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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에셀라 시론34

[에셀라 시론] 썩은 동아줄 입력 : 2020. 11. 22 | 디지털판자기객관화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의 발언과 행동은 무엇이든 부끄럽다.술에 취한 채 기숙사로 걸어와 질질 끈 몸을 침대에 뉜 채 세상만사 자기편이 아니라고 떠들던 분위기를 아는가. 죽음과 고난을 거느리며 출신성분으론 이 세계를 벗어날 수 없었던 비운의 주인공은 실력은 출중하나 치고 올라갈 한 방이 없다며 한숨을 이어간다. 토닥이며 날이 지났으니 방으로 돌아가시오 위로에도 상황이 종료되지 않는다. 자리에 앉아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가늠하며 교수들을 만나고 왔느냐고 물으면 물어봐주길 바랬다는 듯 실토하는 한 문장들에선 최소 두 명의 교수 이름이 연달아 나온다. 때마침 TV조선 뉴스9에서 흐르는 대통령과 조선일보의 줄다리기가 세상은 보이지 않는 힘으로 얽혀서 풀리질 .. 2020. 11. 22. 19:40
[에셀라 시론] 미안해, 최진리 입력 : 2020. 10. 23 | A34 기일을 맞이해 작성한 시론의 분량은 이천사백자다. 마음 모아 작성하고 두 문단, 세 문단 쯤 남겨 놓고 천오백자 모두 지우고 말았는데. 첫째는 진리의 죽음을 다루지 못하겠다는 한 숨, 둘째는 진리의 떠남에 어떠한 인용도 할 수 없다는 슬픔이 한 문단씩 지우게 만들었다. 내가 무엇이관대 살아있음을 논한단 말인가라는 부끄러움을 잇는 질문: 내가 무엇이관대 진리의 죽음, 진리에 대한 것, 진리가 가지던 것을 다룬다는 말이냐 이것 때문이었다. 늘 지면신문 이 자리에 떨었던 고상한 글을 미뤄두고 진리에게 설리에게 미안한 몇 가지를 늘여 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코로나 파동을 겪으며 진하게 남았던 질문 하나, “내가 죽으면 장례식에 와줄 거냐”는 물음에 대답을 유보했던 기억.. 2020. 10. 23. 16:19
[에셀라 시론] “다 부질없는 일이었는데” 입력 : 2020. 07. 04 | 수정 : 2020. 07. 04 | A3410년 전 일이다. 강경한 근본주의 신앙을 견지하던 내 입에서 울려 퍼진 세대주의 종말론 신앙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메시지 그 자체로 요약할 수 있다. 내용인 즉은 곧 전쟁이 임할 테니 모두가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는 예언이다. 알다시피 2010년 3월 북한에 의한 천안함 피격 사건과 나라 잃은 슬픔을 기억하려 시청 앞 광장에 10만 명이 넘는 교인들이 강사로 세운 조용기 목사의 설교를 들으며 아멘하던 시절이다. 때 마침 미디어의 실체라는 동영상에 심취하며 유럽연합이 정치적으로 통합하면 적그리스도가 출현함으로써 지구상 완전한 종말이 다가오니 휴거를 대비하라를 진지하게 믿었던 때였다.예언은 보기 좋게 빗나갔고, 무슨 .. 2020. 7. 4. 22:56
[에셀라 시론] 부끄러움의 해방적 역할 입력 : 2020. 05. 10 | 디지털판  보면대를 내리치는 강마에 모습에서 10년 전과 다른, 역설(逆說)적 부끄러움을 느꼈다. 정확한 대사는 이렇다. “한 가지만 물어봅시다. 내가 여러분들을 실력 외적인 걸로 부당하게 야단친 적 있습니까? 아니면 내가 준비를 잘 못해 와서 여러분을 헤매게 만들었나요? 없지요? 도대체 뭐가 문젭니까!” 사과 받으려던 악장의 표정은 굳었고, 주인공과 다름없던 연구단원들 표정은 싱글벙글 웃음꽃이 피었다. “사과 못하겠습니다!”로 운을 띄운 강마에가 일갈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단원들을 불리하게 대하거나 불공평한 지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과를 주도한 악장도 더는 할 말을 잇지 못했고 자리에 앉아 덤덤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게 여우비 내리던 어.. 2020. 5. 10. 23:57
[에셀라 시론] 태초에 개발자가 doctype를 선언하시니라 입력 : 2020. 01. 22 | 수정 : 2020. 02. 05 | A6  드디어 신 죽음의 시대를 벗어나려는 걸까. 신의 명령에 주목한 시대를 신 죽음의 시대 이전이라 정의한다면. 신 명령이 어떠한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함을 인식한 시대를 신 죽음의 시대라 명명할 수 있다. 신 죽음의 시대는 주체성의 개념조차 존재할 수 없는 세계다. 세계라는 점에서 벗어날 수 있고 시대라는 점에서 언젠가는 마침표를 찍는다. 오랜 시간 슬픔과 절망 속에 신이 다시 살아나기를 희망했건만. 신의 부활은 요원하고 세상은 바쁘게도 신의 존재를 망각한 채 신 죽음을 가리킨다. 아직도 신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확인할 수 없는 시대에 살지만. 죽지 않았다고 잠정 결론을 내리고 신 죽음의 시대라는 3년의 터널을 벗어난다. 그래서 마련.. 2020. 1. 22. 20:38
[에셀라 시론] 최진리를 기억하며, 입력 : 2019. 10. 14 | A34 걸그룹을 알기도 훨씬 전이었다. 지면 신문에 실린 모습을 바라보니 흐뭇했던 이유엔 ‘세상엔 이런 사람도 있구나’를 느꼈기 때문이다. 여성이라면 조신해야 할 것 아닌가, 아이돌이면 자중해야 할 것 아닌가, 공인이라면 적당히 할 것 아닌가. 말하는 사람들을 향해 과감히 자신을 내어 던진 모습에 저항하는 여자로 보였다. 응원해 마지않은 시점도 그 때였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자 신학을 전공으로 두고 있음에도 후배들이 “왜 좋아하냐”고 물을 때 나는 말로 표현하지 못할 감정을 이 기사로 보였다. 기사에는 그의 감은 눈, 그의 옆구리, 그의 가벼운 옷차림이 담겨 있었다. ‘왜 논란의 아이콘이 됐나’ 질문은 보이지 않았고 여성이자 혼자로 남아 ‘세상을 등지고 맞선 자’만이 보.. 2019. 10. 15. 00:10
[에셀라 시론] 밤하늘에 덮인 니고데모의 얼굴 입력 : 2019. 01. 05 | 수정 : 2019. 01. 05 |  니고데모가 찾아온 시각도 밤이었다. 랍비와 쿰란공동체는 밤에 율법으로 토론했다고 한다. 우연이 아니었다. 예수의 존재가 궁금했을 것이다. 학자들도 예수가 궁금했다. 복음서로 얼룩진 예수의 속살을 찾으러 라이마루스부터 슈트라우스, 불트만, 바르트를 지나 크로산, 마커스 보그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예수 논쟁은 복음서 아닌 인간 예수를 복원하려는 움직임이다. 우리는 때론 농담으로 신 존재를 묻곤 한다. 네가 신이거든 돌로 빵을 만들라고. 때론 진지하게 고통 중에 묻곤 한다. 당신이 신이라면 살려 달라고. 때론 죽음 앞에 현존을 묻는다. 인간의 인식에 항상 신은 전지전능하다. 시내산에서 바알을 상대로 싸우며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했고, 이.. 2019. 1. 5. 00:52
[에셀라 시론] 아이히만에게 말하지 않은 죄 입력 : 2018. 07. 11 | 수정 : 2018. 07. 11 | 지면 : 2018. 12. 18 | A30 자폐적 세계가 무너질 뿐이다. 무너지지 않길 바랬지만 현실이란 홍수 속에 속수무책 당한다. 버려야 산다. 무거워 부유되지 못하면 죽는다. 생존을 위한 기억 투쟁이 정체성으로, 공동체로, 이데올로기로 살아남았다. 선을 추구한다는 공리성마저 상품화 돼 살아남기 위한 내러티브로 주목 받는다. 이제 냉전체제로도 먹히지 않는다. 진부해진 냉전을 선과 악, 새 이념으로 주목해 주위를 환기시키는데 성공했다. 사면초가 중 생존전략이다. 기억은 어느새 집단 전유물이 되었고, 신학은 자폐가 되었고, 존재는 상품이 되어 살아남기 위한 부유물로 변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기억은 일기로 몰아세웠고, 하나의 투쟁.. 2018. 7. 11. 23:33
[에셀라 시론] 다양성이 가져다 준 극복의 힘 비공개 기사입니다. 2018. 3. 24. 17:07
[에셀라 시론] 목련처럼 흩어진 아이덴티티(identity) 비공개 기사입니다. 2018. 2. 3. 2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