 이대로 헤어지기 아쉬워 대학원 카페에서 2차를 보냈다. 세 시간 이어진 대화는 지난 번 이야기의 연장선이었다. 신학교에 입학해도 무얼 해야 할지 모른다며 한 숨 지었다. 기나긴 대화는 하나님이 어떻게 당신을 이끌어 가셨는지 재차 확인하던 자리였다. 그러나 그 뒤에 찾아오는 빈 공간, 다음 인생사 이야기를 어떻게 써내려가야 할지를 모르는 막막함이 느껴졌다. 촉. 그 때의 촉은 빗나가질 않았다. 미소는 밝지 않았다. 일찍이 자퇴한 친구가 있다고 말했다. 사진까지 보여주며 소개시켜 주겠다고 말했지만 한사코 거절했다. 영적인 세계에 몰두한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은 내 앞에 앉아서 곱상하게 웃기만 하던 이 자매는 인터콥 회원이다. 7년 전에도 인터콥이 어떤 단체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이들 회원을 강하게 붙잡던 거대한 이야기 하나. 복음의 서진(西進)이 이스라엘에 이르면 예수가 다시금 재림할 거라는 강한 믿음체계 신봉하던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이 단체 인터콥 창시자 최바울은 5년 전 목회자 국제선교 컨퍼런스에서 구속사적 신학으로 알려진 신약학자 헤르만 리델보스를 인용했다. “사도바울 관점은 구속 역사 그 자체의 사실이 중심이다. 그것은 ‘구원의 서정’이 아니라 ‘구속의 역사’다.” 구원에는 순서가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이끌어갈 보이지 않는 손에 주목한다. 백 투 예루살렘(back to jerusalem) 운동도 하나님이 만들어가는 마지막 시대, 종말의 때에 인터콥과 대한민국을 사용해 하나님 나라를 완성한다는 믿음체계다. 따라서 통치자가 나타나 세계를 통합해 사람들을 노예로 만든다던 80년대 세대주의 종말론을 재인용한다. 우리 손으로 마지막 시대를 만들어가자는 거창한 구호쯤으로 보일 테지만. 거대한 하나님 나라 비전에 이끌려 기꺼이 헌신하는 착취 구조를 들여다보거든 눈에 띄는 ‘빈 공간’이 거대 담론으로 가득 차 있는 모순이 보인다. 인터콥서 벗어난 심정 누구보다 이해하니까 신앙에서 벗어나 함께 모름의 바다 유랑하자
Today소랑 2026년 6월 21일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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