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셀라 시론] 소녀의 이름으로

나는 이제껏 김용철의 새능력을 왜 더 빨리 탈퇴하지 못했는가에 대한 괴로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좀 더 빨리 탈교(脫敎) 했다면, 조금 더 빨리 관계를 정리했더라면…. 소년을 구하지 못한 죄책감은 우연히 입수한 18년 전, 한 영상을 보면서 오롯이 해소되었다. 연세중앙교회 YBS 인터뷰에 담긴 소년은 짐짓 말할 수 없는 모든 죄를 짊어진 표정으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알고 지은 죄인데 왜 그걸 지금까지 해결하지 못했는가….” 도대체 중학교 2학년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카메라 앞에 서서 자책하며 스스로를 옥죈단 말인가. 새능력을 탈퇴하고서 나는 단 한 번도 김용철의 설교를 끝까지 들어본 일이 없다. 양심에 찔려서도 아니고 눈물이 감격으로 앞을 가렸기 때문도 아니다. 1시간 설교 모든 문장 옭아맨 감정 동원과 협박 구조, 의미 없는 아멘의 반복, 철학도 신학도 없는 감정만 휘젓는 수준의 처참한 호통은 그의 설교를 들어보면 누구나 깨닫게 된다. 그는 오로지 의식의 흐름에 의지한 채 청중을 감정적으로 끌고 다닐 뿐이다. 각 단락 사이의 논리적 연결은 찾아볼 수 없다. 자기도취에 빠진 간증을 서사로 가져다가 어떻게든 이어 붙이는 게 전부다. 모든 것 공허함의 파도밖에 보이지 않던 시절, 나는 죽을 용기를 가지고 어둠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시절 스물 두 살의 나는 미지(未知)의 두려움을 견뎌야 했다. 이제는 지옥에 가는 건가 싶었다. 가족도, 연고도 없이 새능력에 붙잡혀 노동 착취를 당했어도 불안함은 가시지 않았다. 그로부터 10년이 흘렀다. 그동안 탈출이 재생되었다. 때로는 방송실 귀퉁이에서 일을 하는 장면이 꿈으로 재생되었고, 어쩔 땐 빠져 나오는 꿈을 꾸기도 했다. 많으면 한 달, 뜸하면 서너 달에 한 번 연속된 꿈은 새능력으로부터의 완전한 탈출을 가리키고 있었다. 과거의 나로부터 찾아오는 ‘시간의 죄책감’이 나를 오랜 시간 사로잡은 것이다. 몸은 난파선을 벗어났지만 아직도 나의 혼은 그곳에 갇혀 있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허물어지는 시간. 탈교는 무너진 영혼 속에서 재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저 어른들이 주입한 죄책감은 남은 인생의 각도를 비틀었다. 어그러진 관념과 여성성에 대한 왜곡된 이해는 긴 시간의 교정이 아니었으면 영구히 손상되었을 것이다. 바로 그 소년이 자신의 입으로 토설한 ‘알고 지은 죄’는 이브가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따먹은 상징이다. 왜곡된 여성 이해의 뿌리는 기독 담론 그 자체다. ‘성숙한 소녀’라는 어른들의 거짓말이 빚어 만든 망상이 소녀의 노동을 착취했고, 소년의 미래를 짓밟은 것이다. 탈교 이후 나는 차근차근 기독 담론을 해체하기 시작했고 비로소 소녀를 다시 발견하게 되었다. 그 소녀는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지,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천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악과를 먹은 후 야훼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침잠한 것처럼 나는 소녀 앞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되어가는 과정을 순연(純然)하게 바라보듯 과거의 시간을 다시 배열하고 재건하는 소녀의 손길을 말없이 볼 뿐이었다. 소녀는 잃었던 재주, 놓쳤던 이름, 잊혔던 얼굴을 되찾았다. 에덴의 난민, 아담과 이브는 재건의 기회조차 잃었으나 소녀는 신의 질서를 거스르고 마침내 ‘지금 여기(hic et nunc)’의 자리에 섰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소녀의 일하는 광경 속에서 기록하는 것뿐이었다. ‘기억의 화해’가

[사설] 그저 ‘병사1’로만 생각하는 정신머리 이런 게 해병 없는 ‘해병 정신’

2023년 7월 19일 경상북도 예천군 내성천에서 13명의 해병대원과 폭우 실종자를 수색하는 작전에 투입된 채수근 상병이 급류에 휩쓸려 순직한지 2년 10개월 만에 법원은 1심에서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다.(2026.05.08) 포병 대원이 구명조끼도 없이 허리 깊이까지 물에 들어가는 건 수색 작전이라 할 수 없다. 상급 지휘관의 성과 집착이 대원의 몸으로 지불된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임 전 사단장은 수중 수색 사진을 보고받고도 멈추지 않았다. 재판부는 이를 두고 “구체적 위험을 인지한 상황에서 위험을 가중시키는 지시”라고 밝혔다. 과실이 아니라 선택이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죗값은 징역 3년이었다. 특검은 5년을 구형했음에도 대원의 생명을 담보로 작전 성과로 밀어붙인 지휘관에게 법원이 매긴 값이 고작 그뿐이었다. 채 상병의 어머니는 선고 직후 법정을 떠나지 못했다. 군 복무로 나라를 바친 이들이면 먹먹해질 물음이다. “아들의 희생에 대한 책임이 이렇게 가볍다면 어느 부모가 안심하고 자식을 군에 보내겠느냐.” 임 전 사단장은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 “수중 수색을 지시한 건 내가 아니”라는 장문의 이메일과 문자를 보냈다. 재판부는 “오랜 재판 경력에서 이런 피고인을 본 적이 없다”고 질타했다. 해병 정신을 입에 달고 살던 사람이 해병의 죽음 앞에서 한 행동이 그것이다. 임 전 사단장의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를 적시한 2023년 7월, 해병대수사단이 경찰에 이첩하려 했을 때, 누군가 그것을 가로 막았다. 대통령실 번호로 걸려온 통화 뒤 14초 후 이첩 보류 지시가 내려간 것이다. 수사단장은 ‘집단항명의 수괴’로 입건됐다. 이첩을 막은 혐의로 기소된 윤석열의 재판이 진행 중이다. 1심 법원이 임 전 사단장의 과실치사를 인정했다는 것은 그 이첩을 막을 이유가 없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재판부는 말단 지휘관에게만 책임을 떠넘기는 군의 관행을 지적했다. 그 관행을 깨려 한 건 해병대수사단이었고 그것을 다시 덮으려 한 것이 침묵의 권력이었다. 해병 정신을 가르치던 이들이 누구보다 해병의 죽음을 덮으려 했다.

살기 위해 뭐든 하는 세상

2019년 08월 21일
“신학을 그만두고 약학을 전공한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2018. 4. 18). 이미 미국 유학길 채비를 마쳤기 때문이다(2018. 1. 6). 목회학석사를 밟을지, 신학석사를 밟을지 고민하던 목소리는 자기 힘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긴장감에 사로잡힌 상태였다(2018. 1. 10). 한 차례, 식어버린 치킨마요덮밥 앞에 훌훌 털듯 “아르바이트조차 부담스럽다”고 고백한 입술은 파르르 떨렸다(2018. 3. 20). ‘하긴, 나도 힘든 헬조선 너라곤 버텨낼 재간이 있겠니’ 생각하던 차 머지않아 그는 회심을 선언했다(2018. 3. 14). 썩어 문든 보수 교회와 운동권에 잠겨버린 진보 사이에 갇힌 이념 논쟁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존재로의 신앙인을 축원했다. 그 자유를 곧 과제 보이콧으로 행사했을 줄은 상상조차 못했지만(2018. 4. 29).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 희망의 메시지, 부흥을 주도한 교회라는 수식어가 무색하게 빈자리로 가득한 여의도 순복음교회 뒷좌석에 마주 앉아 두 손 들고 축도 중인 남자 앞에 고개를 떨궜다. 그 시절 희망과 할 수 있음은 지금 시대에 먹히지 않은 구호에 지나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이제는 교회서 울리는 너스래미 들을 시간이면 콘서트와 뮤지컬로, 하다못해 넷플릭스로 시간을 때운다. 종교를 가지지 않은 인구가 종교 가진 인구를 앞지른 지도 오래다. 두 손 들고 여의도에서 퍼져간 복음의 메시지가 그 시대에 희망이지 않았냐고 묻는다. 가끔은 빨래판에 올려둔 흰 교복 셔츠를 칫솔로 쓱싹쓱싹 문지르던 때가 향수로 돌아온다. 대형교회 향한 꿈은 내겐 빛나는 희망이자 내일을 살아낼 용기였다. 노쇠한 여든살 노인이 복음성가 1장을 부를 때면 눈물이 나왔는데 여전히 조용기 신화를 잊지 않은 탓일까. 번영신학 정점은 현실과 함께 허무하게 스러졌다. 왜 잘못을 논하는데 업적을 들이대나 싶을 테지만, 그렇다 치자. 시대가 변한 만큼 메시지도 발전해야 하지 않나. 그 시대에 은혜였다 셈 치자. 교인들을 무기력한 허상으로 좇아가게 만든 현실을 목도해도 된단 말인가.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3요한 1,2) 고백 앞에 눈물을 훔친 것처럼. 신앙으로 막 전향한, 알바조차 힘겨워한 남자 앞에 고개를 떨궜다. 나약해 보이던 남자는 누구보다 마음 속 진실함을 요구했다. 곧 관계가 파탄 날 것을 알았는지, 약학 전공한단 진솔한 연기도 보였다. 하나님 은혜가 필요하다던 신앙으로의 전향자에게 “희귀병을 앓고 있으니, 쉬어도 된다”고 말하자 당당히 조별 과제를 보이콧한 주체성에 감복했다. 자기보다 나약한 인간을 병신과 머저리로 치부한, 은혜를 가장한 연기에 감탄했다. 어차피 학부 시절 인간관계 파탄 내도, 당당히 아버지 빽으로 미국행 유학길에 오르면 될 테니까. 유학이 문제가 아니다. 갈 수 있다. 가면 된다. 가보라. 언젠가 신까지 팔아먹은 도피성 인생이란 현실 앞에 또 다시 좌절하고 죽음을 묵상할 테지만. 10년 전, 기독교 채널만 넌지시 시청하던 어머니께 조용기 실체를 토설한 아들이 떠올랐다. 저런 인간에게 돌아갈 헌금을 그만 내라던 아들에겐 그 시절도 은혜가 아니었다. 자유로운 인간이라 믿었던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죄라는 구도에 가둔 전략적 틀이란 사실을 선지자가 되어버린 아들이 말하고 있었다. 그 진실한 말을 그는 듣지 못했다.

[현실논단] 광복: 이 어처구니없음을 끝내고

2019년 08월 15일
존엄 파괴한 전체주의 光復, 전체주의 종결 교회 내 여전한 私益은 東奔西走하게 만들 것 “탈영한 아들의 시체 앞에서 느끼는 욕된 감정과 전사자로서 야스쿠니 신사에 안치된 아들의 영령 앞에서 흘리는 기쁨의 눈물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다.”(기억전쟁, 73) 제 2차 세계대전 종전 50주년을 맞아 1995년 일본 ‘아사히신문’이 게재한 권터 그라스(Gunter Grass)와 오에 겐자부로(大江 健三郎)가 주고받은 편지에서 사학자 임지현은 전쟁이 한창일 때 일본군 헌병대가 처형된 탈영병 시신을 짓밟는 모습에서 이를 지켜만 보던 어느 부모 이야기를 이렇게 표현했다. 처형된 자신의 아들을 치욕스럽게 여기며 “천황제로 대변되는 전체주의 윤리가 가족 안에까지 깊숙이 침투했기 때문”(73)이라던 오에의 지적에 지금 “이 나라가 파시즘”이란 비난을 잊게 만든다. 전체주의는 모든 영역을 제어하고 점령했을 뿐 아니라 인간이란 존재 자체에 침투해 인간됨을 잊게 만들었다. 한나 아렌트가 나치 전체주의를 지적한 지점이 여기였다. ‘전대미문의 극단적인 악의 출현’으로 가리킨 수용소가 등장하자 나치 체제는 유대인이란 이유로 무죄한 사람을 가둬 법인격을 말살했다. 유대인은 책임져야 할 가족을 죽음으로 몰 것인지, 친구를 죽여 살해해야 할지 양자택일 하도록 만들어 도덕적으로 인격을 말살시켰다. 인간성 상실의 핵심은 자발성의 상실이다. “파블로프의 개”로 묘사된 이들은 철저히 잉여 인간으로 전락했다. 나치 체제가 바라던 총체적 지배의 목적인 것이다. 총체적 지배로 향하기 위해 부품처럼 사용된 이들은 알다시피 평범한 시민이다. 옛 유고슬라비아 내전 전범을 재판하며 증언한 동네 이웃은 학살자들을 ‘파리 한 마리 죽일 수 없을 만큼 착하기 그지없는 청년들’로 묘사했다(151). 전체주의가 독일에서 발생한 현상이며 평범한 독일인 사이에서 벌어진 체제라면 사학자 임지현도 긴 지면을 할애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가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부끄러움의 해방적 역할’을 강조한 이유는 방관자 논리가 희생자 의식에 내포하기 때문이다. 전쟁범죄를 저지른 일본제국에 원폭 피해자를 앞세워 장막으로 가린 부끄러움은 희생자 의식 속에 사라졌고, 괜한 일본인 미나토자키 사나(湊﨑紗夏)에게 전쟁 범죄를 뒤집어씌우며 애써 우리 안의 민족성을 강조한 폭력적 민족주의 가면은 현재에도 전체주의 잔상으로 남았음을 보여준다. 광복절은 조국이 해방된 기쁘고 즐거운 날임과 동시에 전체주의 체제가 종결된 극적인 날이다. 현인신(現人神)이자 숭배 대상이던 일왕은 한갓 보잘 것 없는 노인임이 드러난 기쁘고 즐거운 날이었다. 광복을 맞이하고 74주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여전히 전체주의 망령(亡靈)을 보고 있다. 현인신으로 등장한 목사와 민족주의로 비춰진 교회 중심 집단주의다. 권능이란 이름을 오용한 이재록을 따르던 만민중앙교회 교인들은 그가 정말로 병 고칠만한 능력이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해당 교회에서 사임 또는 ‘은퇴하는’ 위임 목사의 배우자 및 직계비속과 그 직계비속의 배우자”는 위임목사로 청빙할 수 없음에도 ‘은퇴한’ 김삼환 후임으로 김하나가 담임목사로 청빙되어도 문제없다며 “아멘”하고 대답한 명성교회 교인들을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 나치 전체주의를 형성한 것은 평범한 독일 부르주아였다. 나치스에 입당한 하인리히 힘러와 아이히만은 지극히 정상적 인물이다. 평범한 시민과 정치가를 비정상 중의 비정상인 전체주의에 하나 되게 만든 원인은 “사생활 속에 은거하고 가정과 출세 문제에만 오로지 헌신하는 태도”(전체주의의기원2, 66), 사적 이해관계가 제일이라 믿는 태도 때문이다. 살기 위해 부조리한 악의 구조가 존재해야 한다는 사적 이익은 타자를 보지 못하게 만들어 인간 존엄성 파괴를 이뤄냈다. 평범한 인간이 먹고 살기 위해 사적 이익에 충실하면 충실할수록 전체주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이들은 깨닫지 못했다. 교회를 지키기 위해 아들이 담임목사가 되어야 하고 교회를 살리기 위해 범죄자 목사를 비호하는 비정상적 현상에 우리 사회는 혀를 내두른다. 해방 74주년을 맞이했지만 한국교회는 여전히 전체주의 잔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전 세계를 복음화하겠다는 획일적 인식을 버리지 못한다면 교회는 여전히 사적이익 지키느라 동분서주 할 것이다.

[망원동으로] 센치함은 사라지고

2019년 08월 08일
자기 착취적 아이돌 文化 에로스와 필레오로 형성 더욱 자기 착취를 옹호 감정 자체는 잘못 아니나 서로 매이는 사랑이 自由?자기 파괴로 전락한 팬덤 자기 모순적 아이돌 문화 우월 관계에서 벗어나야 아이돌 문화가 자기 착취적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총공연합부터 문자 투표, 00시 나눔, 콘서트·음악프로그램 발(發) 총동원령, 팬미팅, 생일 컵 홀더·전광판 광고, 축하 화환, 후기 북, 생일총공, 찍덕, 편지, 어느 하나 할 것 없이 자기 착취적이다. 이는 자발성에 기인한단 점에서 자기 모순적이기도 하다. 우스꽝스럽게도 아이돌은 팬들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사랑이란 말을 남용하고 오용하는 동안 팬과 아이돌 사이는 더욱 촘촘하게 긴밀히 맺어진다. 끈끈하다 못해 끈적해지면 탈덕(脫-)하기 어려운 환경이 만들어진다. 사랑한다 고백과 함께 자기 착취는 더욱 착실해진다. 다양한 굿즈(goods)가 쏟아지며 사랑하는 마음만큼 물품을 쓸어 담은 채 안도의 한 숨을 쉬는 것이다. 동시에 아이돌은 1:다(多), 팬덤은 1:1의 보이지 않는 계약을 형성하고 자발성에 몸을 담근다. 동시에 아이돌 입에선 ‘연애’가 터부시 된다. “3년에서 5년” 발언은 이 같은 배경에서 등장했다. 팬덤과 아이돌 관계는 에로스(Έρως)이기도 하며, 때론 필레오(φιλέω)이기도 해 서로가 끈끈히 얽혀 있어 구분이 곤란하다. 신(神)은 존재 증명이 어렵기 때문에 탈덕이 어렵다. 종교 단체에서 상처 받은 이들이 교회라는 건물을 나올지언정 신을 버리지 않듯이 말이다. 아이돌은 다르다. 그 리트머스시험지가 연애다. 감정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기에 하지 말라 할 순 없다. 어디에서 어디까지 팬심인지, 어디에서 어디까지 에로스인지 구분할 수 있을까. 연애하다 걸리면 배신감 느끼는 것도 에로스로서 접근했기 때문이며 보이지 않는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고 느껴져서 벌어지는 현상이다. 따라서 아이돌과 팬 사이 “사랑한다” 고백은 서로가 서로를 자유에서 멀어져 매이기 때문에 자기 모순적이다. 자유 없는 사랑은 없다. 20년 전 여름에 벌어진 사건이 연속해서 벌어지는 사회가 과연 정상인가. 1999년 8월 20일 대구에서 벌어진 브로마이드 사건은 일반인 상식에선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사실이 아님에도 남자 아이돌과 열애설이 난 걸그룹 멤버 앞에 브로마이드를 꺼내 들고 사인하라 윽박지른 행동이 지금 대 우리 사회에도 만연하다. 연예 매체 디스패치는 트와이스 지효(박지효·22)와 워너원(Wanna One) 강다니엘(22) 연애를 폭로했다(2019. 8. 5). 데이트 장소는 강 씨 자택이며 올해 초부터 만났다고 보도한 매체는 강 씨 자택에 들어가던 박 씨를 몰래 촬영했다. 연예인의 사생활보다 알 권리를 중시한 이들이 겨냥한 것은 아이돌 커플을 넘어서 자기 모순적 아이돌 현상이었다. 언제부터 아이돌 판에 센치(sentimental ·감정적인)함이 불어왔다. 특정 아이돌을 향해 응원보다 야유를 보냈고, 죽음을 암시하는 테러와 살해를 예고한 행동은 서슴지 않았다. 이 모든 일은 놀랍게도 나의 사랑하는 아이돌을 위한 자발적 자기 파괴 과정으로 구체화한 것이다. 지수는 아이돌이지 팬들과 연애하는 사사로운 존재가 아니다. 팬덤을 향해 “러블리너스를 평생 사랑하겠다”는 말은 부모를 사랑하지 않고 러블리너스를 유일하게 사랑하겠다고 선언한 게 아니듯, 엄마·아빠 사이, 더 소중한 사람이 누구냐는 말이 무의미하듯, 모든 이가 소중하며 러블리너스 역시 그 범주 안에 포함되는 관계로 이해해야 한다. 지애의 고백처럼 7년의 마(魔)를 넘어서지 못한 그룹만 부지기수다. 어쩌면 오늘의 콘서트가 마지막일지 모를 이들은 최상의 공연에 영혼을 갈아 넣었다. 그런 영원하지 않을 허무히 스러질 소녀들 계정으로 팬들이 힘들다고 고백한건 이들이 만능이란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누구보다 1위를 바랬지만 세상만사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듯, 누구보다 망원동의 흩어진 사무실을 전전하며 이름 없는 연습생으로 살아온 인생이었기에 지수는 우월감과 비교의식 속 ‘어처구니없는 사회’를 살아가는 팬덤을 끌어안았다. “(여러분은) 숨 쉬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치 있는 사람들이예요.” 칼바람 같은 센치함은 노래 소리와 함께 떠내려갔다: “약하고 어리석은 나 자신을 본다 해도/그 모습 그대로를 사랑할 수 있으며/비교하기보다는 나 자신을 가꿔가고/우리를 사랑하신 그 분을 믿으며” 자신을 사랑하며 확장된 외연은 타자를 볼 수 있는 안목을 열어주고, 더불어 살아가는 코스모폴리터니즘(cosmopolitanism)으로 확장됐다. 지수는 이 노랫말을 몰라도, 인류 보편 가치를 알고 있었다. 끝없는 피해의식과 집단화로 타자를 우월과 열등함으로 비교하며 악화일로를 걷던 녹림청월(綠林靑月)은 장막 속 어둠에서 파멸했다. 고인물은 썩기 마련이다.

[사진으로 보는 내일] 권력은 어디에 있나요

2019년 08월 05일
교회가 세습을 해도, 성폭행을 해도, 노동 착취를 일삼아도 어쩔 수 없는 대물림이자 연인 관계였고, 자발적 활동이라 변명하면 그만이라 생각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 기가 막힌 변명의 시대에 살고 있음에도 문제제기와 공론의 장으로 끌고 나오기 힘든 까닭에는 각자도생(各自圖生) 속 대한민국을 헤매기 때문이다. 예수는 권력자와 손잡지 않았다. 예수 자체가 권력을 지닌 하느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권력을 지닌 스스로 광채로 빛난 존재로 권력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샘물이자 근원인 로고스(Logos) 그리스도는 속에서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 되어(요한 4:14) 나약한 인간에게 흐를 수 있는 존재건만. 신앙하는 이들부터 스스로의 권력으로 드러난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스스로가 권력자가 되어 힘없고 연약한 이들을 예수와 멀어지게 만들다니. 힘없는 사람들은 거리로 내 몰리고 “내가 왜 세상에 내버려진 채 영문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귀찮은 존재가 됐는지” 묻는다. 이마저도 힘없는 사람들은 거리에 조차 나오지 않은 채 심연으로 향한다.

[사설] ‘졸린 꿈’이 깨자 일상으로 돌아가는 靑春들

2019년 08월 04일
2017년 11월 14일 발표한 이 곡 ‘졸린 꿈’은 사회의 모든 가치와 존재가 파편화되고 갈라지는 시대에 태어났다. 양성 갈등, 세대 분열, 각자도생, 이데올로기, 포퓰리즘, 갇힌 사회, 폐쇄 집단, 공동체 부족화(化), 취업전선(戰線), 과거회귀, 무엇이든 양분되고 자신의 이익에 충실한 현대를 어느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우리가 디딘 이 땅 사회와 내면의 세계, 심지어 시간조차 일상과 특별한 시간(카이로스)으로 갈라져 첨예하게 파편화되고 갈라진 틈 사이에 시대의 권력과 자본, 의욕과 희망을 잃은 채 우리 청춘이 살아 숨 쉬고 있다. 청년 멘토로 등장한 이들은 인생이란 이런 것이며 꿈을 위해 직장을 포기하고, 나 자신이 되기 위해 무엇이든 버리라고 가르치지만 정작 남의 꿈을 먹은 또 하나의 괴물과 다르지 않았다. 파편화 된 청춘을 위한 정책 수립이 쉽지 않은 듯 운동권 세력과 386세대는 권력을 놓지 않으려 아등바등한다. 늙어버린 국회 정상화는 시급한 과제로 떠올라 84일 만에 자유한국당이 복귀해도 김대중 정권 이후 최장기 멈춰선 국회에 어느 청춘도 기대를 걸지 않는다. 교회라고 다르지 않다. 청춘의 때에 창조주를 기억하라 꾸준히 외우고 읊은 구절이 우습게 보이듯, 지금 대한민국 청춘은 창조주 위에 건물주가 날아다닌다는 자명한 농담을 가리킨다. 청춘을 가져다 바쳐도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보상도, 성취도 아무 남는 것 없이 교회는 천국으로 기만한다. 유튜버로, 아이돌로, 공무원으로, 힐링(healing)과 번 아웃(Burnout Syndrome)이 조류로 등장한 지도 오래다. 대한민국 청춘은 각자도생(各自圖生)으로 얼룩져 있는 것이다. 시간이 멈추고 이 꿈이 깨이지 말아 달라 소원을 빌자 그 뒤로 별똥별이 스러지듯 지면 아래 떨어졌다. 연인의 어깨에 기댄 채 동화책을 읽어주듯, 청춘을 일군 옛날 옛적 추억의 동화를 무대에서 낭송하자 팬덤은 손뼉 치며 응원봉을 흔들었다. 이곳저곳 나눠진 망원동 연습실서 살아온 이들이 느낀 슬픔도 같을까, “주위에 좋은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았다면 나쁜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 소감을 밝힌 케이의 눈동자가 팬덤에게 잊고 싶지 않은 기억으로 새겨졌다. 조각으로 나눠진 시대의 아픔과 애환으로 얼룩진 소녀들은 조각조각 갈라지고 만 각자도생 대한민국 청춘을 향해 “이 노래를 바친다.” 꿈속 어딘가 노래 접한 이들은 갈라진 인터넷 어딘가에 고맙다는 글을 남긴다. 연예인이 되어 평생을 웃게 해줄거란 고백에 다시금 살아갈 힘을 얻었다며 고마운 존재로서 러블리즈를 호명한다. 이제 막 꿈에서 깬 청춘들은 자신의 삶을 지킬 힘을 이들에게 얻고 일상으로 돌아간다. 아이돌이 청춘에게 위로를 건네는 시대라니. 언제든 깨어야 할 꿈이란 걸 잘 알듯, 언제든 자기에게 기대라고 말한다. 소녀로 보이는 이들이 무슨 힘을 가지고 있겠나. 언제든 힘없이 스러질 소녀란 걸 잘 알 듯, 고마운 기억은 감정에 멈추지 않은 채 또 다시 주체적 힘으로 살아갈 새 힘으로 나타나 오늘의 졸린 꿈을 잊지 않겠다고 말한다. 언젠가 청춘이란 이름으로 흩어진다 할지라도, 이름 모를 청년으로 호명된다 하더라도, 청춘의 시대가 접어들어 어디로 갈는지 몰라도, 겁먹지 않겠다는 고백과 함께 지금의 어처구니없는 시대를 졸린 꿈을 꾸며 살아가고 있다. 답을 알 수 없고 보편적 진리는 없는 것 같아도 정의롭지 않은 일에 정의롭지 않다고 외치며 사랑하는 일에 사랑한다 외치는 용기를 안으며 작금(昨今)의 시대를 잊지 않은 채 러블리즈에 열광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이들과 2019년 8월 4일을 살아가고 있다.

[사설] 정작 당사자가 없는 한국교회

2019년 07월 28일
삶의 최후의 보후로 여긴 여성이 향한 곳은 교회였다. KBS 사시기획 창을 통해 폭로된 교회 성폭력은 너무도 익숙한 일상으로 비쳤다. 인천 모 교회 목사가 저지른 그루밍 성폭력을 바라본 그 교회 교인은 “나이 차이 나는 연인이었다”는 기가 막힌 변호를 이어갔다. 목사가 스물여섯 명 여학생과 성관계를 해도 그저 “나이 차이 나는 연인이었다”고 말하는 종교가 된 것이다. 언제부터 교회가 성에 이토록 관대했나. 문대식은 여대생을 바라보며 내심 걱정했다. “여자 청년 다섯 명 중 두 명은 결혼 전에 섹스를 했다니까.” 교회는 마치 가까운 언니와 누나가 순결을 잃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내 딸을, 나의 누나를 지켜야 한다는 불안에 휩싸였다. 기독교 발(發) 공포팔이는 이 뿐만 아니다. 청와대 앞 천막에서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은 ‘문재인은 하야하라’ 현수막을 뒤로하고 단식했다. 이유 중 하나는 동성애 반대였다. 이애실 씨가 출간한 『만화 어? 성경이 읽어지네!』엔 인상적인 장면이 연출된다. 인도 카주라호 사원 미투나 상인지 벽화인지 모를 그림을 그려놓고 “포르노”라며 “성화(性畵)가 그들의 성화(聖畵)”라는 웃지 못할 해석을 담아놨다. 요가 상(狀)은 “마약을 피우며 앉아 있는데 이들이 마약중독 남자 성창(性娼)”으로 묘사하는데 고대 힌두교가 쾌락과 타락의 온상이란 주장에서 역사적 고증도 맞지 않고 해석도 틀렸다. 이런 수준 떨어지는 책이 겨냥한 독자층은 청소년이다. 청년 사역자로 등장한 이들도 다르지 않다. 음란물은 끊어야하고 성은 억제해야 할 죄로 가르치는 수준이다. 여신 숭배 사상조차 접하지 못한 이들은 시대착오적 상상을 넘어 인간이 어떻게 성을 주체적으로 이해했는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채 ‘죄’라는 단어로 공포를 유발한다. 이들은 10년 전 반기독교시민연합이 주도한 ‘바이블 19금(禁) 제정 운동’을 잊어버렸나보다. 오난(창세 38,10)과 월경을 다룬 조항(레위 15,26), 성폭행 당한 레위인 첩 이야기(사사 20,6)도 문자적으로 실행해야 할 거룩한 성(聖)스러운 구절인가? 문대식도 청소년을 겨냥해 자신의 책을 팔았다. 여성은 자동차 가진 남자를 조심해야하고 24살까지 연애해선 안 되며, 리벤지 포르노(Revenge Porn) 피해자의 음란함도 분명히 죄라고 주장하니. 한국교회 성 인지 수준은 이 모양 이 꼴이다. 성폭력이 드러난 이유는 악마가 교회를 공격했기 때문이 아니다. 목사가 여성을 성적 해소 수단으로 이용했기 때문이다. 목사들의 성 인지부터 챙겨야 할 상황에 애먼 여학생 순결을 걱정하는 꼴이니 목사들부터 미신(迷信)에서 자유하길 바란다. 니체가 귀족도덕과 노예도덕을 왜 나눴겠는가. 10년 전부터 주일학교에 주일학생이 없고, 청년부에 청년이 없으며 한국교회엔 교인이 없다. 그래도 목사들은 “난 야훼로 즐거워하리”(하박 3,18) 노래를 부르고 있다.

[현실논단] ‘영진항 부근’은 안 된다면서 ‘삼척항 인근’은 되나보군?

2019년 07월 13일
그 날도 내일이 휴가란 즐거움에 근무가 근무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위병소 근무를 마치고 곧장 달려간 곳은 상황실이었다. 오후 초소 근무 감시 공백을 채우기 위해 세워진 감시카메라 IVS 앞에 앉았다. 다음 근무자가 오기 전 잠시간 앉았던 20분 동안, 벌어진 상황을 일찍 알았더라면. 근무를 더 늦게 교대했을지 모른다. 위병소와 달리 IVS에 앉으면 노곤해진 몸을 바짝 땡겨 의자와 하나 되곤 했다. 한 시도 졸지 않기 위해 옆에 세워둔 노란 커피 맥스(Max)와 함께라면 더욱 힘이 났다. 지능형영상감지시스템 IVS는 이름과 달리 일반 컴퓨터 프로그램과 다르지 않았고 키보드로 카메라를 실시간 조정 가능하단 점 빼곤 영락없는 화질 구린 감시카메라였다. 그러다 상황병으로부터 질문 하나를 건네받았다. “영진항 부근에 뒤집혀진 선박 있냐?” 빨간 등대까지 관측 가능한 IVS로 샅샅이 뒤졌지만 전복된 배는 찾을 수 없어 이렇게 말했다. “전복된 배는 없다.” 등명 부표 쪽 선박 3척을 확인했지만 전복된 배는 보이지 않았다. 상황병은 IVS로 달려왔다. 자기가 직접 관측도 하려 했지만 상황실로 온 연락 때문에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 했다. 지속적으로 관측하다 다음 근무자가 다가왔다. 상황 종료도 되지 않은 시점에 내 옆 후임은 이미 방탄모를 끼고 자리를 뜰 채비를 마쳤다. 나는 사각지대에 숨었는지 확인키 위해 두 IVS를 동시에 확인하며 뒤집힌 선박을 찾아내려 애를 썼다. 이제 막 상황실로 돌아온 상황병 부사수가 또 다시 물었다. “OOO 병장님, 배가 뒤집힌 선박이 있다는데 이게 무엇인 것입니까?” “OOO 병장으로부터 영진항 부근에 전복된 선박이 있단 얘길 들었지만 찾지 못했어.” 감시 구역 아닌 섹터까지 카메라를 돌렸다. 저 멀리 크레인 바지선과 예인선 두 척을 식별했다. 하지만 뒤집힌 선박은 아니었다. 내 다음 근무자가 도착했다. “지금 전복된 선박이 있어. 자세한 위치는 모르고 영진항 부근이야” 방금 확인한 크레인 바지선을 인수인계하고 점심식사 하러 갔다.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아 작전과장이 호출했다. 불려온 나는 연락을 받자 “OO IVS 감시 범위는 1km인데 왜 식별하지 못했냐”는 질책을 받았다. “OO IVS 감시 범위는 야간엔 5:5(해상:육지) 비율이며…….” 당황한 나머지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1km까지가 맞고 상세히 자세하게 보고 있었다”는 동어 반복만 이어졌다. 그리고 인수인계한 크레인 바지선이 OO초소 기준 11km라고 상세히 보고했다. 레이더 기지에 연락한 작전과장은 소초 기준으로 길이가 얼마나 되냐고 물었다. “800m” “왜 거짓말 하느냐. 솔직히 근무 제대로 안 섰지? 한 번 소초 찾아가야겠네” 옆에 선 상황병은 “(뒤집혀진 배가) 2~3km라고 말해라” 거짓 진술을 유도했다. 하지만 보지 않은 걸 봤다고 말할 순 없었다. 논란을 종식한 건 의외로 부소초장 증언 덕분이었다. “그 곳은 OO IVS로 보기엔 사각지대였다”는 증언이 아니었다면 뒤집힌 선박에 대한 책임은 고스란히 내게 돌아왔을지 모른다. 소초 전방, 혹은 초소 전방 몇 미터 몇 밀(mil)에서 부유물 식별. 하다못해 초소 전방 몇 미터, 방파제 내항인지 외항인지 던져주건만 영진항 부근에서 뒤집힌 선박을 찾으라 닦달한 그 때, 사각지대를 감안해 찾아대도 보여야 할 찾아야 할 뒤집힌 선박이 왜 보이지 않았냐는 물음 앞에 사각지대는 무의미했다. 나는 “사각지대였습니다” 말 한 마디 하지 못했다. 만일 운 나쁘게 아무 것도 모르는 후임이 내 자리를 대신했다면. 만일 부소초장이 나를 변호하지 않았더라면. 3년이 지나도 2016년 10월 18일은 아뜩하다. 원효대교에서 장 일병은 목선을 언급하지 않았다. 선택을 구구절절 설명하기엔 너무도 젊고 어린 나이였으니까. 말로는 표현되지 않았지만 사각지대임을 나의 가슴이 느끼고 있었던 것처럼, 입술은 움직이지만 무슨 말로 나를 변호하고 지켜야 할지 모르던 그 날 저녁은 누구도 다가오기 어려운 시커먼 심연이었을지 모른다. 수많은 무책임한 말과 의자를 던진 그를 향해 자신을 변호하지 못한 지난날의 후회가 스쳐갔을지 모른다. 3년이 지나고 대대장이 병사들 읽어보라 던져준 편지를 복기(復棋)하며 파란색과 검정색 명조체 사이에서 두 단어를 떠올렸다. 품성론과 키니코스(κυνισμός).
소랑 2026년 9월 19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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