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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에셀라 시론

[에셀라 시론] 든든함이 이렇게 말하는 걸 들었어

입력 : 2021. 02. 28  22:30 | 디지털판

 

자네에게 늘 감사한 마음을 가지는 이유가 단지 내 생일에 몸살감기 걸려 한 발자국 내딛지 못할 때 집까지 찾아와 부축해 주었기 때문만은 아니네. 점심시간 방송실에 찾아갈 때마다 멋있게 일하던 성실함도, 그저 같이 있는 게 좋아서 자정까지 컨테이너 자네 방에서 대화한 그 밤도, 고입고사 한 시름 놓았다고 먼저 집에 돌아가 서운했던 이유도, 자고 있는 선욱 깨어나거든 친구들과 박수치며 당황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던 정겨운 풍경도. 느껴지던 든든함이 못내 겨워 잊을 수 없었기 때문만도 아니라네.

과거 모든 기억들이 실오라기 남김없이 사라지는 이 시대에 자네에게 느껴지는 든든함이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네. 모든 전통적인 것들이 무너지는 광경을 바라보며 무너지지 않는 어른이 누구일지를 말일세. 누군가는 자네의 든든한 특질을 보고 순진하다거나 세상 물적 모른다고 말할지도 모르네. 하지만 내 바라본 자네의 든든함은 광야에 구원자가 있다 하여도 나가지 않으며, 그가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않는(마태 24,23-26) 자신감일세. 누구 일지도 모르는 구원자가 자신을 도우리라 믿는 미신보다 스스로가 구원자 되어 자신을 구하는 그런 자신감이 든든함 아닐까 하고.

생각보다 사람들은 구원자를 찾아 저기 기웃거리고 여기를 기웃하며 방황하고 있는 것 같다네. 모든 것이 모름의 바다로 침몰하여 먹을 것 구하러 겨우내 언저리를 벗어나 섬 밖을 나서는 상황처럼. 하이에나 득실대는 나쁜 어른들이 배 채우러 바깥 구경하는 사람들을 잡아먹고 반대로 강한 사람이 모름의 바다를 평정하기 위해 구원자를 내세워 영향력을 과시하는 천박한 그런 시대. 따라서 구원자가 광야에 있다고 말하고 허나 골방에 있다고 말하는 나쁜 어른들이야 말로 아는 것 하나 없으면서 아는 체 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보았네.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잘난 체 하는 그런 어른에게서 무엇이 든든한 것인지, 든든함을 갖춘 사람은 누구인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네.

나 역시도 내 살아온 터전, 이 섬을 버리고 나온지 꽤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네. 처음에는 죽을 만큼 무서웠네. 무서운 크기 만큼이나 먼저들 하나 둘 빠져 나와 떠도는 이들을 보며 저들이 단지 표류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나는 보았네. 교회라는 전통적 삶의 양식이란 과거의 섬에서 빠져 나와, 새로운 삶이라는 장소로 항해하기 위해 저들은 표류하던 중이 아니라 유랑(流浪)하고 있다는 흥미로운 광경을 목격한 것일세. 따라서 어디를 가든지 그 곳이 자신의 집처럼 자연스러운 공간이었네. 어차피 백 년도 안 되는 세월 살다가 떠날 인생이거늘, 뭣 하러 쥐었다 펴면 하루아침에 사라질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두 주먹을 감싸야 할는지. 잃어버릴까 움켜쥔 악력을 내어 풀고 기꺼이 내 세계로, 내 섬에 나의 배로 누군가를 초대할 미소가 필요하지 않을까 고민해 보았네.

 

 

겉으로 보기에 든든한
널 좋아하던 이유에는
어디에도 없을 구원자
스스로가 홀로 선 채로
너로부터 연결된 이들
시간표를 살아가기에



안타깝게도 나쁜 어른들은 모름의 바다조차 이용하고 있다네. 주체적인 삶을 사는 방법, 당당하게 사는 법을 구호로 내세워 대중 강연하다 못해 인기몰이하며 잘 먹고 잘 사는 그런 어른들 말일세. 이들은 과거를 부끄럽게 생각하고 현재를 반성하여 미래를 바라보자는 문법을 구사하더군. 가만히 듣다보면, 과거의 자조적 단어와 미래의 희망적 단어를 적당히 버무려 현재라는 시간을 나쁜 어른들이 말하는 방법대로 살면 된다고 가르치는 전형적인 사기꾼 논법이란 걸 알아냈네.. 구독이라는 현대의 시스템을 이용해 떼로 몰려들고, 우리 집단에 포섭되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진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지. “보아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계신다! 그리스도가 골방에 계신다! 광야에 우르르 몰리고, 골방에 우르르 몰리는 이 우스꽝스러운 광경을 보게나!

모름의 바다를 표류하는 동안 갈라진 커뮤니티 한 곳에서 만들어진 자조적 단어가 유행하고 있네. 과거의 조선을 빗대어 현재를 망국 조선으로 비유하는 자조적 단어가 힘을 얻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역설적인 특질을 찾아내었네. 나쁜 어른들이 과거와 미래라는 시공간을 이용해 시간표를 조작한다면, 건드리기 전에 미리 시간표를 확보해 오로지 내게만 유효한 시간을 살아가면 되지 않을까하고. 그 시간의 특질이 자네가 가진 든든함이란 특질과 비슷해서 화색이 돋았다네. 자네의 독창적인 시간표 말일세.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하지 말게나. 그야 틀릴 수도 있다네. 그러나 누군가가 만들어준 시간표가 틀렸을 때 찾아오는 당혹감보다, 스스로가 작성하다 틀려서 찾아오는 기민함은 그 결이 다르다고 생각하네. 그 기민함! 항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과 만나서 자신의 시간표를 꺼내어 타인과 연결하는 그 전문성이 바로 자네의 든든함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네.

자네의 시간표로 나를 초청한 그날은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다네. 그것까지 말해주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지면이 모자란 바람에 여기서 끝맺어야 할 참이네. 그거 참 아쉽구먼. 자세한 이야기는 가까운 시간에 만났을 때 풀어 말하고 싶네. 그때까지 나 자신도 부끄럽지 않은 어른으로 살아갔으면 좋겠네.