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김용철 새능력’이 체제경쟁 대상이라 생각하는 정신머리

예수의 부활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새능력의 김용철은 유독 ‘믿음’에 방점을 두었다. 그의 스크립트를 분석해 보면 ▲믿음=74회 ▲부활=54회 ▲사망·죽음=54회 ▲하나님=26회 ▲죄=22회를 언급했다. 특히 그가 “~줄로 믿습니다”를 말한 맥락을 살펴보면 종결의 강박을 확인할 수 있다. 이 표현이 수십 번 나오는데 LLM 인공지능 클로드는 “기능이 독특하다”고 평했다. 주장을 사실처럼 만들지 않고 ‘믿음의 영역’에 가둬버린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회복시키십니다”가 아니라 “회복시키실 줄로 믿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반증 불가능해지는 구조다. 안 되면 ‘믿음이 부족한 것’이 되고 되면 ‘믿음의 결과’인 것이다. 이 종결 어미 하나가 설교 전체를 검증 불가한 구조로 만들었다. 김용철의 스크립트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몇 가지 특징이 선명하게 보인다. ①설교 전체에서 대여섯 번 반복되는 ‘위기-해결’ 구조: 단일한 구조가 청중이 어디에 있든 ‘내 문제도 해당되겠다’는 느낌을 받도록 설계돼 있다. 문제는 이게 설득이 아닌 패턴 주입이라는 것이다. 부활이 왜 그 위기의 해답인지를 한 번도 연결하지 않는다. 그저 위기 다음에 부활이 나오니까 청중이 연결되는 것처럼 느끼게 할 뿐이다. ②예수가 부활했다(전제)-믿으면 너도 산다(결론)-아버지가 나았고, 쌀통에 쌀이 나왔고, 바울이 순교했다(근거): 이건 신학적 논증이라 할 수 없다. 귀납도 연역도 아니다. A가 B와 비슷하니까 A에서 일어난 일이 B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주장을 하려면 A와 B가 왜 비슷한지 먼저 보여야 한다. 그러나 김용철의 스크립트에서는 그 과정이 없다. 성경은 전부 결론을 지지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될 뿐이다. 로마서 6장, 고린도전서 15장, 요한복음 11장을 인용하지만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지, 그 문맥이 무엇인지, 원어가 무엇인지 단 하나의 설명도 없다. 성경은 감정 고조의 타이밍에 삽입되는 장치로 기능하는 것이다. 김용철의 스크립트는 오직 청중을 위기 속의 존재로 몰아넣는다. “삶이 무너졌나요” “건강에 어려움이 찾아왔나요” “절망 가운데 계십니까” 청중의 현재 상태를 결핍으로 규정하고 그 결핍의 해답을 설교자가 독점하는 구조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해답은 언제나 교회 안에 있다고 주장한다.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려면 예배당에 와야 하고, 믿음을 고백해야 하고, 설교자의 언어를 따라 해야 한다. 청중이 스스로 접근할 수 있는 경로가 없다. 설교자를 경유해야만 한다. 교인의 실명과 자산 규모를 비유하는 것도 이 맥락에서 봐야 한다. 단순한 농담이 아니라 설교자가 교인의 삶을 알고 있다는 과시를 의미한다. 알고 있는 사람이 권력을 가지는 이 섬뜩한 맥락을 어떻게 무시할 수 있는가. 새능력은 10년이 넘는 기간,

[한눈금] 18세 국민연금

10대 국민연금 임의가입자 순 출처: 국가데이터처 청년의 기피 대상인 국민연금을 자진해서 가입한다는 통계가 눈에 띄었다. 국민연금 10대 임의가입자가 2023년 4814명에서 올해 1월 1만2245명으로 2년 새 두 세 배 늘었다는 기사였다. 18~ 19세 인구 대비 10대 임의가입률이 높은 지역은 경기도 과천시(3.63%), 서울 강남구(2.88%), 종로구(2.45%), 동작·송파구(2.41%) 순이다. 전국 평균 1.28%의 2~3배다.

[교회 安 이야기] ‘언제부터 우리가 노예였던 거지?’

2019년 12월 10일
3년 만에 교회 갈 생각을 하니 두근두근 설렜습니다. 25분만 걸어가면 언덕에 위치한 교회가 보이거든요. 인도없는 10분 거리를 아무 생각 없이 걸으면 500m, 300m. 조그만 주차장에 빼곡한 차들이 보이고 정문에서 주보 건네며 이 남자 저 여자 악수 나누는 장로님도 보입니다. 예배당 곳곳 울린 김도현의 ‘샬롬’을 듣자하니 방송실 한쪽에 수그려 커피를 홀짝이던 때가 떠올랐습니다. ‘샬롬’보단 ‘우리 아버지는’을 좋아했죠. 음향도 포근하고 시끄럽지 않은 평일 오전 카페 같습니다. 얼굴을 마주하고 반갑게 인사한 저 아저씨는 딱 봐도 장로님 같습니다. 눈도 감지 않고 주보를 책상에 걸쳐 두고 목사님이 설교할 본문을 찾았습니다. 흠, 이사야 40장이군요. 제 2이사야. 선지자가 주님의 길을 예비하라는 익숙한 구절입니다. 3부 예배는 예레미야서가 본문이라 ‘선지서 강해를 하나’ 물었습니다. 제 뒤에선 반가운 권사, 집사님이 어디 앉을지 옥신각신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시곗바늘은 11시 2분을 가리켰고 성가대 복장을 입던 집사님인지 목사님 사모님인지 나와서 예배의 시작을 알리더군요. 드럼 꽝꽝치고 피아노를 부수는 어떤 교회와는 달랐습니다. 장로교회는 아니라서 전통적 예배와 달랐습니다. 묵도는 있지만 교독문(성시교독이라고도 하죠)은 없었고, 성가대가 찬송을 부르면 담임목사와 교직자들이 교인석 사이 강단으로 향하는 가톨릭식 입장으로

[사설] 지금도 綠林靑月 바라보며 눈물을 흘린다

2019년 12월 01일
유튜브 알고리즘이라 불리는 시간 여행을 떠나다 보면 미처 생각지 못한 세계에 발을 딛곤 한다. 9년 전 ‘감옥살이 기도원’ 이름으로 방영한 지상파 프로그램에 지금에까지 격노하는 이유엔 현재도 한국교회 안에 만연한 범죄를 뉴스로 마주하기 때문이다.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 오 모 씨는 고독하게 숨진 채 발견됐고 시체조차 거두지 못해 무연고 사망자 처리되고 말았다. 경찰이 들이닥친 기도원 풍경도 속 시원했지만. 더욱 마음을 울컥하게 만든 장면은 “나가고 싶으세요?” 질문에 조금도 망설임 없이 앞치마를 버리고 점퍼 하나 챙겨들고서 그곳 파주 소망기도원을 빠져나올 때다. 피해자 할아버지는 긴 복도를 지나는 동안 단 한번 뒤 돌지 않았다고 한다. 한국교회는 끊임없이 교인을 죄인으로 만들고 집단에 복속하게 만든다. 자신들 주장이 옳다고 입증하는 방식이 기가 막힌다. 성경이 옳으므로 성경대로 사는 삶이 옳다고 믿는 순환논리다. 집단 논리가 더해지면 강력해진다고 믿는다. 동성애도 교회세습도 배제의 정치도 아직도 지구 중심으로 태양이 돈다고 믿는 꼴이다. 자신은 용서받은 죄인으로 만들고 타자를 죄인으로 만들어 교회란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교회를 나오자 연락 끊고 관계를 끊었다는 이야기를 이어가는 청년들이 한 둘이 아니다. 삶을 바치듯 충성한 이들에게 돌아온 결과는 배제였다. 녹림청월(綠林靑月)도 타인을 악마화하기 바빴다. 자신들이 아끼던 만화 캐릭터의 명예가 훼손됐다는 이유로 작가를 상대로 인격 모독으로 소송 걸 수 있느냐고 물었지만. 정작 자신과 상관없는 타 캐릭터를 좋아하던 회원들을 바보 취급했다. 필명 대한제국이 카페 공간을 벗어나기 한 달 전부터 여론조작을 준비했다. 댓글공작계획이다. 주력 1과 2로 나눠 총 여섯 단계로 정리한 계획을 들여다보면 자신의 주장이 옳음을 입증하기 위한 방법으로 댓글 조작을 준비했음을 알게 한다. 2011년 이들 행적을 지적하자 글 삭제와 사과를 약속했지만 이행하지 않았다. 자신이 한 말에 책임조차지지 않은 것이다. 안부게시판에 작성한 한 명의 사과는 이내 사라졌다. 고소를 무서워하다 아무 일도 없자 은근슬쩍 지우고 만 것이다. 그러나 녹림청월을 상대로 항복한 13년 전 필명 대한제국은 어리석은 공간을 빠져 나오며 해방을 맞이했다. 패배의 역설적 해방인 것이다. 교회를 빠져 나오면 지옥에 간다고 협박한다. 그러나 사회는 그런 기독교인 만의 천국에 간다면 지옥에 갈 거라고 농담한다. 그런 천국보다 지옥이 낫다는 것이다. 그러나 농담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결론은 한 가지에 도달한다. 비정상 구조 자체를 나올 용기다. 시민들은 한국교회가 멸망의 가도를 걷는 이유에 사탄의

[에셀라 시론] 최진리를 기억하며,

2019년 10월 14일
걸그룹을 알기도 훨씬 전이었다. 지면 신문에 실린 모습을 바라보니 흐뭇했던 이유엔 ‘세상엔 이런 사람도 있구나’를 느꼈기 때문이다. 여성이라면 조신해야 할 것 아닌가, 아이돌이면 자중해야 할 것 아닌가, 공인이라면 적당히 할 것 아닌가. 말하는 사람들을 향해 과감히 자신을 내어 던진 모습에 저항하는 여자로 보였다. 응원해 마지않은 시점도 그 때였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자 신학을 전공으로 두고 있음에도 후배들이 “왜 좋아하냐”고 물을 때 나는 말로 표현하지 못할 감정을 이 기사로 보였다. 기사에는 그의 감은 눈, 그의 옆구리, 그의 가벼운 옷차림이 담겨 있었다. ‘왜 논란의 아이콘이 됐나’ 질문은 보이지 않았고 여성이자 혼자로 남아 ‘세상을 등지고 맞선 자’만이 보였다. 걸그룹이었을 땐, 느껴지지 못한. 개인으로, 단독자로 남아서자 비로소 그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세상이 논란의 손가락을 짚고 있던 그 때. 평생 알아가도 이해하지 못할 여자를 두고 세상은 마음대로 재단해 세 가지 질문을 던졌다. 네가 그럴 자격은 있니? 네가 추해 보이지 않니? 네가 어그로

[사설] 우리는 모두 신 죽음의 時代에 살고 있다

2019년 09월 27일
제 104회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예장통합) 총회는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을 내렸다(2019. 9. 26). 명성교회수습전권위원회가 발표한 명성교회 수습안은 교단 헌법과 재판국을 뛰어넘는 초법적 판단이었기 때문이다. 헌법 제 28조 6항은 은퇴하는 위임(담임) 목사의 배우자와 직계비속, 그 직계비속의 배우자는 위임목사로 청빙할 수 없다고 규정한다. 재판국은 명성교회가 교단 헌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김하나 목사 청빙 결의를 무효로 판단하기까지 했다(2019. 8. 5). 명성교회수습전권위원회는 수습안을 통해 명성교회 위임목사 청빙을 2021년으로 미룸으로써 김하나 목사를 위임목사로 청빙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놨다. 헌법에선 분명히 직계비속을 위임목사로 청빙할 수

[일과속기록] 박제의 시대

2019년 09월 11일
조국 법무부 장관을 둘러싼 의혹을 보며 분명한 한 가지를 깨달았다. 말조차 기록으로 박제되는 시대 말이다. 조 장관이 사회적으로 비판을 받는 큰 이유 중 하나도 그가 말과 행동이 달랐다는 점이다. 우리는 박제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어떻게 말하든 커뮤니티 댓글에서 카카오톡 채팅창, 심지어 발화한 말조차 녹음으로 디지털화된다. 논쟁하다 댓글을 수정하면 곤란해진다. 그새 캡처해 “왜 말을 바꾸냐”고 따지기 때문이다. 글 삭제도 불가능하다. 아카이브 사이트에 주소 채 박제 가능하기 때문이다. 아카이빙이 무서운 이유다. 약학을 전공하겠다고 말한 그가 신학을 끝까지 밀고 간 행동도 마찬가지다. 그는 분명히 약학으로 전공을 바꾸겠다고 말했다. 그가 한 부분 발언은 일과속기록(日課速記錄)의 후신 감회록(感懷錄)에 남았다. 공교롭게도 그가 말을 바꿀 것이기 때문에 남겨놓은 발언이 아니었다. 그가 말을 바꾸니 뒤늦게 드러난 사실이다. 정의로운 삶을 사는 것보다 정의로운 말을 하는 건 생각보다 쉽고 간단하다. 정의롭지 않게 살아온 이유도 변명으로 일관하면 해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주고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다. 순결을 강조한 이재록 목사도, 청빈을 가르친 김기동 목사도. 자신이 한 말과 다른 삶을 살아 비판받는 현재. 모두 박제의 시대, 인터넷이란 공간 안에 벌어졌다. 그래서 신앙인으로 귀화(歸化)한 삶을 향해 축복의 기록을 남겼다. 그 기록이 발목을 잡을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아버지의 유학 자금으로 변명해도 소용없다. 먹고 살기 위해 신(神) 버려도 된단 말이며 아버지 힘으로 유학 간단 말을 증명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은혜를 강조한 나머지 인류의 구체화 된 그리스도를 기린다 한들 말과 달리 행동에서 차별과 저주를 본다면 그는 은총을 모르는 사람이다. 성서는 보이는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하기 때문이다(1요한 4,20). 더구나 윤리와 떨어질 수 없는 신학 전공자로 살아가는 존재라면 더욱 자신이 한 말이 발목을 잡곤한다. 얼마 전까지 청어람ARMC 전 대표이자 이사였던 양희송 씨의 행동이 그가 발화한 말이 그를 붙잡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의 청빈과 경건은 우리 사회를 기만하는 수준으로 전락했다. 일반 사회와 교회라는 두 도성 이론으로 사회를 바라보면 곤란하다. 기독교인과 시민은 다르지 않은 동질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문화가 우월하단 증거도 경제 성장이 막바지에 다다르자 외면 받기 시작했다. 윤리적 삶도, 하느님 나라 담론도 그렇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했다. 세상에 비밀은 없다는 말이다. 오히려 말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때문에 선조들은 혀를 조심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때론 진실함을 강조하는 이들이 존재하지 않는 하느님 나라를 위해 마음의 진실함을 요구하는 이유다. 그래서 한국 기독교가 자아비판 고백에 익숙한 것일까?

[시대성의 창] 홍콩을 지지합니다

2019년 08월 22일
입력 : 2019. 08. 19 | 수정 : 2019. 08. 23 | A27 자국민 억압하는 당국 지금 當國이 정상인가 홍콩의 自由 실현되길 지난 18일, 홍콩 시민은 유수식 집회(流水式集會)로 도로를 행진했습니다(2019. 8. 18). 거대한 우산들로 가득 메운 빅토리아 공원 오색 빛깔은 어둡고 칙칙했고, 자유를 위한 주말 투쟁이 열한 번째 주(週)를 넘겼다는 사실에 조금도 즐겁지 않았습니다. 시위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지난 2월, 한 홍콩 청년이 대만에서 여자친구를 살해하고 홍콩으로 도망 온 사건이 발생하자 범죄인을 인도하라 홍콩에 요청했지만 범죄인을 인도할 근거가 없으므로 송환하지 못했습니다. 속지주의(屬地主義)인 탓이지요. 홍콩 정부가 이 때문에 송환법을 개정하려 한 겁니다. 문제는 정치범이나 종교 관련 사범을 중국 본토가 손 쉽게 송환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의문 때문입니다. 6월 9일, 103만 명이 홍콩의 자유를 위해 모였습니다. 입법회는 범죄인 인도법 개정안 심의를 연기하겠다고 밝혔지만(2019. 6. 12) 물러서지 않은 홍콩 시민들은 캐리 람 행정장관 퇴진과 개정 법안 완전 철회를 주장하며 해산하지 않겠다고 밝혔습니다. 홍콩 경찰은 “해산하지 않으면 발포하겠다”는 경고와 함께 물대포와 최루탄으로 해산을 시도했습니다. 이를 항의하기 위해 5분의 1에 달하는 홍콩 시민은 검은 상복을 입고 홍콩의 자유가 무너지는 것을 참을 수 없어 거리로 나왔습니다. 흰옷 입은 남성들이 홍콩 위안랑(元朗) 전철역에 등장해 귀가하던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폭행을 가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2019. 7. 21). 백색테러였습니다. 그 중엔 만삭의 임산부까지 포함 돼 있었습니다. 뉴스로 바라보던 지하철 안에서 벌어진 무차별 폭행은 충격이었습니다. 올라가던 계단에 펼쳐진 우산이 찢어져라 때려대던 광경은 광기 그 자체였습니다. 이들은 도대체 어디서 온 존재일까요? 지난 달 한국일보 인터뷰에서 민간인권전선 부의장 웡익모(黃弈武·34) 씨는 불법 진압에 나선 경찰이 경찰 번호와 배지를 의도적으로 가렸다고 지적합니다. 비폭력

살기 위해 뭐든 하는 세상

2019년 08월 21일
“신학을 그만두고 약학을 전공한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2018. 4. 18). 이미 미국 유학길 채비를 마쳤기 때문이다(2018. 1. 6). 목회학석사를 밟을지, 신학석사를 밟을지 고민하던 목소리는 자기 힘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긴장감에 사로잡힌 상태였다(2018. 1. 10). 한 차례, 식어버린 치킨마요덮밥 앞에 훌훌 털듯 “아르바이트조차 부담스럽다”고 고백한 입술은 파르르 떨렸다(2018. 3. 20). ‘하긴, 나도 힘든 헬조선 너라곤 버텨낼 재간이 있겠니’ 생각하던 차 머지않아 그는 회심을 선언했다(2018. 3. 14). 썩어 문든 보수 교회와 운동권에 잠겨버린 진보 사이에 갇힌 이념 논쟁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존재로의 신앙인을 축원했다. 그 자유를 곧 과제 보이콧으로 행사했을 줄은 상상조차 못했지만(2018. 4. 29).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 희망의 메시지, 부흥을 주도한 교회라는 수식어가 무색하게 빈자리로 가득한 여의도 순복음교회 뒷좌석에 마주 앉아 두 손 들고 축도 중인 남자 앞에 고개를 떨궜다. 그 시절 희망과 할 수 있음은 지금 시대에 먹히지 않은 구호에 지나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이제는 교회서 울리는 너스래미 들을 시간이면 콘서트와 뮤지컬로, 하다못해 넷플릭스로 시간을 때운다. 종교를 가지지 않은 인구가 종교 가진 인구를 앞지른 지도 오래다. 두 손 들고 여의도에서 퍼져간 복음의 메시지가 그 시대에 희망이지 않았냐고 묻는다. 가끔은 빨래판에 올려둔 흰 교복 셔츠를 칫솔로 쓱싹쓱싹 문지르던 때가 향수로 돌아온다. 대형교회 향한 꿈은 내겐 빛나는 희망이자 내일을 살아낼 용기였다. 노쇠한 여든살 노인이 복음성가 1장을 부를 때면 눈물이 나왔는데 여전히 조용기 신화를 잊지 않은 탓일까. 번영신학 정점은 현실과 함께 허무하게 스러졌다. 왜 잘못을 논하는데 업적을 들이대나 싶을 테지만, 그렇다 치자. 시대가 변한 만큼 메시지도 발전해야 하지 않나. 그 시대에 은혜였다 셈 치자. 교인들을 무기력한 허상으로 좇아가게 만든 현실을 목도해도 된단 말인가.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3요한 1,2) 고백 앞에 눈물을 훔친 것처럼. 신앙으로 막 전향한, 알바조차 힘겨워한 남자 앞에 고개를 떨궜다. 나약해 보이던 남자는 누구보다 마음 속 진실함을 요구했다. 곧 관계가 파탄 날 것을 알았는지, 약학 전공한단 진솔한 연기도 보였다. 하나님 은혜가 필요하다던 신앙으로의 전향자에게 “희귀병을 앓고 있으니, 쉬어도 된다”고 말하자 당당히 조별 과제를 보이콧한 주체성에 감복했다. 자기보다 나약한 인간을 병신과 머저리로 치부한, 은혜를 가장한 연기에 감탄했다. 어차피 학부 시절 인간관계 파탄 내도, 당당히 아버지 빽으로 미국행 유학길에 오르면 될 테니까. 유학이 문제가 아니다. 갈 수 있다. 가면 된다. 가보라. 언젠가 신까지 팔아먹은 도피성 인생이란 현실 앞에 또 다시 좌절하고 죽음을 묵상할 테지만. 10년 전, 기독교 채널만 넌지시 시청하던 어머니께 조용기 실체를 토설한 아들이 떠올랐다. 저런 인간에게 돌아갈 헌금을 그만 내라던 아들에겐 그 시절도 은혜가 아니었다. 자유로운 인간이라 믿었던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죄라는 구도에 가둔 전략적 틀이란 사실을 선지자가 되어버린 아들이 말하고 있었다. 그 진실한 말을 그는 듣지 못했다.

[현실논단] 광복: 이 어처구니없음을 끝내고

2019년 08월 15일
존엄 파괴한 전체주의 光復, 전체주의 종결 교회 내 여전한 私益은 東奔西走하게 만들 것 “탈영한 아들의 시체 앞에서 느끼는 욕된 감정과 전사자로서 야스쿠니 신사에 안치된 아들의 영령 앞에서 흘리는 기쁨의 눈물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다.”(기억전쟁, 73) 제 2차 세계대전 종전 50주년을 맞아 1995년 일본 ‘아사히신문’이 게재한 권터 그라스(Gunter Grass)와 오에 겐자부로(大江 健三郎)가 주고받은 편지에서 사학자 임지현은 전쟁이 한창일 때 일본군 헌병대가 처형된 탈영병 시신을 짓밟는 모습에서 이를 지켜만 보던 어느 부모 이야기를 이렇게 표현했다. 처형된 자신의 아들을 치욕스럽게 여기며 “천황제로 대변되는 전체주의 윤리가 가족 안에까지 깊숙이 침투했기 때문”(73)이라던 오에의 지적에 지금 “이 나라가 파시즘”이란 비난을 잊게 만든다. 전체주의는 모든 영역을 제어하고 점령했을 뿐 아니라 인간이란 존재 자체에 침투해 인간됨을 잊게 만들었다. 한나 아렌트가 나치 전체주의를 지적한 지점이 여기였다. ‘전대미문의 극단적인 악의 출현’으로 가리킨 수용소가 등장하자 나치 체제는 유대인이란 이유로 무죄한 사람을 가둬 법인격을 말살했다. 유대인은 책임져야 할 가족을 죽음으로 몰 것인지, 친구를 죽여 살해해야 할지 양자택일 하도록 만들어 도덕적으로 인격을 말살시켰다. 인간성 상실의 핵심은 자발성의 상실이다. “파블로프의 개”로 묘사된 이들은 철저히 잉여 인간으로 전락했다. 나치 체제가 바라던 총체적 지배의 목적인 것이다. 총체적 지배로 향하기 위해 부품처럼 사용된 이들은 알다시피 평범한 시민이다. 옛 유고슬라비아 내전 전범을 재판하며 증언한 동네 이웃은 학살자들을 ‘파리 한 마리 죽일 수 없을 만큼 착하기 그지없는 청년들’로 묘사했다(151). 전체주의가 독일에서 발생한 현상이며 평범한 독일인 사이에서 벌어진 체제라면 사학자 임지현도 긴 지면을 할애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가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부끄러움의 해방적 역할’을 강조한 이유는 방관자 논리가 희생자 의식에 내포하기 때문이다. 전쟁범죄를 저지른 일본제국에 원폭 피해자를 앞세워 장막으로 가린 부끄러움은 희생자 의식 속에 사라졌고, 괜한 일본인 미나토자키 사나(湊﨑紗夏)에게 전쟁 범죄를 뒤집어씌우며 애써 우리 안의 민족성을 강조한 폭력적 민족주의 가면은 현재에도 전체주의 잔상으로 남았음을 보여준다. 광복절은 조국이 해방된 기쁘고 즐거운 날임과 동시에 전체주의 체제가 종결된 극적인 날이다. 현인신(現人神)이자 숭배 대상이던 일왕은 한갓 보잘 것 없는 노인임이 드러난 기쁘고 즐거운 날이었다. 광복을 맞이하고 74주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여전히 전체주의 망령(亡靈)을 보고 있다. 현인신으로 등장한 목사와 민족주의로 비춰진 교회 중심 집단주의다. 권능이란 이름을 오용한 이재록을 따르던 만민중앙교회 교인들은 그가 정말로 병 고칠만한 능력이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해당 교회에서 사임 또는 ‘은퇴하는’ 위임 목사의 배우자 및 직계비속과 그 직계비속의 배우자”는 위임목사로 청빙할 수 없음에도 ‘은퇴한’ 김삼환 후임으로 김하나가 담임목사로 청빙되어도 문제없다며 “아멘”하고 대답한 명성교회 교인들을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 나치 전체주의를 형성한 것은 평범한 독일 부르주아였다. 나치스에 입당한 하인리히 힘러와 아이히만은 지극히 정상적 인물이다. 평범한 시민과 정치가를 비정상 중의 비정상인 전체주의에 하나 되게 만든 원인은 “사생활 속에 은거하고 가정과 출세 문제에만 오로지 헌신하는 태도”(전체주의의기원2, 66), 사적 이해관계가 제일이라 믿는 태도 때문이다. 살기 위해 부조리한 악의 구조가 존재해야 한다는 사적 이익은 타자를 보지 못하게 만들어 인간 존엄성 파괴를 이뤄냈다. 평범한 인간이 먹고 살기 위해 사적 이익에 충실하면 충실할수록 전체주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이들은 깨닫지 못했다. 교회를 지키기 위해 아들이 담임목사가 되어야 하고 교회를 살리기 위해 범죄자 목사를 비호하는 비정상적 현상에 우리 사회는 혀를 내두른다. 해방 74주년을 맞이했지만 한국교회는 여전히 전체주의 잔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전 세계를 복음화하겠다는 획일적 인식을 버리지 못한다면 교회는 여전히 사적이익 지키느라 동분서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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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day소랑 2026년 6월 23일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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