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는 사건] 내가 퀸덤을 안 보는 이유

2019년 10월 05일

그날도 저녁 늦은 밤, 내 방을 찾아와 학술 동아리 관계자가 작성한 글을 소개 받았다. 이런 글도 있다는 차원의 소갠 줄 알았는데 뭔가 여운이 길어 눈동자를 쳐다봤다. ‘좋아요’를 눌러달란 의미였다. 이 인간 앞에서 원치 않은 서명도 해준 적 있던 터라 두 번 속기 싫어 물었다. “근데요?” 안 누르겠다는 얘기다. 적어도 어떤 얘긴 줄은 읽어봐야 누르지 않겠나. 살짝 서운했는지 내 방을 나서던 풍경을 그 땐 이해하지 못했다.

무엇이든 ‘~하는 방법’으로 발견하는 특성이 여기저기 떠올랐다. 자영업 성공하는 비결, 유튜브 대박 나는 비법, 블로그로 돈 버는 일곱 가지 기술, 브런치 작가 합격하는 팁, 이젠 자신의 성공한 인생을 상품화한 브이로그까지. 소소한 일상도 상품으로 내보내 너도나도 “나는 이렇게 성장해”를 보여주는 진풍경이 줄이었다. 좋아요를 요구한 그 녀석도 틈만 나면 “나는 성장해”를 올려두곤 했다. 아이돌도 성장하는 시대에 채권자 팬덤이 등장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 내 아들 내 딸에게 “~야 정신차려”로 운 띄워 연애할 시간에 연습하라고 구박한다.

머지않아 트와이스 사나를 만나기 위해서 앨범 백 장 구매했단 이야기를 접하자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100장이면 얼마야.’ 마이너·메이저갤러리 이곳저곳 떠도는 영혼들은 무엇이 고맙고 감사한지 아이돌판 품앗이를 경쟁하듯 행사해 디시 서버가 버벅댔다. 내 아들 내 딸을 렌즈에 담아내기 위해 행사장 앞좌석에 벌떡 일어나 여기 찍고 앞 사람 어깨에 대고 저기 찍는 동안 엠넷이 야심차게 준비한 경쟁프로그램 조작 의혹이 사회 문제로 부각됐다. 의아했다. 경쟁을 부담스러워 하는 이들이 왜 경쟁프로그램에 열광하는 걸까. 열광하던 틈 사이에 ‘성숙 내러티브’를 발견했다.

혹자는 내가 하지 못한, 내가 이루지 못한 성공. 내 아들, 내 딸이 이뤄내면 좋겠다고 고백했다. 이런 글이 어떻게 포스트 박정희를 요구하던 신문에 실릴 수 있을까 경악했다. 이들 움직임은 조직적이고 치밀하다. 아이피(IP)를 바꿔 댓글을 달고, 추천·비추천을 누른 후. 투표하고 인증하면 상품까지 주겠다고 유세(遊說)했다. 현대판 막걸리 고무신 선거가 따로 없다. 여론은 연관검색어 정화부터 시작한다. 연관검색어가 정화되자 팬덤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혹여 내 아들 내 딸을 비판하면 학교는 어디니, 지방에 사니 묻는 댓글도 보았다. 도대체 이들이 말하는 성숙은 무엇일까?

무대에 내려온 류수정(21)이 “인생을 송두리 째 비난해 애 먹었다”고 속상한 감정을 드러내자 자칭 팬은 “다른 팀들은 이걸 기회 삼아 피터지게 연습해서 무대 올라가잖느냐” “눈치 빠른 애들은 바로 ‘잘못했습니다. 다음부터는 주의하겠습니다’라고 한다”고 가르쳤다. 러블리즈는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은 아이돌이 되어 인터넷 박제의 시대에 조리돌림 당한다. 키워드는 ‘노력’과 ‘절실함’이다. 내 아들 내 딸이 노력한 진짜 앞에 너의 조신하지 못한 가짜 노력이 나의 분노를 자극하는구나. 갓을 쓰고 “엣헴!” 나부낀 부채에 성공과 노력, 이것이 인생이란 배틀이 키보드로 이어진다. 근엄한 칼춤을 노력과 절실함으로 내보인 것이다. 노력과 절실함은 공정성을 담보한다. 그 공정의 집합체인 경쟁프로그램이 조작이었다니!

인생의 다양한 선택에 한 예로 수능을 들었는데. 피 터지게 준비하는 수험생들 마음을 아느냐고 훈계하는 광경. 러블리즈가 준비한 무대보다 수험생들이 더 힘들다는 댓글.

운에 맡겨 둔 팬사인회 조차 돈 많아야 갈 수 있단 사실에 놀랐고, 팬덤 활동하려거든 이제껏 구매한 굿즈와 앨범을 인증해야 한다는 현실에 이질감을 느꼈다. 아이돌은 결국 돈으로 만들어 낸 성장 아닌가. 돈 없으면 덕질도 아니란 시대에 ‘공정성’이란 공허한 이야기가 대한민국을 감돌아 너도 나도 힘들지 않느냐 묻는다. 그래, 너는 부모 잘 만나 그랬을 테고, 나는 부모 잘못 만나 헬조선을 살아가는 구나 노래를 부른다. 그래서 청년들이 분노할 줄 알았다. 웬걸 광화문 네거리엔 태극기와 성조기가 나부꼈다.

법무장관 딸이 인터뷰 중 “고졸이 돼도 시험은 다시 치면 되고, 서른에 의사가 못 되면 마흔에 되면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하자 아무 생각 없이 다음 면을 넘겨짚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고졸vs지잡대생’ 서로 물고 뜯던 어느 게시판 일상이 떠올랐다. 돈 많이 벌어 성공하면 장땡이란다. 성공도 자격이 있다나 뭐라나.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 관절도 쇠약해지는 마당에 “라떼는 말이야~”로 운 띄울 광경을 상상해보니 구역질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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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의 첫 월급은 113만5600원이었습니다. 편의점에서 일하던 시절, 2019년 최저임금은 8350원이었습니다. 그마저도 전년보다 10.9% 오른 수준이죠. 한 달 23영업일 출근하고서 받은 정식 기본급은 150만원 언저리였습니다. 주휴수당은 없었고 최저시급으로만 받았으니 하루 품삯으로 따지면 6만5000원이었습니다. 물가가 누적 18~19% 오르고, 최저임금이 20.1% 오를 때 저의 하루 품삯은 2019년에서 2025년, 102% 올랐습니다. 두 배가 오른 셈이죠. 이 정도면 지금의 회사에서 격세지감 느끼는 이유를 아실 겁니다. 2> 개선된 근무 환경과 강도(強度)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밤 11시에서 다음 날 7시까지 꼬박 8시간 일하던 시절에 비해 같은 노동시간 임에도 아침 7시에 출근해 저녁 5시에 퇴근하는 지금의 근무 형태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밤 근무는 그 자체로 고통이지만 상쾌하게 일어나는 이른 아침과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한 달에 두 번 재택근무, 한 달에 한 번은 아무 이유 없이 내 마음대로 퇴근할 수 있는 회사라는 점에서 편의점과는 다른 복지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3>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도 비교하면 근무 환경이 개선된 곳에서 일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매번 고객사로부터 새로운 디자인을 요구 받습니다만, 저의 커리어를 생각하면 고마운 사람들입니다. 이유 있는 피드백과 구체적인 회신, 메일이라는 문자 전송으로 이루어지는 근무 환경이 저의 정신을 단단하게 만듭니다. 일을 못하면 혼을 내는 게 아니라 ‘누구나 초기 근무에는 실수할 수 있다’고 격려해주는 고마운 선배와 동료들. 진상 고객을 만날 때마다 스트레스 받던 편의점 시절과는 다릅니다. 매번 폐쇄회로(CC)TV를 들여다보며 감시하는 사장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4> 편의점 시절의 저는 그저 버티는 사람이었습니다. 진상 고객과 CCTV 앞, 그리고 새벽 3시의 편의점 안에서 성장보다 생존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생존의 공간이 지방 편의점이었다는 건 그저 직종의 차이가 아니라 기회의 밀도 차이였습니다. 서울로 발걸음을 옮긴다는 건 더 많은 선택지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편의점에서 일하던 시절, 저는 제대로 된 임금을 받지 못했습니다. 주휴수당은 법적인 권리였지만 저는 에둘러 묻지 않았고 사장은 모른 체했습니다. 지금의 격세지감은 단지 월급이 두 배 올랐다는 얘기만이 아닙니다. 5> 2023년 기준 한국의 1인당 생애주기적자를 보면 만 45세에 노동소득 정점을 찍고 61세부터 다시 적자 구간으로 돌아선다고 합니다. 어쩌면 더욱 부단히 일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의 격세지감을 발판 삼아, 더욱 발전하는 삶을 위해서 말입니다. 내일은 한 시간 일찍 퇴근하는 날입니다. 회사에 더욱 고마운 마음이 싹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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