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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에셀라 시론

[에셀라 시론] 너라는 관성에서 벗어난다

입력 : 2021. 02. 12  21:00 | 수정 : 2021. 02. 13  23:15 | A30

 

켜켜이 쌓인 십여 년 전 써 놓은 글을 읽다 보면 표현할 방법을 몰라서 자신만의 언어로 작성한 딱딱한 문체에 주목하곤 한다. 학창시절, 사람들과 일상을 주제로 한 대화보다 꽃과 나뭇잎, 하늘 구름 바라보며 아름다움에 주목하는 일들이 더 익숙했다. 일상 언어를 습득하지 못할 만큼 집단과 공동체, 학교라는 공간과 교회의 장소에서 벗어나 고독함을 즐겼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한나 아렌트가 목격한  아이히만의 상투적 언어처럼 일상 언어와 자신의 언어로 나누어 사용하던 시대였다.


유행어와 여자 아이돌에 관심조차 없어서 성경과 기도가 익숙해 떼려야 뗄 수 없었던 고등학교 1학년. 0교시 수업 전부터 정독한 성경을 9교시 마치는 시간까지 틈틈이 읽었다. 빈 틈, 빈 공간을 병적으로 싫어했다. 때로는 점심시간, 산책을 나서며 침묵의 공간에 머물러 무엇이든 관찰했지만, 캄캄한 교실 책상에 앉아서 뮤직비디오 보는 것만큼 낭비가 또 있을까 두 눈 감고 기도하듯 되뇌었다. 아이들이 허벅지와 가슴에 열광하며 다음 영상 재촉하던 모습에서 마치 외부인의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성(聖)과 속(俗)의 이분화 속에서 신앙의 세계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게 끌어당긴 신앙의 관성(慣性)이 외부인으로 만들었다.


고독한 연습을 이 무렵 시작했다. 미처 준비 못한 교과서도 반성의 여지라 생각하고 없는 상태로 지내보기로 했다. 대학교에서 신문을 읽으며 혼밥하던 습관도 이때의 고독한 연습 덕분이다. 빈 교실 어두워져 방언으로 기도했고 신기하듯 코딱지를 혀 끝에다가 발라도 아랑곳 않았다. 묵주까지 가져와 성경 읽던 옆에다가 두어도 밉지가 않았다. 외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교 후엔 커피와 신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빈 공간을 용납하지 않은 채 할 일에 열중하고 몰입했다. 앞만 보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고독한 연습은 외부인의 신분에서 이뤄졌으니까. 모든 선생님과 친밀하게 지내온 덕분에 아이들과 사사로운 이해관계에 붙들리지 않았다. 외부인에게 친구처럼 다가온 낯섦이 오히려 스스로를 견고하게 만들었고 성실하게 살아갈 힘을 제공했다. 신분 제도로 이해하던 피라미드 구조는 나와 상관없는 먼 세계의 것이었다. 학교폭력에 분개하여 관성으로 이리 끌리고 저리 끌리던 이들에게 반항하던 이유도 애초에 그 세계가 나와 아무 상관도 없었기 때문이다.

 

 

외부인을 선언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스스로 침잠에 들어가
스스로 고독을 즐기고
나는 네 노예가 아니라
외부인이라 말하는 것

 


유별난 학생이 유별나게 좋아하던 선생에게 이르기라도 할까봐서 교실 문 닫고 치고받아도, 아무도 모르게 문자 한 방으로 아이들 뒤통수 때리며 폭력에 대항했다. 철없던 실장은 싫어하던 선생에게 수업 중에 대답하지 말자고 단합을 요청했다. 비웃기라도 하며 그 실장 보라는 듯 당당하게 대답했고, 평소처럼 반응으로 너스레를 떨었다. 식판 들고 친구의 말꼬리를 잡을 때면 대신 잡아뗐다. 정의실현 때문이 아니다. 스스로를 지킬 힘조차 없어서 눈물만 흘리던 친구의 얼굴이 대항할 힘을 만들었다. 마침내 그 실장 녀석을 붙잡고 당기던 또 하나의 관성을 확인했다. 존경하는 선생님을 괴롭히고, 사랑하는 친구의 가슴을 찢어발긴 그 녀석이 가고자 적었던 고려대학교 공책에는 자기소개서란 제목이 자리했다. “나는 _______한 학생이다” “나는 _______ 같은 사람이다” 아직 채우지 않은 빈 공간을 보았다.


그 아이의 빈 공간은 내가 싫어하던 빈 공간과 달랐다. 허벅지 사이의 공허함이 아니었다. 하루아침에 사라질 유행어도 아니었다. 채워 넣지 않으면 안 되는, 빈 공간에서 불안을 읽었다. 자기가 버려둔 공책, 어디에 있느냐고 짜증내던 모습을 외부인의 시선으로 지켜보며 조용히 불안한 목소리를 들었다. 관성처럼 그 애를 끌어당긴 힘은, 혼자서 실행하지 못하는. 반드시 누군가가 필요해 누군가로부터 의지해야 비로소 쓸 수 있는 빈 공간이었다. 고독과 거리가 먼, 그 애 여자친구 향기를 맡으며 과연 무엇을 채워 넣으려고 했을는지 궁금했다. “따라서 해당 대학의 인재상에 부합하며, 입학 후 입학할 만한 능력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지. 진심을 묻고 싶었다.


강제하던 야간자율학습 사라지고 매몰차게 뺨 때리던 나쁜 교사도 없어졌지만. 대중독재, 상위 포식자를 세우고서 스스로 노예 삼을 이 이상한 관성은 어디에서 비롯하는 걸까. 영향력을 과시하며 내 편에 들지 못한다면 배제하고야 말겠다던 피식 웃게 만드는 천박한 공기가 어디에서 부는 걸까. 오늘의 학교 폭력 가해자로 끌어내어 나쁜 놈을 욕하고서 조용히 잊어버린 그 시절 관성을 따르던 이들의 심리학은 연구할 가치라도 있을까. 따라서 콘크리트 건물 안에 욱여넣어 사육하는 공교육이 사라져야 한다고 외치던 목소리를 오늘에야 이해했다. 통제 불가능한 세계에선 한없이 약해지고 외로워질, 한낱 빈 공간에 붙들려서 울고 웃는 반 아이들. 고즈넉한 교정을 걸으며 고독 속에 유부가 키워놓은 화단을 관찰하던 점심이 그립다. 대학교를 끝으로 모든 의무 공간에서 벗어났다. 그래도 외부인의 시선은 필요했다.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 누구라도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네가 없어도 잘 먹고 잘 산다는 외부인이 관성처럼 나를 끌어당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