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망이의 신학 서재] 종교 다원주의: 기독교가 기독교이기를 포기할 수 있을까?

2021년 06월 15일

미망이의 평점
가독성│★★★
내용│★★☆
소장가치│★☆☆
보너스점수│☆☆☆
총점│6점

평점 기준
가독성
① 한 번에 읽기 쉬움 3점
② 두 번 읽어야 이해가 됨 2점
③ 세 번 읽어야 이해할 수 있을 경우 1점
④ 세 번 읽어도 어려운 경우 0점

내용
① 독서 후 다른 곳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유용함 3점 (다른 곳에 적용 가능성)
② 단순한 새로운 정보의 습득 2점 (다른 곳에 적용 가능성이 없음)
③ 새로운 정보 없이 기존 정보를 재편집 했을 경우 1점
④ 텍스트 오류 발견 시 0점

소장가치
① 평생을 두고 함께 갈 텍스트 3점
② ①의 경우에는 해당 되지 않지만 지인에게 한번은 추천할 텍스트 2점
③ 도서관에서 빌려볼 만한 책 1점
④ 안 봐도 그만인 텍스트 0점

보너스 점수
저자에 대한 호의감이나 감동 외에 기타 점수 1점

다원주의와 종교철학을 크게 생각해 본 일은 없었다. 내가 속한 기독교에 대한 이해도 부족할뿐더러 다른 세계 종교의 이해도 부족해 스스로 종교철학 본문을 읽으려던 마음이 없었던 탓이다. 피할 수 없는 전공필수 과목, 피할 수 없는 과제는 어쩔 수 없이 본문을 열고서 저자가 인도하는 종교 다원주의 세계로 향하게 만들었다.

본문의 1부는 학자 별 종교 다원주의를 유형에 따라 분류한다. 아쉽다면 저자가 소개하는 대부분 학자들이 기독교적 배경에서 이야기를 하는 점 하나. 만일 ‘기독교 다원주의’라는 제목으로 구성했다면 문제없을 테지만 이 책의 이름은 분명히 ‘종교 다원주의 유형’이다. 저자가 소개하는 학자들 대부분 기독교, 혹은 영미권 학자들로(파니카 한 분 빼고) 종교 다원주의를 말하려면 다른 종교의 목소리에도 귀 기울여야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슬람, 불교, 힌두교, 도교, 유교 학자들 목소리는 전무했다.

언어란 사고에 대한 표현이며 사용에 따라 권위가 부여되기도, 부여되지 않기도 한다. 종교 다원주의는 분명히 종교라는 상위 개념을 말한다.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종교 다원주의가 기독교 하나님의 배경, 혹은 영미권 학자들 사이에서만 이야기가 이어진다면 기독교 상위 개념인 종교라는 위치에서 말하는 게 아닌 기독교 그 자체 안에서만 이야기함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본문의 종교 다원주의는 언어가 가진 개념을 완전히 표현하지 못하며 나아가 힉의 지적처럼 기독교 제국주의적 성격이 가능한 게 아닐까.

◇기독교이기를 포기한 기독교 다원주의?
본문을 읽으며 고민된 지점은 기독교 다원주의에 대한 내 입장이다. 저자는 기독교 다원주의를 오늘날 피할 수 없는 상황으로 묘사하며 다원주의를 주장하는 학자들과 근거를 싣는다. 역사적 예수 연구 세미나 결과로 예수의 배타적 발언은 케리그마(κῆρυγμα) 선포일 뿐 역사적 예수의 발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288) 다시 말해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는 케리그마 예수와 케리그마 붓다가 만나는 게 아니라 역사적 예수와 역사적 붓다가 만나야지, 케리그마 간의 만남은 어렵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기독교가 가진 배타성은 케리그마라는 선포에 불과하다. 타종교와 만나 차이를 인정하는 자세를 넘어 상호간 변혁해야 할 필요성은 저자가 다원주의를 주장하는 근거다.(292) 저자가 정의한 신학은 틸리히(Paul J. Tillich)처럼 “기독교 메시지를 새로운 상황과 상호 관련시키는 작업”(297-8)이기는 하지만 종교 간 계속되는 대화와 상호변혁은 우리가 흔히 ‘이단’이라 부르는 집단에 대한 인정을 넘어 그들을 통해 ‘상호 변혁’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일 수 있다. 기독교가 이단으로 명명한 집단과 연합이 가능한 셈이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무엇일까. 사전의 정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며 인류의 유일한 구원자로 믿는 종교’(지식백과)라고 말한다. 기독교는 니케아-칼케돈 신조를 가지고 천 오백년 간 이를 부정하는 이들과 싸워온 종교다. 기독교 분파에서 기독교 기본 원리는 오직 성경이고 이를 이룩하기 위해 수많은 이들이 피 흘릴 만큼 중요한 전통이자 규범이다. 문영옥 연구자는 논문(니케아, 칼케돈 신조로 본 종교다원주의 신관의 문제연구)에서 종교 다원주의를 공통 합의인 니케아-칼케돈 신조를 근거로 비판한다. “유대인들의 배척이나 로마의 박해, 희랍의 철학이나 논리 앞에서도 결코 굽히지 않는 신앙을 보임으로써 진리를 수호하였는 바 이렇게 바른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정리되어 공표된 것이 바로 니케아 신조와 칼케돈 신조다.”(60)

케리그마(Kerygma)
신약성서에서 선포라는 단어로 사용했으며 설교를 의미한다.(마태 3,1; 누가 4,18-19; 로마 10,14; 1고린 2,4) 설교자가 세상을 향해 좋은 소식,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전파하는 일이 케리그마다. (장동진, 2010)

니케아 신조(Council of Nicaea) 325년 니케아에서 열린 기독교 공의회. 공의회를 통해 예수는 아버지와 동질하다고 보는 입장이 채택되어 아버지인 성부와 아들인 성자가 다르다고 보는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결정했다.
칼케돈 신조(Council of Chalcedon) 451년 소아시아 비티니아 도시 칼케돈에서 열린 기독교 공의회. 공의회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분리되지 않는다며 예수는 완전한 인간이자 완전한 하나님으로 고백한다.
알렉산드리아 사제 아리우스 아리우스는 성자 예수를 성부 하나님의 종속적 개념(이질)으로 주장했다. 성자와 성부는 본질이 같다고 발표한 니케아 신조에 의해 교회는 아리우스와 그 교리를 이단으로 분류했다.

진보 정당이 진보적이고, 보수 정당이 보수적일 때 당원들은 자신의 정당을 지지한다. 현실 정치에서 보듯 정당은 정당이 가진 강령과 색채를 잃을 때 몰매의 대상이 된다. 유권자가 각 정당의 강령을 보고 정당을 선택하듯 모든 사람은 종교의 자유와 선택의 권리를 가질 뿐, 하나로의 통합, 교리가 가진 정통과 역사를 부정하면서까지 변혁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 현재의 종교는 하나의 집단 체제이자 개인화된 종교로 전락했다. 피터버거(Berger)는 “오늘의 종교는 사회적 기능보다 개인적 기능에 머물렀다”고 지적했고, 루크만(Luckmann)도 “종교가 다원화 됐기에 종교는 사적인 일만을 담당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이원규, 종교사회학의 이해, 1997) 오늘의 종교가 자유로운 하나의 소비재가 되었고 집단성보다 개인의 안정과 평화를 위한 도구로 머물렀다. 종교가 굳이 자신이 가진 구호를 깨고 타종교와 대화를 넘어 변화를 추구하는 자세가 종교를 선택한(혹은 구매한) 이들에 대한 배신일 수 있고 그동안 지켜온 전통과 합의에 대한 도전이 될 수 있다.

따라서 기독교 다원주의에 대한 내 입장은 종교 간 상호 존중, 배려, 대화는 가능하지만 종교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변화해야 한다는 주장엔 의문을 던진다고 봐야 한다. 변화를 통해 종교는 종교가 가진 고유한 정체성을 잃을 수 있기에 대화와 만남에서 소극적일 수 있다는 점이 내 생각이다.

본문은 힉을 시작으로 캅까지 다양한 학자의 견해를 소개하지만 말 그대로 소개에 머물 뿐, 설득력을 지닌 내용은 없어서 학자들 의견에 동의하기 쉽지 않았다.

종교 다원주의는 필요한가
종교에 대화는 필요하지만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신앙
정체성 부정이 변혁일까

다원주의보다 토착화
다원은 본질에 영향주지만
토착화는 문화 변혁만 줘
문화-본질 사이 접촉해야

현실의 벽
문화와 본질은 무엇일까
분리·구분이 어려운 작업
끝없는 질문과 고민이 答

◇기독교 신앙을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토착화 신학
저자는 기독교 다원주의가 아니라 토착화를 언급한다. 다원주의와 토착화의 차이를 캅(John B. Cobb)과 신학자 변선환의 개념 차이로 설명한다. 캅에게 다원주의는 기독교와 불교가 만남의 결과로 ‘불교적 기독교’를 지향한다면 변 교수에게 토착화란 불교와 만남을 통해 기독교가 상호 보충되는 작업이다. 상호보충이란 비기독교적 종교의 통찰로 기독교를 더욱 심화하고 확대하며 더욱 풍요롭게 하는 일이다.(251) 따라서 저자에게 다원주의는 종교가 가진 본질을 변화할 위험을 가지지만 토착화는 본질과 문화를 분류해 본질은 고수하고 문화를 변혁시키는 일이다. 다원주의는 종교 간의 갈등을 다룬다면 토착화 신학은 종교 내 갈등을 우선적으로 다룬다. 저자는 토착화를 옹호하고 긍정하며 더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260)

기독교 경전인 성서도 히브리즘과 헬레니즘 문화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는 토착화 작업을 거쳤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현재 문화와 토양 안에서 토착화 작업은 필요하다. 다만 토착화가 저자의 말처럼 본질은 고수하고 문화를 변혁시키는 일일 텐데, 어느 순간 변화한 문화가 본질이 되어버린 경우. 예컨대 한국의 새벽기도, 찬양 문화, 기복 신앙은 한국 문화 안에서 자란 토착화 된 신앙인데 이게 어느 순간 본질의 개념으로 자리 잡아간 것처럼 대안 없는 점이 아쉬웠다.

◇하지만 토착화는 쉽지 않았다
토착화 신학의 한계와 대안을 잠시 고민해 봤지만 쉽지 않았다. 토착화 신학을 고민하기 위해 본질과 문화를 구별해야 하는데 이 작업부터 어려웠기 때문이다. 본질과 문화는 성서 안에서 구별해야 한다. 기독교의 규범이자 기독교의 하나님을 나타내는 가장 기본인 본문이 성서이고 이를 규범화한 종교가 기독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서 시대 문화에 감춰진 기독교(혹은 야훼 종교)가 아닌 원시 기독교 사상과 그들이 전한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데 문제는 원시 기독교를 찾는 작업이 결코 단순하지 않다. 성서 안에서 증언된 신의 모습은 계속해서 바뀐다. 단일신론, 유일신론, 삼위일체, 때로는 엄한 아버지, 사랑 많은 아버지처럼. 기독교인 관점에서 하나님은 사랑의 신으로 이해되지만 단순히 성서에서 하나님이 인류를 사랑하는 신이라면 기독교가 지닌 종교적 특성은 사라지고 만다. 누군가는 삼위일체 중 제2위격인 성자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죽은 사랑으로 다른 종교와 비교하지 못할 특성으로 주장하지만 이미 다원주의자들이 밝히듯 다른 종교 안에서 유사한 사례를 찾을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어려운 과정을 거쳐 토착화 신학 연구자가 해야 할 두 번째 과제는 무엇일까. 현 시대의 문화를 이해하는 작업이다. 쉽지 않다. 한국의 문화는 빠르게 변화한다. 기독교 본질과 문화, 이 땅의 문화 분석이 마쳐지면 첫째, 둘째 단계에서 적용점을 찾고 이 과정에서 교회사를 통한 토착화 성공과 실패를 분석하는 작업이 세 번째 단계다. 동시에 토착화된 신학이 교리화하는 현상을 계속해서 경계해야 한다. 토착화 신학 과정은 이처럼 오랜 시간과 사유, 많은 신학적 지식을 요구한다. 한 순간에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변화하는 현대 문화와 기독교의 본질을 접촉하는 흐름이며 이를 멈추는 순간 문화의 개념 속 토착화 신학은 어느 순간 본질의 개념이 되고 만다.

대안은 무엇일까? 아직도 모르겠다. 변명으로 보이겠지만 ‘끊임없는 고민’이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자신의 신학을 하나의 교리 상태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자기 신학의 문제를 찾으며 보완하는 시도만이 토착화 한계를 깨는 답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질문을 던지지 못해 아쉬워
서평을 ‘종교 다원주의’에 맞춰 할지, ‘토착화’에 집중할지 많은 고민이 됐다. 분명 본문에서 원한 내용은 종교 다원주의지만 저자는 토착화에 방점을 둔다. 독서는 본문을 통한 저자와의 대화이기에 토착화 부분에 무게를 실어 서평을 써 내려갔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건 저자가 소개하는 학자들 견해에 더 깊은 생각을 이어가지 못한 점, 저자가 소개한 학자들 이론만 간략히 정리한 점이다. 예를 들면 힉(John H. Hick)에게 사이비 종교의 진실성, 도덕적 기준과 비전, 가치가 있으면 참 종교라고 주장하지만 진정한 기준이란 게 있는 건지, 월프레드 스미스(Wifred C. Smith)에겐 종교 간 만남에서 자신의 종교 전통에 대한 확신이 강해지는지, 거꾸로 개종 당하는 경우도 있지 않은지를 묻고 싶었고 파니카(R. Panikkar)에게 우주와 신을 구분한 구체적 근거를 묻고 싶었다. 니터(Paul F. Knitter)에게 가난한 자에 대한 해방이 구원이라면 부유한 자에겐 구원이 필요 없는지, 네오마르크시즘(neo- marxism)에 의하면 부유한 자에 대한 배려가 존재하는데 니터는 어떤 생각을 하는지. 학자들과 다양한 대화를 생각으로 이어가고 싶었지만 과제로 인해 학자들 생각을 깊이 생각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았다.

소득이라면 본문으로 제대로 고민 한 번 해보지 못한 토착화에 대해 한 시간 가량 통학길, 함께 공부하는 이들과 대화하고 생각할 수 있어 과제임에도 꽤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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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만 읽으면 되지, 굳이 구약도 봐야 하나” 그래서 교회는 구속사에 주목한다

같은 신명기 문헌 안에서 연좌제 허용·불허 왜 일까 수많은 사람 손 거친 결과 기독교라 부르는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는 구약과 신약을 경전으로 인정한다. 가톨릭은 더 나아가 제2경전이라 부르는 ‘토빗기’ ‘바룩서’ ‘집회서’ ‘마카베오서’ 등도 경전으로 받아들인다. 기본적으로 구약은 고대 이스라엘을 다룬다. 어려운 구약을 굳이 공부해야 하는지 의문이 든다. 명확하게 예수의 생애와 죽음, 부활, 재림을 말하는 신약만 공부하면 되지 않을까 묻는 이들도 있다. 신약성경 중 복음서를 읽다보면 각주에서 구약성경 주소를 볼 수 있다. 신약성경 구절이 구약과 연결된다는 의미다. 마태7,23에서 각주는 시편6,8을 가리킨다. 마태복음서에서 예수가 시편 구절을 인용해 설교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복음서 외에도 바울 서신이나 일반 서신에서도 구약 인용을 볼 수 있다. “마음이 한껏 부푼 교만한 자를 보아라. 그는 정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하박2,4) “하나님의 의가 복음 속에 나타납니다. 이 일은 오로지 믿음에 근거하여 일어납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한 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한 것과 같습니다.”(로마1,17) 하박국과 로마서 본문을 정독하다보면 바울 사도가 하박국 구절을 인용하며 재해석함을 알 수 있다. 하박국서 내용은 ‘왜 하나님을 믿는 백성은 힘들게 살며 믿지 않는 이방인은 승승장구하느냐’는 물음(1,2-4)에 야훼 하나님이 “정한 때가 올 때까지 기다려라”(2,3)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4)며 믿고 기다릴 것을 독려한다. 그러나 바울은 하박국의 의도대로 인용하지 않는다. 단순히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말하려함이 아니다. 유대인에게 향한 구원이 이방인에게까지 전해지면서 바울은 “복음이 부끄럽지 않다”는 맥락에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라” 권면한 것이다. 리처드 헤이스(Richard B Hays)는 ‘바울서신에 나타난 구약의 반향’에서 구약의 메시지를 문자 그대로 인용한 것이 아니라 바울이 살던 상황에 맞게 재해석한 것을 지적한다. 따라서 연구자 조주희도 논문(어거스틴, 칼빈과의 비교를 통한 조나단 에드워즈의 구속사적 성경해석에 관한 연구, 2015)에서 칼빈은 구약의 역할에 대해 구약성경을 해석하기 위해 신약성경을 지침서로 활용한 점을 가리켰다. 예수 그리스도 역할을 구약 본문으로 인용하는 해석 방법은 가톨릭이나 개신교나 비슷하다. 단지 가톨릭 교부 전통과 루터의 해석 방식, 칼빈의 해석 방식 등으로 세분화되어 차이를 만들 뿐이다. 개신교회는 이를 ‘구속사’라고 부른다. 유대교는 신약을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으므로 구속사 관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쯤 되면 신약은 구약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신약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구약도 필요하다. 신약과 구약을 떼어 한 경전만을 중요하게 생각해서도 곤란하다. 그래서 가톨릭과 일부 교회가 성경 읽을 때 구약과 복음서, 서신서 세 군데를 모두 읽는 게 아닐까. 누가 구속사적 해석 방식을 시작했는지 모른다. 성경 형성 과정을 보면 이해 가능하다. 구약은 얌니아 회의(기원후 90년)를 통해 확정되었으며 신약은 카르타고 공의회(기원후 397년)에 이르러서야 정경 과정을 마무리한다. 예수가 죽고 300년가량 지나서야 신약조차 정경으로 완성되어 지금에 이르렀고 구약은 말할 것 없이 원본을 확보할 시간과 여력도 턱없이 부족하다. 오늘의 성경으로 만들어지는 과정 속에서 사라지고 추가된 문헌 자리는 오늘 우리의 성경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없음’ 구절 속에는 성경 형성 과정이 응축되어 있다. 다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누구의 손에 의해 지금에 이르렀는지 정확히 알지 못할 뿐이다. 신명5,9에서는 연좌제를 허용하지만 신명24,16에는 연좌제를 부정하는 성경 내용상 불일치를 설명하지 못한다. 같은 신명기 문헌 속에서 불일치가 나오는 이유는 성경이 다양한 사람들의 손에 의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약성경으로 모든 신약성경을 재해석할 수는 없다. 마태2,23에서 나사렛 사람이라 부를 것이라 예언한 구약 문헌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잘한 성경 속 오류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도 성경을 완벽히 해석할 수 없다. 이쯤 되면 ‘구속사’ 용어 자체가 필요한지 의문이 든다. 가톨릭도 예수의 죽음, 부활, 재림으로 이어지는 예수로부터 시작될 해방을 믿는다. 자기가 해석한 성경이 더 구속사 관점이고, 더 예수 중심이라는 미사여구가 아닌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세상에는 완벽한 해석이란 없다.

[미망이의 신학 서재] “호오, 의외네요.” 非전공자가 쓴 성경 통독서라니…

“호오, 의외네요.” 만화 드래곤볼에서 악당 프리더는 예상 못할 만큼 강해진 주인공 일행에 놀란다. “호오 전투력이 상승하는군요.” 한 페이지 펼치자 엇비슷한 입버릇이 나왔다. 저자가 신학이나 종교학 전공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공자 아닌 사람이 성경 가르치는 책을 쓰다니. 그렇다고 전공자만 써야 한다는 편견에서 느낀 당혹감은 아니었다. 전공자도 어려워하는 성서에 관한 글쓰기를 일반 신자가 감당했다는 사실에서 의외라고 생각했다. 의외는 이어졌다. 본문 초반부터 다른 성경통독 서적에서 다루지 않는 성서 번역의 역사를 다룬다. 보통 신학을 모르는 일반 신자들은 성경에 과도한 신성을 부여한다. 따라서 신의 가르침과 의미를 성경이라는 문자로 가두어 또 다른 우상을 만드는 실수를 저지른다. 이 책은 다르다. “우리는 ‘신이 메시지를 준 대상이 고대인이었다’는 것을 반드시 인식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 읽을 때는 현대 뉴턴적 세계관으로 해석하고 분석하는데 정력을 소비하는 것보다 고대인들이 어떤 역사적 경험을 했으며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32쪽) 기독교인 다수가 가진 성경에 대한 생각에 도전장 내밀며 포문을 연 것이다. 신학교에선 저자의 주장은 너무도 당연하다.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저자가 집필했다니. 흥미롭고 재미있다. 미망이의 평점가독성│★★★내용│★☆☆소장가치│★★☆보너스점수│★☆☆총점│7점 평점 기준가독성① 한 번에 읽기 쉬움 3점② 두 번 읽어야 이해가 됨 2점③ 세 번 읽어야 이해할 수 있을 경우 1점④ 세 번 읽어도 어려운 경우 0점 내용① 독서 후 다른 곳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유용함 3점 (다른 곳에 적용 가능성)② 단순한 새로운 정보의 습득 2점 (다른 곳에 적용 가능성이 없음)③ 새로운 정보 없이 기존 정보를 재편집 했을 경우 1점④ 텍스트 오류 발견 시 0점 소장가치① 평생을 두고 함께 갈 텍스트 3점② ①의 경우에는 해당 되지 않지만 지인에게 한번은 추천할 텍스트 2점③ 도서관에서 빌려볼 만한 책 1점④ 안 봐도 그만인 텍스트 0점 보너스 점수저자에 대한 호의감이나 감동 외에 기타 점수 1점 ◇내용은 쉽지만 구약의 존재를 묻게 만드는 구성 “일반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학자들이 그간 써놓은 내용을 정리했다”(머리말) 전체적으로 괜찮은 입문서로 보인다. 중간사 몇몇 부분을 제외하면 성경 기본 지식이 없는 사람도 충분히 읽을 정도로 쉽다. 하지만 ‘좋은’이 아니라 ‘괜찮은’으로 평가한 이유는 두 가지 문제 때문이다.

순복음 신앙의 별이 지다

여의도 순복음교회 원로목사 靈山 조용기… 85세 일기로 逝去 여의도 순복음교회 조용기 원로목사가 85세 일기로 서거했다.(2021.09.14) 지난해 7월 뇌출혈로 쓰러져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서울대병원으로 옮겨 입원 치료를 받았다. 지난 2월 부인인 고(故) 김성혜 한세대 총장 장례식에도 참여하지 못했다. 조 목사는 2020년 7월 19일 ‘예수님과 강도’라는 제목으로 설교했으나 생방송이 아닌 녹화 방송으로 보이는 영상물로 설교를 대체한 바 있다. 안경을 쓰지 않은 채로 오른쪽 눈을 감고 설교하고서 뇌출혈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세계 최대 교회 여의도 순복음교회를 설립한 조용기 목사는 해방 이후 서울 서대문구 대조동에서 1958년 5월18일 5명의 교인으로 개척했다. 1961년 천막 성전에서 서대문성전으로, 1969년 여의도 부지에 지금의 여의도 순복음교회 건물을 세웠고 1979년 교인 10만명을 돌파해 기념 예배를 드렸다. 1984년 ‘순복음중앙교회’에서 ‘여의도 순복음교회’로 개명했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08년 담임목사 직에서 은퇴한 조 목사는 원로목사로 취임했고 2020년 7월까지 주일4부예배에서 설교를 진행했다. 제2대 담임목사로 취임한 이영훈 목사가 뒤를 잇고 있다. 조용기 목사는 평소에 복음성가를 작사했다. 아내

조용기 목사 서거에 한국교회 이어진 哀悼

여의도 순복음교회 조용기 원로목사 서거에 한국 보수교회는 침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한국교회총연합은 ‘고 조용기 목사님의 한국교회장에 즈음하여’ 성명을 통해 “산업화 시대, 실향민이 서울로 집중되는 변화의 시기에 십자가 복음을 통한 삶의 변화와 긍정적 삶의 가치를 가르치며 모든 국민에게 희망으로 세상을 이길 용기를 갖게 했다”며 “어려운 이웃을 돌보기 위해 NGO 선한사람들 설립과 헌혈 운동 등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며 한국교회를 위한 큰 족적을 남겼다”며 애도했다. 한국교회연합은 ‘조용기 목사님의 소천을 애도합니다’ 성명에서 “지금도 까랑까랑한 음성으로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3요한
Today소랑 2026년 6월 21일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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