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칼럼] 인스턴트 신앙

2020년 02월 09일

신학교에서 기도 배틀을 한 적이 있었다. 누가 기도빨이 잘 먹히나 내기였다. 상대는 수십 년을 오순절 신앙으로 무장한 동기, 한 놈은 걸그룹 믿는 이단아.

서로가 서로를 겨냥한 채 너의 기도가 응답되면 오늘부로 신앙 그만두겠다고 삿대질 했다. 이렇게 된 까닭엔 신앙으로 병 고쳐야 하지 않겠냐고 싸워댄 탓이다. 오순절 신앙을 고수한다잖은가. 안아키(약 안쓰고 아이 키우기) 수준은 아니나, 유사 안아키(?)라 생각한 배경에는 영분별과 치유의 은사를 운운한 단언 때문이라.

한국교회에는 다양한 기도 방법이 존재한다. 금식기도, 대적기도, 선포기도, 부르짖는기도, 관상기도, 땅밟기기도, 호흡기도, 방언기도, 중보기도, 주여삼창. 대게 ○○기도 호칭하는 분일수록 영적인 세계를 강하게 믿는다. 아예 대화할 때 “영적인 세계 믿지?” 전제를 깔고 대화하는 사람도 봤다. 무엇이든 영과 육으로 나눈 후 육이 볼 수 없는 세계를 정복해야 한다고 믿는다.

금식이야 성경에 나온 대표적인 신앙 행위지만 중보기도를 제외하면 그 놈의 ‘영적’으로 해석해야 이해 가능한 기도들이다. 대적기도와 선포기도가 그렇다. 마귀, 사탄, 귀신을 상대로 대적할 때 효능이 생기는 기도인데 거기에 이름을 붙이면 힘이 세진다. 우울의 영, 게임의 영, 독감의 영, 죽음의 영, 아이돌의 영. 하여튼 그 영들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명할 때 떠나간다 믿는 것이 골자다. 꼭 주여삼창해야 마음이 시원해진다거나, 귀신 떠나가라 선포할 때 아멘해야 신통하다든지. ‘신통(神通)’이란 말만 안 썼을 뿐이지 분위기는 영적도해와 다를 바 없다.

기도에 효능이 없다거나 성경대로, 문자대로 기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지 않다. 신을 필요로 할 때 찾고, 필요 없을 때 안 찾는다고 조롱할 목적도 없다. 기도를 자기만의 정의(定義)로 삼는 게 문제다. 신학교 선배는 이걸 ‘인스턴트 신앙’이라 평했다. 우울증이 발생한 원인을 내부에서 찾지 않고 외부, 마귀, 귀신, 사탄에게 찾는다고. 아무리 선포기도 한들 없던 귀신이 곱게 떠나겠나. 지옥 같은 삶은 여전할 테지.

때론 이분화 된 시각도 필요하다. 그렇다고 세상만사 이분화 프레임에 가둬서도 안 된다.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도 그렇다. 인간의 한계를 표현한 바울 사도가 “랄랄라따따따” “예쑤~!” “떠나가라!”는 기도 소리에 무슨 생각을 할까. 아, 기도 배틀 어떻게 됐냐고? 중년의 전도사 찾아가서 안수기도 받았다. 나는 아니고 동기가. 감기 걸려 골골대던 그에게 기도를 읊어주던 전도사와 함께 나도 손을 얹고 눈감았다.

“사랑하는 ○○ 형제가 아픕니다. 병 고쳐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하여 기도하오니 응답해주시옵소서.”

당연히 나았을까. 여전히 골골대며 돌아오는 길, “좀 나은 것 같은데?” 한마디 외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낫기를 바라는 열망과 이미 골골대던 상황을 인지하고 기도해준 손길마저 매도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여튼 동기 녀석 신념보다 러블리즈 지수가 더 센가보다. 서지수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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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만 읽으면 되지, 굳이 구약도 봐야 하나” 그래서 교회는 구속사에 주목한다

같은 신명기 문헌 안에서 연좌제 허용·불허 왜 일까 수많은 사람 손 거친 결과 기독교라 부르는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는 구약과 신약을 경전으로 인정한다. 가톨릭은 더 나아가 제2경전이라 부르는 ‘토빗기’ ‘바룩서’ ‘집회서’ ‘마카베오서’ 등도 경전으로 받아들인다. 기본적으로 구약은 고대 이스라엘을 다룬다. 어려운 구약을 굳이 공부해야 하는지 의문이 든다. 명확하게 예수의 생애와 죽음, 부활, 재림을 말하는 신약만 공부하면 되지 않을까 묻는 이들도 있다. 신약성경 중 복음서를 읽다보면 각주에서 구약성경 주소를 볼 수 있다. 신약성경 구절이 구약과 연결된다는 의미다. 마태7,23에서 각주는 시편6,8을 가리킨다. 마태복음서에서 예수가 시편 구절을 인용해 설교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복음서 외에도 바울 서신이나 일반 서신에서도 구약 인용을 볼 수 있다. “마음이 한껏 부푼 교만한 자를 보아라. 그는 정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하박2,4) “하나님의 의가 복음 속에 나타납니다. 이 일은 오로지 믿음에 근거하여 일어납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한 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한 것과 같습니다.”(로마1,17) 하박국과 로마서 본문을 정독하다보면 바울 사도가 하박국 구절을 인용하며 재해석함을 알 수 있다. 하박국서 내용은 ‘왜 하나님을 믿는 백성은 힘들게 살며 믿지 않는 이방인은 승승장구하느냐’는 물음(1,2-4)에 야훼 하나님이 “정한 때가 올 때까지 기다려라”(2,3)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4)며 믿고 기다릴 것을 독려한다. 그러나 바울은 하박국의 의도대로 인용하지 않는다. 단순히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말하려함이 아니다. 유대인에게 향한 구원이 이방인에게까지 전해지면서 바울은 “복음이 부끄럽지 않다”는 맥락에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라” 권면한 것이다. 리처드 헤이스(Richard B Hays)는 ‘바울서신에 나타난 구약의 반향’에서 구약의 메시지를 문자 그대로 인용한 것이 아니라 바울이 살던 상황에 맞게 재해석한 것을 지적한다. 따라서 연구자 조주희도 논문(어거스틴, 칼빈과의 비교를 통한 조나단 에드워즈의 구속사적 성경해석에 관한 연구, 2015)에서 칼빈은 구약의 역할에 대해 구약성경을 해석하기 위해 신약성경을 지침서로 활용한 점을 가리켰다. 예수 그리스도 역할을 구약 본문으로 인용하는 해석 방법은 가톨릭이나 개신교나 비슷하다. 단지 가톨릭 교부 전통과 루터의 해석 방식, 칼빈의 해석 방식 등으로 세분화되어 차이를 만들 뿐이다. 개신교회는 이를 ‘구속사’라고 부른다. 유대교는 신약을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으므로 구속사 관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쯤 되면 신약은 구약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신약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구약도 필요하다. 신약과 구약을 떼어 한 경전만을 중요하게 생각해서도 곤란하다. 그래서 가톨릭과 일부 교회가 성경 읽을 때 구약과 복음서, 서신서 세 군데를 모두 읽는 게 아닐까. 누가 구속사적 해석 방식을 시작했는지 모른다. 성경 형성 과정을 보면 이해 가능하다. 구약은 얌니아 회의(기원후 90년)를 통해 확정되었으며 신약은 카르타고 공의회(기원후 397년)에 이르러서야 정경 과정을 마무리한다. 예수가 죽고 300년가량 지나서야 신약조차 정경으로 완성되어 지금에 이르렀고 구약은 말할 것 없이 원본을 확보할 시간과 여력도 턱없이 부족하다. 오늘의 성경으로 만들어지는 과정 속에서 사라지고 추가된 문헌 자리는 오늘 우리의 성경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없음’ 구절 속에는 성경 형성 과정이 응축되어 있다. 다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누구의 손에 의해 지금에 이르렀는지 정확히 알지 못할 뿐이다. 신명5,9에서는 연좌제를 허용하지만 신명24,16에는 연좌제를 부정하는 성경 내용상 불일치를 설명하지 못한다. 같은 신명기 문헌 속에서 불일치가 나오는 이유는 성경이 다양한 사람들의 손에 의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약성경으로 모든 신약성경을 재해석할 수는 없다. 마태2,23에서 나사렛 사람이라 부를 것이라 예언한 구약 문헌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잘한 성경 속 오류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도 성경을 완벽히 해석할 수 없다. 이쯤 되면 ‘구속사’ 용어 자체가 필요한지 의문이 든다. 가톨릭도 예수의 죽음, 부활, 재림으로 이어지는 예수로부터 시작될 해방을 믿는다. 자기가 해석한 성경이 더 구속사 관점이고, 더 예수 중심이라는 미사여구가 아닌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세상에는 완벽한 해석이란 없다.

[미망이의 신학 서재] “호오, 의외네요.” 非전공자가 쓴 성경 통독서라니…

“호오, 의외네요.” 만화 드래곤볼에서 악당 프리더는 예상 못할 만큼 강해진 주인공 일행에 놀란다. “호오 전투력이 상승하는군요.” 한 페이지 펼치자 엇비슷한 입버릇이 나왔다. 저자가 신학이나 종교학 전공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공자 아닌 사람이 성경 가르치는 책을 쓰다니. 그렇다고 전공자만 써야 한다는 편견에서 느낀 당혹감은 아니었다. 전공자도 어려워하는 성서에 관한 글쓰기를 일반 신자가 감당했다는 사실에서 의외라고 생각했다. 의외는 이어졌다. 본문 초반부터 다른 성경통독 서적에서 다루지 않는 성서 번역의 역사를 다룬다. 보통 신학을 모르는 일반 신자들은 성경에 과도한 신성을 부여한다. 따라서 신의 가르침과 의미를 성경이라는 문자로 가두어 또 다른 우상을 만드는 실수를 저지른다. 이 책은 다르다. “우리는 ‘신이 메시지를 준 대상이 고대인이었다’는 것을 반드시 인식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 읽을 때는 현대 뉴턴적 세계관으로 해석하고 분석하는데 정력을 소비하는 것보다 고대인들이 어떤 역사적 경험을 했으며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32쪽) 기독교인 다수가 가진 성경에 대한 생각에 도전장 내밀며 포문을 연 것이다. 신학교에선 저자의 주장은 너무도 당연하다.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저자가 집필했다니. 흥미롭고 재미있다. 미망이의 평점가독성│★★★내용│★☆☆소장가치│★★☆보너스점수│★☆☆총점│7점 평점 기준가독성① 한 번에 읽기 쉬움 3점② 두 번 읽어야 이해가 됨 2점③ 세 번 읽어야 이해할 수 있을 경우 1점④ 세 번 읽어도 어려운 경우 0점 내용① 독서 후 다른 곳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유용함 3점 (다른 곳에 적용 가능성)② 단순한 새로운 정보의 습득 2점 (다른 곳에 적용 가능성이 없음)③ 새로운 정보 없이 기존 정보를 재편집 했을 경우 1점④ 텍스트 오류 발견 시 0점 소장가치① 평생을 두고 함께 갈 텍스트 3점② ①의 경우에는 해당 되지 않지만 지인에게 한번은 추천할 텍스트 2점③ 도서관에서 빌려볼 만한 책 1점④ 안 봐도 그만인 텍스트 0점 보너스 점수저자에 대한 호의감이나 감동 외에 기타 점수 1점 ◇내용은 쉽지만 구약의 존재를 묻게 만드는 구성 “일반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학자들이 그간 써놓은 내용을 정리했다”(머리말) 전체적으로 괜찮은 입문서로 보인다. 중간사 몇몇 부분을 제외하면 성경 기본 지식이 없는 사람도 충분히 읽을 정도로 쉽다. 하지만 ‘좋은’이 아니라 ‘괜찮은’으로 평가한 이유는 두 가지 문제 때문이다.

순복음 신앙의 별이 지다

여의도 순복음교회 원로목사 靈山 조용기… 85세 일기로 逝去 여의도 순복음교회 조용기 원로목사가 85세 일기로 서거했다.(2021.09.14) 지난해 7월 뇌출혈로 쓰러져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서울대병원으로 옮겨 입원 치료를 받았다. 지난 2월 부인인 고(故) 김성혜 한세대 총장 장례식에도 참여하지 못했다. 조 목사는 2020년 7월 19일 ‘예수님과 강도’라는 제목으로 설교했으나 생방송이 아닌 녹화 방송으로 보이는 영상물로 설교를 대체한 바 있다. 안경을 쓰지 않은 채로 오른쪽 눈을 감고 설교하고서 뇌출혈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세계 최대 교회 여의도 순복음교회를 설립한 조용기 목사는 해방 이후 서울 서대문구 대조동에서 1958년 5월18일 5명의 교인으로 개척했다. 1961년 천막 성전에서 서대문성전으로, 1969년 여의도 부지에 지금의 여의도 순복음교회 건물을 세웠고 1979년 교인 10만명을 돌파해 기념 예배를 드렸다. 1984년 ‘순복음중앙교회’에서 ‘여의도 순복음교회’로 개명했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08년 담임목사 직에서 은퇴한 조 목사는 원로목사로 취임했고 2020년 7월까지 주일4부예배에서 설교를 진행했다. 제2대 담임목사로 취임한 이영훈 목사가 뒤를 잇고 있다. 조용기 목사는 평소에 복음성가를 작사했다. 아내

조용기 목사 서거에 한국교회 이어진 哀悼

여의도 순복음교회 조용기 원로목사 서거에 한국 보수교회는 침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한국교회총연합은 ‘고 조용기 목사님의 한국교회장에 즈음하여’ 성명을 통해 “산업화 시대, 실향민이 서울로 집중되는 변화의 시기에 십자가 복음을 통한 삶의 변화와 긍정적 삶의 가치를 가르치며 모든 국민에게 희망으로 세상을 이길 용기를 갖게 했다”며 “어려운 이웃을 돌보기 위해 NGO 선한사람들 설립과 헌혈 운동 등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며 한국교회를 위한 큰 족적을 남겼다”며 애도했다. 한국교회연합은 ‘조용기 목사님의 소천을 애도합니다’ 성명에서 “지금도 까랑까랑한 음성으로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3요한
Today소랑 2026년 6월 21일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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