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未知의 2020年代를 살아가는 존재들에게

2019년 12월 31일

드디어 우리는 상상으로만 그려왔던 2020년대에 도달했다. 지금까지 살아있음에 경이(驚異)를 느끼고 경의(敬意)를 표하는 이유엔 믿을 수 없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사건들 속에 현재를 만든 오늘의 존재에 있다. 그저 살아있음에 놀랍고 신기하게 여기는 이유엔 당연한 인간으로의 삶으로 당당히 걸어갔기 때문이고 존경을 표하는 이유엔 오랜 시간 희로애락(喜怒哀樂)을 겪으며 정의를 추구한 오늘 덕분이다.

불현듯이 마음속에 내재하던 신 밖으로의 열망을 키워낸 10년 전의 질문을 시작으로 존재를 고민하고 질문하며 무엇이 답인지를 묻고 답했다. 알 수 없는 존재와 현상에 대한 정답을 마치 눈을 감으며 온 몸으로 느끼면서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찾아 헤맨 시간이 그간의 십 년의 세월인 것이다.

그 시작은 스스로가 우울증을 겪고 있음을 인정하는데서 시작했다. 지금도 형상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다섯 마리 괴물을 표현하며 여러 우울한 현상들의 원인을 찾아내고 해명하는데 오랜 시간 소요(騷擾)했다. 그리고 마침내 인간은 슬퍼할 수 있는 존재이고, 고독 속에 자기 형상을 인식하고 기억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울 그 자체는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며 때로는 기쁨이 찾아오듯, 슬픔과 고독을 통해 반성과 수치심을 느낌으로써 비로소 인간 존재로 성장한다는 현실을 마주할 수 있었다. 인간의 불완전함을 깨달은 것이다.

이미 몸으로 체화(體化)된 교회성장과 신앙생활의 중독은 6개월의 단절이란 이름 앞에 허무하게 스러졌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수 없듯(누가4,4), 종교 생활을 꾸역거린다 한들 조금도 신의 형상을 인지하지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인간 너머의 존재, 신 존재를 반성하기 시작했다. 어째서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만들었는지, 무슨 이유로 하느님은 인간의 고통에 침묵하는지, 신이 살았는지 죽었는지를 물었다. 그리고 우리는 영원히 대답하지 않을 존재를 향해 맴돌 것만 같은 질문을 발송하기 시작했다.

이 질문을 발송하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존재했다. 아닌 것을 아니라 말할 수 없었던 참혹한 현실이 서 있었다. 우리는 오랜 시간 교회 바깥세상을 죄악으로 묘사하고 표현했다. 터부(taboo)라는 이름으로 하지 말아야 할, 피해야 할 선악과로 상정하고 옳음을 아니라고 말해왔다. 스스로 노예로 복속(服屬)되기를 열망했다. 신의 노예로 살아가면 진정한 자유를 얻을 것임을 말한 것이다. 현실은 교회의 노예이자 행위 중독에 시달려 금단에 시달려야 했다. 교회는 배신자 낙인을 찍었고 기독교인은 하나 둘 떠나갔다. 단독자는 낙오의 다른 이름이다.

우리가 디딘 이 땅 사회와 혼자라는 존재가 외롭고 구슬프게 느껴진 이유에는 파편화 된 인간 존재와 존재 그 자체를 고민하지 않는 왜곡된 물질 중심 세계의 재편이 자리한다. 존재는 상품으로 대체했고 상품화의 쾌락을 오래 유지하기 위해 인간을 비교 가능한 대상으로 오해하게 만들었다. 진리의 총체라 자부했던 그리스도 공동체 역시 상품화와 자본에 눈이 멀어 존재를 향한 물음을 잊고 말았다. 모든 것이 숫자와 단어로 설명되고 정의되어 불편할 뿐인 단독자가 되지 않기 위해 집단으로, 노예로 복속되기를 염원했다. 진리(眞理)의 실종, 진리란 존재가 사라졌다.

그래서 우리는 희망의 노래를 불렀고 노래에 의지했다. 노래에는 존재가 담겨 있다. 노래의 이름은 자유다. 노래를 부르며 만들어진 존재를 과감하게 무너뜨렸다. 처참하게 부서진 신의 형상은 사실 석고상(石膏像)과 다르지 않았고 내면의 폐쇄된 세계는 커튼을 젖히며 창문이 부서질 정도로 끝까지 열어두자 비로소 나의 세계라는 실체를 깨달았다. 어둠 속 존재 향한 물음은 나 자신이 누구인지, 어째서 타자가 필요한지 우리가 디딘 이 땅 사회는 무엇인지 궁금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당도(當到)한 미지의 세계 문턱 앞에 서 있는 상황이다.

여전히 문제는 산적하고 답해야 할 질문들은 많다. 어떤 질문을 해야 할지조차 모르기도 하지만. 영원한 타자로 존재할 것만 같았던 여성에 대한 오명을 벗겨냈고 미래를 향해 발송한 메시지의 수취인이 누구인지를 알아내었다. 시간을 달려서 미래에 메시지를 발송할 수 있다면 우리는 무엇을 담아 보낼 것인가. 그 미래를 향해, 미지의 세계 앞에서 우리는 한결같이 자유를 갈망하고 자유의 새 노래를 부르며 메시지를 상상한다. 그 존재가 미지(未知)의 세계 앞에 서 있는다.

2020년대를 맞이한 지금도 우리는 진리를 알지 못한다. 다만 우리가 인식하는 단 하나, 진리(眞理)를 잃어버렸다는 잊어버렸다는 슬픈 감정뿐이다. 그러나 잊지 않은 한 가지가 있다면 자유의 새 노래다. 2009년 발표해 서울 창작 애니메이션 우수상을 수상한 애니메이션 ‘선 샤인 걸(Sunshine Girl)’은 사랑하는 소녀를 위해 공연을 준비하던 소년들의 슬픔을 담는다. 70년 세월을 넘어 여전히 식지 않은 뜨거운 사랑의 노래를 잊지 않고 있었다. 잊었던 존재를 기억하며 잊지 않은 진리를 마음 속 간직하던 소년들 심정은 우리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자유의 새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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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직필의 자유·시대성의 창달·주체자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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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환단고기는 위작이다” 대통령은 이 한 마디가 어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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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열한 번의 여름, 미디어그룹을 만든 겨울의 언어

자유의새노래 미디어그룹의 출범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오롯이 한 사람의 기억을 담던 그릇이 이제 많은 이들의 기록을 품는 그릇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 서기까지 열한 번의 여름을 지나쳐야 했다. 그 사이 겨울의 언어로 아로새긴 추위와 고독, 결의가 지금도 선명하다. 이 신문의 방향을 가른 것은 외부의 세력도, 미지(未知)의 존재도 아니었다. ‘바뀌어야 산다’는 절박한 마음이 오늘을 만든 것이다. 10여 년의 세월, 새능력교회의 비정상적 신앙은 세상을 둘로 가르고 인간성을 거세했다. 그 거세된 인간성 속에서 내면의 아이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 것이다. 그 아이를 오래도록 ‘소녀’라고 불렀다. 소녀는 인간을 사랑하고 삶의 작은 목소리에도 귀 기울일 줄 아는 하나된 자아를 추구하는 존재였다. 동일한 인간이 느끼는 감정과 감각을 상징했다. 그러나 교회의 극단적 교리는 소녀의 존재를 부정했고, 신의 침묵은 소녀가 죽음에 이르도록 방치했다. 이 신문의 역할은 죽은 소녀를 되살리는 일이었고, 할 수 있는 것은 ‘기억 보도’뿐이었다. 다채로운 기억을 되살리고 다시 배치함으로써 소녀의 숨결을 느끼고, 그리워하며, 애도(哀悼)하는 일뿐이었다. 겨울의 언어는 죽은 소녀를 기억하고, 기록하며, 기약했다. 그렇게 죽은 줄만 알았던 소녀를 다시 살려낸 것은, 교회로부터 해방을 맞고 몇 년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죽은 줄 알았던 감정이 되살아나고,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추억이 기억의 재편을 통해 자신의 색깔을 되찾자, 숨죽이며 기다리던 소녀를 발견한 것이다. 비로소 소녀의 역할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하나의 서사로 연결하며 삶을 다시 재편하는 일이었다. 자신과의 화해는 과거의 나를 용서하고, 미래의 나에게 현재의 나를 의탁(依託)하는 일로 확장되었다. 부모와의 화해, 지인과의 화해 그리고 악마라고 믿었던 이들과의 화해로 이어졌다. 그렇게 열한 번의 여름이 지나갔다. 드디어 한 시대, 서사의 끝에 서 있다. 오랜 시간 고대하던 본지 미디어그룹의 출범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본지 미디어그룹의 출범은 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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