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0. 11. 22 | 디지털판
자기객관화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의 발언과 행동은 무엇이든 부끄럽다.
술에 취한 채 기숙사로 걸어와 질질 끈 몸을 침대에 뉜 채 세상만사 자기편이 아니라고 떠들던 분위기를 아는가. 죽음과 고난을 거느리며 출신성분으론 이 세계를 벗어날 수 없었던 비운의 주인공은 실력은 출중하나 치고 올라갈 한 방이 없다며 한숨을 이어간다. 토닥이며 날이 지났으니 방으로 돌아가시오 위로에도 상황이 종료되지 않는다. 자리에 앉아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가늠하며 교수들을 만나고 왔느냐고 물으면 물어봐주길 바랬다는 듯 실토하는 한 문장들에선 최소 두 명의 교수 이름이 연달아 나온다. 때마침 TV조선 뉴스9에서 흐르는 대통령과 조선일보의 줄다리기가 세상은 보이지 않는 힘으로 얽혀서 풀리질 않는 알력 다툼으로 이뤄진다는 긴장감마저 느끼게 만든다. 그래도 이 방의 후배들은 술 냄새에 찡그리기만 할 뿐 자기 말도 하지 못한 채로 할 일만 한다. 조용히 책장 넘기는 소리에 모든 것이 내 탓이오, 내 탓이오. 그대는 점잖이 들어봐 달라는 속삭이는 목소리에 뉴스 앵커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여기까지 읽으면 교수들 눈치 보는 대학원생을 떠올릴 테지만 고작 학부 때의 일이다. 한국교회처럼 좁은 집안에선 몸가짐을 바르게 해야만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다지만 이 양반 말씀을 듣다보면 마치 자유의새노래에 찾아와 물컵을 깨뜨리며 술주정하자 오늘의 1면을 갈아엎어야 할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당시 1면엔 방언 논쟁에서 이겨 신 죽음의 시대를 보도한 기사가 배치돼 있었다. 다시 생각해도 이 양반은 실력이 출중하다. 내가 하지 못하는 걸 해낸 걸 보면 말이다. 하지만 치명적 오류가 있었다. 인간을 대하는 자세였다. 한국교회라는 세계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이 그를 망가뜨렸다. 느려진 시간 속에서 교인들을 기다려 줄 여유는 없었고, 자신이 이해 받아야 타인도 이해할 수 있는 자기중심적 사고가 교회라는 조직에서 모난 행동으로 주위 시선을 끌게 만들었다. 자기 실력을 안고서 교회를 나온다면 잘 먹고 잘 살 텐데, 교회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해 운명처럼 스스로가 멍에처럼 지웠다.
지애보다 준희가 아닌 건
지애라서 지애가 좋은 법
기독교적 우월감 버려야
부끄러운 얼굴들 보일 것
이걸 자기객관화라 한다
자아도취에 이 세계에서 살아남기 류의 망상은 정치질을 할 수밖에 없다는 필연 속에서 여러 교수들을 만난 내 기분이 어땠는지 물어봐달라는 어리광을 만들었다. 살아남을 수밖에 없었고 살아남기엔 나약한 인간이란 고백들은 점심이 되어 취기(醉氣)가 빠져야만 내 이름 부르며 인사하는 짧은 여운의 부끄러움을 느끼게 만들었다. 이해했다. 한국교회는 살아남아야 하는 세계였기 때문이다. 김주하 앵커와 똑같이 생긴 AI 김주하 앵커를 보며 벌써부터 걱정하는 이들이 많았다. 인공 지능이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는 상상부터 인간을 정복해 착취하는 단계까지.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며 만들어 낸 구조를 AI도 똑같이 하리란 상상이 공포를 만들어내는 반응을 보며 먼저 떠오른 건 한국교회였다. 청소년 사역 한다던 전도사에게도 직설했다. 여자 아이돌을 좋아하며 삶이 바뀌어간 간증들을 나열하며 하나님보다 더 우월하다고 주장하면 어쩔 거냐고 물은 것이다. 기독교적 인간론은 구식이고 더는 새로운 시대를 가르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래도 진리는 변하지 않으며 신앙을 대체할 수 없다고 자신했다. 과연 그럴까?
사실 이 같은 우월성 프레임은 내가 만든 덫이다. 철학과 결을 달리하는 종교에서 우월성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인공 지능에 인간만의 감정을 넣는다 한들, 인간의 가치가 추락하지 않는 것처럼 실패하고 넘어지고, 실수하는 인간의 매력은 인간만의 것이기 때문이다. 노래도 잘 부르고 작사·작곡도 직접 하는 주니엘이 지애누나보다 더 뛰어나다고 해서 지애누나 매력이 사라지지 않는다. 우월의 성(城)을 쌓고 되도 않는 논리로 불완전한 인간이 하나님을 변호하려다보니 전술에서 몸통부터 해체된다. 신 죽음의 시대를 건너온 새 시대의 현대인에게 불과 구름 기둥으로 홍해를 건너게 해 줄 신 따위는 필요 없는 것이다. 좌파 싫어하면서도 자본주의 해체 논리 따와서 신이 필요하다고 설파한들 죽음 이후의 세계까지도 만들어내는 인간의 독창적인 상상력 덕분에 교회의 교리는 여자 아이돌 앞에서마저 와르르 무너진다. 그런데도 천국과 지옥을 운운하며 허접한 종말론 따위로 공포 마케팅 한다고 교회로 달려갈 것 같은가?
한국교회가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알려주겠다. 우월감을 버려라. 하나님이 더는 동아줄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왜 인간이 인간이기 때문에 사랑하는지가 보일 것이다. 다른 세계를 접하며 자기객관화가 이뤄진다면 교회 시장 이용해 먹으며 하나님의 능력 있는 삶 살겠다고 호가호위(狐假虎威)할 낯짝도 사라질 것이다. 교회를 떠나지 못하는 목회자 자녀들 심정은 하나다. 교회를 물려받거나 교회 시장 속에서 살아남는 것. 교회를 등진 청년들을 향해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지껄이겠지만 그들보다 성실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 앞에서는 명함 하나 내밀지도 못할 것이다. 지애누나 좋아하는 내 말이 농담으로 들린다면 평생 그러고 살겠지만.
'오피니언 > 에셀라 시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셀라 시론] 은진이를 바라보는 마음에서 슬픔을 느꼈을 때 (0) | 2021.01.17 |
---|---|
[에셀라 시론] 내러티브의 종말 (0) | 2020.12.19 |
[에셀라 시론] 미안해, 최진리 (0) | 2020.10.23 |
[에셀라 시론] “다 부질없는 일이었는데” (0) | 2020.07.04 |
[에셀라 시론] 부끄러움의 해방적 역할 (0) | 2020.05.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