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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에셀라 시론

[에셀라 시론] 내러티브의 종말

자유의새노래 2020. 12. 19. 07:03

입력 : 2020. 12. 19  07:03 | A30

 

닫힌 사회에서 벗어나는 하나의 방법으로 주목했던 내러티브의 역설적인 오류를 발견하자 먼저 든 생각은 인간의 추악함이었다. 나의 세계가 존재하듯, 너의 세계도 존재한다는 그럴싸한 명제가 우리 사는 이 세계에 먹히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쉽게 말해 착한 마음만을 가지고 살면 왜 이 세상 아름답지 않겠냐는 농담 같은 질문과 다르지 않는다. 그런 쉬운 방법이 가장 어려운 법이고 불가능에 가까워 아예 불가능하다고 말하듯. 모든 사람이 이 세상을 드라마의 이야기처럼 받아들지도 않을뿐더러, 모든 사람이 감성주의자는 아니므로 더욱이 내러티브의 역설적 오류를 발견한 것도 이 때문이다.


자신의 세계 속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캐릭터는 투사의 도구로 전락한다. 바우라는 만화 속 캐릭터에 자신을 투영해 비천한 존재를 끌어 올려야 한다고 주장하던 녹림청월(綠林靑月)식 피해 서사도 하나의 내러티브였다. 작가와 만화가의 악랄한 짓거리로 규정한 녹림청월은 스스로가 탄압 받는 대상자로 상정했고 쓰인 각본에 의하면 테러라는 공모·공작을 통해서 판을 뒤엎어야 한다고 강하게 믿고 있었다. 그러면 세상은 달라질 것이고 우리를 바라보는 작가와 만화가도 움직임을 달리 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이 만들어낸 결과는 파멸이다.


하다하다 사람 대하는 것까지도 유튜브를 통해 배우려는 현대인의 인식 어딘가에는 누군가로부터 공격을 당하는 자신을 상정하고 상상 속의 캐릭터인 자신이 난국을 해쳐가는 망상을 재생하기 마련이다. 당연히 사기 당한 사람보다 사기 친 인간이 잘못되었다는 것도 알고 그렇게 살아서도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안다. 하지만 마음 어딘가엔 알아야 사기당하지 않으며 몰라서 당하는 것도 잘못이라는 결론을 내리고서 무엇이든 정보를 획득하기에 바쁘다. 하지만 어느 시대보다도 풍족하고 부럼 없을 이 시대에 고통스러운 마음의 원인이 어디에서 비롯되는 걸까. 보릿고개를 넘겨야 했던 시절보다 분명히 풍족한 시대를 살고 있음에도 여전히 개인 아닌, 집단이나 만들어진 존재들에 빌붙어 먹으며 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집단에 대한 의문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모름의 바다를 헤매던
현대인이 손잡은 집단
스스로 정상인이라고
착각해 살아갈 테지만
나약한 인간을 괴롭힌
가장 비정상적 인간상

 


현대인은 외롭다. 토대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전통에 선 인간이 스스로의 전통을 무너뜨리고 혼란 속으로 나앉게 되는 상황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목도한 인간이 아니라면 현대인은 외롭다. 기독교라는 전통이 무너졌다. 당연하게 생각해온 가치들이 ‘모름’이란 바다 속에 침몰했다. 그 모름은 스스로에게 답을 찾아야 한다는 모호한 해답과 함께 현대인의 목 위까지 차올라 숨 막히는 지경에 이르렀다. 스스로가 생각하고 답을 구해야 하는, 아니 답조차 찾을 수 없는 영원히 팽창하던 질문들 속에 질식될 만큼 범람 직전의 상황 그 자체다. 따라서 현대인에게 모름이란 바다 속에 벗어나 자신이 정상인임을 증명해 줄 기관이 필요했다. 토대가 무너져 지쳐버린 현대인에게 쉴 안식처가 되어줄 기관 말이다.


현대인에게 필요한 기관은 모조리 모름의 바다 속에 침몰하고 말았다. 그렇다고 스스로가 부유물이 되어 둥둥 떠다닐 수는 없었다. 따라서 모름의 바다에서 헤엄치며 지나치는 사람들과 손에 손을 잡고 만들어낸 기관이 ‘집단’이다. 집단의 생각, 집단의 언어, 집단의 행동을 구사하며 살아있음을 강조한다. 집단 속에 살아가는 천박한 자신의 말들과 행동이 집단의 생각과 언어, 행동으로 아름답게 포장되어 더욱 집단 속의 나를 사랑하게 만든다. 캐릭터는 그래서 아름답다. 누가 봐도 진부하고 재미없는, 편집되지 않을 있는 그대로의 나보단 어느 한 직책의 나, 어느 집단에 소속된 내가 더 멋있고 아름다워 보일 테니 집단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환대라는 착각은 손에 손을 잡았을 때 시작한다. 예수도 이렇게 말했다. “너희를 좋게 대하여 주는 사람들에게만 너희가 좋게 대하면, 그것이 너희에게 무슨 장한 일이 되겠느냐? 죄인들도 그만한 일은 한다.”(루카 6,33)


문제는 언제든지 무너질 만한 허약한 내러티브라는 점이다. 내러티브 자체가 그렇다. 문제의 문제는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내러티브를 신봉하며 나보다 나약한 인간들을 사냥하는 야욕에 있다.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이 지루하고 재미없어진 현대인이, 누군가를 괴롭히며 살아가는 욕구를 느끼고 성욕에서부터 인간의 원초적 감각을 곡해한다. 그 캐릭터는 인싸인데다 쿨하고, 최애다. 그래서 내가 아는 정보들을 바다에서 따와 아무거나 나열하고 스스로의 멋진 구석을 찬미한다. 죽어버린 신조차 박제한 상태로 니체의 경구를 읽으며 나보다 나약한 인간들 앞에서 가르치는 교수로 빙의한다. 이 순간만큼은 누군가를 가르치는 내러티브 속 교수인 것이다. 목불인견(目不忍見)도 이런 목불인견이 따로 없다.


다시 내러티브를 꺼내던 때로 돌아가 생각해보면 잊어버린 한 가지를 깨닫는다. 내러티브로 타인을 이해했다면, 이제 비로소 현실의 눈을 뜨고 지금을 살아가야 한다는 너무도 진부한 결론이 서 있을 것이다. 인싸인데다 쿨하고 최애였던 나라는 캐릭터가 아닌, 천박한 현실을 살아가는 나약하고 힘없는 개인이란 나에게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